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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 • 현대사)/친일파 • 안중근 • 이토히로부미 • 총독부

학살- 1936년 : 731 부대 ① 생체실험 부대

by 당대 제일 2022. 10.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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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 1945년 여름까지 존속했던 "731 부대  (생체실험부대ㆍ관동군 방역 급수부 본부ㆍ이시이 부대ㆍ동향부대)"는 "히로히토 일왕"의 칙령으로 설립한 유일한 부대로,  "관동군" 소속의 "세균전 부대"로, 인체실험을 포함한 비밀 생물학전 연구ㆍ개발 기관이었다.

 

1. 731 부대  (관동군 방역 급수부 본부ㆍ이시이 부대ㆍ동향부대)

"히로히토 왕"의 칙령으로 설립한 유일한 부대ㆍ"관동군" 소속의 "세균전 부대"로, 인체실험을 포함한 비밀 생물학전 연구ㆍ개발 기관

1936년 "만주 침공"시, 공식적으로는 "헌병대 정치부 및 전염병 예방 연구소ㆍ방역과 급수에 대한 임무"로 설립되었고, "세균전 비밀연구소"로 출발하였으며. 당시 관동군 방역 급수부 본부ㆍ이시이 부대(石井部隊)→ 동향부대→ 731 부대(1941년)으로 변경

"731 부대"는 일제가 세운 "생물학전 연구기관" 중 하나였으며, "100부대 (창춘)ㆍ200부대 (만주)ㆍ516부대 (치치하얼시)ㆍ543부대 (하이라얼시)ㆍ773부대 (Songo)ㆍ1644부대 (난징/南京)ㆍ1855부대 (베이징/北京)ㆍ8604부대 (광저우)ㆍ9420부대 (싱가포르)"등 동아시아 각지에 세워진 기관도 "731부대"와 유사하거나, 731부대의 생체실험을 뒷받침하는 역할을 하였다. 이들은 "헌병대"가 관리하였다.

• 위 치 : 중국 흑룡강 성ㆍ하얼빈 남쪽 20km 지점에 "세균전 비밀연구소"로 설립       • 기 간 : 1936~ 1945 여름까지

• 결 과 : "731부대"에서 개발된 생화학 무기(페스트ㆍ콜레라ㆍ탄저) 등 전염병으로 약 40만 명의 중국인이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

731

2. 대상자ㆍ한국인 희생자 수ㆍ마루타

• 대 상 : 3,000여 명 (600명/년 간 실험ㆍ전쟁 포로ㆍ기타 구속된 사람)→ 각종 세균실험ㆍ약물실험 / 한국인 희생자(6명)ㆍ중국ㆍ몽골ㆍ러시아 군인과 시민ㆍ여자ㆍ어린이ㆍ일부 흑인ㆍ유럽인 등 / 2005.08.02일, "하얼빈일보"는 생체실험 대상자였던 1,463명의 명단을 발굴 공개했다.

현재까지 밝혀진 "한국인 희생자"는 6명으로, "항일운동이나 반파쇼 운동"을 하다가 체포된 인물로 파악되고 있다.(일설에 의하면, 시인 윤동주도 마루타로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이기수 (李基洙ㆍ41.07.20일 체포) 1913년생ㆍ함북 신흥군 동흥면    고창률 (高昌律ㆍ41.07.25일 체포) 1899년생ㆍ소련 공산당 첩보원ㆍ강원도 회양군 난곡면   • 한성진 (韓成鎭ㆍ43.06.25일 체포) 1913년생ㆍ함북 경성    • 김성서 (金聖瑞ㆍ43.07.31일 체포) 함북 길주   • 심득룡 (沈得龍ㆍ43.10.01일 체포) 1911년생ㆍ소련 공산당 첩보원    • 이청천 (李淸泉ㆍ44.07. 체포) 독립운동가

• 마루타 : "마루타"라는 말은 일본어로 "나무토막ㆍ통나무"이란 뜻으로 마음대로 써도 되는 땔감이란 뜻으로, 꿈쩍도 않는 생명가치가 없는 "인간 통나무"라는 뜻

"마루타"란 용어는 이 시설을 지역당국에는 "제재소"라고 했기에, 구성원 중, 일부의 농담에서 유래했다. (암호명 "마루타의 특별계획"은 실험할 때, "인간"을 사용하였다)

3. 실 험 : 세균실험"731부대의 꽃"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주력했던 실험

부대는 "헤로인 생산"을 위해, 만주에서 "양귀비"를 경작하던 "미쓰이 재벌"과 연계가 있었다고 한다. 실험 대상은 주위의 "인구 집단"에서 징용되었으며,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심지어 임산부까지 동원되었다. 수많은 실험과 해부가 살아있는 상태에서 마취 없이 이뤄졌고, 이는 실험 결과에 영향을 주지 않기 위해서였다원래는 "태평양전쟁" , 정치이념 부서로 설립되어, "적에 대한 사상정치적 선전일본군의 사상 무장"이 임무였으며, 크게 보면, "독일 나치의 SS" 같은 정치 선동 부서이다.

설립 당시 "사령관"1930년대 초, 유럽 시찰을 통해, "세균전"의 효용을 깨닫고, 이에 대비한 전략을 적극 주창한 사람은, 의사이며 세균학 박사인 "이시이 시로(石井四郞)" 중장이다시골에서 농사짓던 형제들을 불러다가 자신 부대의 "고등관"으로 복무시켰으며, 조카 "이시이 나가데"에게는 대위 계급으로서 "판임관"의 신분을 부여하고, 마루타를 공급하는 부서의 총책임자로 임명했다"중일 전쟁(1937~1945)"을 거쳐, 1945년까지 "생물/화학 무기 개발치명적인 생체 실험"을 행하였다.

"이시이"가 군의관으로서 올린 최초의 업적은 대형 설비가 필요하던 "정수기"를 대형과 동일한 성능을 지니면서도 야전에서도 간단히 운용할 수 있는 "소형 정수기"를 일본 내 기술수준으로 만든 것인데, 성능을 증명하기 위해서 장군들이 보는 앞에서 자신의 소변을 정수해서 직접 마시기까지 했다고 한다예하에는 "바이러스곤충동상페스트콜레라" "생물학 무기"를 연구하는 17"연구반" 었고, 각의 "연구반"마다, "마루타"라고 불리는 인간을 "생체 실험용"으로 사용했다

1940년 이후, 해마다 600명의 마루타들이 생체실험에 동원되어 최소한 3,000여 명의 "한국인중국인러시아인몽골인" 등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1945, "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만행의 흔적을 없애기 위해, 살아남은 마루타들(150여 명)까지 모두 처형한 것으로 알려졌다.

"인체"를 대상으로 생체실험을 하는 부대 속성상, 부대 주변 지역주민을 전부 추방시킨 사례나 부대 인근지역 주민을 대상으로 "생물학 무기"를 실험하기도 하였으며, "하얼빈 역"에서 출발한 열차가 부대 인근지역을 통과 시, 열차 커튼을 모두 내려야 했고, 부대 인근지역을 차창 밖으로 내다보는 승객은 그 자리에서 체포심문하는 규정이 존재하였을 정도로 보안에 매우 철저할 수밖에 없었다고 알려져 있다.

"이시이 시로731부대 간부들"이 세균무기인체실험 자료를 미군정에 넘기고 처벌되지 않았다.

1945.08, "이시이 시로"의 명령으로 731부대는 증거인멸을 위해 철저히 소각되었고, 대원들은 수용되어 있던 약 400명의 생체실험 대상자(마루타)를 태워 죽인 후 귀국하였다"소련" 국경에 가까운 지부에 있던 일부 731부대원들은 "소련"의 포로가 되었다.

본부인 731부대와 항구도시인 "대련"에 있었던 지부 및 "페스트 방역반"의 요원은 거의 포로가 되지 않았다. 국외에 있는 731부대 관련 자료 중 가장 중요한 것은 1950"모스크바"에서 간행된 "세균전용 병기의 준비 및 사용으로 기소된 전 일본군 군인의 사건에 관한 공판서류"에 첨부된 "하바로브스크 재판" 기록이다.

"소련"에 의해 열린 "하바로브스크 재판"1949.12.25~ 30일까지 진행되었고, 피고는 "관동군 사령관 야마다 오츠조관동군 군의부장 가지즈카 코지" 12명이었다이들은 모두 유죄판결을 받았고, 각각 교정노동수용소에서 2~ 25년까지를 한도로 억류되었다이들 대부분 형기가 만료되기 이전, 귀국이 허락되어, 1956년에 마지막 그룹이 귀국하였다.

731부대의 자료는 "연합국 최고사령부"와의 밀실교섭으로 "미국"으로 넘어가는 대신, 당사자들의 전범 기소를 피할 수 있게 되면서, 731부대가 자행한 만행에 대한 재판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1947, "미군""소련"의 통보에 의해, "이시이 부대"의 인체실험 사실을 알게 되었고, 이후 실험의 데이터를 모으는데 주력하였다. 그러다 731부대원이었던 "이시가와 다치오마루(가나자와 대학 의학부 병리학 교수)"가 비밀리에 가져온 표본의 존재가 알려졌고, 이 표본은 "다치오마루"의 설명문과 함께 미국의 생물학전 연구소 "캠프 데트릭(, 포드 데트릭)"으로 보내졌다"다치오마루"가 쓴 영문의 리포트는 "탄저병비저병"의 인체실험과 "페스트균"에 관한 것으로, "탄저균" 인체에 어떻게 들어가 병변을 일으키는지에 대해 색연필로 자세히 그려져 있다.

"미국"에 항복한 자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던 자료를 제공하는 대가로 "사면"을 받았다.

"극동 국제 군사재판" , 일본의 "생체 실험 문제"가 언급되었으나, 관련자들은 실험에서 얻은 자료들을 "미국"에 제공하고, "러시아"에 넘겨주지 않는 대가로 처벌을 받지 않았다전후 미군은 "동물실험으로 얻을 수 없는 자료"에 눈독을 들여, 731부대 출신 인사와의 사법거래를 진행하고 이들의 신변을 보호했다. 이는 미국의 이중 잣대로 공산권의 좋은 선전거리가 되어버렸고, 때문에 미국은 이러한 의혹을 전면 부정하면서 더더욱 이들을 보호할 수밖에 없었다실제로 미군이 보호한 관련자들이 살아서, 일본 의료계 중진으로 자리 잡은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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