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4년(명종9) 17살 때, 어머니 "신사임당(1504~1551)"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충격을 받은 그는 "금강산"에 들어가 1년간 승려로 생활하였다. 그러나 후에 그의 정적들은 이를 두고, 그가 "유학자의 탈을 쓴 중(불교 승려)"이라고 비난하였다.
1. 논란ㆍ의혹
① 불교 승려 의혹 : "율우"의 문묘종사 논쟁시
"인조" 즉위 초부터, 시종 "이이ㆍ성혼"의 "문묘 종사"를 놓고 논란이 발생했다. "남인"중에서 "이이와 성혼"의 문묘 종사를 반대한 핵심 인물들은 "허목ㆍ윤선도ㆍ윤휴" 등이었다. "율우의 문묘종사"논쟁이 벌어지자, "허목"은 이이를 "유학자의 옷을 입은 불교 승려"라고 비판했다. "윤휴"도 "허목"과 같은 시각에서 이이를 비판했다. "허목"이 "이이의 문묘 종사"를 반대한 명목은 그의 학문이 "유교가 아닌 불교에 바탕을 두었다"는 것이었다.
"학문에는 차례가 있고 공(功)에는 순서가 있다. 율곡은 한갓 큰 것을 이기려는 굉장한 논의를 갖고서, 자신이 (싸움에서) 이기기만을 힘썼다. "허목"은 이이가 당쟁을 조절하는 것처럼 행세했지만, 싸움에서 이기기만을 힘썼다"며, 이를 부인하였다.
"이이가 "성학집요(聖學輯要)" 서문에서 말하기를, 먼저 요로(要路)를 찾아서 문정(門庭)을 확실히 연 후에 정해진 방향 없이 널리 배우라'고 했는데, 이 말은 크게 잘못되었다.(중략) 율곡의 말처럼 한다면, 근본을 세움이 확실하지 못하고 방향이 정해지기도 전에 요로와 문정을 얻게 되는 것이니 이 무슨 말인가?(중략). 이는 불가(佛家)의 거꾸로 배우는 방법이지 공자의 가르침이 절대 아니다."
"이는 도(道)를 보는 것을 먼저 하고, 학문을 뒤로 돌린 것으로, 학문 방법을 거꾸로 한 것이다. 이는 불교의 "돈오법(頓悟法)"이지 공자의 가르침이 아니다."
"허목ㆍ윤휴"에 의하면, "이이는 유학자가 아니라, 유학자의 옷을 입은 불교 승려에 불과한데, 승려를 어떻게 문묘에 종사하느냐"는 비난인 셈이었다. "허목"의 비판은 결국 이이의 "출가 경력"을 정치적으로 이용해, 그의 "문묘종사"를 막으려는 당파적 비판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남인"중에서 "율우의 문묘종사"를 반대한 핵심 인물들은 "미수 허목ㆍ고산 윤선도ㆍ백호 윤휴" 등이었다. 어린 시절 한때의 방황을 이들은 이해하지 않았다. "허목ㆍ윤휴"등이 이이는 "학자가 아니라 불교 승려"라고 몰고 가자, 분노한 "송시열"은 "허목ㆍ윤휴"를 "이단 사이비"라고 규탄하였고, 이들에 대한 감정적인 분노를 품게 된다.
② "동인"의 "남ㆍ북" 분당시, 의심
"이발ㆍ정인홍"등이 "우성전"의 축첩을 문제 삼은 것 역시, "동인 강경파"들의 "온건파"에 대한 불신, 의혹의 한 원인이 되었다. "우성전"은 여러 명의 첩을 두었는데, 이 점이 일부 "동인 소장파"들에 의해 의혹으로 제기되었다. 그런데 "우성전"이 문제가 되었을 때도, "동인"들은 이이를 배후로 의심했다.
"우성전"은 당시 "동인"들이 떠받들던 인물이었다. "우성전"은 학문적 소양도 폭 넓었고, 지략이 남달랐으며, 경세에 대한 관점이 뚜렷하였다. "동인"들이 "우성전이 대신이 된다면, 만백성이 잘살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을 정도로 "동인"들이 떠받드는 새로운 지도자였다.
이런 "우성전"에게도 1가지 흠이 있었는데, 기생 1명을 지나치게 좋아한 것이었다. 심지어 "우성전"의 부모상 때에도 이 기생이 상례에 어긋나게 머리를 풀고, "우성전"의 집에 출입할 정도였다. 상중에 기생이 "우성전"의 집에 출입하는 것을 보고, 해괴하게 여긴 인물은 "동인 이발"이었다. "이발"은 "사헌부장령 정인홍"에게 "우성전"의 부모상에 기생이 출입하더라는 사실을 이야기하였다. 훗날 "대북(大北)"의 영수가 되는 "정인홍"은 재야에 오래 있던 사람으로서, 자신의 깨끗한 처신을 자랑삼아 온 인물이었다.
그는 "예"에 어긋난 이러한 일을 두고 볼 수 없다면서, 앞장서서 "우성전"을 공격했다. "정인홍"이 "우성전"을 탄핵한 것은, 이처럼 "동인"인 "이발"의 토로에 의한 것이었는데, "동인"들은 이 것 역시 이이가 뒤에서 조종한 것이라고, 이이를 의심하였다.
③ 유배 사주 의혹
훗날 "남인 이중환"은 자신의 저서 "택리지"에서 이이가 "동인"계 사람들의 "탄핵ㆍ귀양"을 배후에서 사주했다는 의혹을 제기하였다.
④ "곽사원"의 제방 송사
1579년, "곽사원의 제방 송사"가 정언지 등에 의해 1589년 터지게 된다. 10년 된 사건은 결국 주관부처인 "공조"의 "참판 정언지"의 상소로 "선조"의 결심을 얻어 조사하게 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의혹이 있는 "송익필"일가의 뒤를 이이가 봐주었다는 것이다. 토목공사를 둘러싼 부정사건에 "송익필의 조카사위(송익필의 형 송한필의 사위)"가 관련되었고, 그 동안 이이가 이 사건을 극력으로 돌보아주었다는 의혹이 있다.
2. 사상
"임진왜란ㆍ병자호란ㆍ정묘호란"으로 "도망 노비 발생 및 신분제도 해체"가 가속화되자, 이이의 문하생들은 봉건사회 해체 양상에 반발, "신진관료ㆍ지주"중심의 사회운영을 합리화하며, "송익필"계열의 "예학"을 내세운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이이를 자신들의 정신적 지주임을 재 선언했고, 이이의 사상이 "주자학"을 정통으로 계승했음을 강조했다.
이이의 정통성을 입증하기 위해 "서인"은 계속 이이의 "성균관 문묘 배향"운동을 벌였고, 이이는 "스님"일 뿐이라는 "허목ㆍ윤휴ㆍ윤선도" 등의 정면반박을 받게 된다. 당초 집권세력의 견제를 위해서는 반대세력이 소수 나마 존재해야 한다,
"붕당"에 관계없이 어느 당에도 "소인"과 "군자"는 있다는 이이의 견해를 고수하던 "서인ㆍ노론"은 1623년 "인조반정" 때까지만 해도 "남인"과 연립정권 구성을 시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예송"을 계기로 이이의 견해를 버리고, "남인" 및 "반대파"에 대한 탄압정책을 실시하게 된다.
① 학문관
그의 학문 즉 "성리설"의 특징은 "논리적"이다. 반면에 "이황"은 "체험"을 중시한 것이었다. 그는 학문에 대하여, "실생활"에 적용할 수 있는 학문을 참된 학문이라고 규정하였다. 아무리 훌륭하고 고결한 이론이라고 해도 현실에 적용이 불가능하다면, 이는 헛된 "공리공담"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후배인 "서인"은 그의 "실용사상"을 사장시키고, 관념적이고 교조적으로 나아가, "당쟁"을 격화시키게 된다.
② 일도설 (주기설ㆍ이기일원론- 이황은 호발설)
그는 "이"와 "기"는 "하나"라고 판단했다. 그의 사상은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로 대표되며, "이황"의 "사단칠정(四端七情)설"로서 "이기호발설"을 배격하였다. 그가 23세 때 지은 "천도책 (天道策)"에 이미 그 바탕이 드러나 있다.
즉, 이이는 "이황"이 "기(氣)와 이(理)는 서로 독립되어 있다"는 데, 이설(異說)을 제기하여, 우주의 본체는 "이기이원(理氣二元)"으로 구성되었다는 것은 인정하나, "이"와 "기"는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분리되거나 "선후(先後)가 있는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따라서 "이"와 "기"는 최초부터 동시에 존재하며, 영원무궁하게 떨어질 수 없는 것이어서 이는 "조리(條理)", 즉 당연의 법칙으로 우주의 "체(體)"요, "기"는 그 "조리"를 구체화하는 활동이니, 우주의 "용(用)"이라 주장하였다.
"이황"의 설은 "호발설"이고, 이이는 "일도설"이었다. 하지만 "이황"의 "칠정설"인 "기발이승설"만을 취한 것이다. 반면에 그의 "사단설"인 "이발기수(理發氣隨)설"을 비판하였다. 그것은 "이황"과 "사단칠정설" 논쟁을 벌인 "기대승"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또한 "서경덕"에 대해서도 "기" 중심의 설로서 독창적이지만, 문제가 있다며 비판한다. 그의 설은 "기"가 운동하고, 이는 그 원인이 된다는 설에 근거한 것이다. 그는 자기의 주장을 발전시키면서, 이 주장이 "주자"의 뜻과 어긋나면 주자가 잘못 된 것이라고까지 하는 자신을 얻게 된 것이다. 이같이 그는 학문으로 유명할 뿐 아니라, "경세가(經世家)"로서도 혁혁한 업적을 남겼다.
훗날 영남의 "유직"이 <효종 원년>에 올린 상소문에서, 이이의 설을 "불교"와 "육왕(육구연과 왕수인)"과 같은 "주기설"로서 이단이라고 공격하였다. 그는 "이황"이야말로 "주리설"로서, "정학"이라는 사상에 근거하여, "이이"를 비판했던 것이다. 그 후 "주리설"은 "정학"이고, "주기설"은 이단이라고 여겨지게 되었다. 그 상소로 인하여, "유직"은 조정으로부터 처벌받아, 과거시험을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을 박탈당하였다.
하지만 이이 역시 "기"의 뿌리가 "이"라고 말하였기 때문에 "주리설"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이황"과 이이 모두 "기"의 뿌리가 "리"라고 했기 때문에, 모두 "이일원론" 또는 "이기일원론"이라고 할 수 있다.
③ 향약ㆍ규례
이 밖에 정치적 부패의 타개와 백성의 구제에 대한 방책에 관해서는 한층 구체적인 포부를 가지고 있었다. "만언봉사(萬言封事)"에서 "부패의 시정책 7개항"을 제시하였는데, 특히 그 중 "10만 양병설"을 주장하여 "임진왜란"을 예언한 것은 유명한 사실이다.
이 밖에도 "대동법"의 실시와 "사창"의 설치 등을 제의한 일은 조선사회 정책에 획기적인 혁신을 가져오게 하였으며, 일반 민중의 계몽을 위하여, "서원향약 (西原鄕約)ㆍ해주향약 (海州鄕藥)ㆍ사창계약속 (社倉契約束)ㆍ동거계사 (同居戒辭)ㆍ학교모범 (學敎模範)ㆍ해주은병정사학규 (海州隱屛精舍學規)ㆍ약속 (約束)ㆍ문헌서원학규 (文獻書院學規)" 등의 규례를 많이 만들었다.
④ 정당관
그는 "정당"을 "군자의 정당"과 "소인의 정당"이 존재한다고 보았다. 이이의 "붕당관"은 기존의 "성리학적 붕당관"에서 벗어나지 않았으나, "소인의 정당"을 완전히 배척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다만 "군자의 정당"을 상대적으로 많이 등용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해야 된다고 판단하였다.
⑤ 여성 교육관
그는 기존의 "유교"나 "성리학"의 남녀 차별에 반대하였다. 여성 역시 하나의 인간이자 인격체로 간주하였고, 여성에게도 유교와 성리학을 가르쳐, "인의예지"와 "도덕적 소양"을 가르쳐야 된다고 확신했다.
그의 이런 사상은 집안의 여성들에게 "사서삼경"을 직접 가르치는 것으로도 나타났다. 또한 어머니 "신사임당"의 영향을 받았는데, 이는 딸들에게도 유교와 성리학을 가르쳤던 외할아버지 "신명화"의 영향력이기도 했다. 그러나 동시에 여러 명의 "첩"을 거느리는 이중적인 면모를 보이기도 한다.
⑥ 독서관
그의 저작 "자경문(自警文)"에서 독서에 대한 생각을 규정하였다. "새벽에 일어나면 아침나절 할 일을 생각하고, 아침밥을 먹고 나면 낮 동안 할 일을 생각하고, 잠자리에 들 때면 내일 할 일을 생각한다. 아무 일이 없으면 마음을 내려놓고, 일이 있으면 반드시 생각을 하여 일 처리에 마땅한 방도를 얻어야 할 것이다. 그런 뒤에 "독서"를 한다. "독서"란 옳고 그름을 분변(分辨)하여 일을 행하는 데 실천하는 것이다. 만약 일을 살피지 않고 오뚝 앉아 "독서"만 한다면, 무용한 학문이 된다."
또한 "격몽요결 4장"에서 이이는 "독서"에 대해 상세히 논하고 있다. "배우는 사람은 늘 이 마음을 보존하여 사물의 유혹에 져서는 안 된다. 반드시 이치를 따져보고(窮理), 선(善)을 밝힌 뒤에야 마땅히 행해야 할 도리가 눈앞에 드러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도(道)로 드러내는 데는 이치를 따지는 것보다 앞서는 것이 없고, 이치를 따지는 데는 독서보다 앞서는 것이 없다. 왜냐하면 성현(聖賢)들이 마음을 쓴 자취와 본받거나 경계해야 할 선과 악이 모두 책에 있기 때문이다." 라고 하여, "독서"를 세상, 사물의 이치와 진리를 깨우치는 가장 기본적인 단계로 해석하였다.
3. 학맥ㆍ문하생
① 학맥
학문적으로는 "김종직"학파의 직계로서, 친구인 "성혼"과 함께 "백인걸"의 문하생이었다. "성혼"은 "백인걸"외에도 "성수침"에게도 사사했는데, "백인걸ㆍ성수침"은 "조광조"의 문인이었다. "조광조"는 다시 "김종직"의 문하생의 한사람인 "김굉필"의 문하생이기도 하다. 이들의 친구였던 "노수신" 역시 "이연경"의 문인으로, "이연경" 역시 "조광조"의 문인이었다.
그는 관료생활 중에도, 스승인 "백인걸"을 자주 찾았는데, 이이가 "백인걸"과 함께 "정암 조광조ㆍ퇴계 이황"의 인물평을 논하면서 "정암ㆍ퇴계"의 우열을 평했는데, 이때 이이는 스승인 "백인걸"에게 "조광조"에 대해 타고난 성품은 훌륭하였지만, 학문이 성숙하지 못한 채 관직에 나가, 일을 그르쳤다고 소신을 피력했다.
② 문하생
문인으로는 "사계 김장생(金長生ㆍ애제자ㆍ학문적 계승자ㆍ서인 예학의 종조)ㆍ중봉 조헌ㆍ수몽 정엽ㆍ묵재 이귀" 등이 있다. 이이와 "성혼"의 문하생들 중의 1명인 "김장생"의 문하에서 "송시열ㆍ송준길"등이 배출되었고, "이이ㆍ성혼"은 후일 "서인의 종주"로서 추앙되었다.
이이의 사상ㆍ학문은 "김장생"을 거쳐 "김집ㆍ안방준ㆍ송시열→ 권상하 →한원진"등 "서인 노론"으로 이어졌고, "성혼"의 문인들과 결속한 "김장생ㆍ김집"의 또 다른 문하생 일부, "윤황ㆍ윤선거 "등을 통해 "서인 소론"에게도 계승되었다.
이 중 "김장생"은 이이의 친구인 "송익필"의 문하와 "성혼"의 문하에서도 수학하였는데, "송익필"이 노비로 환천되면서, 학문적 연원을 "이이ㆍ성혼"에게서만 찾게 되었다. 이이와 친분이 있던 "송익필ㆍ송한필"에게서 "예학"을 배운 제자들 중, 상당수는 "송익필"의 집안이 "안당 가문"을 "역모"로 몰았던 일로 몰락하자, "송익필ㆍ송한필"의 제자임을 숨기고, "이이"의 학맥을 계승한 것처럼 자처하기도 했다. 이는 "송익필ㆍ송한필"에게도 배웠으며, "이이ㆍ성혼"등에게도 두루 수학한 "김장생"과 그의 일가를 통해 "학맥 세탁"을 했다.
4. 과로ㆍ병세
이이는 평생 동안, "대사간"에만 9번이나 임명되었고, "선조"의 신임은 계속되었다. 1581년 "사헌부대사헌"이 되었다가, 곧 "예문관제학"에 임명되어, "대사헌"으로 "예문관제학"을 겸임하고, "동지중추부사"를 거쳐, "예문관대제학ㆍ홍문관대제학"을 겸임한 "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이 되었다.
1582년 "이조판서"에 임명되었으며, 이때 "선조"의 왕명을 받고,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을 지어 올렸으며, 같은 해 "김시습"의 일대기 <김시습전(金時習傳)>과 학생 계몽서 <학교모범(學校模範)>을 저술하였다.
1582년, "이조판서"에 임명되었다가, "형조판서"를 거쳐, "병조판서"로 임명되었다. "병조판서"로 있을 때부터, 갑자기 과로로 쓰러진 그는 관작을 사퇴하고, 요양하게 된다. 그러나 "동인"은 계속 그를 탄핵하고, 공격하였다.
그는 "서인의 영수"인 "심의겸"을 비판하였고, "정인홍"의 "심의겸 탄핵"상소에도 동조하였음에도 1583년(선조17) 당쟁을 조장한다는 "동인"의 거듭된 탄핵으로 스스로 사직했다가, 같은 해 다시 "판돈녕부사"에 임명되고, 다시 "이조판서"가 되었다. 결국 당쟁을 조절하려는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고, "동인"들에 대한 이이의 미움과 원망, 인간적인 감정은 극에 달하게 되었다. 또한 당쟁 조절 노력에 협조하지 않는 같은 "서인"당원들 일부에게도 인간적인 혐오감과 환멸감을 느끼게 된다.
5. 죽음ㆍ사후
"당색"으로는 "서인"에 속했는데, 이 때문에 그는 "동인"과 "서인"의 당쟁을 조절하려고 노력하였음에도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동인"의 공격 대상이 되었다. 그는 "성혼ㆍ류성룡ㆍ정구ㆍ우성전ㆍ송익필ㆍ조헌"등의 지기들에게 당쟁을 조절하려다가, "동인"의 미움을 산일을 한탄하며 통곡하였다. "동인"의 집중 탄핵을 받아, 지친 이이는 모든 관직에서 물러나, 경장(更張)하고 싶어 하던 구국의 뜻을 풀지 못한 채, 병을 얻어 사퇴하고, 와병하였다.
병석에 누운 동안에도 "동인"의 공격은 계속되었다. 그는 "경기도 파주군 주내면 율곡촌"에서 요양하던 중, 차도가 없음을 알고 "한성"으로 내려왔으며, 1584년(선조19) 음력01.16일 새벽 "한성부 대사동(大寺洞)"자택에서 사망하였다.
그가 남긴 재산은 서재에 가득한 "책"들과 "부싯돌" 몇 개였다. "임진왜란"이 터지자, "선조"는 한탄하며, 피난길에 그의 이름을 불렀다고 한다.
1615년(광해군7)에 이이의 "애제자 김장생"등의 "공의"로 고향 "파주"에 그를 모신 사당 "문성사(文成祠)"가 설립되었다. "문성사"는 1649년(효종 즉위년) "효종"이 "사액"을 내려, "자운서원(慈雲書院)"이라 하였다. 1631년(인조8), "경기도 파주시 법원읍 동문리"에 이이의 "신도비(神道碑)"가 세워졌다. "이항복(李恒福)"이 글을 지었다. "경기도 파주"에는 그의 "위패"와 "영정"이 봉안돼 있는 서원인 "자운서원"과 여생을 보낸 누각 "화석정"이 있다.
'조선 > 인물 • 악녀 (10인) • 부덕 (6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선 천재 ④ 정약용 (1762~1836)ㆍ조선의 다빈치 (최고 지식인) (0) | 2022.10.10 |
---|---|
조선 천재 ③ 충무공 이순신 (1545~1598)ㆍ임진왜란 (2) | 2022.10.10 |
조선 천재 ② 율곡 이이 (1537~1584) ① 9차례 장원급제 (0) | 2022.10.10 |
조선 천재 ① 신숙주 (1417~1475) : 세조 최측근ㆍ8개 국어 능통 (0) | 2022.10.10 |
3대 정원 : 윤선도 원림ㆍ성락원ㆍ소쇄원 (2) | 2022.10.08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