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남 "안준생 (安俊生ㆍ마태오ㆍ1907~1952ㆍ45세)"은 1939.10.17일, 당시 "서울 장충단"에는 "친일파" 인사들에 의해, "이토 히로부미"를 추모하는 신사인 "박문사(博文祠)"가 세워져 있었다. "안준생"은 "총독부"의 계획대로, "서울 장충단"에 있던 "박문사"를 찾았고, "이토 히로쿠니(이토 히로부미 아들)"과 함께 참배하고, "부친 안중근의 죄에 대해 용서"를 빌었다.
1. 안중근 (안응칠ㆍ安重根ㆍ1879~1910ㆍ31세ㆍ1910년 하얼빈 의거)
안중근은 "안태훈 (베드로)ㆍ조마리아"의 1째 아들로 태어났다. 의거 당시, 부친은 이미 사망했지만, 어머니는 생존해 있었다. "김아려"와 결혼해서 2남 1녀를 두었다.
• 부인 : 김아려 (金亞麗ㆍ김마리아ㆍ1878~1946ㆍ68세)
• 장녀 : 안현생 (1902~1959ㆍ57세): 안준생(2남)의 "박문사" 사죄를 지원했다고 알려진다. 1953.04~1956.03 "대구 효성여대 (현, 대구 카톨릭 대)"에서 3년간 불문학 강의. "상하이"에서 "황일청(黃一淸)"과 결혼하여, 평범한 삶을 살았다. 서울수복 후, 서울에서 생활. "러시아ㆍ중국"에서 불문학ㆍ미술 공부, "서울"로 이주, "한국전쟁" 때, "대구"로 피란
• 1남 : 안문생 (安文生ㆍ안분도ㆍ1905~1911ㆍ6세) : 독살설 있음ㆍ중국 연해주에서 질병으로 사망ㆍ의거 시 5살
• 2남 : 안준생 (安俊生ㆍ마태오ㆍ1907~1952ㆍ45세): 사업가ㆍ폐결핵으로 사망ㆍ서울 혜화동 천주교 공원묘지 안장
① 1째 아들 : 안문생ㆍ안분도 (安文生ㆍ1905~1911ㆍ6세)
"안분도"가 "신부님"이 되기를 열망했었으나, 1911년 "연해주"로 피신하였다가, 중국에서 급사했다. "일제"에 의해, 독이 든 과자를 먹고 독살당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② 2째 아들 : 안준생 (安俊生ㆍ마태오ㆍ1907~1952ㆍ45세):
"안준생"은, 끝내 아버지의 큰 뜻을 따르지 못하고, "변절"하고 만다. 중국에서 근근이 살던 그는 끝내 "일제"의 회유에 넘어갔다. 그는 3살밖에 지나지 않았던 때, 아버지를 일제에 잃어서 기억할 수 없었다. "상하이"에서 성장하고, 수학했으며, "상하이"의 "가톨릭스쿨(진단대학)"에서 영어를 공부하였으며, "정옥녀(鄭玉女)"와 결혼하여, 2남 1녀를 두었고, 1952년 "부산"에서 숨진 뒤, 가족은 "미국"으로 이주했다고 한다. "중일전쟁"시, "중경"으로 가지 못하고, "상하이"에 남아 있었다. 처가의 권유로, "헤로인 장사"를 시작하여 치부했고, "조선총독부"의 초청을 받아, 고국을 방문했다고 한다.
1939.10.17일, 당시 "서울 장충단"에는 "친일파" 인사들에 의해, "이토 히로부미"를 추모하는 신사인 "박문사(博文祠)"가 세워져 있었다. "안준생"은 "총독부"의 계획대로, "서울 장충단"에 있던 "박문사"를 찾았고, "이토 히로쿠니(이토 히로부미 아들)"과 함께 참배하고, "아버지 죄의 용서"를 빌었다. 이렇게 "이토 히로부미 아들"과 눈물의 악수 장면을 연출했다. 이후 유족은 일제의 보호를 받으며 생활했다.
이른바 "내선일체(內鮮一體)"의 길을 향해 가고 있던 일제의 침략정책에 동원되었다, 장녀 "안현생"도 막내동생의 "박문사 사죄"를 지원했다고 알려진다. 1945년, "안준생"은 독립이 되자, 몰래 숨어 들어와 "부산"에서 살다가, 1952.11월 "한국전쟁" 때, "해군 병원선"에서 "폐결핵"으로 사망했으며, "혜화동 천주교 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 당시 "해군"에는 그와 "상하이" 시절 알고 지냈던 "손원일 제독"이 있었기 때문이다.
③ "안중근"의 유언
31살의 한창 나이의 청년 "안중근"도 죽음을 앞에 두고, 연로하신 어머니를 생각했다. 그리고 어린 자식들과 함께, 살아갈 아내를 걱정했다. "안중근"의 사랑을 독차지 했을 첫째아들 "안분도"를 그리워했다. "안중근"은 "어머니ㆍ아내ㆍ사촌 안명근(安明根)" 및 여러 숙부들에게 유서를 남겼다. 자신에게 세례를 준 "빌렘(洪錫九) 신부"와 당시 "조선 교구장"이었던 "뮈텔 주교"에게도 유서를 남겼다. 친동생인 "안정근(安定根)ㆍ안공근(恭根)"은 "여순 감옥"에서 직접 만날 수 있었으니, 이들에게도 "유서"가 아닌 "유언"을 남겼을 것이다.
이때, "안중근"은 눈에 밟히는 6살짜리 첫째아들 "안분도"를 가장 많이 생각했고, 그에 관한 당부의 말을 특별히 남겼고, 어머니에게 보낸 유서에서 "장손 분도가 신부가 되어, 자신의 일생을 천주님께 바치도록 교양해 달라"고 부탁했다. 아내에게도 다음과 같은 유서를 보내, 이를 강조했다. (현재 유서의 원본은 남아있지 아니하다.)
"찬미예수. 우리들은 이 이슬과도 같은 허무한 세상에서 천주님의 안배로 배필이 되고, 다시 주님의 명으로 이에 헤어지게 되었으나, 또 멀지 않아 주님의 은혜로 천당 영복의 땅에서 영원히 모이려 하오. 반드시 육정(肉情)을 고려함이 없이 주님의 안배만을 믿고 신앙을 열심히 하고 모친에게 효도를 다하고 두 동생과 화목하여 자식의 교양에 힘쓰며 세상에 처하여 신심을 평안히 하고 후세 영원한 낙을 바랄 뿐이요. 장남 분도를 신부가 되게 하려고 나는 마음을 결정하고 믿고 있으니까 그리 알고서 반드시 잊지 말고 특히 천주님께 바치어 훗날에 신부가 되게 하시오. 허다한 말은 후일 천당에서 기쁘게 즐겁게 만나보고, 상세히 이야기 할 기회가 있을 것을 믿고 또 바랄 뿐이오."
그러나 이 "유서"는 거의 틀림없이 "한글"로 작성되었고, 이에 기초하여 "일본어"로 번역되었다. 이 "유서"는 "일본어 번역본"을 중역한 것임으로, "한글"로 다시 번역하는 과정에서 "일본인 번역자"가 범한 오류가 남아있고, "일본식 표현"을 직역 했기 때문에, 문제가 많다고 할 수 있다.
2. 의거 이후 행방 : 안중근의 가족
"하얼빈 의거" 이전, "안중근"은 동료에게 자신의 가족을 국외로 불러오도록 부탁한 바 있었다. 그리하여 "아내ㆍ자식들"은 "하얼빈 의거" 전에 "조선"을 떠났고, "의거" 다음날 "하얼빈"에 도착했다.
"하얼빈"에 도착한 처자식들은 "유승렬"의 도움으로, "러시아령 연해주의 꼬르지포"로 옮겨가 살게 되었다. "유승렬"은 그 지역에서 "의사"로 일하면서, 재정적으로 "안중근"을 지원한 바도 있었다. "유승렬"의 아들 "유동하"는 "안중근 의거" 직후, 함께 체포되어, 재판을 받기도 했다.
"안중근"이 순국한 직후, "연해주"에서는 "안중근 유족 구제 공동회"가 결성되어, 활동하고 있었다. "공동회"의 주선으로 1910.10월 경, 이곳에서 "어머니ㆍ1째 동생 안정근 내외ㆍ2째 동생 안공근" 등 "안중근 일가" 8명이 모여 살게 되었다. 그 후 "안중근 가족"은 1911.04월경, "안창호ㆍ이갑"의 도움으로 "꼬르지포"에서 10여 리 떨어진 "조선인 마을인 목릉(穆陵) 팔면통(八面通)"에 이주하고, "열여드레 갈이" 농장을 마련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안중근 가족"에 대한 일제의 추적은 이 마을에까지 이르렀다. 1911년 여름, 이 마을에서 "안중근"의 맏아들인 "안분도"가 일제의 밀정에 의해, 독살 당해 죽었다. "안분도"는 "안중근"이 "부인ㆍ어머니"에게 보낸 유서에서 신부로 키워달라고 부탁했던 아이였다.
"안중근 가족"은 1917.07월, "니콜리스크"로 다시 이주하여, "벼농사"를 시도하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연해주"는 "러시아 혁명"의 큰 물결에 휩쓸리고 있었고, "안중근 가족"은 안전을 위해, 그들은 당시 "동양" 최대의 국제도시였던 "상하이(上海)"로 이주해갔다. "안중근 가족"이 "상해"에 정착한 때는 1919.10월로, "임시정부"가 "상해"에서 출범한지 몇 개월 지나서였다. "상해"로 이주한 "안중근 가족"들은 "프랑스 조계 내 남영길리(南永吉里)"에서 살았다. 그들이 살던 곳은 "평안도 출신 서북지방" 인사들이 집중적으로 거주했으며, "흥사단의 상하이 지부"가 있던 "선종로(善鍾路)"나, "기호지방" 인사들의 거주지였던 "애인리(愛仁里)"와는 약간의 거리가 있었다.
"상하이" 정착에는 "안창호"가 일정한 도움을 주었고, 구한말 1894년 "동학농민혁명" 직후부터 부친인 "안태훈"과 잘 알고 지내던 "김구"도 그들의 생활을 도왔다. "상하이" 시절 초기, "어머니ㆍ아내ㆍ자녀들"을 전적으로 돌보아준 사람은 2째 동생 "안공근"이었다. 그는 "상하이" 시절, "김구"의 오른팔이 되어, 활동하기도 했다. 1937년 "일본군"이 "상하이"를 공격해 오자, 안공근"은 자신의 가족들도 내버려둔 채, "김구"의 모친 "곽낙원" 여사만을 "남경"으로 모시고 나왔는데, 이 때문에 "김구"로부터, 호된 질책을 받기도 했다.
3. 동생 : 1째 안정근 (安定根)ㆍ2째 안공근 (安恭根)
"안중근 집안"은 자유ㆍ독립을 위해서 투쟁한 대표적 가문으로 평가될 수 있다. 일제시대, "상해 임시정부"에서 "국무령"을 지냈던 "이상룡 (李相龍)가문"이나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했던"이시영 (李始榮) 집안"이 이러한 사례에 속한다.
"안중근"에게는 "안정근(시릴로)ㆍ안공근(요한)" 두 동생이 있었다. "식민주의는 민족주의의 학교"라고 누군가 말했다. "제국주의"의 침략과 "식민주의"의 형성은 "민족주의"에 대한 각성을 가르쳐주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천주교 신앙"과 함께, "안중근"의 죽음을 통해 "민족주의 학교"에 입학하여 "민족 모순"에 대해, 눈을 뜨게 되었다. 그리고 직접 "독립운동 전선"에 뛰어들었던 동생들과 그 소생들은 "남ㆍ북한사회"에서 높이 평가받는다.
• 안미생 (安美生): 1째 동생 "안정근"의 딸 - 김구의 비서ㆍ김구의 맏아들 "김인"과 결혼ㆍ이들의 결혼으로 "김구"와 "안중근"의 가문은 사돈지간이 되었다.
• 안우생 (安偶生): 2째 동생 "안공근"의 아들- 김구의 비서(영문)ㆍ김구가 암살 후, "홍콩" 망명
< 해방 후, "경교장"에서 (왼쪽부터), 장우식ㆍ안미생 (안정근의 딸)ㆍ김구ㆍ안우생 (안공근의 아들) >
4. 1째 안정근 (2남 4녀) : 안원생(安原生)ㆍ안진생(安珍生)ㆍ차녀 안미생(安美生)등 4딸
첫째 동생 "안정근(1885~1949ㆍ시릴로)"은 "안중근 의거" 이전에 이미 "한씨 부인"과 결혼했었고, 사이에는 "안원생ㆍ안진생" 두 아들과 "안미생"등 네 딸이 있었다. "안중근"의 순국 후, "안정근"은 자신의 "가족ㆍ모친ㆍ안중근의 유족" 등과 함께 우선 "러시아령 연해주 꼬르지 포"에 정착했다. 이들의 "연해주 정착"에는 그곳의 독립운동가 들을 비롯하여 "안창호(1878~1938)"의 도움이 컸다.
"안정근"은 "3ㆍ1운동" 이전부터 "조선의 독립"을 위해서 투쟁했다. 그는 1914년 "권업회" 활동을 통해,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그는 독립운동의 효율적 추진을 위해, 동생 "안공근"과 함께 "러시아"에 귀화했지만, 1915년 "독립운동" 단체인 "신민회(新民會)의 노령(露領) 총감"을 맡고 있었다. 1918.11월, "중국 길림"에서 자주독립을 위해, "무오 독립선언문"의 발표에도 공동으로 참여했다. "3ㆍ1운동" 이후, 1919.10월 경, 그는 가족들과 함께, "상하이"로 이주했다.
"안중근"의 맏아들 "안분도"가 독살된 이후, 안전한 활동근거지를 찾으려던 것과 이미 "상하이"에 집결해 있던 "백범 김구(1876~1949)"나 "도산 안창호" 등의 초청과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상하이"에서 그는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에 참여하여, "김구"와 함께 이사로 선출되었다. "임시정부" 조직 이후, 적극 참여하여 활동했고, "김구"와 함께 "황해도 신천군"의 조사위원으로 활동했다.
그 후 "간도ㆍ연해주" 지방을 넘나들면서, "상하이 임시정부"의 기치 아래 "김구"와 함께 독립운동에 매진했는데, 예를 들면 "대한적십자회 부회장ㆍ독립신문 발행인"에 선출되어, 활동했다. "간도교민단(僑民團) 설립ㆍ청산리전투 보고ㆍ임시정부 의정원 의원" 등을 역임했다. 그러나 그는 1925년경부터 "신병"으로 인해 고통을 받게 되었고, 1939년 이후에는 "중국" 각지를 옮겨 다니면서 은거생활을 하다가, 1949년에 "상하이"에서 죽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 1째 아들 "안원생"은 "상하이 교통대학"에 다닐 때, 중국 국가대표 "축구선수"로 활동한 바 있었다. 1943년, "한독당" 계의 청년조직인 "한인청년회 총간사"가 되었고, "한국광복군 인지(印支)파견책임자"를 역임했다.
• 2째 아들 "안진생"도 독립운동에 참여하여, "건국훈장 흥인장"을 수여받았다.
• 2째 딸 "안미생"은 "중국 서남연합대학 영문과"를 졸업하고, "임정 주석 김구"의 비서가 되어, 독립운동에 참여했고, "김구"의 맏아들인 "김인"과 결혼했다.
5. 2째 안공근 (2남 4녀): 안우생 (安偶生)ㆍ안낙생 (安樂生)ㆍ4딸
둘째 동생 "안공근(1889~1940?ㆍ요한)은 "서울교육대학교"의 전신인 "한성사범학교"를 마치고, "진남포"에서 "보통학교 교사"로 근무했다. "안중근 의거"를 계기로 교사 생활을 접고, 형인 "안정근"과 함께 "연해주"로 이주하여 살면서, 독립운동에 참여했고, 1912~1914년까지 "뻬쩨르부르크" 및 "모스크바"에 머물며, "러시아 어"를 공부했다.
"안공근"은 6개 국어에 능통했다고 하는데, 그는 "상하이"에서 "미국이나 영국대사관"에서 통역으로 근무한 바 있었고, "소련 영사관ㆍ독일 영사관"과도 관계를 맺었다. 그는 "임시정부"와 "중국 국민당 정부"를 연결하는 역할을 맡아, "국민 정부"의 정보기관인 "남의사(藍衣社)"와도 일정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는 "임정"과 "중국을 비롯한 외국 정부기관ㆍ조선인 좌파세력ㆍ무정부주의자"들과 연결시켜주던 인물이었다.
1919년, "임시정부 안창호"의 추천으로 "모스크바 특사"로 임명되어, "상하이"로 오게 되었다. "상하이"에 도착 후, "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에 의해 "외무차장"으로 임명되었고, 1921년에 "임시정부"에서 공식적으로 파견한 "외교관"으로 "모스크바"에 도착하여, "레닌" 등을 상대로 하여, "독립자금" 확보를 위해 활동하였다. "상하이"로 귀임한 1925년 이후부터, 모친 "조 마리아"와 "안중근 가족"들을 부양해야 할 실질적 책임을 지게 되었는데, 이를 위해 1928년 경, "정화암" 등 "무정부주의자"들과 함께 "상하이"에서 "빙과점"을 운영한 바도 있었지만, 생활의 곤궁함을 면하기 어려웠다.
1925년, "상하이"로 귀환한 직후, "임시정부 대통령 박은식"이 서거했을 때, "독립운동을 위한 전 민족적 통일"을 강조했던 그의 유언을 필기한 바 있다. 이처럼 그는 "임시정부"의 핵심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1926년, "여운형"의 후임으로 "상하이 한인교민단장"을 역임하게 되었다. 그는 "독립운동" 과정에서 파생된 "좌우의 분열"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면서, 1927년에는 "유일당 운동"에 "김구ㆍ이동녕" 등과 함께, "집행위원"이 되어 활동했다.
그는 "전 민족 유일당 운동"이 실패하자, "안창호ㆍ조소앙ㆍ김구" 등과 함께 "우파" 계열의 통일체인 "한국독립당"을 창당하여, 이사직에 취임하고, 임시정부를 유지ㆍ옹호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한독당의 별동대"로서 의열 투쟁을 목적으로 한 "한인 애국단"이 "김구"의 주도로 결성되자, "안공근"은 "단장"이 되었는데, "한인 애국단"은 "이봉창 의사ㆍ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계획한 조직이었다.
이 시기 "일제"의 정보보고서에는 "안공근은 김구의 참모로서, 그의 신임이 가장 두텁고, 김구가 범한 불법행동은 안공근의 보좌에 의해서 된다."고 평한 바 있었다. 1930년대, 그는 이처럼 "임시정부 주석 김구"의 최측근으로 활동했다. "안공근"은 "일제"의 상하이 침공과 "윤봉길 의거"로 인해, 1932년 "상하이"를 탈출할 때, "자신의 어머니ㆍ처자식ㆍ안중근의 자녀"를 남겨둔 채, "김구의 모친" 만을 모셔왔다. 이 때문에 그는 "김구"에게 심한 질책을 당한 바도 있었다.
1934년, "중국 낙양"의 "중앙군관학교 분교"에 "한인군관학교"를 설립하여, "독립군 장교"를 양성했고, "남경"에 설립된 "조선혁명 군사정치 간부학교"에도 관여하였으며, "남경"에서 "대한교민단"의 명예위원으로도 활동하였다. 1936년, "김구"가 주도해서 결성한 "한국국민당"에 함께 참여했다. 1937년부터 행방불명이 되던 1940년까지 "의정원 의원" 등으로 활동했다. 이러한 그의 활동을 살펴보면, 그는 "임시정부"의 핵심요인 가운데 하나였고, "김구 주석"의 "정보책임자"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1930년"대 말, "중경(重慶)시절"에 "김구"와 관계가 소원해졌다.
"중경"에서 "상하이 동제대학출신 의사 유진동(劉振東ㆍ김구의 주치의)"의 집을 내왕하면서, 지내다가 갑자기 행방불명되었는데, "임시정부" 산하에서 "안공근"과 경쟁관계에 있던 "기호파 계열"에 의해 암살된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그는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다.
• 2째 아들 "안낙생(安樂生)"은 "한국광복군"에 참여ㆍ활동하였고,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았다.
• 1째 아들 "안우생"은 "임시정부"에서 운영하던 교육기관인 "인성학교"를 거쳐, "중국 광둥"에 있던 "국립 중산대학 영문과"에서 수학했다. 이때 "광둥"에서 "하룡(賀龍)ㆍ섭정(葉挺)"이 주도했던 "공산 폭동"이 발발했다. 이 폭동에는 "님 웰즈"가 지은 "아리랑"의 주인공 "김산(金山)"을 비롯한 40여명의 "조선인" 청년학생들이 참여한 바 있었는데, 이 폭동에 참여했던 "조선인" 대부분은 죽음을 당했다. 그러나 "안우생"은 이에 참여하지 않고, 몸을 피해 살아남게 되었다. 후일 "김구의 영문비서"가 되어, 해방 조국에서 봉사하다가, "김구"가 암살된 직후, "김구"의 주치의였던 "유진동"과 함께 "홍콩"으로 다시 망명의 길을 떠났다.
• 1째 아들 "안우생" : "북"에서 활동했던 경우도 확인된다. "1째 아들 "안우생"은 "김구"가 암살된 이후, "홍콩"을 거쳐 "북"으로 들어가 살다가, 1992년 "평양"에서 사망하여, "평양의 통일 열사릉"에 안장되었다. "안우생"은 장녀 "안기애"와 "안기철ㆍ안기호ㆍ안기영"의 세 아들을 두었다.
1녀 "안기애"는 1965년경 "북한과학원 출판사 편집부"에 "수학전문가"로 배치되어 일했다. 1남 "안기철"은 "제주도 유격대장"이었던 "김달삼의 딸"과 결혼하여, 장모와 함께 "평양"에서 살았다. 2남 "안기호"는 전쟁 중 홀로 된 "고모"와 함께 부친을 모시고, "평양 신원동 간부사택"에서 살았다. 3남 "안기영"은 "북한 정권"의 "부주석"을 역임한 "김병식의 사위"가 되었다.
• "안공근"의 사위 한지성 (韓志成) : "한지성"은 "장인 안공근"과 함께 "독립 운동"에 종사했고, 1943년 "충칭"에서 사촌 매부인 "안원생(1째 안정근의 1째 아들)"이 "총 간사"로 있던 "한국청년회"의 "간사장"에 취임한 바 있다. 그는 "해방"이 되자, 북쪽으로 가서 활동했으며,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서울"로 내려와서 "서울시 인민위원회 부위원장"을 역임하다가, 9ㆍ28 때, 다시 "북"으로 올라갔다.
6. "안중근"은 일찍 세상을 떠났지만, 동생들은 "안중근의 뜻"을 이어나갔다.
그들은 우리 민족이 걸어온 신고의 길 위에서, 땀과 피를 아끼지 않으며, 해방의 그날을 위해 분투했다. 이 과정에서 그들은 신병을 얻었거나, "암살의 비운"에 직면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이 활동할 수 있는 한, "독립"을 위해 노력했고, "좌우"로 대립되던 "독립운동 세력"을 하나로 엮어나가고자 했다. 그들의 염원은 "좌"나 "우"가 아닌, "독립"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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