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곡 이이 (李珥ㆍ1537~ 1584ㆍ향년 47세ㆍ이황과 35살차)"는 3세 때, 이미 글을 깨우쳤을 뿐만 아니라, 어머니 "신사임당"의 글ㆍ그림을 흉내 낼 정도로 놀라운 천재였다.1548년, 10세 때, "진사 초시"에 "장원 급제"하였고, 9차례의 과거에 장원 급제해,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는 별칭을 얻었고, 관직은 "숭정대부 병조판서"에 이르렀다. 제자들에게 "동방지성인(東方之聖人)"이라는 칭호를 받고, "기호학파"를 형성하여, 후세의 학계에 강력한 영향을 끼쳤다.
1. 율곡 이 이 (李 珥ㆍ1537~ 1584ㆍ향년 47세ㆍ이황과 35살차)
조선 선조 때의 문신(우찬성)ㆍ성리학자ㆍ 정치가ㆍ"이항복"은 이이의 "신도비"를 썼다ㆍ문묘종사ㆍ종묘배향을 이룬 6현 중 1명ㆍ과거를 통해 관직생활 진출 후, 죽을 때까지 관직생활을 한다.→ "조헌ㆍ김장생"에게 영향을 준다ㆍ신사임당의 7남매 중 3째 아들 (신사임당 : 申師任堂ㆍ1504(연산군10)~1551(명종6)ㆍ46세ㆍ시ㆍ글씨ㆍ그림에 뛰어났던 여류화가)
• 사 상 : 이기일원론 (理氣一元論ㆍ이와 기는 하나다) / 이통기국 (理通氣局說ㆍ이는 통하고, 기는 국한된다) / 이발이승일도설 (氣發理乘一途說ㆍ기는 발현되면, 이는 그것에 편승한다) / 성학집요 (聖學輯要ㆍ뛰어난 신하의 말을 경청하라)→ 신권중시
• 출 생 : 조선 강원도 강릉부 죽헌동 오죽헌(외가) 별채 몽룡실 (태몽 : 흑룡이 바다에서 하늘로 오르는 꿈)
• 사 망 : 조선 한성부 대사동 자택 (장지- 경기도 파주시(본가) 법원읍 동문리, 자운산 선영에 장사)
• 호 : 율곡(栗谷)ㆍ우재(愚齋) • 아명- "현룡(見龍) • 사 인 : 병사 (노환)
• 법 명 : 석담(石潭)ㆍ1554년(명종9) 17살 때, "금강산 마가연(摩訶衍)"에서 1년간 수도
• 별 칭 :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ㆍ장원급제 9번)ㆍ동방지성인(東方之聖人)ㆍ(진사과 초시(12세)ㆍ진사과 복시(20세)ㆍ별시 초시(22세)ㆍ28세- 진사과 초시/ 생원과 초시/ 생원과 복시/ 대과 초시/ 대과 복시/ 대과 전시)→ 시험을 통해, 자신이 "천재"임을 증명
• 1548년(명종3) 10세 : "진사 초시"에 장원 급제 • 종 교 : 유교(성리학)→ 불교→ 유교(성리학)
• 서 원 : 자운서원(경기도 파주시) - "위패ㆍ영정" 봉안 / 화석정- 여생을 보낸 누각
• 부 모 : 부- 이원수 (李元秀ㆍ1501~1561) 사헌부감찰ㆍ수운판관 통덕랑 역임ㆍ좌찬성에 추증 / 모- 신사임당 (申師任堂ㆍ1504~1551 (이이 14세에 사망))ㆍ측실(서모)- 권씨 ("주모"출신ㆍ술주정으로 이이를 괴롭혔으나, 원한을 품지 않고 극진히 모심)
• 처 : 정실- 곡산 노씨(? ~1592ㆍ성주목사 노경린의 딸) / 측실- 김씨 / 측실- 경주 이씨(이양(李崵)의 딸)ㆍ2남 1녀(김집의 첩으로 출가)ㆍ임진왜란 당시 부인 "노씨와 하녀 1인"이 그의 묘소 주변에서 "시묘살이"를 하며, 묘소를 지켰다. 왜군이 "노씨와 하녀"를 겁탈하려 하자, 이들은 자결로서 항거하였는데, 임진왜란이 종결된 뒤 후대에 그들의 시신을 수습하면서, 누가 "부인 노씨"이고, 누가 "하녀"인지 분간할 수 없었으므로 이들의 시신은 "이이"의 묘소 앞에 합장하였다.
• 가 족 : 재 종조부- 이권ㆍ이기(의정부영의정)ㆍ이행(의정부좌의정)ㆍ친족척- 이순신 / 외조부- 신명화 (진사ㆍ조광조와 친구ㆍ벼슬에 출사하지 않음ㆍ딸들에게 유교를 교육) / 사돈- 사계 김장생(제자)ㆍ서녀사위- 김집(사계 김장생의 아들, 이이 사후, 경주 이씨의 딸과 혼인)
• 스 승 : 스승 없이 조광조 사숙→ 조광조 문하생인 휴암 백인걸(조광조ㆍ김식ㆍ김안국의 학통) → "이이ㆍ우계 성혼" 전수(백인걸 문하에서 "우계 성혼"을 만나고, 오랜 친구가 된다)
• 친 구 : 정철(정치적 동지)ㆍ우계 성혼(이웃 사는 절친ㆍ백인걸 문하생 동문)ㆍ구봉 송익필
• 저 서 : 성학집요(聖學輯要)ㆍ격몽요결(擊蒙要訣)ㆍ동호문답(東湖問答)ㆍ소학집주ㆍ만언봉사ㆍ기자실기ㆍ경연일기(經筵日記)ㆍ석담일기(石潭日記, 경연일기의 일부)ㆍ순언(醇言)ㆍ인심도심설ㆍ김시습전ㆍ천도책ㆍ인심도심설
• 작 품 : 서원향약(西原鄕約)ㆍ해주향약(海州鄕藥)ㆍ사창계약속(社倉契約束)ㆍ동거계사(同居戒辭)ㆍ약속(約束)ㆍ학교모범(學敎模範)ㆍ해주은병정사학규(海州隱屛精舍學規)ㆍ문헌서원학규(文獻書院學規)ㆍ자경문
• 예언서 : 칠언고결ㆍ옥룡자청학동비결ㆍ오백론사비기
• 전향서 : 자경문(自警文)- 승려에서 환속한 후 지은 것
2. 인물
"이이"는 어려서 "신동"이라 불렸다. 생후 1년도 안 돼, 말과 글을 깨우쳐서 주변을 놀라게 하였다. 3세 때, 이미 글을 깨우쳤을 뿐만 아니라, 어머니 "신사임당"의 글과 그림을 흉내 낼 정도로 놀라운 천재였다. 4세 때, 중국의 역사책인 "사략"의 첫 권을 배웠는데, 가르치는 스승보다도 더 "토"를 잘 달았다고 한다.
성격은 솔직하였으며, 그는 "위선"과 "가식"을 극도로 혐오하여, 꾸며서 말하기를 거절하였다. 1548년, 12세 때, "진사 초시"에 "장원 급제"하여, 시험관은 물론 부모와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15세 때에는 이미 다른 사람에게서 더는 배울 것이 없을 정도였다. 벼슬길에 오른 때는 "문과"에 장원급제한 29세이다. 이미 12세에 "진사 초시"에 "장원급제"를 한 것을 시작으로 "생원과ㆍ진사과ㆍ대과ㆍ별시"까지 모두 9차례의 과거에 장원 급제해,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한명회"는 늘 낙방하다가, 39세에 "경복궁 직"을 겨우 받은 것과 비교하,면 "이이"는 타고난 천재인 것이다)
관직은 "숭정대부 병조판서"에 이르렀다. 제자들에게 "동방지성인(東方之聖人)"이라는 칭호를 받고, "기호학파"를 형성하여, 후세의 학계에 강력한 영향을 끼쳤다. 저작인 "동호문답(東湖問答)ㆍ성학집요(聖學輯要)ㆍ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ㆍ시무육조소(時務六條疏)"등은 모두 임금의 도리와 시무를 논한 명저로, 그의 정치에 대한 태도는 유학자의 이상인 "요순시대"를 실현하는 것이었다.
"성혼ㆍ송익필ㆍ김장생"등과 함께 "기호 지역"이 기반인 "서인(西人)의 종주"로 추앙된다. 13세 때, 어머니 "신사임당"이 죽자, 3년간 "여묘 살이"를 한 후, 아버지 "이원수(李元秀)"가 "계모 권씨"를 들인 뒤, 18세 때, 금강산에 들어가 승려가 되었다. 이 때문에 훗날 그가 죽은 후에까지도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려다가, 환속한 사람"이라고 "동인"과 "남인"이 공격하는 빌미가 되었다.
그러나 그가 죽은 뒤에도 "동인"과 "동인"의 분파인 "북인ㆍ남인"은 이이가 1년간의 입산 경력이 있음을 놓고, "불교와 관계했다"하여 온갖 트집을 잡아 비방을 하였다. "묘막에서 독서에 열중하다가, "불교 서적"을 읽고, "유교"와 색다른 학문에 흥미를 느껴, 3년 상이 끝난 1554년(명종9) 16살 때, "금강산 마가연(摩訶衍)"에 들어가, 자신의 아호이기도 한 "석담(石潭)"이라는 법명으로 "승려"가 되어 "불도"를 닦았다. 수행하는 중, "승려"들 간에 "생불이 출현했다"는 소문이 자자했다고 한다. 그러나 입산 1년 만에, "금강산 마가연(摩訶衍)"을 떠나 내려와, 환속한다.
이이는 "서경덕"의 "기 중심의 설"을 "성리학자"답지 않게 "도"에 치우쳤다며 공박했다. "이황"의 "사단칠정"인 "이기호발설"을 비판하여, "이"와 "기"는 한 몸체에서 나온다며, "기"는 능동성이 있지만, "이"는 없기 때문에 "사단" 뿐만 아니라 "칠정"도 "기"가 발동하고, "리"가 그것을 탐으로서 발생된다는 "기발이승일도설"을 주장했다.
이준경"이 죽기 직전, "붕당의 폐에 관한 유차"를 올리자. "죽음에 이르러 말이 악하다"고 공격하였으며 이후, "이준경"의 처벌까지 가기도 했다. 이는 "서경덕"과 "이황"의 "문하생ㆍ추종자"들의 분노를 자아냈고, "허엽ㆍ김효원ㆍ송응개ㆍ윤승훈ㆍ허봉ㆍ송응형"등은 이이를 줄기차게 비난하고, 공격하게 된다.
주로 "이황"과 "서경덕"의 문인이었던 "동인ㆍ남인ㆍ북인"은 그가 18세에 "불교"에 입문했다가 환속한 점과 그의 할아버지가 "윤원형"의 동료인 "이기"의 재종손이라는 점을 걸고넘어지며 그를 계속 중상, 인신비방 하였다. "성삼문"의 "백이ㆍ숙제" 비판 역시 그르다며, "백이ㆍ숙제도 옳고, 주 무왕 역시 옳다"는 "양시론" 역시, "대중을 현혹하고 혹세무민하려 한다"는 이유로 "동인ㆍ남인" 계열의 꾸준한 인신공격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후일 "당쟁"이 현실화하자, 스스로 크게 뉘우치고, "동인ㆍ서인" 사이의 "당쟁 조정"을 평생 정치 이념으로 삼았다.
이이는 당색을 초월해서 "인재"를 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에 의하면, "동인ㆍ서인"에 "군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소인도 있을 수 있다"며, "서인"에 군자가 있으면 소인도 있고, "동인"에도 소인배만 있는 게 아니라 군자도 있을 수 있다며, "당파"위주로 서로 자기 당파 사람만 천거하고 끌어주고 밀어주는 인사정책에 반대하며, "당색"을 떠난 채용을 주장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같은 "서인"들로부터도 "동인"에게 우호적인 것이 아니냐는 의심을 받았다.
그는 양반에게도 똑같이 "군역"을 부과하고, 병력을 증강할 것을 주청하였다. 군사비용 발생에 대한 대안으로 그는 불필요한 관직자의 수효를 줄이고, 실직에 있지 아니한 자에게는 품계 역시 회수할 것을 건의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양반들의 집단 반발에 부딪혀 공세의 대상이 되었다.
"당색"으로는 "서인"에 속했는데, 이 때문에 그는 "동인"과 "서인"의 당쟁을 조절하려고 노력하였음에도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동인"의 공격 대상이 되었다. 그는 "성혼ㆍ류성룡ㆍ정구ㆍ우성전ㆍ송익필ㆍ조헌"등의 지기들에게 당쟁을 조절하려다가, "동인"의 미움을 산일을 한탄하며 통곡하였다. "동인"의 집중 탄핵을 받아, 지친 이이는 모든 관직에서 물러나, 경장(更張)하고 싶어 하던 구국의 뜻을 풀지 못한 채, 병을 얻어 사퇴ㆍ와병하였고, 병석에 누운 동안에도 "동인"의 공격은 계속되었다.
그는 "경기도 파주군 주내면 율곡촌"에서 요양하던 중, 차도가 없음을 알고 "한성"으로 내려왔으며, "한성부 대사동(大寺洞)"자택에서 사망하였다. 그가 남긴 재산은 서재에 가득한 "책"들과 "부싯돌" 몇 개였다.
"공납(貢納)"의 폐단 시정책인 "대공수미법(代貢收米法)"실시를 주장하고, "병조판서"로서 "여진족 이탕개"의 침입을 격퇴한 후, "10만 양병설"을 주장해, "임진왜란을 예언했다"는 명성을 얻었다. "임진왜란"이 터지자, "선조"는 한탄하며, 피난길에 그의 이름을 불렀다고 한다. "붕당"을 조정하지 못한 "한"을 남긴 채 죽었으며, 사후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되었다.
그 뒤 그를 "문묘"에 제향하는 문제를 놓고, "인조반정" 이후 50년간 논쟁의 대상이 되다가, "숙종" 때 "경신환국"으로 "서인"들이 집권한 후, "문묘"에 종사되었다. "이항복"은 이이의 "신도비"를 썼다. 이이의 애제자인 "김장생"은 이이의 가장 큰 제자로 이이의 일대기인 "행장"을 지어, 이이의 업적을 찬양하였다.
"김장생"은 이이를 추모한 <율곡 행장>에서 "고려 말엽에 문충공 정몽주 선생이 처음으로 도학(道學)을 열어 명유들이 이어져 조선에 와서 번창한다. 그러나 학문이 높고 밝은 데에 이르고 재주가 경국제세의 역량을 감당할 만하고 의리로써 벼슬에 나아가고 물러났던 사람에는 조광조와 율곡 두 분이었다."평가하고, 율곡이야말로 만세토록 태평성대의 나라를 세우려 했으니, 그 공로가 원대하다 말하겠다며 극찬하였다.
3. "이이"와 "이황"의 만남
"백인걸"의 문인이기도 한 "이이"는 "이황"을 "선학"으로 모시고, 존경하기도 하였다. 또한 친구 "성혼"과의 인연으로 "대곡 성운ㆍ남명 조식"등도 찾아가 그들과도 "사물과 이기론, 주자와 육구연"등을 담론하기도 했다.
1558년(명종13) 20살의 "이이"는 당시 대학자인 55세의 "이황"을 찾아가서 만났다. (35살 차이) "이이"는 그곳에서 2일간 머물며, "이황"과 학문의 여러 가지 문제와 사상을 논하고, 시를 짓고 토론하였고, "이황"은 그의 재능에 크게 감탄하였다. 비록 견해를 일치시키지 못했지만 그 후 이들은 가끔 편지를 서로 주고받으며, 학문에 관한 질의응답을 나누곤 하였고, "이이"의 학식과 달변을 높이 산 "이황"은 자신의 문인은 아니지만 "후생가외"라 하기도 하였다.
그 뒤에도 여러 차례 서신을 통하여, "경공부(敬工夫)ㆍ격물(格物)ㆍ궁리(窮理)의 문제"를 서로 서신을 주고받으며, 교류하였다. "이이"가 질문을 하면, "이황"은 친절한 답변을 보냈고, "불교"에서 과감히 벗어나 "유교"로 되돌아온 용기를 높이 평가하며, 칭찬하는 글을 보내기도 했었다. 그해 겨울, "이이"는 "별시(別試)"에 "장원"하였다.
4. 10만 양병설
이이는 선조에게 "10만 양병설"을 주장하여, "동인"의 반감을 사기도 하였다. 그는 "일본의 전국시대는 종결될 것이며, 일본을 통일할 무사는 일본 내 세력 갈등 완화와 국내 관심사를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한 목적으로, 미구에 명나라나 조선을 침공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일본의 도발에 대한 대응으로 그는 "10만 명의 정병"을 양성하여, 일본의 침략에 대비할 것을 건의하였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견해는 "동인"에 의해 "왕"을 현혹하기 위한 발언으로 치부되었고, "서인"조차 그의 생각이 지나친 상상력과 "허언"라며 호응해주지 않았다.
이이가 "10만 양병설"을 주장하던 당시, 조선의 총 병력수는 장부상으로는 30만 명이 넘었으나, 실제 전투 가능한 병력 숫자는 1,000명 정도가 되었다고 한다. 1581년 "대제학" 재직 중, 오랫동안 저술하던 <경연일기>의 완성을 보았다.
"선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은 이이는 1582년 "이조판서"와 "형조판서"를 거쳐, "병조판서"에 임명되어 여진족의 반란을 진압하였고, "대제학"을 역임하고, "우찬성"에 올랐다. 이듬해 "당쟁"의 조정을 시도하였으나, 오히려 탄핵을 받아 일시 퇴직되었다가, 다시 "이조판서"가 되는 등 반대파의 탄핵에 시달리느라, 제대로 "경륜"와 "소신"을 펼칠 만한 기회는 부족하였다.
< 10만 양병설에 관한 의혹 > 이이의 "10만 양병설"에 관해 의혹을 제기하고 있는 학자도 있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10만 양병설"은 당시 조선의 "사회적ㆍ경제적" 능력으로 보았을 때, 절대적으로 불가능한 사안이었으며, 그러한 한계를 분명히 파악하고 있던 실무적 유학자인 이이로서는 오히려 "10만 양병설"을 주장하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고 한다.
실제로 이이가 올렸던 "상소문"과 각종 글을 모은 문집을 살펴보면, 당대 다른 중신들도 즐겨 쓰던 "양병"이란 글자는 나올지언정 "10만 양병"에 관련된 내용은 일체 나오지 않는다고 하며, 오히려 "군축을 해야 한다"는 상소문이 "10만 양병설" 대신 자리 잡고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10만 양병설"에 관련된 내용은 후대에 세워진 "이이를 기리는 비문"에 처음으로 등장한다고 하며 이는 이이를 숭배하던 후대 조선 유학자들이 일종의 "신성화"를 노려 임의로 추가하였다고 한다.
5. 인재 천거에 사심이 없었다.
사심 없이 사물을 판단하려는 그의 자세는 "선조"를 매료시켰고, "선조"는 일이 있을 때마다 그를 불러 자문하곤 했는데, 젊은 나이에 "왕의 자문역"을 맡게 된 것을 부담스러워하여 스스로 사양하였으나, 왕은 계속 그를 불러들였다. "사림"의 천거로 "친구 성혼"이 중망에 오르자, "선조"는 이이를 불러 "사림에서는 이 난세를 치유할 수 있는 인물로 우계를 천거하는데 경의 생각은 어떤가?"라고 그에게 성혼의 사람됨을 물었다.
이이와 성혼은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자"는 동심일체의 교우관계를 지닌 사이였다. 하지만 "선조"의 물음에 이이는 한마디로, "우계는 그러한 위인은 못 되고, 학문에 힘쓰는 착실한 선비입니다"라고 답변했다. 나라의 어려움을 건질 만한 인물이라고 "사림"에서까지 떠받드는 절친한 친구를, 착실한 "선비"에 불과하다고 한 이 답변 역시 일상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냉혹한 평가다.
"선조"가 이어서 "경과 성혼을 비교하면 어떤가?"라고 묻자, 이이는 "재주는 소신이 우계보다 좀 나으나, 수신과 학문의 힘씀에 있어서는 우계에 미치지 못합니다."라고 답변했다. 이이다운 정직한 답변이었다.
어느 날, "선조"가 "경은 짐을 어떻게 생각하는가?"라고 묻자, 이이는 "전하께서는 선한 의지를 가지고 계시니, 학문에 힘쓰고 노력하면, 현주(賢主)가 될 수 있습니다"고 답변했다. 이러한 답변을 통하여, "선조"에게 "현명한 임금이 되어 달라"는 말을 한 것이다. 이이는 자신의 생각을 굽히지 않고, 진실하게 대답했다.
"선조"가 이이에게 "어떠한 사람을 등용해야 하는가"를 묻자, 이이는 "전하에게 충성을 다짐하는 사람은 되도록 피하고, 자기 일에 충성을 다짐하는 사람을 가까이 하십시오. 전하에게 충성을 다짐하는 사람은 전하를 배신할 가능성이 있지만, 자기 일에 충성을 다짐하는 사람은 전하를 결코 배신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고 답변했다.
"선조"는 "성혼"과 더불어 당시 "정승 감"으로 물망에 오르고 있던 "사암 박순ㆍ퇴계 이황ㆍ스승 백인걸"에 대해 "인물평"을 물었다. "백인걸"에 대한 인물평을 요구받은 이이는 한마디로 "기고학황(氣高學荒)"이라고 답변했다. 쉽게 말해서 "기가 높고 글이 거칠다"는 것이다. "조광조"의 문하생 중 수제자요, 자신의 "스승"이자, 노상 자신이 가까이 모신 어버이 같은 인물에 대해 보통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냉혹한 평가였다. 그러나 이는 "동인"에 의해 이이의 인격을 걸고넘어지는 꼬투리로 작용하게 된다.
6. 붕당에 대한 생각
1570년(선조3) 관직을 사퇴하고, "황해남도 해주 야두촌(海州野頭村)"에 돌아가 학문의 터를 닦았다. 1571년, 조정의 부름을 받고, "청주목사"로 임명되어 내려간 그는 "서후향약"을 정하고, 백성들의 자치 생활을 권장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다. 1572년, 학문 연구를 위하여 신변을 핑계로 사직하고 "해주"로 낙향했다가, "파주의 율곡촌"으로 돌아와 학문에 힘썼다. 1572년, "이준경"이 병으로 임종하기 직전, "사림"들이 당을 나누어서 싸울 것을 예견하였다. 그리고 "당쟁"의 중심인물로 "이이"를 지목하였다.
화가 난 이이는 "이준경이 자신을 모함하는 것"이라며 반박하였다. 이이는 "붕당정치를 무조건 비판할 것이 아니며, 사람은 각자 사상이 다를 수 있다"고 반박했다. 이이에 의하면, "붕당은 국가정치를 문란하게 하는 무리가 아니라, 뜻이 맞는 이들끼리의 모임"이라고 반박했다.
그는 "소인이 무리를 이루듯, 뜻을 같이 하는 군자들끼리 집단을 이루는 것은 당연하다"고 보았다. 또한 "상대방 정당이라고 해서 전부 소인배들만 있는 것은 아니라"고 지적했다. "이준경"이 "당쟁"을 예견하는 글을 쓰자, 그는 "이준경"을 향해, 죽음에 이르러, "그 말이 사악하다"며 강도 높게 비난했다. 그러나 일부 "사림"인사들은 그의 "종조부 이기"가 "이준경"과 원수였던 것과, 관료생활 초반 그의 솔직함을 비판하고 예의 없는 인간으로 몰고 간 것에 대한 한풀이로 해석하였다. 뒤늦게 1575년 "을해당론"으로 "동인ㆍ서인" 분당이 확실해지자, 그때 당론을 인정하고 자신의 실책을 인정하였다.
1572년, "파주 율곡리"에 머무르며, 친구인 "성혼"과 "이기론ㆍ사단칠정론ㆍ인심도심설"등을 논하였다. 주로 "성혼"의 주장에, 이이가 반박 또는 보충설명을 하거나, "성혼"이 이이에게 질의하고, 이이가 회답하는 형식이었다. 이때 "성혼"은 "이황"의 "이기이원론"도 옳을 수 있다고 하여, 장기간 서신과 방문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한편 "윤근수ㆍ윤두수ㆍ정철ㆍ송익필"등이 이이와 친해졌고, 그는 자연스럽게 "서인"으로 기울게 된다.
7. 정쟁 조정 노력ㆍ실패
"동인"과 "서인"의 당쟁이 격화되자, 그는 "동인의 김효원","서인의 심의겸ㆍ정철"을 동시에 탄핵하여 양당의 강경파들을 일선에서 후퇴시킴으로써, 당쟁을 조절하려 하였다. 그러나 "동인"들은 그가 일찍이 "불교"에 귀의하여 승려가 된 것과, 그 승려가 되는 과정에서 "서모(庶母) 권씨"와 싸웠던 점을 집중 부각시켜 그를 공격하였다. 또한 당시 "사대부 가"에서는 "첩"을 거느리는 것이 관행이었는데, 그가 "첩"을 2명 거느린 점, 역시 "동인"의 인신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또한 "동인"들은 그의 "재종조부 이기"가 "장리(탐관오리)"의 사위라서 관직에 제한을 받아야 했으나, "이언적"의 구제를 받고 출사했는데도, "명종" 때 "을사사화"에 가담하였고, 말년에 권력을 농단하다가 삭탈관직 당한 것까지 그에게 연결시켜서 공격하였다.
이이는 "동인ㆍ서인"이 모두 학문을 하는 "사류(士類)"이며, 그 분열은 "시국관ㆍ환경ㆍ의견의 차이ㆍ개인의 사상ㆍ관점 차이"에서 연유한 것이기 때문에, 당초 "주자"가 처음 주장했던" 진붕ㆍ위붕이나 군자당ㆍ소인당"등으로 나누는 "군자ㆍ소인구별론"은 이제 와서 적용시킬 수 없다고 주장했다.
동시에 "양시양비론(兩是兩非論)"과 "보합조제론(保合調劑論)"을 제시하게 된다. 그는 "동인ㆍ서인" 갈등의 시발점인 "심의겸ㆍ김효원 간의 알력ㆍ시비"에 대해 "양시양비론"을 적용하여 비생산적인 논쟁을 중단하고, 같이 조정에 출사하여, 국사와 민생문제를 논할 것을 호소하였다.
그는 "당쟁의 조절"과 "정쟁 중단"을 촉구하였지만, "동인ㆍ서인"붕당은 기존의 "군자의 붕당"과 "소인의 붕당"이 존재한다는 견해를 고수했고, "서인"을 "군자의 붕당", "동인"은 "소인의 붕당"으로 생각하였다. 따라서 그는 당쟁을 조절하는데 노력하였지만, 비교적 "서인"의 입장에 서서 당쟁을 조절하려 하였고, 이는 "동인"에게 늘 불평불만과 적개심의 대상이 되었다.
그의 당쟁 조절을 중립적이지 못하다고 판단한 "정여립"은 "서인"에서 탈당하여, "동인"으로 건너간다. 그는 어느 "붕당"에나 "군자ㆍ소인"이 있음을 거듭 반복하였다. 또한 자신을 비판한 "동인"계 인사에 대해서도 석방 사면을 탄원하기도 했다. 그러나 1583년 자신을 소인으로 공격하는 "송응개"등 "삼사의 언관"에 대해서는 사면 요구를 거부하며, 엄정한 시비분별을 요구하기도 했다.
8. 개혁 방안
① 변법 경장론
이이는 "조선이 건국하고 2백년이 경과하였으므로 다시 사회의 기강을 바로 세워, 관민에게 다시 개국 초기의 자세로 돌아가야 한다"며, "변법 경장론"을 주장하였다. 이는 이이가 당시 "개혁적인 성격"을 지녔음을 말해준다.
이이는 "조세 제도"에 대한 철저한 관리 및 "대장 기록"의 중요성도 설파하였다. "탐관오리"가 공납이나 진상물을 빙자하여, 갈취한 물품을 "사적인 축재"에 쓴다며" 거듭 주장했다. 이이가 말하는 "변법경장(變法更張)"은 나라의 기강이 무너져 제대로 돌아가지 않음을 지적한 뒤, 주장한 것으로서 다음 내용을 가지고 있다.
• 문벌이나 출신보다는 능력 있는 사람을 기용하자 • 신분을 가리지 말고 평민을 포함하여 폭넓게 인재를 양성하자 • 중앙에서는 외척의 권력 집중화를 막고, 지방에서는 수령의 자질을 높이며 이서(吏胥)들에게도 녹봉을 주어 민폐를 막아야 한다 • 붕당을 막기 위해서는 사림의 공론을 존중하고 사기를 높여야 한다 • 민생을 괴롭히는 방납을 시정해야 한다 • 왕실 사유재산을 억제하고, 왕실의 경비를 줄여야 한다 • 군포에 대한 족징과 인징을 금지해야 한다 • 공노비의 선상(選上)을 개선하여 부담을 줄여야 한 • "사창제"를 실시하여 빈민을 구제해야 한다.
② "군제"와 "공직" 개혁
1583년(선조16) "병조판서"에 임명되고, "병조판서"로 시작한 그해 음력2월에는 국방력 강화를 위해 <시무육조>를 계진하였다.
• 첫째, 어진 이를 등용하시오 • 둘째, 군대와 백성을 제대로 키우시오 • 셋째, 재용(財用)을 넉넉하게 마련하시오 • 넷째, 국경을 견고하게 지키시오 • 다섯째, 평소 전쟁에 나갈 군마(軍馬)를 충분하게 확보하고, 길러야 합니다 • 여섯째, 교화(敎化)를 밝히라는 것이었다.
같은 해 음력 4월, 다시 "봉사(封事)"를 "선조"에게 올려, 그동안 주장했던 "폐정"에 대한 개혁을 실시할 것을 다시 반복해서 요구하였다. "봉사"에는 공안(貢案)의 개혁, 군적을 고치고, 지방의 군현을 합병하여 불필요한 공직자 수를 줄이고, 관찰사(도지사)의 임기를 보장하여, 관찰사로 하여금 지방을 제대로 다스릴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하는 요구였다.
"서얼 제도"를 폐지하며, 신분에 관계없이 천민이나 노비 중에서도 능력 있는 사람은 평등하게 공직에 발탁하여 나랏일을 맡겨야 한다는 것 등이었다. 그리고 "찬집청(纂輯廳)"이라는 관청을 신설하여, 국가에서 각종 서적들의 편찬 사업을 주관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경제사(經濟司)"를 신설하여, 국가의 경제 문제의 해결을 담당하는 전담 부서로 활용해야 한다고 방안을 내놓았다.
③ 서얼 허통론
1583년(선조16) 변방에서 "이탕개의 난"이 일어나자, 당시 "병조판서 이이"는 국난을 극복하기 위한 제안으로, 전쟁에서 공훈을 세우거나 "군량미"를 내면, "서얼"에게도 벼슬길을 열어주자는 주장을 하였다. 그러나 "태종"의 유언을 빌미삼아, "서얼차대"에 집착했던 양반들의 반대에 부딪혀 좌절되었다.
그러나 이이의 "납속허통" 주장은 "서얼허통"의 물꼬가 됐다. 바로 이 때 "이언적"의 "서 손자"이자, "이전인"의 아들인 "이준"도 "납속허통"을 받아, 자신과 후손들의 과거응시 길을 열었다. "이언적"의 "서자 이전인"은 뛰어난 학행과 효심이 남달랐으나, "서자"라는 이유로 이언적의 대를 잇지 못했다.
"서얼 허교" 주장 역시, 유학자들에 의해, "태종"의 유지를 거스르는 행위라는 비난을 계속하였고, "동인"에서는 그가 사사로운 원한으로 "불교"에 입문했던 점을 계속 들먹이며, 그가 사회를 어지럽힐 생각으로 "서얼"의 "허통"을 주장한다며, 공세를 계속하였다. 그의 "서얼 허통"은 "신분제"를 문란하게 만들 우려가 있다는 "동인"들의 공격을 받았고, 심지어는 같은 당인 "서인"들로부터도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그런데 유일하게 "동인"인 "류성룡ㆍ정구"가 그의 "서얼 허통" 주장에 "인재를 가려 쓰는 데는 차별이 있어서는 안 된다."며 당색을 초월하여, 동의하였다.
9. 부정적 평가
"정조"처럼 좋은 아버지를 두지 못했기에, 이이는 착하지만 세상일에 뜻이 없는 아버지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그 결과 지나치게 "왕"에게 집착했다. "이준경"이 "당쟁의 화"를 예언했을 때, 그는 뒤에 후회하고 신념을 바꾸기는 했으나, "이준경"을 강한 어조로 비난하여, 그에 대한 처벌 여론을 형성하게끔 유도하기도 했다. "유성룡"등이 "이준경"을 옹호했는데, 이는 후일 "이인좌의 난" 당시 "경상북도"지역이 집중적으로 호응하는 원인을 제공한다.
"당쟁"의 조절을 위한 노력을 기울였으나, "서인"의 입장에서 조절하려 노력한 한계점이 있다. "이중환(택리지의 저자)"은 그가 "동인"인사들이 유배되도록 사주했다며, 비판하였다. 그에 의하면 "이이는 유학자로서 이름이 높았고, 또 서인으로 자처하지 않았으나, 3차례에 걸쳐 귀양 보낸 일에 손을 쓴 것은 경솔했다."며, "이 일로 조정이 혼란에 빠져 수습할 수 없게 되었으니, 그 책임을 면하기 어렵다."고 비판했다.
지나치게 "왕"에게 의존적이었다는 비판도 있다. 그는 "선조"를 착한 개혁군주로 만들어, 조선을 재건하려는 정치노선을 신봉했다. 그러나 심리적으로 건강하지 않은 인물에게 "성인(聖人)"이 되라고 요구하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이다. 물론 의지박약으로 큰 뜻을 세우지 못하는 "왕"에게 큰 뜻을 품으라고 설득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10. 긍정적 평가
이이가 "대학자"이면서 뛰어난 "정치가"로 평가 받을 수 있었던 점에는 몇 가지 요인이 있다.
① "신사임당"을 어머니로 두었다는 점이다.
이이는 어렸을 때, "문학ㆍ예술"에 조예가 깊은 "신사임당"으로부터 수학했다. 조선시대에는 여성은 "한문"서적을 읽지 않는 것이 관례였다. 어머니에게서 글을 배우고, 학문을 익히는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만큼 글을 읽고 쓰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고, 또 그것이 남들과는 독자적인 길을 갈 수 있는 밑바탕이 되었을 것이라 짐작된다.
② "퇴계 이황"이라는 "선배"가 있었다는 점이다.
1558년(명종13) 20살의 이이는 "도산서원"으로 직접 "이황"을 방문했고, 뒤로도 편지를 주고받으며, 학문과 개인적 신상에 관해 의견을 나눴다.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이황"을 극구 만류했고, "이황"이 죽고 나서는 "만시(輓詩)"를 지어 애도했다. "이황"과 함께 조선 "성리학"의 두 줄기를 형성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후대 학자들이 "학파"와 "붕당"의 형성에 따라, "이황"과 "이이" 사이에 건널 수 없는 강이 흐르는 것처럼 만들고, 그에 따라 학문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적대적인 관계처럼 되어버렸지만, 당대에는 서로를 인정한 좋은 선후배였다. 이이는 그런 선배와의 편지 교류 등을 통해 학문적 연마를 할 수 있었고, 선배가 이루어놓은 성과를 디딤돌로 해서, 자신의 학문적 세계를 구축할 수 있었다.
③ "선조"시대에 활동했다는 점이다.
이이가 관직에 진출하자마자, "문정왕후"가 사망하고, 외척인 "윤원형"이 탄핵을 받았다. "사화"로 얼룩졌던 시대는 지나가고, "사림"이 중앙의 무대에 오르는 때가 된 것이다. 개혁 의지가 강하고, 학문적 역량이 있었던 이이가 "사림파"가 정계의 중심이 된 때에 관직에 들어갔다는 것은 행운이었다. 이이보다 35살 위였던 "이황"의 경우, "사림"이 위축되었던 때에 관계에 있었으므로, 조정에 염증을 느끼고 고향으로 물러나는 쪽으로 생각을 굳혔던 것과는 대비된다.
물론 "선조"의 한계, "사림"의 분열 등 이후 전개되는 상황이 "이이"를 괴롭혔다는 점을 간과할 순 없다. "십만 양병설"등의 건의에 대해 "선조"가 미온적으로 받아들였고, 또 "붕당"에 대해 중립적인 입장을 견지하여 조율하려고 했으나, "동인"과 "서인" 양쪽으로부터 공격을 받는 결과를 낳아 정치적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그렇더라도 이이는 항상 "중앙 정계"의 한 중심에 서 있었다.
④ 학문적 지식이 있었던 친구들과 교류했다는 점이다.
평생의 친구인 "성혼ㆍ송익필ㆍ정철" 등 당대의 인사들이 주위에 있어, 학문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개인적으로 부족한 것을 채워주고 격려해 주어, 자신의 역량을 펼칠 수 있었다. 이이는 몸이 좋지 않거나 뜻이 좌절될 때면, 선대의 고향인 "파주"로 물러나 학문과 교육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그 결과 학문과 교육 분야에서도 많은 성과를 거둘 수 있었고, 제자도 많이 양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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