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형 (崔在亨ㆍ1860~1920ㆍ60세)"은 "군수업"으로 쌓은 막대한 재력으로 독립운동을 지원하여,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실현자로 평가된다. 다양한 길을 걸으며, 오로지 한인들을 위해 살았고, 엄청난 자금을 독립운동에 쏟아 부었다.
1. 최재형 (崔在亨ㆍ1860~1920ㆍ향년 60세)ㆍ최도헌(崔都憲)ㆍ최 표트르 세묘노비치
안중근 의거를 지원ㆍ군인ㆍ항일 독립운동가ㆍ사업가ㆍ언론가ㆍ교육가(정교회 학교 32개 설립)
• 1908년 : "동의회(최초의 독립단체)"를 조직하고, 총장에 선출(안중근- 평의원)ㆍ"대동공보" 사장ㆍ"전로한족중앙총회(全露韓族會中央總會)" 명예회장 → 1911년 : "권업회" 발기회 회장 → 1914년 : "한인아령이주 50주년 기념회" 회장 → 1919년 :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만세운동 주도ㆍ"대한국민의회(최초 임시정부)" 외교부장ㆍ대한민국 "임시정부 재무총장"에 선출/사임 • 수상 : 러시아 항제 니콜라이 2세 - 은급 훈장
2. "안중근 의거"를 지원 ㆍ일본군에게 총살당함
1907년, "안중근"은 해외망명을 통해, "러시아"에서 "최재형"을 만났다. "최재형"은 1908년 최초의 독립단체 "동의회"를 조직하여, 총장이 된다. "동의회" 산하 의병부대 "대한의군 참모중장"으로 "국내진공 작전"을 하는 "안중근"의 뒤에는 "최재형"이 있었다. 싼값에 무기를 샀고, "의군"의 숙식은 그의 집에서 했다. 그만큼 그는 "군납업"으로 많은 자금과 큰 저택을 보유했다.
"대한의군"은 "신아산 전투" 등 "국내진공 작전"에 연전연승 하고, "영산전투"에서는 참패했다. 참패의 원인은 포로를 석방하여, "대한의군"의 비밀 루트가 발각된 때문이었다. 또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러시아"를 압박하여, "최재형"을 무장 해제시켰다. 그는 자금난에 문을 닫게 된 "해조신문"을 인수하여, "대동공보"를 발행, 항일의식을 고취시켰다.
"안중근"은 의병을 다시 일으킬 것을 다짐하며, 그의 집에서 손가락을 자르는 "단지동맹"을 했다. 그 후, "대동공보 기자증"을 가지고 활동하던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대동공보"에서 "최재형"과 함께, "이토 히로부미 주살"을 모의한다. 당시 "하얼빈"은 "중국"의 영토였지만, "러시아"가 조차해서 다스렸다.
"하얼빈"에 "이토 히로부미"가 오니, 그는 "이토 히로부미" 사살 장소를 "하얼빈"으로 정해, "안중근"은 "최재형의 집"에서 권총연습을 한다. "최재형"은 "안중근"에게 권총을 사주고, "안중근" 거사 후, "일본"이 관할하지 않는 "러시아 법정"에서 재판 받도록 계획하고, 변호사인 "미하일로프" 주필을 "안중근의 변호인"으로 준비했다.
그러나 "안중근"이 1910년 "일본 법정"의 불법 재판 끝에 순국하자, 그는 자신이 "안중근"을 지켜주지 못했다고 자책감을 느껴, "안중근"의 처자들을 보호하였다. 이 사건으로 "러일 전쟁" 패전국인 "러시아의 연해주" 조선인들에 대한 감시가 강화되었고, 그는 "권업회"를 창설하여 독립운동을 하다가, "일본"의 음모에 따라 "간첩 혐의"로 체포되었다. 곧 석방됐으나, "러시아 정부"가 더 이상 그와 거래 하지 않음에 따라, 경제적 궁핍에 시달렸다.
"전로한족중앙총회(全露韓族會中央總會)의 명예회장"으로 활동했고, 1919년에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했고, 곧이어 최초 임시정부였던 "대한국민의회에서 외교부장"을 맡았다. 그 이후, 1919년 "상해"에서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재무총장"에 선임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여건이 나빠진 그는 "우수리스크"의 한 초라한 집에서 지내다가, 1920년 "러시아에 거주하는 한인들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연해주"에 침입한 "일본군"에 의해 총살당하고 말았다.
3. "군수업"으로 부를 쌓아, 항일투쟁에 사용
1860년, "함경도 경원"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노비"였으며, 어머니는 "기생"이었다. 1869년, 아버지 손에 이끌려 조선인들이 정착해 살고 있던 "러시아의 지신허 (Tizinkhe)"로 갔다.
조선인 최초로 "러시아 정교회" 학교에 들어갔다. 그러나 학교를 다니는 동안, 형수의 심한 구박으로 굶기를 밥 먹듯 하여, 11살이 되던 해, "포시예트 항에 가면 굶지 않는다."는 소문을 듣고 가출하여, "포시예트"를 찾아갔을 때는 기진해서 바닷가에서 정신을 잃었고, 배고픔에 지쳐 기절한 그를 발견하여 돌본 이들은 선한 "러시아 선장"이었다.
선장 부부는 나이가 많았고, 선박을 타고 세계를 도는 "선주"였다. 그들의 각별한 보살핌을 받았다. "선장 부인"은 학식이 뛰어났다. "선장 부인"은 그에게 "러시아어ㆍ서양학문"을 가르쳤고, 선장은 해외에서 견문을 넒힐 수 있도록 후원하였다. 그는 1871~ 1877년까지 6년 동안 선장부부와 상선을 타고 세계를 돌며 무역을 배웠고, 이를 통해 풍부한 학식과 폭 넓은 사고를 가진 지식인으로 성장했다.
17살에 "블라디보스톡"으로 돌아온 그는 유창한 "러시아어"로 한인노동자들의 부당한 대우를 시정해주고 한인인부들을 데리고 "도로공사"를 성공적으로 마쳐 "러시아 항제 니콜라이 2세"로부터 "은급 훈장"을 받았다.
"군수업"으로, 1년 수입 10~12만 $의 막대한 부를 쌓았다. 그는 특별히 조선인들을 직원으로 고용했는데, 이로 인해 절대빈곤에 시달리던 조선인들은 자력으로 돈을 벌 수 있었다. 그는 "러시아의 연해주 연추"에서 활동하였는데, 조선인들의 경제적 자립에 기여한 덕분에 "연추"의 조선인 사회에서 "도헌(都憲ㆍ군수 비슷한 공직)"에 선출될 정도로, "러시아" 사회에서 지위가 높아졌다. 그는 한인들의 교육에도 힘을 쏟아, 한인마을의 "정교회 학교"를 32개나 세웠다. 한인들은 그를 "페치카(따뜻한 난로)"라고 불렀다.
"러일전쟁"에 참여한 그는 그 후 "일본"의 야욕을 간파하고, 항일운동에 뜻을 두었다. 1907년, "안중근"은 해외망명을 통해, "러시아"에서 "최재형"을 만났다. "최재형"은 1908년 최초의 독립단체 "동의회"를 조직하여, 총장이 된다.
"최재형"은 자신의 재산 대부분을 항일투쟁을 위해 값지게 사용하였다. "연해주"에 온 "류인석(柳麟錫)"이 "13 도의군"을 조직할 때, 의병들의 총기 구입 등 무장을 도왔다. 옛 "소비에트 연방"이 "제2차 세계대전" 때까지 사용할 정도로 성능이 뛰어난 "소총"으로 무장시킨 것이다.
"동의회"는 "러시아"의 모든 항일의병 세력을 단결시켰고, "러시아" 국경의 "일본군" 초소와 소규모 부대들을 격파하고, 많은 탄약과 소총을 탈취했다. 당시 "일본군"은 전사자 40여명에 달했으나, "의병들"은 부상자가 불과 4명이었다. 결국 "의병들"의 "러시아" 활동 사실을 파악한 "일본"은 "제정 러시아"를 압박했고, "러시아" 국적의 조선인 청년의 징집ㆍ무기수거 등으로 의병 활동을 방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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