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2.10.26일, 일본제국은 "이토 히로부미 (이등박문(伊藤博文)ㆍ본명- 하야시 도시스케ㆍ1841~1909.10.26ㆍ68세)"를 추모하기 위한 사찰인 "박문사(博文寺)"를 짓고, 사찰이 자리잡은 언덕을 "춘무산(春畝山)"이라고 불렀다. "박문사"라는 이름은 "이등박문(伊藤博文)"에서 따왔고, "춘무(春畝)"는 "이토"의 호이다. 현재 장충단공원 동쪽, "신라호텔 영빈관" 자리에 있던 사찰이었다.
1. 박문사 (博文寺ㆍ1932.10.26): 장충단공원 동쪽 "신라호텔 영빈관" 자리에 있던 사찰
"장충단(奬忠壇)"은 "을미사변(1895.10.08)" 때, 피살당한 "홍계훈(시위연대장)ㆍ이경직(궁내부대신)" 등을 기리기 위해, "고종"이 쌓은 제단이었다. 이곳은 "명성황후 살해"에 대한 항일감정의 장소였기에, 1919년 "조선총독부"는 "장충단" 자리를 "공원"으로 바꾸었다. 1932년, 공원 동쪽에 "이토 히로부미"를 추모하기 위한 사찰을 짓고, 사찰이 자리잡은 언덕을 "춘무산(春畝山)"이라고 불렀다.
① 목 적 : "이토 히로부미(초대 조선 통감)"의 훈업을 영구히 후세에 전하고, 일본불교 진흥 및 일본인과 조선인의 굳은 정신적 결합"을 도모하기 위한 것으로 명시
② 완 공 : "이토"의 23주기 기일인 1932.10.26일에 완공 (건평 : 387평)
③ 낙성식 참석자: 우가키 가즈시게(조선 총독)ㆍ이광수ㆍ최린ㆍ윤덕영 등 친일파ㆍ1000여명
④ 자 재 : 정문은 흥화문(경희궁 정문)을 이전하여 사용 / 광화문 석재ㆍ경복궁 선원전(역대 왕 어진(초상화) 봉안장소)과 부속 건물ㆍ남별궁의 석고각 등이 사용 (남별궁 : 서울 중구ㆍ조선 태종(3대)의 딸 "경정공주"가 거주하던 궁궐) → 1988년, "경희궁"을 복원하면서 "흥화문"을 옮겼고, 현재 호텔 정문은 옛 문을 본떠 만든 것
2. 장충단 공원 변천사
"고종"이 장충단 건립 (1900.11) → 장충단 공원으로 변경 (1919) → 박문사 건립 (1932) → 1950년 한국전쟁 중 소실 → 1959년 이승만의 영빈관 건립 지시 (4ㆍ19/ 5ㆍ16으로 공사중단) → 1967년 박정희가 완공 → 1973년 "삼성"에 매각(28억 원)에 매각→ 1978년 청와대 영빈관 개관 전까지 12년간 만찬장 → 1984년 "장충단 공원(근린공원)"은 "남산 공원"의 일부로 흡수ㆍ합병
• 장충단 사당: 남산의 동북쪽 기슭, "조선 영조" 때 도성의 남쪽을 수비하던 "남소영"이 있던 자리
• 장충단 공원 : 문화재(장충단 비ㆍ수표교ㆍ승정전ㆍ관성묘ㆍ와룡묘)ㆍ항일운동 관련(3ㆍ1운동 기념비ㆍ한국유림 독립운동 파리 장서비ㆍ만해 한용운 시비ㆍ동상(유관순ㆍ이준 열사ㆍ김용환 선생))
3. 을미사변 (1895.10.08) 발생
1895.10.08일, "명성황후"가 일본의 자객들에 의해, "경복궁"에서 시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당시, "홍계훈(시위연대장)ㆍ이경직(궁내부대신)" 등 많은 장병들이 일본인들과 싸우다가 죽음을 맞았다. 이에 "고종"은 그들의 영령을 위로하고자, 1900.11월 "장충단"이라는 사당을 짓고, 이후 1908년까지 매년 춘추로 제사를 올렸다.
1919년, "조선총독부"는 "장충단 자리"를 "공원"으로 바꾸었다. "명성황후"를 살해한 항일 감정을 상징하는 장소였기에, 일제는 민족정기를 말살하기 위하여, 바꾸었다.
1932년, 공원 동쪽에 "이토 히로부미"를 추모하기 위한 사찰을 짓고, 사찰이 자리 잡은 언덕을 "춘무산(春畝山ㆍ이토 호)"이라고 불렀다. "박문사"라는 이름은 "이등박문(伊藤博文ㆍ이토 이름)"에서 따왔다. 낙성식에는 "조선총독 우가키 가즈시게"가 참석하고, "히로히토 천황ㆍ황족"들의 하사품도 전해졌다.
1937년, "일본군 육탄3용사"의 동상을 세워, 대륙침략을 위한 "정신기지"로 삼기도 하였다. 1939년, 이곳에서 "이토"를 포함하여, "한일 병합 공로자(이완용ㆍ송병준ㆍ이용구 등)"을 위한 "감사 위령제"가 열리기도 했다. "이석규(이용구의 아들)"이 "흑룡회"와 함께 개최한 이 행사에는 "이광수ㆍ최린ㆍ윤덕영" 등 약 1,000여 명의 사람들이 참석했다.
40여 년 전만 해도 "청와대" 안에 국빈을 맞이할 공간이 따로 없었다. 1978년, "청와대"에 별도의 "영빈관"을 마련하기 전까지 이름 그대로 국빈을 위한 "영빈관"으로 기능한 곳이 "신라호텔" 안의 낮은 한옥 건물 "영빈관(장충단 영빈관)"이었다. 남산 기슭 "장충단공원" 동쪽에 "영빈관"을 지으라고 지시한 건, 1959년 "이승만 대통령"이었다.
4ㆍ19와 5ㆍ16 등을 거치며 공사가 중단됐지만, "박정희 대통령" 지시로 1967.02월 "영빈관"이 완공됐다. "영빈관" 옆 암벽에 "박정희 대통령"이 한자로 쓴 "민족중흥" 휘호가 지금도 남아 있다.
1973년 "영빈관"은 "삼성그룹"에 28억 원에 매각됐으나, 1978년 지금의 청와대 영빈관이 개관하기 전까지 12년간 국빈을 위한 숙소와 만찬장 역할을 했다. 1973년, "신라호텔"이 "영빈관"을 맡기까지 5년간, 여러 정부 기관이 돌아가며 관리했다. 1972.08월~ 1973.06월까지는 "중앙정보부"가 "영빈관"을 운영했다.
※ 환구단(圜丘壇)ㆍ원구단(圓丘壇): 대한제국 "천자"가 하늘에 제를 올리는 제단ㆍ제천단(祭天壇)
1897년 고종이 대한제국의 황제가 되어 건립했으나, 1913년 "일제"에 의하여 헐고, 그 터에 "조선호텔"을 세웠다. 지금은 "환구단" 북쪽에 건립하였던 "황궁우(3층 팔각정)" 만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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