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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 • 현대사)/친일파 • 안중근 • 이토히로부미 • 총독부

안중근 ① 이토 히로부미 처형 (1879~1910ㆍ31세)

by 당대 제일 2022. 9.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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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安重根ㆍ1879~ 1910.03.26ㆍ31세)"은 1909, "우덕순(후에 밀정으로 변절)조도선ㆍ유동하"과 소수의 결사대를 조직하여, "만주의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초대 한국통감ㆍ이등박문)" 하차시에 암살을 준비하였고, 1909.10.26"하얼빈 역"에 잠입하여, 역전에서 "러시아 군"의 군례를 받는 "이토 히로부미"09:30분에 암살하였다.

 

1. 안중근 (安重根1879~ 1910.03.26향년 31)

군인 (의병부대 참모중장참모총장 직)항일 의병장교육자 (삼흥학교(三興學敎) 설립)ㆍ"하얼빈 역"에서 "이등방문"을 죽였을 때, 그 많은 사람들 속에서 대한독립을 3번 부르짖고, 순순히 잡혔다.

옥중에서도 혹독한 고문을 받으면서, "자서전동양평화론" 등을 집필하는 한편, "매양 법정"에서 한국의 국토 국권을 침해하고, 동양의 평화를 유린한 것 등 "이등박문(이토 히로부미)15가지 죄목"들어 규탄함과 아울러 의거의 이유를 밝히는 등 고문죽음 앞에 태연하였다.

옥중생활 5개월 동안, 남긴 유묵이 "200여 점"이라고 전해지고 있으며, 그 중 남아있는 것은 "50여 점"으로 많은 진품이 "안중근 기념관 (서울 중구 남대문로 5471번지)"에 소장되고 있다.

자서전인 "안응칠 역사"에서 "평생 즐기던 4가지가 있다"고 했다.   구와 의를 맺는 일 (親友結義)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는 일(飮酒歌舞)   총으로 사냥하는 것(銃砲狩獵)   날랜 말을 타고 달리는 것(駿馬騎馳)이라 고백했다. 그러나 그 사이 "조선역사ㆍ맹자ㆍ자치통감" 등과 같은 동양 고전을 체득했을 뿐 아니라, 17세 때 프랑스 신부 "빌렘"으로부터 "세례(세례명 안도마)"를 받을 만큼, 기독교 사상은 물론 서구문물에도 정통했다.

•  출 생 : 황해도 해주읍 광석동

•  사 망 : 1910.03.26 오전 10:15, 여순(뤼순) 감옥에서 사형

•  묘 소 : 러시아 여순(뤼순) 감옥 근처 야산에 "매장" 추측

•  세례명 : Thomasㆍ도마ㆍ다묵 (多默)

•  : 응칠(應七)            •  동지 : 우덕순조도선동하

•  경 력 : 1909.10.26 : 이토 히로부미 살해현장 체포1910.02.14 : 사형 선고(마지막 공판) 1910.03.26 : 사형 집행

•  : 김아려 (金亞麗1878~ 1949)

•  자 녀 : 12(안현생 (1902~1959)ㆍ안문생 (안분도ㆍ1905~1911ㆍ6살 때 독살)안준생 (1907~1952)

•  동 생 : 안정근(安定根1885~1949)안공근(1889~1939)

•  저 서 : 안응칠 역사(자서전)동양 평화론(10여 일후 사형집행으로 "리말과 1장인 전감(前鑒)의 일부만 쓸 수밖에 없었음)    •  수 상 :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안중근1

2. 이토 히로부미 (1841~ 1909.10.26향년  68이등박문(伊藤博文)본명- 하야시 도시스케)

조선 병탄 작업 완성자에도시대 후기의 무사(조슈 번사)정치가ㆍ작위는 백작 (사후 공작으로 추증)ㆍ일본제국 헌법학자일본제국의 초대 내각 총리대신(15710)ㆍ 조선통감부의 초대 통감 역임"메이지 유신" 이후, 정부의 요직을 거쳤으며, 일본제국 "헌법"의 기초를 마련추밀원 의장(13810)귀족원 의장

현대 "일본"의 기초를 쌓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로 평가되며, 특히 "메이지 헌법"의 초안 작성(1889) "양원제(兩院制)" 의회의 확립(1890)에 크게 기여한 인물로 평가된다우리에게 영원히 침략자이자, 민족의 원수이지만, 일본 국민들에게는 합리적이고, 청렴한 정치가로 추앙받는 인물이라 한다.

3. 동지 : 우덕순 (3년형 밀정)조도선 (16월형)ㆍ유동하 (16월형)

동지

"이토 히로부미"저격은 안중근을 비롯한 4명의 동지들의 공동 작전이었다. "창춘의 남창춘(南長春)콴청쯔(寬城子)역과 도착지인, 차이자거우(蔡家溝)(다음 역인)하얼빈"4 지점에서 암살하려 했으나, 자금인력이 부족하여, 거사를 도착지(차이쟈거우 또는 하얼빈)변경했다이에 따라 "우덕순조도선""차이쟈거우 역"으로 이동하였으며, 안중근은 "하얼빈 역"에서 공격하기로 했다.

"차이자거우 역"에서의 계획은 이를 수상하게 여긴 러시아 경비병에 의해 실패하였다1곳에서 실패할 것을 우려해, "하얼빈역과 채가구역" 2곳에서 치밀한 계획 속에 진행된 거사였다.

10.26일 오전 9, "이토"의 열차가 하얼빈에 도착했다"이토""코콥초프"와 열차 안에서 회담한 후, 09:30분경 러시아 군의 사열을 받기 위해 하차했다안중근은 사열을 마치고 열차로 돌아가던 "이토""브라우닝제 반자동권총 M1900"으로 저격했다.

안중근은 총탄 7발 중 3발로 "이토"를 맞혔고, 나머지 4발 중 3발은 각각 그 곁의 수행비서관, 하얼빈 주재 일본 총영사, 만철 이사를 맞혔다그 후, 일행들은 모두 체포되었고 안중근과 함께 "여순 감옥"에 수감되어 같이 재판을 받게 되었다.

① 우덕순 : 거사 당시 29세ㆍ禹德淳ㆍ1880~ 1950ㆍ70세ㆍ충북 제천 출신→ 밀정으로 변절

  ( 안중근 : 거사 당시 30세ㆍ安重根ㆍ1879~ 1910ㆍ31세)

3년 형을 선고 받고 복역 중, 전 탈옥사건이 추가되어 7년을 복역하고 나와, 만주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계속하며, 수차례 옥고를 치렀다.  해방 후, 1948년 대한국민당 최고위원이 되었으나, 남북전쟁 중 북한군에 의해 살해되었다.

1920년대 들어, 우덕순은 이상 행적을 보인다.  독립 운동가를 감시하는 밀정이었고, 일본 외무대신에 돈을 지원 받았다고 2019.08월 KBS가 주장했다.  취재진이 입수한 일본 기밀문서 등을 보면 우덕순은 1920~30년대 하얼빈과 치치하얼 등 만주 지역에서 "조선인민회" 회장으로 활동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인민회(朝鮮人民會)"는 일제가 당시 한국인 사회를 통제하기 위해 만든 대표적 친일단체다. 정보 수집이 주요 역할로, 일반 한국인뿐 아니라 독립 운동가를 면밀히 감시하고 정보를 끌어 모았다.  (조선인민회 : 1911년에 조선 총독부가 만주에서 조직한 친일 단체. 용정촌(龍井村)을 시작으로, 만주 전역에 차례대로 만들어졌다.  민족 해방 운동을 탄압하고, 조선 총독부의 말단 행정 기관으로서 역할을 수행하였다.)

우덕순이 일제 정보기관인 "특무기관"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음을 보여주는 증거 자료 등을 입수했다. 중국 지역 한국독립운동 전문가인 김주용 원광대 교수는 "조선인민회가 활용하는 밀정들이 독립 운동가들을 감시하는 역할을 했고 이들 정보가 조선인민회장을 했던 우덕순에게 집중됐다"고 분석했다. 말하자면 우덕순이 밀정을 지휘하고 관리하는 역할을 맡았다는 이야기다.

② 조도선 : 거사 당시 30세ㆍ曹道先ㆍ1879~ 몰년 미상ㆍ함남 홍원 출신ㆍ건국훈장 독립장(1962)

1년 6개월의 형을 마치고 나온 이후, 행적을 찾지 못했다.

③ 유동하 : 거사 당시 18세ㆍ劉東夏ㆍ1892~ 1918ㆍ60세ㆍ함남 원산 출신ㆍ건국훈장 독립장(1988)

1년 6개월의 형을 마치고, 러시아에 머물다가, "볼셰비키"가 혁명에 성공하여 러시아를 지배하자, 조선 독립운동을 지원받기 위하여, 애국 청년들과 함께 "볼셰비키 혁명군"에 가담하여 "백 러시아군"의 축출활동을 하고 있을 때, 독립군으로 가장한 일본군에 의하여 11명의 애국 청년들과 함께 체포되어 "싸말리야 강"으로 끌려가서 총살을 당하였다.

4. 안중근의 정신적인 스승 : 이상설

"안중근(1879~1910) 의사""뤼순 감옥"에 수감돼 있을 때, "내가 가장 존경하는 분은 이상설이다. 이범윤 같은 의병장 1만이 모여도 이 한 분에 미치지 못한다."고 말한 바 있다"안중근 의사""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뒤, 작성된 "일본 헌병대사령관 아카시 모토지로"의 비밀보고서가 공개됐다. "일제""안중근 의사"의 배후를 캐기 위한 문서였다. "비밀보고서"에는 "안응칠(안중근 아명)은 이상설에 의탁해서, 당시 미국에서 귀국한 안창호와 함께 간도에 갔다"고 기록돼 있다.

"안중근 의사""간도"로 간 이유 중 하나가 "이상설의 문하생"이 되기 위함이었다"안중근 의사""뤼순 감옥"에서 심문을 받을 때, "(이상설은) 포부가 매우 크고, 세계 대세를 통해 동양의 시국을 간파하고 있다. 용량이 크고 사리에 통하는 큰 인물로서, 대신(大臣)의 그릇이 됨을 잃지 않았다", 자신의 "사상적 스승"을 평했다.

※ 이상설 (李相卨ㆍ1871~1917ㆍ향년 44세) : 조선(대한제국) 문신 (성균관 교수ㆍ영의정(1개월))ㆍ일제 강점기 독립 운동가(안중근의 정신적 스승)1907년, "헤이그 회담ㆍ만국평화회의"에 특사로 파견되어 활동하였고, 이후 "해외 독립운동 기지"건설에 이바지하였다. "헤이그 밀사"와 관련하여, 사형선고를 받았다.

5. 사형집행 전날 (국내외 동포들에게 다음과 같은 글을 보냈다)

애국 시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 두었다가, 우리나라가 주권을 되찾거든 고국으로 옮겨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국민 된 의무를 다하며, 마음을 같이하고 힘을 합하여 큰 뜻을 이루도록 일러다오. 대한 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② 동포에게 고함

내가 한국의 독립을 되찾고 동양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3년 동안 해외에서 모진 고행을 하다가 마침내 그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이곳에서 죽노니,  우리들 이천만 형제자매는 각각 스스로 노력하여, 학문에 힘쓰고, 농업ㆍ공업ㆍ상업 등 실업을 일으켜, 나의 뜻을 이어, 우리나라의 자유 독립을 되찾으면, 죽는 자 남은 한이 없겠노라.

6. 최 후

사형장에 가는 그 순간까지 일개, "일본 헌병"의 청까지 잊지 않고 기억하여 일필휘지의 글씨를 써줬다"일전에 부탁한 글씨를 지금 씁시다." 1910.03.26일 오전 9, 사형 집행장으로 나가기 직전안의사는 호송관 "지바 도시치(千葉十七) 상등병"에게 "지필묵을 가져오라"고 했다"지바"는 재판을 받던 안의사를 "법정~감방 사이"를 호송해온 헌병이었다.

얼마 전 안의사에게, "휘호 한 점을 받고 싶다"고 요청한 바 있었다그러나 사형집행 당일까지 받지 못하고 있어서, 체념하고 있었다그런데 안의사가 부동자세로 감방 앞에 서있던 "지바"를 보고, "얼마 전의 부탁"을 떠올린 것이다안의사는 급히 준비한 "비단천과 필묵"으로 단숨에 글씨를 써내려갔다.

"위국헌신군인본분(爲國獻身軍人本分): 나라를 위하여 헌신하는 것이 군인의 본분 (행서체 8자)

안중근은 개인적인 원한이 아니라, "동양평화"를 위해,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1841~1909)" 처단했다고 당당히 밝혔다. 안중근은 법정에서 "이토의 15가지 죄악"을 밝힌다마지막 15번째 죄악이 "동양 평화의 영위를 파괴하여 수많은 인종의 멸망을 면치 못하게 한 짓"이라 했다죽는 그 순간까지 일본인의 양식을 일깨워 당신의 동양평화 의지를 심어주고 싶었을 것이다"독립전쟁의 일부로, 또 개인 자격이 아니라 한국 의병 참모중장의 신분으로 척살한 것"이라고 강조했으니, 보통의 일본인에게 추호의 악감정도 없었다.

사형집행 직전, 남길 말이 없냐고 묻자, "거사는 동양평화를 위해 결행했으므로 형 집행 관리들도 한일 간의 화합으로 동양평화에 이바지하기 바란다."고 부탁한다.

1910.03.26일 오전 09: 55(오전 10:15분 안중근은 숨이 끊어졌다)

그는 어머니가 직접 짜주신 흰색 옷을 입고, 10시에 사형실로 들어갔다. 그 다음, 기도를 3번 했다 "중국 감옥"이 아닌, "러시아 여순 감옥"이었다 "사형 집행인"이 그에게 "마지막 소원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었다. 사형 집행 전, 사형수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는 것이 관행이었기 때문이다. 술을 마시게 해 달라거나, 담배 1대를 피우게 해 달라는 흔한 얘기를 하지 않고 "5분만 시간을 주십시오, 책을 다 읽지 못했습니다." (처형당하기 직전까지, 의연했다)  5분 동안 읽고 있던 책의 마지막 부분을 다 읽고, 그들에게 "고맙다" 인사를 하고 세상을 떠났다.

사형은 7계단을 올라가서, 대충 나무판자 잘라 놓은 곳이 있는데, 그곳에서 밧줄에 얽힌 뒤"대한독립만세"3번 외친 뒤 사형수가 안중근이 묶인 밧줄을 잡아 당겼다.

7.  묘소 위치 : 이규태가 쓴 "안중근의사 백년원(百年寃) 풀이" 참고

"안중근"의 묘소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고 한다. 이유는 그동안 묘지를 관리하는 사람도 없었고, 돌아가신 지 100여 년이 되다보니, "묘소 부근"의 지형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처형 1시간 전, "안중근"은 두 아우(와의 마지막 면회에서, "유해는 고국에 못 돌아가고, 감옥 묘지에 묻히게 될 것이다. 만약 유족의 손에 건네지면, 하얼빈 공원 인근에 묻었다가, 고국에 반장하라"했다"교수형"을 받으면, 세로로 된 "통관(桶棺)"에 담기게 마련인데, "안중근"의 시신은 가로로 된 송판의 "침관(寢棺)"에 담겼고, "성당"에서 마련한 십자가가 양편에 꽂혔다그러 후, 찬 봄비 내리는 저녁, "마차"에 실려 "감옥 묘지"로 들어갔다.

그동안 남북한에서 유해 찾기가 꾸준히 벌어져 왔지만, 현장이 개발되고 변형되어, 위치 확인하기가 어렵게 된 데다, 분단을 이유로 "중국 당국" 비협조적이었다난감했던 "안중근 의사 무덤 찾기"가 남북이 공조하기로 하고, 중국에서도 협조할 것으로 보여 앞으로 "중근 의사의 백년원(百年寃)"이요, "민족의 한()"이 풀릴 전망이다.

8. 어머니(조 마리아 여사) 편지안중근의 유서

어머니 "조 마리아 (1862~1927ㆍ향년 65세ㆍ당시 48세ㆍ안중근은 18살에 낳은 자식)" 여사는 아들이 사형언도를 받자, "옳은 일을 하고 받은 형이나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라는 편지를 썼다.

① 조 마리아 여사 (당시 48세)의 편지 : 사형선고를 받은 아들 안중근 (31세)에게

네가 만약 늙은 어미보다 먼저 죽은 것을 불효라 생각한다면 이 어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너의 죽음은 너 한 사람 것이 아니라, 조선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짓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 즉, 딴 맘 먹지 말고 죽으라.

옳은 일을 하고 받은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대의에 죽은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다. 아마도 이 어미가 쓰는 마지막 편지가 될 것이다.

네 수의를 지어 보내니 이 옷을 입고 가거라 어미는 현세에서 재회하길 기대하지 않으니 다음 세상에는 선량한 천부의 아들이 되어, 세상에 나오거라

② 안중근 의사가 어머니 (조 마리아 여사)에게 쓴 유서

어머니 전상서.  예수를 찬미합니다. 불초한 자식은 감히 한 말씀을 어머님 전에 올리려 합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자식의 막심한 불효와 아침저녁 문안인사 못 드림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이 이슬과도 같은 허무한 세상에서 감정에 이기지 못하시고 이 불초자를 너무나 생각해주시니, 훗날 영원의 천당에서 만나 뵈올 것을 바라오며 또 기도하옵니다. 이 현세(現世)의 일이야말로 모두 주님의 명령에 달려 있으니 마음을 편안히 하옵기를 천만번 바라올 뿐입니다.

분도(안 의사의 장남)는 장차 신부가 되게 하여 주시길 희망하오며, 후일에도 잊지 마시옵고 천주께 바치도록 키워주십시오. 이상이 대요(大要)이며, 그밖에도 드릴 말씀은 허다하오나, 후일 천당에서 기쁘게 만나 뵈온 뒤 누누이 말씀드리겠습니다 위아래 여러분께 문안도 드리지 못하오니, 반드시 꼭 주교님을 전심으로 신앙하시어, 후일 천당에서 기쁘게 만나 뵈옵겠다고 전해 주시기 바라옵니다. 이 세상의 여러 가지 일은 정근과 공근에게 들어 주시옵고 배려를 거두시고, 마음 편안히 지내시옵소서. < 아들 도마 올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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