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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천재 ③ 충무공 이순신 (1545~1598)ㆍ임진왜란

by 당대 제일 2022. 10.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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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공 이순신 (李舜臣ㆍ1545~1598ㆍ53세)"은 "이순신"은 신분ㆍ시대를 막론하고, 존경ㆍ숭모의 대상이 되었다. 존경하는 인물 여론조사에서 항상 "세종대왕"과 함께, 1ㆍ2위에 선정된다. 본인 스스로에게 엄격하고, 청렴한 생활을 하고, 깊은 효심을 지닌 "선비의 모범"으로 평가된다.

 

1. 이순신 (李舜臣ㆍ1545~ 1598.12.16ㆍ향년 53세)

조선 중기의 무신문반 가문 출신: 180cm 후반~190cm 초반ㆍ1576년(선조9ㆍ31세)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관직이 "동구비보 권관ㆍ훈련원 봉사ㆍ발포진 수군만호ㆍ조산보 만호ㆍ전라좌도 수군절도사"를 거쳐, "정헌대부 삼도수군통제사"에 이르렀다.

"임진왜란" , "장수"로서 "조선의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부하들을 통솔하는 지도력뛰어난 지략탁월한 전략능수능란한 전술""일본 수군"과의 해전에서 연전연승하여, 나라를 구한 "성웅(聖雄)"으로 추앙받고 있으며, "노량 해전"에서 전사하였다.

아버지 "이정 (李貞)" 4명의 아들에게 고대 중국의 성인으로 알려진 "복희요 임금순 임금우 임금" 이름자를 붙여 주었고, 3째 아들에게 "순신(舜臣)"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현충사" 경내에 있는 "고택" 조부 "이백록"으로부터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모친 "변씨의 문기(文記, 땅이나 집의 소유권을 증명하는 문서)"에는 형인 "요신(堯臣)" 함께, 모친으로부터 "외거노비 6~8"을 증여 받았으며, "충청도 은진(, 충남논산시)" 지방에 있는 가옥토지도 물려받았다는 기록이 있다선조 22, 아내인 "상주 방씨" 4형제에게 준 "분재기" 기록도 남아있다.

출 생 : 조선 한성부 건천동 (, 서울 중구 인현동 131-2명보극장 자리)ㆍ04.28일은 "충무공 탄신일"

사 망 : 조선 경상우도 노량해협 (묘소- 충청남도 아산시 현충사 경내)

서 훈 : 충무공(忠武公)선무1등 공신덕풍부원군() 좌의정가증(加贈) 영의정ㆍ최종 계급 정헌대부(2)삼도수군통제사(2)명 수군도독(1)

: 기계(器溪)덕암(德巖)

저 서 : 난중일기(亂中日記)충무공이순신전서(忠武公李舜臣全書)임진장초일기시조한시 등

경 력 1591.03~1593.08 -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전임- 원균ㆍ후임- 원균) 1593.08~1597.04 - 삼도수군통제사 (후임- 원균)1597.09~1598.12 - 삼도수군통제사 겸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전임- 원균)

: 상주 방씨 (방진(方震보성군수)의 딸온양 방씨로 변경) 슬기롭기로 유명하였고, 친정집에 들어온 도둑들을 지혜를 이용해 물리치기도 했다 "이순신"의 무술 연습을 위해, 자신의 패물로 말을 사게 할 만큼 내조도 잘했다.

1 : 해주 오씨 (오수억의 서녀)- 22녀ㆍ2 : 부안 댁

자 녀 : 31(이회(1567)이울(또는 이예1571)이면(1577))

조부- 이백록(楓巖公) 1522(중종17)"생원 2"에 합격참봉을 거쳐, 평시서봉사 역임ㆍ"조광조""기묘사화" 죽고, 주위 인물들이 참형을 당하자, 벼슬을 내놓고, "조광조" 묘소(용인 심곡리)에서 멀지 않은 "고기리"에서 은거를 하다가 사망

 - 이정 (李貞, 덕연부원군德淵府院君)- 초계 변씨(변수림의 딸)4형제 중 3째 아들ㆍ아버지로 인해, 벼슬을 단념한 채, 43세 쯤 외가이자, 처가에 가까운 "충청도 아산 음봉"으로 이사하였다. 훗날 "상주 방씨"와 혼인한 "이순신"이 정착한 곳이기도 한, "현충사"에서 멀지 않은 곳이다.

2. 평 가

"충무공은 거의 완전무결한 인물이었다. 그러기에 성자라 하고, 영웅이라 일컫는 것이다."(천관우) 등 이순신에 대한 평가는 높았다"선조""졸서후사제문(卒逝後賜祭文)"에서도 똑같이 그 잘못을 사죄하는 듯한 뉘앙스를 남기며, "생 한 세상에 한번 죽음 못 면하네. 죽을 데서 죽은 이로 그대 같은 이 드물도다."라고 추켜세웠다.

"징비록"에서 "류성룡""이순신은 백 번 싸운 장군으로서 한 손으로 친히 무너지는 하늘을 붙든 사람이었다. 그리고 이순신은 재질을 가지고도 운수가 없어, 백 가지 재능을 한 가지도 풀어 보지 못한 사람이었다."고 평하였다"오윤겸 제문"에서 이순신의 죽음을 두고, "황천에서 다시 일으켜올 수 없음을 생각하고, 백 명을 대신 바치고도 몰려올 수 없음을 안타까워한다."고 평하였다.

이순신이 전사한 "노량 바닷가"에서 멀지 않은 "관음포""이충무공전몰유허(李忠武公戰歿遺墟)"에서 "홍석주""이순신을 중국의 제갈량에 빗대어 칭송하고, 제갈량이 병사한 뒤에는 촉한이 위태롭게 된 것과는 달리, 이순신은 오히려 그가 남긴 공적 덕분에 지금(홍석주가 살아 있었던 시대)에 이르기까지 사직(社稷)이 남아 있을 수 있다", 이순신의 공적을 치켜세우고 있다.

진린(임진왜란 참전, 명나라 장수): 1598"선조"에게 올린 글에서 : 이순신은 천지를 주무르는 경천위지(經天緯地)의 재주와 나라를 바로 잡은 보천욕일(補天浴日) 공로가 있는 사람이다. (有經天緯地之才補天浴日之功)

G.A.발라드 (George Alexander Ballard영국 해전사 전문가해군중장 : 그의 이름은 서구 역사가들에게는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그의 공적으로 보아서 위대한 해상지휘관들 중에서도 능히 맨 앞줄을 차지할 만한 이순신 제독을 낳게 한 것은 신의 섭리였다 이순신 제독은 광범위하고 정확한 전략판단과 해군전술가로서의 특출한 기술을 갖고 있었으며, 탁월한 지휘통솔력과 전쟁의 기본정신인 그칠 줄 모르는 공격정신을 아울러 가지고 있었다.

그가 지휘한 모든 전투에 있어 그는 언제나 승리를 끝까지 추구하였으며, 그 반면에 그 용감한 공격이 결코 맹목적인 모험은 아니었다는 점은, 넬슨(Horatio Nelson) 제독이 기회가 있는 대로 적을 공격하는 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다가도 성공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세심한 주의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유사하다 이순신 제독이 넬슨 제독보다 나은 점을 가졌으니, 그것은 기계발명에 대한 비상한 재능을 갖고 있었다는 점이다.

도고 헤이하치로 (東郷平八郎ㆍ일본 해군의 영웅) : 1905, "쓰시마 해전 승전" , 축하하는 축사를 듣고 나서, "나를 넬슨에 비하는 것은 가하나, "이순신"에게 비하는 것은 감당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는  "러일전쟁" 출정 전, 전쟁승리를 기원하는 의미로 "이순신"에게 제사를 치른 일화가 유명하다.

와키사카 야스하루(脇坂安治) 회고록에서 : 나는 이순신이라는 조선의 장수를 몰랐다. 단지 해전에서 몇 번 이긴, 그저 그런 다른 조선 장수 정도였을 거라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내가 겪은 그 한 번의 이순신, 그는 여느 조선의 장수와는 달랐다 나는 그 두려움에 떨려, 음식을 며칠 몇 날을 먹을 수가 없었으며, 앞으로의 전쟁에 임해야하는 장수로서, 나의 직무를 다할 수 있을런지 의문이 간다.

충무공

3. 충무공 동상 (1968.04.27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제막식)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건립비 983만 원 전액을 헌납했다. 동상은 "최고 권력자 박정희"가 헌납한 것이다. 좌대를 포함해 전체 높이가 16.8m화강석 좌대는 10.5m충무공상 자체는 6.3m동상은 구리로 주조했다좌대 전면에는 거북선 모형(L=2.79m)을 구리로 만들었다. 제작은 조각가 "김세중(1928~1986서울대 미대 교수김세중미술관(서울 용산구 효창동))"이 맡았다. 그는 "김남조(1927~)" 시인의 남편이다.

충무공 동상을 보면, "이순신 장군"이 갑옷을 입고, 오른쪽 발을 앞으로 살짝 내민 채, 오른손에 장검(長劍)을 쥐고 있다. 턱을 바짝 당기고 눈을 부릅뜬 채 아래쪽을 내려다보고 있다. 또한 배를 앞으로 내밀어 당당함을 과시하고 있다. 그런데 동상이 모습을 드러내자 고증을 잘못했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칼을 오른손에 잡고 있는 점 : 칼을 오른손으로 잡고 있는 것은 전투에 나선 지휘관이 아니라 패장(敗將) 또는 항장(降將)의 모습이라고 주장한다. 칼을 왼쪽에 차고 있어야 오른손으로 바로 뽑아 전투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갑옷자락이 발끝까지 내려온 점 : 갑옷이 발끝까지 내려올 만큼 길면 전투하기에 불편하다는 내용이다.

 동상의 칼 모양이 임진왜란 당시 충무공이 사용한 장검과 다른 점 : 임진왜란 당시 충무공이 사용한 장검(보물 326)의 실물이 남아 있어 문제가 됐다. 당시 장검은 칼날이 약간 휘어지고 길이가 2m에 달한다. 반면 동상의 칼은 직선인데다 길이도 1.3m에 불과하다.

 좌대 옆의 북(戰鼓)이 누워 있는 점 : 좌대 옆의 북 모양을 문제 삼는 이들은 전투에서는 북을 세워놓고 치는 게, 일반적이라고 말한다. 동상은 북을 뉘어놓아 전쟁 분위기를 살리지 못했다는 것이다.

 충무공이 고개를 살짝 숙이고 아래쪽을 내려다보고 있는 점 : 작업실의 천장이 낮아 이순신 장군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모습으로 만들게 됐다는 미확인 이야기까지 떠돌았다.

그러나 "김세중"은 전투를 승리로 이끈 뒤, 휘하의 병사들을 독려하는 "이순신 장군"을 동상으로 표현했다. 승전 분위기를 부각하고자, 칼을 오른손에 쥔 모습으로, 칼을 이순신 장군 키보다 다소 작게 표현한 것이다. 그래야 승장(勝將)의 위엄이 더 살아난다고 조각가는 판단했다.

동상의 신장(키)가 문제가 되었었다. "이순신" "180cm 후반이 넘었다"는 것이 공식기록이며, 사용 도구와 여러 문헌을 조합 했을 때, "190cm가 넘었다"는 것이 현재의 정설이다. "이순신 동상의 키"를 줄인 이유는, "박정희가 자신의 작은 키와 비교하여, 자신이 이순신과 동일시하기 위함이었다."는 설도 있었다.

4. 인 물

"용모"에 대해서는 "이순신 생전"에 그려진 초상화가 없고, 그의 얼굴을 묘사한 기록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이순신"과 한 동네에서 살았던 벗이기도 한 "류성룡""징비록"에서 어린 시절의 "이순신"에 대해, 다른 아이들과 모여 놀 때면, 나무를 깎아 활과 화살을 만들어, 동리에서 전쟁놀이를 하곤 했으며, 그의 성격을 거슬러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의 눈을 쏘려고 하였으므로, 어른들도 그를 꺼려 감히 군문(軍門) 앞을 지나려고 하지 않았다고 적고 있다.

"100원 주화"에 새겨진 "이순신"의 복식이나 초상화 중, "갑옷전립"이 아닌 "관복 차림""이순신 초상화""영의정"의 예우를 갖춰 그려졌고, 실제로 그는 살아생전 그 복장을 입은 적은 없다.

5. 결 혼

1565(명종20), 20세의 나이에 "방씨"에게 청혼하고, 결혼하였다당시 "병조판서"였던 "이준경(1499~1572)"중매"를 섰다"이순신""한성"을 떠나, "외가처가(온양 방씨)"가 있는 "충청도 아산"으로 이주했다조선 중기까지도 "남귀녀가혼(男歸女家婚)"의 영향으로 남자가 결혼한 뒤, "처가"에서 상당 기간 거주하는 풍습은 "부인""처가"의 위상을 높였다.

"이순신"은 장인 "방진(方震보성군수)"의 격려경제적 후원으로, "무과 시험"을 준비하게 되며, "방진"으로부터 활쏘기말 타기 등을 배우면서, "병학"을 익혀, 11년만인 1576.02월(31살)에 치러진 "무과 시험"에서 "병과"로 급제했다.

"임진왜란" , "이순신"은 아들들을 통해, "충청도 아산 본가"에 있던 "방씨"가 병에 걸려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기는 했지만 직접 다녀오지는 못했다그러나 잠을 설치며, 걱정했을 뿐만 아니라, 점까지 치며 "방씨 부인"을 염려하는 내용이 일기에 적혀 있다.

6. 이순신 장군 해전 : 45405무승부 >

옥포 해전(1592.06.16): 이순신이 첫 승전을 알리게 된 해전

사천 해전(1592.07.08): "거북선"이 출전한 1번째 전투"왼쪽 어깨 위"에 관통상

한산도대첩(1592.08.14): 임진왜란의 3대 대첩 중 하나"학익진"(육전의 포위섬멸 전술) 처음 사용

명량 해전(1597.10.25): 진도 울돌목에서 13척으로 왜군 "333" "131" 격파

노량 해전(1598.11.19): 지금은 싸움이 급하다.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

전투1
전투2

7. 무과 급제

1545, "한성부 건천동"에서 "이정(李貞)""초계 변씨"3째 아들로 태어났다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건천동"에서 보냈고, 외가인 "아산"에서 소년기를 보냈다. 1565(20), 그는 "방 씨"와 혼인하고, "보성군수"를 지낸 장인 "방진(方震)"의 후원으로 "병학"을 배우면서 "무과(武科)"를 준비하였다.

1572(선조527), "훈련원 별과(別科)"에 응시했으나, 시험을 보던 중, 낙마하여 왼쪽 정강이가 부러지는 바람에, 버드나무 가지로 부목을 대고, 시험을 완수하였지만, 결국 낙방하였다.4년 뒤인 1576(선조931), "식년시(式年試) 무과""병과"로 급제하여, "권지훈련원봉사(權知訓練院奉事훈련원 봉사실습생으로, 정식 직책이 아니다)로 처음 관직에 나섰다.

"조선시대 무과 합격자" 분석에 의하면, 당시 그의 나이는 현대인의 상식과 달리 늦은 나이에 과거에 급제한 것이 아니다1579, 10개월간 "해미"에서 "훈련원 봉사"로 근무하였다1580.07(35), "전라도 발포(, 전남 고흥군 도화면 발포리)""수군만호(水軍萬戶)"로 전근되었다그 후 북방 국경지대인 "함경도"로 가서 "여진족" 방어를 맡았으며, 1586(선조19), "사복시 주부" 되었고, 이어 "조산만호(造山萬戶) 겸 녹도 둔전사의(鹿島 屯田事宜)"가 되었다.

8. 무관생활, "녹둔도" 전투 1번째 "백의종군(白衣從軍)"

1587(선조20), "조산만호 이순신"에게 "녹둔도의 둔전"을 관리하도록 하였다. 풍년이 든 "녹둔도"에서 가을 추수를 하는 사이에, "추도"에 살고 있던 "여진족"이 침입하였고, "경흥부사 이경록"과 함께 군대를 인솔하고 가, "녹둔도 전투"가 벌어졌다"녹둔도 전투"에서 조선군 11명이 죽고, 160여 명이 잡혀갔으며, 15필의 말이 약탈당했다당시 "조산만호 이순신""북방 여진족"의 약탈침략을 예상하고, 수비를 강화하기 위하여, 수차례 "북병사 이일"에게 추가 병력을 요청하였으나, 모두 거절당하였다.

패전으로 인해, 책임을 지게 된 "북병사 이일"은 이순신에게 그 책임을 덮어씌우고, 이순신은 죄를 받아 수금되었고, "백의종군(白衣從軍)"하게 되었다이후 이순신은 "북병사 휘하"에서 종군하며, "여진족 장수 우을기내(于乙其乃)"를 꾀어내어, 잡은 공으로 사면을 받아, 복직되었다그 후, "전라도감사 이광(李珖)"에 의해, "군관"으로 발탁되어, "전라도 조방장(助防將)선전관(宣傳官)" 등이 되었다.

1589.1(선조22), "비변사(備邊司)"가 무신들을 다시 "불차채용(순서를 따지지 않고 채용)"하게 되자, "이산해정언신"의 추천을 받았다7, "선조"가 다시 "비변사""이경록과 이순신 등도 채용하려 하니, 아울러 참작해서 의계하라." 전교를 내렸다.

1589.12, "류성룡"이 천거하여 "이순신""정읍 현감"이 되었는데, 관직에 오른 지 14년 만이었다고을을 다스리는 데 있어,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로부터 칭찬이 자자하였다1590.08, "조정"에서는 "3"의 직책인 "고사리진만포진의 첨사"로 거듭 삼으려 했으나, "지나치게 진급이 빠르다"는 이유로 논핵되어, 개정되었다.

1591.02, "선조""이천이억기양응지이순신""남쪽 요해지"에 임명하여, 공을 세우게 하라는 전교를 내렸다"선조"는 신하들의 반발논핵을 피하기 위해, 벼슬의 각 단계마다 임명제수하여, 승진시키는 방법을 써서, 1591.02, 이순신을 "정읍 현감"에서 "진도 군수"로 승진시켰고, 그가 부임지에 부임하기도 전에 "가리포 첨절제사(加里浦 僉節制使)"로 전임시켰다.

이어 "선조"는 이순신이 "가리포"에 부임하기도 전에 다시 "전라 좌수사"에 전임하게 하였다또한, "선조"는 이순신과 같이 "백의종군"을 하였던 "이경록""전라도"의 요지인 "나주 목사"에 제수하였다계속되는 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선조"는 이순신을 "수사"로 삼으려는 심지를 굳혔다"이경록의 발탁은 천천히 생각하여, 결정하겠다."고 하면서도, "이순신의 수사 발탁은 개정은 할 수 없다"고 하며, 밀어붙였다.

9.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1591(47), 이순신은 "3품 당상""절충장군(折衝將軍)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에 임명되었다이후에도 "부제학 김성일" 많은 신하가 "경험이 모자라다는 것"을 이유로 들어, "선조"의 결정을 반대하였으나, "선조"는 이순신을 신임하였다한편 이순신은 부임지에 부임하자마자, 전쟁에 대비하고자, 휘하에 있는 각 ""의 실태를 파악하였으며, 무기군량미를 확충하고, "거북선"을 개발건조하는 등 군비를 강화하였다.

1592(임진왜란 발발 직전), 이순신은 "왜는 섬이니, 왜군의 수군이 강할 것"이라고 예단하고, "수군을 육지로 올려 보내, 수비를 강화하라"는 조정의 명에 대하여, 그는 "수륙의 전투와 수비 중 어느 하나도 없애서는 아니 되옵니다."라고 주장하였다그 결과,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전, 이순신의 감독 아래에 있던 "전라좌수영"20여 척(최소 26~ 최대 29)"판옥선"을 보유할 수 있었다.

10. 임진왜란 : 1592.05.23~15941597.08.27~1598.12.16

일 시 : 1592.05.23 (04.13)~1594   •  1(임진왜란): 1592.05.23~1594 (2)화의 (1594~1597)    2(정유재란): 1597.08.27~1598.12.16 (2)

이 유 : "도요토미 히데요시"타국의 "다이묘"들이 가지고 있던 막강한 군사력을 외부로 방출시킴으로써, 국내 안정과 권력 공고화를 도모하고, 신흥 상업 세력을 억제하려고, "()" 침략하게 되었다는 견해가 있다.

결 과 : 휴전회담 진행(3년간)화의 결렬(1597)"도요토미"는 재침의 명령을 내림"정유재란" 발발

3대첩(三大捷): 한산도대첩(이순신)행주산성(권율, 의승장 처영)진주성(진주목사 김시민 장군)

1592.05.23(04.13) 오후 5시경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끌던 선봉군 "왜군 함대 700병력 약 16만 명""부산포"를 침략하여, 임진왜란이 발발하였다이순신의 "전라좌수영""왜군의 침략"이 알려진 때는 "원균의 파발"이 도착한 05.26(04.16) 10시였으며, 이순신은 그 즉시 "조정"에 장계를 올렸고, 아울러 "경상전라충청도"에도 "왜의 침략"을 알리는 파발을 보냈다그 뒤 이순신은 휘하의 병력 700여 명을 비상소집하여, 방비를 갖추도록 하였다.

이 과정에서 이순신은 도주를 시도한 "군졸 황옥현(黄玉玄)"을 참수했다전열을 정비한 "전라 좌수영" 소속 함대는 06.08일까지 수영 앞바다에 총집결하도록 령이 내려진 상태였다그러나 "왜군의 함선"은 이미 "전라좌도 앞바다"에 도달하고 있었고, 다음날인 06.08일에 이순신은 "전라우도 수군이 도착하면, 전투를 벌이겠다."는 장계를 조정에 올렸다.

11. 옥포 해전 : 첫 승전을 올린 해전

06.16일 정오, "옥포 항"에 정박하여 "옥포"에 침략했던 왜군을 공격하여, 모두 26척을 침몰시켰으며, 잡혀있던 포로들을 구해냈다. 오후에는 "웅천현의 합포 앞바다"에서 큰 배 1척을 만나, 이 또한 격파하였다.전투는 다음날에도 계속되었으며, "적진포"에서 "왜선 13"을 침몰시켰으나, 전세가 불리하여 육지로 도망간 적들을 쫓지는 못하였다이때 "조정"은 이미 "한양"에서 철수하여, "평안도"로 후퇴하고 있었다06.27일에는 "도원수 김명원""임진강 방어"에 실패하여, "조선 반도"의 대부분은 "왜군" 의하여 유린되고 있었다.

12. 사천 해전 : "거북선"이 출전한 1번째 전투"왼쪽 어깨 위"에 관통상을 당함

"전라우수영군"의 합류가 늦어지자, 07.08일에 이순신은 뱃머리를 돌려, "노량"으로 향하였다그곳에서 "원균""경상우수영군"을 만났다이날 "사천 선창"에 있던 "왜군"을 공격하여, 적선 30여 척을 쳐부수었는데, 이것이 바로 "사천 해전"이다이 전투에서 이순신은 "왼쪽 어깨 위에 관통상"을 입었다이 해전은 2번째 출동하여 벌어진 1번째 전투였고, 또한 "거북선"이 출전한 1번째 전투다.

이순신 함대는 07.10일에도 전투를 벌여 승리하였는데, "왜군"이 보유하던 화포에 비하여, 성능이 우수한 "지자총통" 등의 화력이 승리의 원인이었다계속하여 적을 추격하여 "개도"로 협공하였으며, 07.12일에는 "전라우수사"와 합류하는 데 성공하였다07.13일에는 "왜군" 함대를 만나, "큰 배 1중간 배 12작은 배 20"을 공격하였다.

13. 한산도 대첩 : 임진왜란 3대 대첩 중 하나"학익진(육전의 포위섬멸 전술) 처음 사용

1592.08.14(선조25), "한산도 앞바다"에서 이순신 휘하의 조선 수군이 ""의 수군을 크게 무찌른 해전이다이 전투에서 "육전"에서 사용되던 "포위섬멸 전술" 형태인 "학익진"을 처음으로 펼쳤다. 이순신 함대는 08.10일 출발하여, 08.12일에 "노량"에 이르렀고, 이곳에서 "경상우수사 원균"과 합류하였다이 때, "적선이 출몰하였다"는 첩보를 얻어, 08.14"큰 배 36중간 배 24작은 배 13"을 만나 전투가 벌어졌다.

"조선 연합함대"는 거짓으로 후퇴하는 척하여, 적들을 큰 바다로 끌어 낸 다음, 모든 군선이 일제히 "학익진 진형"을 갖춰, "지자총통현자총통승자총통"을 발포하여, "왜군 함선"을 궤멸시키는데 성공하였다"포격"으로 적함을 깨뜨린 뒤, "적함"의 갑판에서 "백병전"을 벌여, "왜군"을 격퇴하였으며, 여러 명의 포로들을 구해내었다이날 "왜 수군""큰 배 1중간 배 7작은 배 6" 만이 후방에 있어, 도망을 칠 수 있었다08.15, "안골포에 적선 40여 척이 정박해 있다"는 보고를 받고, 08.16"학익진"을 펼친 채, 진격하여 왜선 59척을 침몰시켰다한편, 음력 7월 말에 이르러서야, "육전"에서도 "홍의장군 곽재우"가 승리하였으며, "홍계남" "안성"에서 승리하였다.

14. "원균"과의 불화

이순신은 "난중일기"에서 "원균"의 성품인격에 문제가 많으며, 일 처리에서도 불만인 점을 자주 기록하였다1592.06(음력), "원균""이순신"과 연명으로 "장계"를 올리려 하였으나, "이순신"이 먼저 단독으로 "장계"를 올렸고, 이로부터 각각 "장계"를 올려, 조정에 싸움의 결과를 보고하였으며, 때문에 두 장군 사이에 골이 깊어지기 시작했다.

1593,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자, 이순신의 명령을 받게 된 "원균"은 이에 반발하고 명령을 어기는 등 문제를 일으켜, 두 사람의 틈이 더욱 더 벌어졌다이순신은 "조정""원균"과의 불화에 스스로 책임을 지고, 자신을 파직시켜 달라고 청하자, "조정"에서는 "원균""충청도 병마절도사"로 옮겨, 제수하였다.

이후 "원균"은 이순신에 대해 "유언비어"를 퍼뜨렸으며, "이원익""체찰사"로서 증거를 찾아내려 했으나, 오히려 "이순신이 반듯하고, 충성심이 강하다"는 사실만 확인했다고 한다"원균"과의 대립은 각기 정파적인 입장과 맞물려서, 갈등이 심화되었으며, "선조실록선조수정실록" 조차도 이러한 두 인물에 대한 입장차이가 심하다이에 대한 논의는 당시뿐만 아니라, "임진왜란"이 끝나고, "논공행상"을 하는 자리에서도 진위 및 당부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15. 백의종군 (2번째)

초기, 전세가 교착 상태가 되고, "강화 회담"이 별다른 진척을 보이지 않고, 대치 상태가 자꾸 길어졌다이순신과 "원균" 사이의 불화도 문제가 되었다2차례의 "대첩" 이후, 이순신이 그 공으로 "조선 수군"의 총지휘관인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지만, "원균"은 자기가 나이도 많고, 선배라는 점을 내세워, 불만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교착화한 전세에서, 초기의 "승전보" 이후, 별다른 승리가 없자, "선조"를 비롯한 조선 조정에서는 이순신의 전략을 불신하기 시작했으며, 이순신에게 "왜군"에 대한 적극적인 공격을 강요하게 되었다당시 "왜군""남해안 일대"에 총집결하여, "왜성"을 쌓는 등 수비를 강화하였으며, "강화 회담"의 진행 과정을 지켜보고 있었다.

한편 "명나라"는 전면적 대결보다는 "강화 회담"에 기대하고 있었으며, "조선"은 자체의 군사력으로 "왜군""육전"에서 대등한 전투를 수행할 능력이 부족했다그러나 "조정"의 요청과는 달리, 이순신은 "왜군"의 유인작전에 걸려들 위험이 있다는 이유에서 "견내량 전선"을 유지하고, 공격에 신중하게 임하고자 하였다이에 조정에서는 "이순신이 지나치게 소극적"이라는 비난이 일었다.

결국 1597.04.11.(02.25), "통제사직"에서 해임되어, "원균"에게 직책을 인계하고, "한성"으로 압송되어, 04.19일에 투옥되었다그때 "우의정 정탁"의 상소로 05.16일에 "사형"을 모면하였으며, "이순신""도원수 권율" 밑에서 "백의종군하라"는 명령을 받았다당시 "권율"은 남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는데, "이순신""권율"의 본진을 찾아가는 길에, 가족을 만나려고, "아산 본가"에 잠시 머물렀다.

이순신이 "한산도"에 있는 동안, 가족은 "순천 고음"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아들의 석방 소식을 들은 그의 어머니가 아들을 만나기 위해, 배를 타고 먼 길을 올라오고 있었다그러나 어머니는 05.26, 배 위에서 별세하고 말았고, 이순신은 모친의 임종을 볼 수 없었다(어머니의 임종소식은 음력 04.13일에서야, "종 순화"를 통해 알게 된다.) 이렇게 어머니를 잃은 이순신은 슬픔으로, 몸과 마음이 모두 피폐해졌다.

16. "원균""칠천량 해전"의 패배복직

1597.08.028(07.16)"삼도수군통제사"에 오른 "원균"이 이끄는 "조선 함대""칠천량 해전"에서 "왜군"의 기습을 받아, "춘원포"로 후퇴, 수군들은 상륙하여 도주하고, "판옥선" 대부분이 불타거나 "왜군"에게 노획당해, "오사카"로 끌려간다.  이를 수습하기 위하여, 조정에서는 "경림군 김명원병조판서 이항복" 건의로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하였다.

하지만 이순신이 다시 "조선 수군"을 모아 정비했을 때, 함선은 "12" 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정부"에서는 이 병력으로 적을 대항키 어렵다고 하여, "수군을 폐지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나, 순신은 "아직도 12척의 배가 남아 있으며, 내가 죽지 않는 한, 적이 감히 우리의 수군을 업신여기지 못할 것"이라는 비장한 결의를 표하였다고 한다그 뒤 전열을 재정비하기 위해, 10.09(08.29)"진도 벽파진"으로 ""을 옮겼다.

17. 명량해전

1597.10.25(09.16), "왜군" 수백 척의 이동정보를 접한 이순신은, "명량해협"에서 대적하기 위해 "12"의 전선을 이끌고, 출전했다"명량해협""울돌목"이라고도 불리었는데, 폭이 294m 밖에 되지 못하여, 바다 표층의 유속이 6.5m/s 정도로 굉장히 빠르고, 밀물썰물 때에는 "급류"로 변하는 곳이었다.

이순신은 이러한 지형을 이용하여, 새로 합류한 1척을 추가한 "13척의 전선"으로 "왜군" 함대를 유인하여, 이 해협에서 "333"의 일본 함대 중에서 공식기록이었던 "131"의 전선을 격파하였다이를 "명량 해전"이라고 한다.

이 해전의 승리로 "조선 수군"은 나라를 위기에 빠뜨렸던 "정유재란"의 전세를 역전시켰다"왜군"은 곤궁에 빠져, "명나라 장군"에게 뇌물을 보내어, "화의"를 꾀하였으나, 이순신은 이를 반대하고, 이듬해 음력 1598.08.18.,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가 죽어, "왜군"이 철수하게 된다.

18. 노량해전에서전사임진왜란 종전

음력 1598.11.18, "조선 수군 70여 척명나라 수군 400""노량"으로 진군했다군사는 15,000명이었다이순신은 "명나라 부총병 진린(陳璘)"과 함께, 음력 11.19일 새벽부터 "노량 해협"에 모여 있는 "왜군"공격하였고, "일본"으로 건너갈 준비를 하고 있던 "왜군 선단" 500여 척 가운데 200여 척을 격파, 150여 척을 파손시켰다.

전투는 정오까지 이어졌고, "관음포"로 달아나는 "왜군"을 추적하던 "이순신"은 날아온 탄환에 맞아 전사하였다. 죽기 전에 그는 "지금은 싸움이 급하다.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명나라 장수 등자룡(鄧子龍)"도 함께 전사했다"노량해전"을 끝으로 "7년의 왜란"은 끝났다"선조실록"의 사관은 당시 사람들이 모두 "죽은 이순신이 산 왜놈들을 격파하였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19. 사 후

전사 직후, "1품 우의정"에 증직되었다1604, "선조"는 그를 "권율원균"과 함께, "선무(宣武) 1등 공신 및 덕풍부원군(德豐府院君)"으로 추봉하고 "좌의정"을 가증했다1643, "인조"는 그에게 "충무" 시호를 내려, "충무공(忠武公)"이 되었다1659, "효종" , "남해"에 그를 기려, "충무공 이순신의 비()"를 세웠다.1688(숙종 14), "명량대첩 비"가 건립되었고, 1705"현충사"가 건립되었으며, 1793"정조""1품 의정부 영의정"을 가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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