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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 • 현대사)/친일파 • 안중근 • 이토히로부미 • 총독부

안중근 ④ 마지막 휘호ㆍ유묵 글씨 (보물 26점)

by 당대 제일 2022. 9.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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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安重根ㆍ1879~ 1910.03.26ㆍ31세)"는 1910.03.26일 오전 9시, 사형 집행장으로 나가기 직전,  호송관 "지바 도시치(千葉十七) 상등병"에게  "위국헌신군인본분 (爲國獻身軍人本分) : 나라를 위하여 헌신하는 것이 군인의 본분"이라는 행서체 8자를 마지막 휘호로 남겼다.

 

1. 마지막 휘호 : 위국헌신군인본분 (爲國獻身軍人本分) 

다음 일화는 귀국 후, 유묵을 제단에 걸어두고 향을 사르며, "안중근 의사"의 명복을 빈 "지바"의 전언을 토대로 구성한 것이다. "지바"가 묻힌 "일본 미야자키현(宮崎縣) 와카야나기쵸(若柳町)"의 대림사 주지인 "사이토 타이켄(齊藤泰彦)"의 단행본 "내 마음의 안중근"에 나온다.

"일전에 부탁한 글씨를 지금 씁시다." 1910.03.26일 오전 9시, 사형 집행장으로 나가기 직전, 안의사는 호송관 "지바 도시치(千葉十七) 상등병"에게 "지필묵을 가져오라"고 했다. "지바"는 재판을 받던 안의사를 "법정~감방 사이"를 호송해온 헌병이었다.

얼마 전, 안의사에게, "휘호 한 점을 받고 싶다"고 요청한 바 있었다. 그러나 사형집행 당일까지 받지 못하고 있어서, 체념하고 있었다. 그런데 안의사가 부동자세로 감방 앞에 서있던 "지바"를 보고, "얼마 전의 부탁"을 떠올린 것이다. 안의사는 급히 준비한 "비단천과 필묵"으로 단숨에 글씨를 써내려갔다.

"위국헌신군인본분 (爲國獻身軍人本分) : 나라를 위하여 헌신하는 것이 군인의 본분"이라는 행서체 8자였다.

안의사는 마지막으로 "지바"에게 "친절하게 대해주어 진심으로 감사하다. 동양에 평화가 찾아오고 한ㆍ일간 우호가 회복되는 날, 다시 태어나서 만나고 싶다"고 했다. 안의사 순국 후, "지바 도시치"는 자진 제대했으며, 사후 부인 및 조카딸은 가보로 보관하던 유묵을 1980년 "안중근의사 숭모회"에 기증했다. 안의사의 마지막 유묵은 "보물 제569-23호"로 지정돼있다.

유묵

2. 안중근 의사의 유묵 26점 : 보물 569-1호 ~ 26호까지 지정

지금까지 한 개인의 작품 중 이처럼 많은 수가 "국가지정문화재(국보보물)"로 지정된 경우는 없다 실물이나 사진으로 확인된 안중근 유묵은 50여점 정도인데, 국내에 소재한 것만 추려서 "보물" 지정했다.

 안의사의 글씨는 "해서(정자체)해서와 행서(흘림체)의 중간인 해행(楷行)"이 주가 되고 있다.

"이동국(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수석큐레이터)""특히 엄정하고 단아한 해서(정자체) 중에서도 필묵이 정확하고 법도가 엄격한 안진경(709~786)류의 필법을 구사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고 밝혔다. 붓을 곧게 들고 누르는 가운데 필압(붓을 누르는 힘)의 경중과 지속의 대비가 분명해서 작품의 긴장과 이완을 극대화하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안의사의 성정기질정신력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동국""안의사의 글씨는 요즘의 프로작가가 쓴 순수예술지상주의 서예라기보다는 도학자인 선비로서 학문의 연장선상에서 쓴 서예"라고 규정한다. 즉 선비로서 글씨를 보는 관점은 "글씨는 곧 그 사람"이다.

 안중근 의사는 "사형언도부터 집행 때까지" 40여 일간, 200여 점의 휘호를 집중적으로 썼다.

안의사가 옥중에서 쓴 휘호의 숫자를 두고는 여러 설이 있다. "안중근 전"을 쓴 "박은식(1859~1925)" "한국통사(1914)"에서 "안의사가 200여 폭을 써주었다"고 기록했다. 1909.02.07, "단지동맹" 때의 혈서(대한독립大韓獨立) 등 극소수 외에는 사형언도를 받은 1910.02.14일부터 집행 때인 03.26일까지 40여일 사이에 집중적으로 썼다. 유묵에는 어김없이 "경술(1910) 2" 혹은 "경술 3"의 간기가 적혀있다.

안의사의 자서전인 "안응칠 역사"에 저간의 사정이 담겨있다 "<동양평화론>을 저술하기 시작했다. 법원과 감옥의 일반관리들이 내 손으로 쓴 글로써 필적을 기념하고자 비단과 종이 수백 장을 사 넣으며 청구했다. 나는 필법이 능하지도 못하고, 또 남의 웃음거리가 될 것도 생각하지 못하면서 매일 몇 시간씩 글씨를 썼다."

"이동국(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수석큐레이터)""안의사는 사형언도를 받은 214일부터 항소를 포기하고 도인의 심정으로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이면서 자서전인 <안응칠 역사> 및 사상을 담은 <동양평화론> 등을 저술하면서 함께 요청받은 글씨도 틈틈이 써준 것"이라고 말했다 안의사는 1910.02.14"사형언도"를 받은 뒤, 옥중에서 자신의 사상을 담은 "동양평화론"을 집필하기 시작했다. 안의사는 원래 집필에 1달 정도 걸릴 것이라고 여기고 항소할 마음을 품었다.

항소심을 진행하는 동안 책을 완성할 작정이었다. 그런데 "히라이시 우지히토(平石氏人) 고등법원장""(집필 때까지) 몇 개월이든 기다려주겠다" 철석같이 약속했다. 게다가 모친인 "조 마리아 선생(1862~1927)"으로부터 "옳은 일을 하고 받은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라는 편지를 받았다. 안의사는 결국 항소를 포기했다. 그렇지만 변수가 생겼다. "히라이시 고등법원장"의 약속이 지켜지지 않은 것이다. 결국 "동양평화론"은 미완성으로 끝났다.

3. 일본인들에게 써준 유묵들

안의사의 글씨를 원했던 이들이 모두 "지바"와 같은 일본인이라는 것도 매우 특기할만한 일이다뤼순 감옥 교도소장간수경찰검찰관통역세무관교사는 물론 심지어 교화승까지 안의사의 인품과 사상에 감복했다는 뜻이다.

국가안위 노심초사 (國家安危 勞心焦思): 야스오카 세이시로(옥중에서 취조한 검찰관)

인무원려 필유근우 (人無遠慮 必有近憂사람이 염려가 없으면 반드시 가까운 근심이 있다): 가미무라 쥬덴(다롄(大連)세관에서 근무)

승려 쓰다 가이준(사형수 안의사 교화 담당유묵 3)시타라 마사오(감옥 간수)야기(감옥 경관)오리타 다다쓰(감옥 의사)사카이 요시아키(한국통감부 경시(총경))나카무라(감옥 경수계장)맹경시(감옥 방문 경찰)삼정덕일(감옥 간수)히시다 마사모토(뤼순초교 교사)

4. 저서 : 순국 전 40여일의 기록

안응칠 역사 (자서전): 1909.12.13.~ 1910.03.15(순국 11일 전)

동양평화론 : 1910.02~ 03월 사이에 집필했지만, 미완성으로 종료

한국인 안응칠 소회 : 1909.11.06"뤼순 형무소" 이감 직후, 검찰관에게 제출

이등박문 죄악 15개조

안의사의 삶학식철학을 알 수 있는 저술은 그리 많지 않았다갓 30세를 넘긴 나이에 순국했기에 많은 글을 남길 시간이 없었다. 다수의 저작과 글들은 수감 후 쏟아냈다안의사는 3~4개월이라는 짧은 옥중 생활에서 자신의 삶과 사상, 철학을 불꽃처럼 쏟아냈다.

그 가운데 사형 언도 후 항소를 포기하고, 사형집행까지 마지막 40여 일간 붓을 휘둘러 써내려간 것이 바로 유묵이다. 따라서 안의사가 남긴 "마지막 40여일 기록", "유묵"은 단순한 붓글씨가 아니다안의사의 삶학식정신사상을 오롯이 "유묵"에 담았다"이동국"은 이를 두고, "유묵 한 점 한 점이 안의사의 유언이자 분신이며, 그 자체가 또 다른 <안응칠 역사>라 할 수 있다"고 평가했다.

평소 갈고 닦은 학식을 바탕으로 각종 고금의 고전한시를 인용한 글을 일필휘지로 써내려갔다. 또 경세(經世)시국을 걱정하는 자작시도 다수 남겼다지금까지 확인된 50여 점의 글 중에서 같은 문장이 하나도 없다불과 31살에 순국한 안중근 의사의 깊고도 넓은 학문을 가늠할 수 있다.

5. 청와대에서 사라진 안중근의 유묵

보물 569-4: 거친 옷과 거친 음식을 부끄럽게 여기는 사람은 더불어 논의할 수 없다(恥惡衣惡食者不足與議): 청와대소재불명<논어-이인>에서 인용

"문화재청의 문화재정보란"에 이 유묵의 소재지가 "서울 종로 세종로1 청와대"라고 되어있는데, 도난 문화재 정보란에 "도난 분실"로 표시되어 있다. 청와대가 갖고 있던 "안중근 유묵"이 사라져서 행방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1972.08.16일 보물로 지정된 이 유묵은 4년 뒤인 1976.03.17일 당시 소유자인 "이도영(홍익대 이사장)""청와대"에 기증했다.

그런데 이 유묵은 어느 순간부터 감쪽같이 사라졌다2009.09, "청와대"로부터 "안중근 유묵이 없다"는 답변이 나왔고, 일부 자료에서 소유자로 표기된 "박근혜 전 대통령" 측도 "있는 유물이라면, 왜 없다고 하겠냐. 이 유묵을 소장하고 있지 않다"고 일관되게 주장했다이에 따라 "문화재청""도난문화재 정보" 항목에 "도난 : 안중근 의사 유묵 1"을 올려놓았다.

그렇다면 이 유묵은 대체 언제, 누가 갖고 나간 것일까그저 "청와대"가 어수선할 때인 1979"1026 사태" 이후나, 1980년대 중후반 누군가가 슬쩍 했을 것이라고 짐작할 뿐이다.

 

6. 안중근 의사의 유묵 26: 보물 569-1~ 26호까지 지정

보물 569-1: 백번 참는 집안에 태평과 화목함이 있다 (百忍堂中有泰和)구전 문장

보물 569-2: 하루라도 글()을 읽지 않으면 입속에 가시가 돋는다 .(一日不讀書口中生荊棘)

보물 569-4: 거친 옷과 거친 음식을 부끄럽게 여기는 사람과 더불어 논의할 수 없다 (恥惡衣惡食者不足與議): 청와대소재불명<논어-이인>에서 인용

보물 569-5: "동양평화론" 집필이 미완성으로 끝났다는 아쉬움과 함께, 침략 야욕에 눈이 먼 일본을 비판 (東洋大勢思杳玄 有志男兒豈安眠 和局未成猶慷慨 政略不改眞可憐) 동양의 대세를 생각하면 아득하고 어두우니, 뜻있는 사나이 편하게 눈을 감을 수 없구나. (동양)평화시국 이루지 못한게 개탄스럽기만 한데, (일본이) 정략(침략 정책)을 고치지 않으니 참으로 가엾도다.

보물 569-6: (일신상) 이익을 얻으면 의로움을 생각하고, (나라가) 위태로움에 처하면 목숨을 바친다 (見利思義 見危授命)<논어-헌문>에서 인용

보물 569-7: 서툰 목수는 아름드리 좋은 목재를 다룰 수 없다 (庸工難用 連抱奇材)자치통감

보물 569-8: 사람이 멀리 생각하지 않으면, 큰일을 이룰 수 없다 (人無遠慮 難成大業)<논어-헌공>에서 인용

보물 569-9: 오로봉을 붓으로, 삼상을 연지로 삼고, 푸른 하늘만한 큰 종이에 내 마음 속의 시를 쓰리라 (五老峯爲筆 三湘作硯池 靑天一丈紙 寫我腹中詩이백의 시

보물 569-10: 날이 추운 뒤에야 소나무ㆍ잣나무가 시들지 않음을 안다 (歲寒然後知松柏之不彫)추사 김정희(1786~1856)의 유명한 "세한도"에도 인용<논어-자한편>에서 인용

보물 569-11: 천리밖 임(나라) 생각에 바라보는 이 눈 뚫어질 듯 하오이다. 이로써 작은 정성 표하니 행여 이 마음을 저버리지 말아 달라 (思君千里 望眼欲穿 以表寸誠 幸勿負情)

보물 569-12: 장부는 비록 죽을 지라도 마음은 쇠와 같이 단단하고 의사(義士)는 위태로움에 이를지라도 기상은 구름같이 드높다 (丈夫雖死 心如鐵 義士臨危 氣似雲)

보물 569-13: 글을 널리 배우고 예로써 절제한다 (博學於文 約之以禮)<논어-안연>에서 인용

보물 569-16: 홀로 자만하는 것보다 더한 외톨이는 없다 (孤莫孤於自恃)

보물 569-22: 국가의 안위를 마음으로 애쓰고 노심초사한다 (國家安危勞心焦思)

보물 569-24: 하늘이 주는 것을 받지 않으면, 도리어 그 재앙을 받을 뿐 (天與不受反受其殃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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