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토 대지진 (관동 대지진ㆍ關東大地震)"1923.09.01일, "일본 도쿄ㆍ요코하마"를 중심으로 한 "일본 간토(關東)지방"에서 발생한 "대지진"의 수습과정에서, "조선인"들에 대한 유언비어가 조장되어 "조선인 대량학살"로 이어진 사건이다.
1. 관동 대학살 (關東大地震ㆍ간토 대지진 학살)
전국적으로 조직된 3,689개의 "일본인 자경단 (自警團ㆍ일정한 지역 내의 민간인들이 스스로를 지키기 위하여 조직한 경비 단체)"이 "조선인"을 대량학살한 사건이다. 현재 일본은 "간토대지진"이 발생한 09.01일을 "방재(防災)의 날"로 정해서 재난재해에 대한 대피훈련을 실시해오고 있다.
일본의 가장 권위 있는 문학상 중 하나인 "아쿠타가와 상"으로 유명한 "아쿠타가와 류노스케(1892~1927ㆍ 35세ㆍ근대 소설가(단편))"도 "자경단"으로 활약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일 시 : 1923.09.10일부터 약 3~4주에 걸쳐서 발생 • 결 과 : 6,600~ 23,000 명 (조선인 대량학살)
• 장 소 : 일본 간토 (關東ㆍ도쿄ㆍ요코하마 중심를 중심으로 한 지역)
• 간토 대지진(관동대지진) : 1923.09.01일 11:58분 (일본 표준시)에 "일본 가나가와현 사가미만"을 "진앙지"로 발생했던 큰 지진이다. 5분 간격으로 발생한 3차례의 지진이다. 1855년에도 "간토 대지진"이 있었으나, 보통 "간토 대지진"은 이때를 말한다.
2. 간토 대지진 : 1923.09.01일 11:58분 (일본 표준시) 발생
"도쿄ㆍ요코하마"를 중심으로 한 "일본 간토(關東)지방"에 "최대 진도 7"의 대지진이 일어났다. 지진은 대규모 화재ㆍ해일ㆍ토네이도로 이어지며, "도쿄(60%)ㆍ요코하마(80%)"가 파괴했다. "일본 기상청" 자료에 따르면, 지진으로 사망자(99,331명)ㆍ행방불명(43,476명)ㆍ가옥 전파(128,266동ㆍ가옥반파(126,233동)ㆍ소실(447,128동)ㆍ유실(868동)의 피해가 발생했다.
그런데, 지진발생 다음날 발족한 "야마모토 곤노효에 (山本權兵衛) 내각"은 흉흉해진 민심을 잡기 위해 "조선인"을 희생양으로 삼았다. 내각은 "조선인이 방화를 하고, 폭동을 일으키려 한다ㆍ조선인이 우물에 독약을 집어넣었다ㆍ조선인의 배후에는 사회주의자가 있다"는 등의 유언비어를 조직적으로 유포시키고, 이것을 구실로 "계엄령"을 선포했다.
유언비어가 기정사실화됨에 따라, 일본인들이 대대적인 "조선인 사냥"이 시작했고, 전국적으로 조직된 3,689개의 일본인 "자경단 (自警團)"이 조선인들을 학살하기에 이르렀다.
"일본 정부"는 이 혼란을 조선인들에게 우호적인 좌익세력을 뿌리뽑기 위한 기회로 삼아, 조선인 학살과 더불어 사회주의자ㆍ아나키스트ㆍ인권운동가ㆍ반정부 행위자 등으로 경찰에 요주인물로 등록되어 있던, 주로 "좌파 계열의 운동가"에 대한 학살 사건도 동시에 진행되었다.
"노동운동가 히라사자와 게이시치(平澤計七)ㆍ사회주의지도자 오스기 사카에(大杉榮) 부부" 등 일본의 진보적 인사 수십 명을 검거해 살해했다.
"아마카스 사건"은 저명한 아나키스트인 "오스기 사카에"ㆍ조카인 6살짜리 "다치바나 소이치"ㆍ아내인 "이토 노에"가 "아마카스 마사히코 중위"가 이끄는 군경에 체포되어 죽을 때까지 구타당한 뒤, 우물에 유기된 사건이다.
3. 진 행
대지진이 일어난 시간인 11:58분은 점심시간이 임박한 시간이었기 때문에, "도쿄"를 비롯한 피해 지역에서는 화재가 발생하였다.점심을 준비하기 위해, 각 가정집ㆍ요식업소에서 불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지진이 발생하면서 불이 대부분 목재건물들을 불태우며, 널리 퍼져나간 것이다.
"간토 지방"은 지진으로 인하여 궤멸적인 피해를 입었고, 흉흉해진 민심 덕분에 일반인들 사이에 서로를 믿지 못하는 불신이 싹트는 가운데, "내무성"은 계엄령을 선포하였고, 각 지역 경찰서에 치안유지에 최선을 다할 것을 지시했는데, 이때 "내무성"이 하달한 내용 중에 "재난을 틈타 이득을 취하려는 무리들이 있다. "조선인들이 사회주의자들과 결탁하여, 방화ㆍ폭탄에 의한 테러ㆍ강도 등을 획책하고 있으니 주의하라"는 내용도 있었다.
내용은 일부 신문에 인용되었고, 이 과정에서 "편향적인 유언비어"까지 더해진 결과, "사회주의자들의 교시를 받은 조선인들이 폭도로 돌변해, 일본인들을 습격하고 방화약탈까지 한다."는 과격한 선동 내용으로 완성되어 각지에 퍼져나갔다.
심지어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ㆍ조선인들이 독이 든 만두를 나눠주고 있다ㆍ조선인들이 일본에 지진 일어나게 해달라고 일본에 저주를 퍼부었다"는 허무맹랑하고 비과학적인 낭설까지 나돌았다. 또한 "조선인들 모두가 일본 열도를 밀어서 지진을 일으켰다"는 어이가 없어질 정도의 만평ㆍ프로파간다 그림들이 신문ㆍ벽보 등으로 나돌았다.
당장의 분노를 표출하고 조선인들에 대한 증오가 있었던 일본 극우들은 이러한 소문들을 곧이곧대로 믿고, 서로 적개심을 확산시켜가며 조선인 학살의 구실을 쌓아갔다.
게다가 조선인들에 대해 무관심했던 다른 민중들도 "지진"으로 인해, 여기저기가 무너지고, 물 공급까지 끊긴 상태라, 삶의 터전을 잃은 허망함ㆍ좌절ㆍ화재ㆍ치안에 대한 불안감까지 커져갔다.
그런데 이런 소문들까지 나돌자, 당장의 분노ㆍ두려움에 휩싸여, 곳곳에서 우익들의 선동 하에 "죽창ㆍ몽둥이ㆍ도끼ㆍ갈고리ㆍ일본도ㆍ총기" 등으로 무장한 "자경단"을 빙자한 폭도들이 결성됐고, 이들은 곳곳을 돌아다니며, "인민재판"을 하며, 조선인이다 싶으면 가차없이 죽였다.
우선 "조선식 복장"을 한 이는 현장에서, 찌르거나, 때리거나, 찍거나, 베어 죽였다. 게다가 기름을 붓거나 장작불로 화형시키기도 했으며, 심지어 밧줄로 굴비 엮듯이 묶거나 반죽음으로 만들어 강물에 던지기도 했는데, 살겠다고 수면 위로 올라오면, 즉시 쫓아가 확인사살을 했다.
게다가 "창씨개명"이나, 화를 피해 일본식 이름ㆍ복장으로 위장한 조선인들까지 잡겠다고 조선인에게 어려운 일본어 발음 "十五円五十銭(십오엔 오십전)ㆍ大根(대근)"등의 단어까지 시켜, 발음이 이상하다 싶으면 살해하였는데, 이 때문에 "지방 방언" 등으로 발음이 어눌하거나, 성이 "金(김)인 도호쿠 사람들ㆍ외자 성을 강제당한 아마미 제도 출신ㆍ부라쿠민" 등이 반체제적 사회주의자나 조선인으로 몰려 같이 죽임을 당했다.
이 과정에서 일부 조선인들은 학살을 피해, "경찰서 유치장"으로까지 피신하였으나, 일부 지역에서는 경찰서까지 쳐들어와 끄집어내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런데 혼란 수습ㆍ질서 회복의 의무가 있는 "일본제국 경찰ㆍ계엄출동한 일본군" 상당수는 이러한 학살들을 묵인하거나 동참까지 해 혼란을 가중시켰다.
결국 재일 조선인들 중 일부는 한국으로 피난에 가까운 귀국을 하였는데, 사태가 너무도 심각하여 부유한 상인들조차 모든 재산을 포기하고 귀국했을 정도이다. 특히 집ㆍ토지 같은 부동산은 아예 가져올 수가 없으니 급매 그런 것도 못하고 귀국했는데, 사태가 진정된 후에도 일본으로 가는게 쉽지 않은 시절이라, 일본에 가지 못한 재일 조선인들이 많았다. 결국 이들의 부동산은 일본정부나 일본인들 소유가 되었고, 재일 조선인들은 1원 한 푼 못 받았다.
한편 시간이 지날수록 "자경단"의 규모는 점점 불어났고, 만행은 점점 도를 넘어 공권력을 위협할 정도가 되었다. 그리고 학살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는 "도쿄"에 흐르는 "스미다 강ㆍ아라카와 강"이 투기되거나, 강가에 암매장, 혹은 방치된 시체들의 피로 붉게 물들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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