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 (秋史) 김정희 (金正喜ㆍ1786~1856ㆍ70세)"는 한국 "금석학의 개조(開祖)"로 여겨지며, 한국ㆍ중국의 옛 비문을 보고 만든 "추사체"가 있다. 대쪽 같은 성품은 "안동 김씨"의 표적이 되었다고 한다. "정순왕후(영조의 계비)"의 친족ㆍ"남양 홍씨 (양모)"를 통해 "남연군(4남- 흥선대원군 이하응)"과 이종사촌 간이다.
1. 김정희 (金正喜ㆍ1786~1856ㆍ향년 70세)
조선후기 대표적인 서예가 (추사체)ㆍ금석학자ㆍ고증학자ㆍ화가ㆍ실학자(노론 북학파)ㆍ이조판서ㆍ당색으로는 "노론"으로 외척이었지만, "벽파"나 "탕평당"에 들지 않고, "북학파"가 되었다.
특히 "난초(蘭)"를 잘 그렸으며, "서예·도서·시문·묵화"에서 독창적이며, 뛰어난 업적을 남겼으며, "묵화"에서는 "난초·대나무 ·산수화" 등도 잘 그렸다. 그리고 지인에게 "난초"를 그려 줄 때, "별호"를 다르게 할 때가 잦아, 한국의 위인 가운데 가장 많은 "별호"를 가지고 있으며, "추사"는 그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별호"로서 "서호(書號)"가 있다. 한편 그에게 "금석학"을 배운 유명한 인물로는 "오경석"이 있고, "난초"를 배운 이로는 "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있다.
• 출 생 : 충청 예산현 입암면 용궁리 (현, 충남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
• 사 망 : 경기도 과천현 동면 주암동 (현, 경기도 과천시 주암동) 과지초당
• 호 : "추사 (秋史)ㆍ완당 (阮堂)"이라는 호를 많이 사용했으나, 그밖에 100여개 넘는 별호를 사용했다. 예당(禮堂)ㆍ시암(詩庵)ㆍ과파(果坡)ㆍ노과(老果)ㆍ농장인(農丈人)ㆍ보담재(寶覃齋)ㆍ담연재(覃硏齋)ㆍ천축고선생(天竺古先生)
• 학 력 : 1819(순조19)- 문과급제 • 종 교 : 유교(성리학) → 불교
• 부 모 : 양부- 김노영(金魯永ㆍ백부)ㆍ양모- 남양 홍씨ㆍ생부- 김노경(金魯敬ㆍ김한신(영조의 부마)의 손자→ 병조판서ㆍ 종3품)ㆍ생모- 기계 유씨
• 스 승 : 박제가 (朴齊家ㆍ1750~1815)ㆍ서자출신ㆍ박지원의 제자ㆍ실학자ㆍ북학파 거두
• 저 서 : 완당집ㆍ완당척독 (阮堂尺牘)ㆍ담연재시고(覃硏齋詩藁)ㆍ금세
• 그 림 : 세한도 (歲寒圖ㆍ국보180호)ㆍ모질도(耄耋圖)ㆍ부작란도(不作蘭圖)ㆍ묵죽도ㆍ묵란도ㆍ초한도→ 제주유배 때 작품, 날이 추워진 다음에야 잣나무ㆍ소나무가 푸른 것을 안다 → 제자(이상적)가 청나라 출장갈 때마다 책(120권)을 선물한 것에 고마워 보낸 것→ 비평서 첨부
① 실학자 (노론 북학파): 박지원→ 박제가→ 김정희→ 흥선대원군ㆍ박규수ㆍ효명세자(헌종 친부, 고종 양부)
실학자로 북학파의 거두인 "박제가 (朴齊家ㆍ1750~1815ㆍ서자출신ㆍ박지원의 문인)"의 문인으로, "연암 박지원 (朴趾源ㆍ1737~1805ㆍ박규수의 조부)"의 학통을 계승하였다. 문인들로는 "흥선대원군ㆍ박규수ㆍ효명세자(헌종 친부, 고종 양부)"이 있다.
② 귀양을 가고, 풀려나기를 반복하여, 일생 동안 "귀양살이"가 "13년"이나 되었다.
1830년 "김노경(생부)"이 "윤상도의 옥사"에 연루되어, "고금도(古今島)"에 유배되었다가, "순조"의 배려로 풀려났으나, "헌종" 즉위 초, "김정희" 자신도 "윤상도 옥사"에 연루, 1840년(헌종6)에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1848년 석방되었다. 1851년(철종2)에 "헌종의 묘"를 옮기는 문제에 대한 "영의정 권돈인"의 예론(禮論)으로 "예송 논쟁"이 벌어지자, 이에 연루되어,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되었다가, 1853년 풀려났다.
1809년(순조9) "생원"이 되고, 1819년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에 급제하고. "세자시강원설서ㆍ예문관검열"을 지냈으며, 그 뒤, "삼사"의 언관을 거쳐, "효명세자"의 사부로써 보도하였으며, 1823년 "규장각대교"가 되었다가 "충청우도암행어사"로 나갔다. 그 뒤, "의정부의 검상(檢詳)", 1836년(헌종2) "성균관대사성ㆍ병조참판ㆍ이조참판"등을 역임하였다.
2. 평 가
문하생이 많아 "추사의 문하에는 3,000명의 선비가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차(茶)"를 좋아하여, "한국의 다성(茶聖)"이라 불리는 "초의 스님ㆍ백파 스님"과도 친분을 맺었다. "김정희"는 많은 사람과 알고 지냈으며, "신위ㆍ오경석ㆍ민태호ㆍ민규호ㆍ강위" 등 중인 계층과 양반 사대부 계층 등을 이끄는 거대한 학파의 지도자였다. 그들은 19세기 후반, "개화 사상가"로 이름을 남기게 되며, "대원군"의 정책도 "북학"에 기초한 "실학사상"에 바탕을 두고 있다.
"서자 출신"으로 "시ㆍ서ㆍ화"에 모두 능했던 "박제가"에게 어려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박제가"를 통해, "북학파 박지원"의 학문을 계승하였다. 학문에서는 "고증학"에 뜻을 두어, "중국"의 학자들과 문연(文緣)을 맺어, "고증학"을 수입하였고, "금석학" 연구로 "북한산"의 "진흥왕 순수비"를 고증하는 등 고증적인 공로도 크다. 그밖에도 "주역"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전각(篆刻)"을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렸다.
그러나 다방면에 걸친 업적에 만큼, 그에 대한 비판도 만만치 않다. 그 역시도 "유교적 권위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18세기에 싹튼 "풍속화"와 "진경산수화"를 낮게 평가했으며, 말년에 "과천"에서 은거할 때는 "불교"에 빠지기도 하였다.
3. 추사체 (제주도에서 완성 )
기교를 쫙 빼서, 순수하게 글자만 돋보이게 한 서체 (유격장 조교와 같은 서체)
"제주도"에서 유배하던 때, "삼국시대"로부터 "조선"까지 내려오는 한국의 "서법"을 연구하여 만든 서체가 "추사체"인데, 이 추사체는 "한국"의 필법뿐만 아니라 한국의 "비문"과 중국의 "비문"의 필체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졌다. "추사 연구"의 디딤돌을 마련한 사람은 "일제시기 경성제국대학 교수"를 역임했던 "역사학자 후지츠카 지카시(1879~1948)"인데, 그는 최초의 전문적인 "추사 연구가"라 할 수 있다.
보기 드문 "추사 매니아"이기도 하다. "추사"의 인격과 학문에 매료되었던 "후지츠카"는 "한ㆍ중ㆍ일" 국경을 넘나들며, "추사"와 관련된 자료들을 광범위하게 수집하여, 문집 등 기초자료의 부실을 보완하는 데 일생을 바쳤다.
4 .명필 집안ㆍ전설
"영조"의 딸 "화순옹주"가 출가한 "월성위" 집안에서 태어난 그의 집안에는 대대로 "명필"이 많았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글을 잘 지었다. 7세 때, "입춘대길"이라 쓴 글을 문 앞에 붙여 놓으니, 지나가던 "채제공"이 보고는 "김정희"에게 "장차 명필이 되겠다."고 칭찬했다고 한다. 어머니 "기계 유씨"가 그를 임신한 지, "24개월 만에 출산했다"는 전설이 있다.
5. 화 풍 (문인화 : 글ㆍ그림이 같이 있는 것)
"화풍(畵風)"은 대체로 "소식"에게서 비롯된 "시ㆍ서ㆍ화 일치"의 문인 취미를 계승하는 것이었다. 그는 이를 "제2의 직업"으로 볼 만큼 전문적으로 하였다.
"그림"에서도 "서권기(書卷氣)와 문자향(文字香)"을 주장하여, 기법보다는 심의(心意)를 중시하는 "문인화풍(文人畫風)"을 매우 존중하였다. 또한 그는 "필묵"의 아름다움을 주장하여, 꾸밈없는 고담하고, 간결한 필선(筆線)으로, 심의(心意)를 노출하는 "문기(文氣)" 있는 그림을 많이 그렸다. 특히 "난(蘭)"을 잘 쳤는데, "난(蘭) 치는 법"을 "예서"를 쓰는 법에 비겨서, "문자향이나 서권기가 있는 연후에야 할 수 있으며 화법(畵法)을 따라 배워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였다. 그의 화풍은 "조희룡(趙熙龍)ㆍ허유(許維)ㆍ흥선대원군 이하응ㆍ전기(田琦)ㆍ권돈인" 등의 문인들을 통해 배출, 계승되었다.
6. 과천에서 후학양성ㆍ출가 (70세ㆍ봉은사)
1852년(철종3) 겨울에 "함경도 북청" 유배에서 풀려났으며, 유배생활을 마친 그는 아버지의 묘소가 있는 "과천"에 은거하면서, "서화"와 "선학(禪學)"에만 몰두했다. 지인과 제자에게 "고대 석기"를 모아오게 하여, "한국의 고대 문화"를 연구하였다고 한다. "경기도 과천"에 "과지초당(瓜地草堂)"이라는 거처를 마련하고, 후학을 가르치며 여생을 보냈으며, 1856년(70세), "승복"을 입고 "봉은사"에 들어갔으며, 10월 "과천"으로 돌아와 생을 마쳤다. 죽기 전날까지 집필을 하였다고 한다.
< 죽기 3일전 쓴 마지막 글씨- 봉은사 서고현판 (판전-板殿)) >
7. 금석학ㆍ고문판독 분야 개척
조선에서 "금석문 연구"를 "금석학"의 반열에 올려놓은 선구자이다. 이전까지 "사서육경"의 보조 학문으로 존재하였던 "금석학(金石學)ㆍ사학ㆍ문자학ㆍ음운학ㆍ천산학(天算學)ㆍ지리학ㆍ천문학" 등의 학문에 대한 포괄적인 연구를 시작하였다. 실생활에 유용한 학문을 연구해야 한다는 "박지원ㆍ박제가"의 가르침은 그가 실용적인 학문을 찾아서 연구하게 하는 이념이 되었다. 당시 "신라ㆍ고려시대"의 "묘비ㆍ지석" 등이 각지에서 발견ㆍ출토되기 시작하면서, "문자 해독"이 이루어졌고, "금석학"은 "문자학ㆍ서도사(書道史)"의 연구와 더불어 독자적인 학문 분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청나라"에서 "고증학"을 배울 때, "금석학"도 함께 배웠다. 그는 "금석자료"를 "호고적(好古的) 취미"로 대하던 당시까지의 풍조를 비판하고, "중국"의 경우를 들어, "금석학"이 하나의 "독립된 학문"으로 발전하였음을 주장하였다. 또 "경학ㆍ역사학"에서 "필수 불가결한 보조적인 학문" 분야라고 하며, 그 효용을 역설하였다. "청나라"에서 귀국한 뒤, 친구인 "김경연ㆍ조인영" 등과 함께 비문을 보러, 8도를 답사하기도 했다.
그가 남긴 "금석학"의 가장 큰 업적은 1816년 당시까지 "무학 대사의 비" 또는 "고려 태조의 비"라고 알려져 있던 "북한산 신라 진흥왕순수비"를, 비문에 적힌 "~ 眞興太王及衆臣巡狩 ~"라는 구절을 통해 "신라 진흥왕의 순수비"라는 것을 밝혀냈다. "순수비"를 밝혀낸 과정과 그 사실적인 증명은 그가 저술한 "예당금석과안록(禮堂金石過眼錄)"에 기록되어 있으며, "진흥이비고(眞興二碑攷)"등과 같은 저서도 남겼다.
그의 학문 태도를 밝힌 글로서 유명한 "실사구시설"은 과학적이며, 객관적인 방법으로 진리를 탐구해야 한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그는 "북학파 학문"과 "청나라의 고증학"까지 두루 섭렵하였으므로, "경학"을 비롯한 모든 분야에서 많은 영향을 받아, "자제군관"으로 "연행"을 다녀와, 과거에 급제한 후에는 관료생활 틈틈이 "금석학" 연구에 몰두하였다. 또한 "문무왕비ㆍ김인문 묘비" 등에서 발견한 "신라 성한왕"이라는 글자에 주목, "경주 김씨"의 역대 족보와 비교, 대조하여, "성한왕"이 "김알지" 또는 "세한(김알지의 아들)"과 동일인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또한 "소호금천씨ㆍ파경진백ㆍ투후"에 대한 단어도 확인하고, 이를 기록으로 남겼다.
이는 하늘에서 내려온 "금궤"에서 태어났다는 "문중"의 시조 설화와 배치되는 것이라, 여러 사람의 비판을 받는 원인이 됐다. 그리고 "금석문" 자료를 찾고 보호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게 되었다. "금석문"에 대한 해독, 문자 판독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ㆍ정리를 바탕으로 후학을 지도하여, "조선 금석학파"를 성립시켰다. 그의 "금석학"을 계승한 학자들로서는 "신위ㆍ조인영ㆍ권돈인ㆍ신헌ㆍ조면호(趙冕鎬)" 등이 있다.
8. 생 애
"충청남도 예산군"에서 병조판서를 지낸 "김노경"과 "유준주(兪駿柱)"의 딸 "기계 유씨"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으나, 아들이 없던 큰아버지 "김노영의 양자"가 되어, "한성부"로 상경하였다. 그의 가문은 멀기는 했으나, 왕실의 이중 외척으로 그가 문과에 급제하자, 조정에서 축하를 할 정도로 세력가였다. 당색으로는 "노론"으로 그의 집안은 "서인" 중진인 "김홍욱"의 후손이었다.
"노론"의 당원이 된 뒤에는 "고조부 김흥경"이 "영조" 때의 재상이었고, "증조부 김한신"은 "영조"의 "서녀 화순옹주"의 부마가 되어, "월성위"가 되었다. 또한 "증조부 김한신"과 10촌 형제간인 "김한구"의 딸은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 김씨"였다.
그의 집안은 "노론" 외척계열이었지만, "고조부 김흥경"과 "증조부 김한신"은 당파에 초연했고, "추사" 역시 "벽파"나 "탕평당"에 들지 않고, "북학파"에 가담하였다. 그러다가 큰아버지 "김노영"이 귀양을 가고, 둘째 큰아버지 "김노성", 할머니, 할아버지 등이 죽게 되었다. 그러자 "가문을 이어야 한다"는 집안의 뜻에 따라, "김노영"의 양자로 입적된 뒤, 15세의 나이로 동갑인 "한산 이씨"와 혼인한다. 결혼하던 해에 "정조"가 승하하고(1800년), 그의 증대고모뻘인 "김대비(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였으며, 그 연고로 친부인 "김노경"은 "종3품"까지 벼슬이 오른다.
9. 생모ㆍ양모ㆍ부인의 죽음
양어머니 "남양 홍씨"를 통해, "남연군"과 이종사촌간이 된다. 이러한 인연으로 후에 "흥선대원군"이 "김정희"의 문하에서 글을 배우게 된다. 생모가 34세로 세상을 떠나자, 비탄과 허무감에 고향 "예산"으로 내려가 한때, "불교"에 심취하기도 한다. 1805년(20살 되던 해), 대왕대비가 승하하고, 그 다음 달에는 "부인 한산 이씨"가 죽었다.
이 무렵, "스승 박제가"가 유배에서 풀려났다가, 집에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죽었다. 양어머니도 얼마 뒤 죽었다. 1808년(순조8), 양어머니의 3년 상을 치른 뒤, 1살 아래인 규수와 재혼한다. 1809년(순조9), "생원시"에 장원급제하여, "생원"이 되고, "성균관"에 들어가 수학하였다.
10. 학문ㆍ사상 형성 (박제가의 제자)
16세 때, "북학파"의 대가이자, 3차례 이상 "청"을 오가며, 학문의 폭을 넓히고 있었던 "박제가(朴齊家)"의 제자가 되면서, 그로부터 "북학파 사상"을 배우고, "연암 박지원"의 학통을 계승하였다. 이에 따라 그는 "청나라"의 "고증학(考證學)"에도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1809년(순조9, 23세), "동지사(冬至使) 겸 사은사(謝恩使)"의 일행이 서울을 떠날 때, 그도 "부사(副使)"인 부친 "김노경"을 따라, "자제군관"의 직책으로 연행(燕行) 길에 올랐다. 6개월 동안, "청나라"에 머물면서, "청나라" 제일의 학자 "옹방강(翁方綱)ㆍ완원(阮元)" 등에게 재능을 인정받아, "고증학"을 배우게 되는데. 이후 학문 활동에 큰 도움을 받게 되었다.
당시 "청"의 학풍은 "한대"의 학문을 숭상하고, "송나라ㆍ명나라"의 "성리학"을 관념적이라며 배척하는 것이었는데, "옹방강"은 "한나라ㆍ송나라" 학문의 절충을 주장하고 있었다. "옹방강"은 일찍이 "사고전서(四庫全書)"의 편찬에 관여했으며, "경학(經學)"에 정통하고, "문장ㆍ금석ㆍ서화ㆍ시"에 능한 학계의 원로였다. "청"나라 중기의 "경학"의 대가였던 "완원"은 "실사구시설(實事求是說)"을 비롯한 "고증학"의 학문적 체계수립에 영향을 주었다. "완원"은 자신이 지은 "소재필기(蘇齋筆記)"를 처음으로 "김정희"에게 기증까지 하였으며, 김정희가 조선에 돌아온 뒤에도 서신을 주고 받았다.
그때 "실사구시설" 등을 발표하여, "북학(北學)"의 학문적 수준을 높이는 한편, "성리학적 관념론"을 비판했다. "연암 박지원"의 "북학사상"과 "청나라 고증학 사상"의 영향을 받은 그는 "성리학"만이 진리라는 생각을 버리게 되었으며, 그는 조선에 돌아온 뒤, 한동안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11. 과거 급제ㆍ세자의 사부ㆍ파면과 생부 유배
1819년(순조19),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로 합격하여, "권지세자시강원ㆍ예조 참의"를 거쳐, "세자시강원설서"로 "효명세자"를 보필하였다. "예문관검열"을 거쳐, "삼사의 언관"을 두루 역임한 뒤, "승문원검교ㆍ규장각대교ㆍ암행어사" 등에 올랐다. 친구 "조인영"의 조카사위이자, 19세의 "효명세자"를 가르치는 "세자시강원 보덕"을 거쳐, "필선"이 된다. 하지만 "효명세자"가 죽고 나자, 권력을 잡은 "안동 김씨"의 "김우명"이 그를 탄핵하여 파면되었으며, 1830년 아버지 "김노경"은 "윤상도(尹尙度)의 옥사"에 관련된 혐의로 "고금도(古今島)"로 귀양을 가게 된다.
"김우명"은 "비인 현감"으로 있다가, "암행어사"로 내려온 김정희에게 파직된 바 있었는데, 이 때문에 김정희에게 원한을 품고 있었다. "김노경"은 "순조"가 죽던 1834년(순조34), "순조"의 특별 배려로 유배에서 풀려난다. "충청우도 암행어사"로 나갔다가, "의정부의 검상(檢詳)"으로 되돌아온 뒤, 1835년(헌종1) 친분이 있던 "풍양 조씨"가 정권을 잡자, "성균관 대사성ㆍ이조 참판ㆍ이조판서" 등에 이르렀다. 1836년(헌종2), "성균관대사성ㆍ병조참판"을 거쳐, 다시 "성균관 대사성"을 역임하고,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에 이르렀다.
12. 유배 생활
1840년(헌종6), "안동 김씨"가 다시 집권하자, 이번에는 "김정희" 자신이 "윤상도(尹尙度)의 옥(獄)"에 관련되어, "제주도"로 유배를 가게 된다. 1842.11월, 부인이 세상을 떠났으며, 1848.12.06일에 유배에서 풀려난다. 유배지에서의 곤궁한 생활 가운데에서도 계속 글과 작품을 썼다. 그의 유배지에는 "안동 김씨" 세도가의 "김유근" 등이 찾아오기도 했다.
그의 "대쪽" 같은 성품은 그 뒤로 "안동 김씨"의 표적이 되었다고 한다. 1851년(철종2)에 실수한 "의정부 영의정 권돈인"은 물론이고, 친구였던 "김정희"까지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를 가게 된다. 친구인 "권돈인(權敦仁)"이 "의정부 영의정"으로 "김정희"를 돌봐 주었는데, "궁중의 제례"와 관련하여 그가 실수를 하게 되었다(→헌종묘천 문제).
1852년(철종3) 겨울에 "함경도 북청" 유배에서 풀려났으며, 유배생활을 마친 그는 아버지의 묘소가 있는 "과천"에 은거하면서, "서화"와 "선학(禪學)"에만 몰두했다. 이 때, 세도가문인 "안동 김씨"의 "서용의 명령"은 내려졌으나, 현직으로 복귀하지는 못했다.
"흥선대원군"이 집권한 후, 그의 사상과 학문이 재조명되기 시작하였으나, "북학파"사상에 대한 "벽파" 및 "위정척사파" 계열의 반감으로, 1910년 "대한제국" 멸망이후부터 본격적으로 그의 사상과 학문에 대한 검토, 연구가 시작되었다. 1934년에 가서야, 그의 문집ㆍ저서ㆍ시문 등을 모은 "완당선생 전집"이 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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