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 (庭園ㆍGarden)"은 미관이나 위락 또는 실용을 목적으로, 주로 주거 주위에 수목을 심거나 또는 특별히 조경이 된 공간이다. 초본ㆍ과수ㆍ화훼 등과 같은 식물을 기르기 위해 사용되는 정원을 설계ㆍ관리하는 일로 주변과 조화를 이루도록 식물을 배열하는 측면에서 볼 때는 "예술"로 간주할 수 있으며, 식물을 기르는 원리나 기술적인 측면에서 보면, 일종의 "과학"이라고 할 수 있다.
1. 조선시대 3대 정원
① 윤선도 원림 (甫吉島 尹善道 園林) : 전남 보길도
② 성락원 (城樂園) : 서울 성북구
③ 소쇄원 (潭陽 瀟灑園) : 전남 담양
2. 윤선도 원림 (尹善道 園林): 전남 보길도 (甫吉島 )
• 정원 구성 (3개 공간): 낙서재 (樂書齋)ㆍ동천석실 (同天石室)ㆍ세연정 (洗然亭) • 종 목 : 명승 제34호
• 위 치 : 전남 완도군 보길면 부황길 57 (완도 보길도) • 면 적 : 81,745m² (지정구역)ㆍ398,983m² (보호구역)
섬에 조성된 "조선시대 별서정원(별장에 딸린 정원)"을 대표할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정원 양식을 하고 있다. "부용동 계곡"의 지형을 이용하여, 아름다운 정원공간을 조성한 곳으로, "보길도" 천혜의 자연과 인공의 조화를 통한, 정원 조성의 높은 경지를 보여주는 명승지이다.
"고산 윤선도(1587~1671)"가 1637년부터 여러 차례 출입을 하면서 13년간 머물면서, 여생을 보낸 곳으로, "윤선도"가 "어부사시사" 등 많은 시문을 남긴 곳으로, 당시 "윤선도"의 생활상과 자연관을 보여주는 문화사적 가치가 큰 정원 유적이다. "윤선도"가 "병자호란"으로 인하여, 제주로 향하던 중 이곳의 절경에 매료되어 머물게 되었으며, "어부사시사" 등 주옥 같은 한시를 이곳에서 창작하였다.
"낙서재(樂書齋)"는 서실(書室)을 갖춘 살림집으로 북향하고 있으며, 옆으로 "낭음계(朗吟溪)"라는 작은 시내가 흐리고, "낭음계" 양편에 "곡수당(曲水堂)ㆍ무민당(無憫堂)"의 두 건물을 지었다. 이 두 건물의 곁에 넓고 네모진 연못이 있다.
"낙서재"는 그가 조그마한 3채의 기와집을 동쪽ㆍ서쪽ㆍ중앙에 각각 짓고서 주자학을 연구하던 곳이다. "낙서재" 바로 건너 산 중턱 절벽 바위 위에는 "동천석실(同天石室)"이라는 1칸 짜리 집의 조그마한 "정자"가 있다. 주변의 "석문ㆍ석천ㆍ석폭ㆍ석대"도 장관이다. "동천석실"은 천하의 명산경승으로 신선이 살고 있는 곳을 "동천복지(洞天福地)"라고 한 데서 이름지어진 곳으로, 휴식과 독서를 위해 이 지역에서 가장 높은 곳이다.
"세연정(洗然亭)"은 "세연지ㆍ회수담" 사이에 있다. "세연정"은 정자의 중앙에 "세연지"ㆍ동편에 "호광루"ㆍ남쪽에 "낙기란"ㆍ서편에는 "동화각/칠암헌(七岩軒)"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었다.
마지막으로 "판석보(板石洑)"는 한국식 정원의 독특한 유적으로, 평평한 돌을 이용하여 내부가 비도록 세워 만든 것이다. 이것은 "세연지"에 물을 저장하였다가, "회수담"으로 흘려 보내는 역할을 하였다. "세연정" 부근은 이 정원에서 가장 공들여 꾸민 곳으로, 해변에 바로 인접한 "동구(洞口)"에 인공으로 물길을 조성하면서 연못들을 만들고, 정자ㆍ대(臺)를 지어, 경관을 즐기도록 하였다.
연못은 곡지(曲池)ㆍ방지(方池)로 구성되는데, "동구"를 흐르는 내를 돌로 된 "보(판석보)"로 막아 만든 곡지에는 큰바위들을 점점이 노출시켰으며, 방지에는 한 쪽에 네모난 섬을 만들고, 그 섬에 소나무 한 그루를 심어 놓았다.
"방지"의 동쪽 물가에는 돌로된 네모진 단 2개(동대ㆍ서대)를 나란히 꾸며놓았는데, 이곳은 무희가 춤을 추고, 악사가 풍악을 울리던 자리이다. "방지" 남쪽에 나지막한 동산이 있는데, "세연정"은 이 동산 위에 세워졌던 것으로 보인다.
2. 성락원 (城樂園): 서울 성북구
• 정원 구성(3개 공간): 앞뜰(쌍류동천ㆍ용두가산)ㆍ안뜰(영벽지ㆍ폭포)ㆍ바깥뜰(송석ㆍ연못)
• 서쪽 암벽 : 추사 김정희가 새긴 "장빙가 (檣氷家)"라는 글씨가 있다.
• 위 치 : 서울 성북구 성북동 2-22 외 • 면 적 : 14,407m² (지정구역) • 종 목 : 명승 제35호
"성락원"은 서울 내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조선시대 민가"의 정원이다. 1790년대 "황지사"라는 인물이 처음 조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 철종 때, 이조판서를 지낸 "심상응"의 별장이었으나 그 후에 고종 아들 의친왕 이강(義親王 李堈, 1877~1955)이 35년간 거처 겸 별궁으로 사용했다.
앞뜰은 두 골짜기에서 흘러내린 물줄기가 하나로 합쳐지는 "쌍류동천(雙流洞天)"과 안뜰 앞을 막아 아늑하게 감싸 만든 "용두가산(龍頭假山)"이 있다. 물줄기 속 암벽에 행서체로 새긴 "쌍류동천"이란 글씨는 성락원의 지맥을 보호하는 뜻도 있다고 한다. 또한 "쌍류동천" 주위와 "용두가산"에는 200~300년 된 "엄나무"를 비롯, "느티나무ㆍ소나무ㆍ참나무ㆍ단풍나무ㆍ다래나무ㆍ말채나무" 등이 울창한 숲을 이루어 안뜰과 성락원 바깥을 가려주는 구실을 한다.
안뜰은 "본재누각(本齋樓閣)ㆍ영벽지(影碧池)ㆍ폭포"가 있으며, "생활ㆍ수학ㆍ수양"의 기능을 하는 공간으로 여러 채의 건축물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현재는 "본재누각" 만이 남아 있다. "영벽지"는 인공이 가해진 자연 연못의 진수를 보여주며, 여기에 비치는 그림자는 공간의 깊이를 더해 준다.
뒤뜰은 "송석(松石)"과 연못이 있는 건물군 뒤의 "후원"과 같은 곳으로, 정자가 있어 자연의 풍치를 음미할 수 있는 공간이다. 이 정자 안에는 "노송"이 지붕을 뚫고 서 있어, 지붕 위에 나무 그늘이 지는 것을 피해왔던 오랜 관습을 타파하고 있다.
서쪽 아래 지역에 고요한 "늪"이 있고, 북쪽에는 물길을 파서, "인공폭포"를 만들었다. 제일 위의 폭포는 낙차가 15㎝, 중간 폭포는 낙차가 30cm, 제일 밑단의 폭포는 낙차가 150㎝이다. 3단의 물줄기는 생동감 있는 수경(水景)을 연출하고 고요한 계곡에 요란한 물소리를 낸다.
3. 소쇄원 (瀟灑園): 전남 담양
• 정원 구성 (2개 공간): 크게 "내원ㆍ외원"으로 구분, "소쇄원"은 내원을 말한다. • 종 목 : 명승 제40호
• 위 치 : 전남 담양군 가사문학면 소쇄원길 17 (지곡리) • 면 적 : 4,399m² (지정구역)ㆍ117,051m² (보호구역)
자연미와 구도 면에서 조선시대 정원 중에서도 첫손으로 꼽힌다. 선비의 고고한 품성과 절의가 엿보이는 아름다운 정원으로, 조선시대를 대표할 수 있는 정원이다.
조선 중종 때, 학자 "양산보(梁山甫,1503~1557)"가 "기묘사화"로 스승인 "조광조(趙光祖)"가 화를 입자, 시골로 은거하러 내려가, 지은 별서정원(別墅庭園)이다. 당시의 건물은 "정유재란" 때 소실되었으나, 다시 복원ㆍ중수하여 현재 2동이 남아 있다.
"소쇄원"은 조선중기 호남 사림문화를 이끈 인물의 교류처 역할을 하였다. "송순ㆍ임억령ㆍ김인후ㆍ김윤제ㆍ고경명ㆍ정철" 등이 드나들면서, 정치ㆍ학문ㆍ사상 등을 논하던 구심점 역할을 하였다.
"정원"은 계곡을 중심으로 하는 사다리꼴 형태로 되어 있다. 기능ㆍ공간의 특성에 따라, "애양단 구역ㆍ오곡문 구역ㆍ제월당 구역ㆍ광풍각 구역"으로 구분할 수 있다. 정원 내에는 "대나무ㆍ소나무ㆍ느티나무ㆍ단풍나무"들로 된 숲이 있다.
주위에는 흙ㆍ돌로 쌓은 자연스러운 담이 있는데, "애양단ㆍ오곡문ㆍ소쇄처사양공지려"의 석판과 목판글씨가 담벽에 박혀있다. "소쇄원" 안에는 영조 31년(1755) 당시 소쇄원의 모습을 목판에 새긴 그림이 남아 있어, 원래의 모습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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