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安重根ㆍ1879~ 1910.03.26ㆍ31세)"은 군인 (의병부대 참모중장ㆍ참모총장 직)ㆍ항일 의병장ㆍ교육자 (삼흥학교(三興學敎) 설립)ㆍ"하얼빈 역"에서 "이등방문"을 죽였을 때, 그 많은 사람들 속에서 대한독립을 3번 부르짖고, 순순히 잡혔다.
1. 하얼빈 의거 : "이토"를 저격하기 위해, "하얼빈"에 머무른 것은 10박 11일
① 1909.10.21 (목) : 오전 08:50 블라디보스토크 역
그동안 함께 활동했던 "우덕순"과 생애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짧지만, 긴 여행을 시작한다. 오후 03:06, "우슬리스크"에 도착한 이들은 "포그라니치누이 행" 열차의 2등차표를 구입. 오후 09:25, "포그라니치누이 역"에 도착하여, 독립활동을 지원해 주던 "한의사 유경건"의 집을 찾아가, "러시아 어"에 능통한 아들 "유동하"를 만나 함께, "하얼빈"으로 향한다.
② 1909.10.22 (금) : 오후 09:15 "하얼빈" 도착
마차로 10여분 거리에 있는 "김성백"의 집을 찾았는데, 그는 "재 하얼빈 한인회 회장"을 맡고 있으며, "유동하"와는 사돈지간이다. 그의 집에서 의거 때까지 머물며, "거사 계획"을 짜기로 한다.
③ 1909.10.23 (토) : 오전
안중근 일행은 이발소에 들러 머리를 깎고, 사진관에 들러, 기념사진을 찍는다. 거사를 앞두고 마음의 준비를 한 것이다. 오후엔 "동흥소학"을 찾아 교사이며, "블라디보스토크"의 신문 "대동공보"의 하얼빈 지국장을 맡고 있는 "김형재"를 만난다. 근처 "김성옥"의 집에 머물고 있는 동지 "조도선"과도 만남 갖는다. 안중근은 "김성백"의 집으로 돌아와, "장부가"를 읊으며, 거사의 의지를 다진다.
④ 1909.10.24 (일) : 아침 일찍
"안중근ㆍ우덕순"은 걸어서 2~3분 거리인 "하얼빈 공원"에 산책을 간다. 공원 안을 산보하면서, 거사 계획을 세밀히 검토한 후, "차이자거우"로 가기로 하고, "유동하"를 제외한 "우덕순ㆍ조도선"과 함께, 오전 9시 "하얼빈"을 출발, 낮 12시쯤 "차이거자우"에 도착한다. 그곳에서 역 승무원을 통해, 모레 오전 6시에 "이토의 특별열차가 도착한다."는 정보를 입수한다.
⑤ 1909.10.25 (월)
안중근 일행은 오워전에 다시 한번 거사계획을 점검한다. "이토"가 도착하는 오전 6시라는 시간여건상 날이 어두워, 거사의 성공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 만일의 경우를 대비, "우덕순ㆍ조도선"이 "차이자거우"에 남아, 기회를 엿보기로 했다. 안중근 홀로 낮 12시 열차로 "하얼빈"에 되돌아 간 후, "김성백" 집에서 거사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⑥ 1909.10.26일 (화) 09:30 (사건 당일)
아침 일찍 일어난 안중근은 새 옷을 벗어놓고, 수수한 양복으로 갈아입는다. 오전 7시, 그는 권총을 지니고, 곧장 "하얼빈 역"으로 나간다. "하얼빈 역"에는 벌써부터 "러시아" 군인들과 환영객 들이 많이 나와서 "이토"를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안중근은 "역" 안에 있는 찻집에서 초조하고 긴장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차를 마셨다. 오전 9시 쯤, "이토" 일행의 특별열차는 "하얼빈 역"에 도착했다. "이토"의 도착과 동시에 "러시아 군악대 소리와 러시아 군대의 경례소리"를 듣고 그는 곧바로 "역"으로 향한다. 안중근은 "이토"라고 생각되는 사람을 뒤쫓았다.
얼마 후, "코코프체프 (러시아 재무대신)"와 "일본 총영사"의 안내를 받으며, "이토"가 기차에서 내렸다. 안중근은 국가와 민족을 위해, 일이 반드시 성공하게 해 달라고 기도한 뒤, 찻집에서 나왔다. "이토"는 "러시아 군 의장대"를 사열한 뒤, 환영객들로부터 인사를 받기 시작했다. 안중근은 "러시아 군인들" 뒤에서, "이토"를 쏠 기회를 노렸다.
9:30분, "이토"는 기차에서 내려, 많은 사람에 둘러싸여, "영사단"이 있는 쪽으로 가고 있었으나, 이때까지만 해도 안중근은 스스로 생각하는 그가 확실히 "이토"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이토"로 생각되는 자를 뒤쫓으면서, "영사단" 2~3명과 악수하는 것까지 확인하고, "이토"와 10보 정도 떨어 진 거리에 왔을 때, 재빨리 권총을 꺼내 3발을 쏘았다.
"이토"는 "심장" 등 3곳에 총탄을 맞고,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또한, 저격을 한 후에도 혹시 잘못 쐈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다른 일본인을 총으로 더 쏘아, "다나카 세이지 (만주철도 이사)ㆍ모리 야스지로 (비서인 궁내대신)"도 부상을 입었다.
그때, "러시아 헌병들"이 그를 덮쳤다. 안중근은 "코레아우라! (대한만세)"라고 외친 뒤, 순순히 체포됐다. 총에 맞아 쓰러진 "이토"는 곧 수행하던 의사가 응급 처치를 했지만, 숨을 거두고 말았다. 조선에 이어 만주를 집어삼키려던 일본 제국주의 침략의 우두머리 "이토"는 "안중근"의 손에 최후를 맞은 것이다.
의거 직후, 안중근 의사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고, "니키프로프 (러시아 기병 대위)"에게 체포되어, "하얼빈 역"에 있는 "러시아 헌병파출소"로 꿀려가 간단한 조사를 받았다. 그 날 오후, "일본 영사관"으로 넘겨졌다. "이토"를 죽인 장소가 "러시아 땅"인 "하얼빈"이었기에, "러시아 재판소"에서 안중근 의사를 재판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러시아"는 이 사건이 정치적으로 복잡한 문제라고 생각하여, "안중근 의사"를 "일본 총영사관"에 넘기고 재빨리 발을 뺀 것이다. 1905.11.17일, 체결한 "한일보호조약"에 의거하여, 한국인의 보호는 "일본 관헌"이 행하는 것으로 되어있어, "러시아 관헌"으로부터 "안중근" 등을 인계받는다.
⑦ 1909.10.27 (수) : 오후 4시 이후
"김성백"의 집에 "정대호ㆍ사촌들ㆍ안중근 가족일행"이 도착하는 순간, "러시아 헌병"이 들이닥치고 그들의 신원을 확인한다. "정대호"는 순간적으로 "김아려(안중근 아내)"를 "누나"라고 불렀다. "러시아 헌병들"은 여자ㆍ아이들을 제외하고, "김성백ㆍ정대호ㆍ사촌동생 정서우"를 연행한다. "안중근"을 비롯한 공범으로 "총 15명"의 한국인이 "일본 총영사관"으로 인도됐다.
⑧ 1909.10.28 (목)
안중근 의사가 조사를 받고 있는 동안, "우덕순, 조도선"등 사건과 관련된 동지들이 하나둘씩 잡혀 들어와, "일본 총영사관 지하실"에 갇혔다. "에조부치 다카오 (관동도독부 고등법원 검찰관)"이 사건 담당검사로 "여순 (旅順)"에서 "하얼빈"에 도착했다.
⑨ 1909.10.30 (토)
검찰관 "에조부치 다카오"는 "하얼빈 총영사관"에서 처음으로 "안중근"을 취조했다. 통역은 "서울 한국통감부"에서 파견된 "소노키 스에키"가 10.30일부로 "관동도독부 고등법원"으로 촉탁되었다. 취조실에서 "안중근"은 전혀 주눅 들지 않았으며, 시종일관 미소를 짓고, 편한 표정으로 잡담에도 응했다. "에조부치 다카오"는 시간을 들여, 꼼꼼히 자백을 받아낼 작정이었다. 안중근은 "이토"를 죽인 이유를 묻는 "에조부치 검찰관"의 질문에 "이토"의 죄악을 15가지로 나누어 하나하나 들었다. "안중근이 일본 황제에 대해, 나쁜 감정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에 대해 주목했다. 검찰관 "에조부치 다카오"는 "우덕순ㆍ조도선ㆍ유동하" 등 3명을 취조했다. 그들은 "안중근의 암살사건"에 대해 전면 부인했고, 체포당한 이후, 사건에 대해 알게 되었다고 했다.
• 한국의 명성황후 (明星皇后)를 죽인 죄 • 고종황제 (高宗皇帝)를 왕의 자리에서 내친 죄 • 을사조약 (5조약)을 강제로 맺은 죄 • 한일신협약 (7조약)을 강제로 맺은 죄 • 독립을 요구하는 죄 없는 한국인들을 마구 죽인 죄 • 정권을 강제로 빼앗아 통감 정치 체제로 바꾼 죄 • 제일은행권 지폐를 강제로 사용하여 경제를 혼란에 빠뜨린 죄 • 한국 군대를 강제로 해산시킨 죄 • 민족 교육을 방해한 죄 • 한국인들의 외국 유학을 금지시키고 한국을 식민지로 만든 죄 • 한국사를 없애고 교과서를 모두 빼앗아 불태워 버린 죄 • 한국인이 일본인의 보호를 받고자 한다고 세계에 거짓말을 퍼뜨린 죄 • 현재 한국과 일본에 전쟁이 끊이지 않고 있는데, 한국이 아무 탈 없이 편안한 것처럼 위로 일본 천황을 속인 죄 • 대륙을 침략하여 동양의 평화를 깨뜨린 죄 • 일본 천황의 아버지를 죽인 죄
"이토"를 죽인 이유를 듣고 난 "에조부치 검찰관"은 매우 놀라면서, "이제 그대가 하는 말을 들으니, 그대는 참으로 동양의 의사라 하겠다. 그대는 절대로 사형을 받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그러자 안중근은 "내가 죽고 사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고, 이 뜻을 어서 일본 천황에게 아뢰어라. 그래서 하루빨리 이토 히로부미의 옳지 못한 정책을 고쳐서 동양의 위태롭고 급한 사태를 바로잡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대답했다.
⑩ 1909.11.01 (월)
검찰관 "에조부치 다카오"는 "안중근" 등 9명에게 "구류장"을 붙이고, 오전 9시에 "관독도독부의 헌병대"에게 신병을 인도하여, "여순 감옥"으로 호송시키기로 하였다. "하얼빈"에 남은 "김성화ㆍ정서우" 등 6명에 대해서는 모두 석방절차를 밟았다. 오전 11시. "안중근" 등 9명은 "헌병대위 니티에이 겐지" 등 12명에게 호송되어, "하얼빈 역"을 출발했다. 열차가 "하얼빈" 교외로 접어들었을 때, 약간의 한국어를 구사하는 "헌병"이 안중근에게 말을 걸었다. "네 아내도 틀림없이 탄식하고 있겠지?" 그러자, 안중근은 "내겐 아내도, 아이도 없다"고 말했다.
한편, "하얼빈"에 남은 검찰관 "에도부치 다카오"는 총영사관 취조실에서 참고인 진술을 받고 있었다. "정대호의 누나"라고 칭하는 31세의 여인, "김아려 (안중근 아내)"였다. 그녀는 가느다란 몸매에 엄한 추궁에도, 시종일관 강인한 모습으로, 조금도 동요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⑪ 1910.03.26 (사형 집행일 (토) ) : 1910.03.26 오전 10:15, 여순 (뤼순) 감옥에서 사형
사형 집행일이다. 새벽녘부터 하늘이 흐렸고, 비도 내리기 시작했다. (소문으로는 "이토"의 기일이 26일이므로, 반년후인 03.26일에 집행했다는 것이다.)
오전 9시가 지나, 두 동생(안정근ㆍ안공근)과의 마지막 면회가 있어, 동생에게 마지막 유언을 전했다. 이때 안중근은 "어머니(조 마리아 여사)"가 넣어주신 "흰 비단 바탕의 저고리 상의ㆍ검은 바지ㆍ조선화"를 신고 있었다. 이어, 안중근은 "형장"으로 끌려갔다. 교수대가 바라보이는 "검시실"에 "검찰관(에조부치 다카오)ㆍ감옥서장(구리하라)ㆍ통역생(소노키), ㆍ서기(기시다)ㆍ의사(오리타)ㆍ변호사 2명(미즈노ㆍ가마타)" 등이 들어갔다.
마지막 남길 말을 묻고는 2장의 붓글씨용 종이를 접어 눈을 가리고 그 위에 흰 천을 감아 눈을 가렸다. 3명의 간수에게 안내되어 교수대 위로 오른 안중근은 조용히 3분 정도 기도를 했다. 오전 10:04분, 목이 밧줄에 걸렸다. 간수가 판때기의 한쪽 끝을 밟자, 몸은 떨어져 매달리게 되었다. 오리타 의사는 10: 15분에 숨이 끊어진 것을 확인했다. 오후가 되어, 찬 봄비가 내리는 가운데, 운구는 마차로 운반되어, "감옥 부지내의 공동묘지"에 매장되었다.
2. 단지 동맹 (왼손 4번째 손가락)
1909.03.02일, "안중근"은 31세 때에 거사가 있기 전, "러시아 연해주"에서 "김기룡ㆍ강기순ㆍ정원주ㆍ박봉석"등 11명의 청년동지들과 함께, 단도로 "왼쪽 약지(4번째 손가락)"를 잘라,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는 "단지동맹"을 맺고, 피로써 태극기에 "대한 독립"이라고 쓴 뒤, 만세를 불렀다. 이들 12명의 애국지사들은 몸과 마음을 바쳐 온 국민의 소망인 독립을 이루기로 맹세한 것이다. 그리고, 그후부터 글을 쓰면, 손바닥을 찍었다.
3. 하얼빈 사건 계획
1909년 가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을 방문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조선을 합병한 뒤, 중국 땅인 "만주"까지 빼앗을 계획을 세우고, "이토 히로부미"를 "하얼빈"으로 보내 "러시아의 재무 대신 코코프체프"와 협상을 하려는 것이었다. "이토 히로부미"는 조선과 "을사조약"을 강제로 맺고, "조선의 초대 통감"을 지낸 뒤, 일본으로 돌아가 "추밀원(樞密院) 의장"이 된 침략의 우두머리였다.
안중근은 침략자 "이토 히로부미"를 없애고, 일본의 침략 정책을 세계에 알릴 "하늘이 주신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는 "대동공보사(大東共報社) "사무실에서 독립투사 "정재관ㆍ김성무" 등 여러 동지들과 함께 "이토 히로부미"를 없앨 계획을 세운 뒤, 1909.10.21일 동지 "우덕순"과 함께 "하얼빈"으로 떠났다. "하얼빈"은 "러시아의" 동청(東淸) 철도의 종착지인 동시에 정치ㆍ문화의 중심지였다.
"하얼빈"으로 가는 도중, "러시아" 말을 잘하는 "유동하"를 통역으로 삼았다. "하얼빈"에 도착한 뒤, 교포 "김성백"의 집에 머무르며 다시 "조도선"을 동지로 맞았다. 동지들과 함께 밤새 여러 신문을 모아 "이토 히로부미"가 "만주"에 도착하는 시간과 환영행사 등에 관한 정보를 모았다. 이때, "일본 남만주 철도와 러시아의 동청 철도"가 엇갈리는 "채가구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가 열차를 갈아탄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채가구 역"에서도 기회를 엿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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