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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 (4대) : 세종ㆍ장영실 (1389?~1450?)ㆍ해시계ㆍ물시계 (자격루)

by 당대 제일 2022. 11.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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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실 (蔣英實ㆍ1389?~ 1450?ㆍ61세?)"은 천민(관노) 출신의 과학자(이순지ㆍ이천)로, 기술자ㆍ발명가이다. 조선 4대왕 "세종 (世宗ㆍ1397~1450ㆍ53세)"이 직접 재능이 뛰어나다고 극찬하였고, 수많은 기기를 제작하였다.  미천한 신분에서 승진을 거듭하여, "종3품관 대호군(大護軍)"에서 "정3품관 상호군(上護軍)"이라는 관직까지 이르렀다. "이순지ㆍ이천" 등과 함께 조선 전기 최고의 과학자로 평가된다.

 

1. 장영실 (蔣英實1389?~ 1450?향년 61세?)

발명품 : 해시계(앙부일구ㆍ1434ㆍ혜정교/ 종묘 앞에 설치한 공중시계)ㆍ옥루(흠경각루ㆍ1438)ㆍ자격루(보루각루ㆍ물시계ㆍ1434)ㆍ혼천의(천문관측대)ㆍ정남일구(방향계)ㆍ현주일구/ 천평일구(휴대용 해시계)ㆍ대간의/ 소간의(천문 관측을 위한 기본기기) ㆍ일성정시의(밤낮으로 시간을 알림)ㆍ각도기ㆍ수표(水標ㆍ측우기)

※ 이순지 (李純之ㆍ1406~1465ㆍ59세) : 천문학자ㆍ"한양의 북극고도(즉 위도)가 무엇이냐"는 "세종"의 질문에 유일하게 답한 것이 계기가 되어, 신임을 받아 "천문역산(天文曆算)" 전문가로 활약

※ 이 천 (李 蕆ㆍ1376~1451ㆍ75세) : 무관ㆍ행정가ㆍ과학자ㆍ장영실과 "앙부일구ㆍ자격루"를 제작

장영실

기록에 따르면, 아버지는 "원나라 소항주 출신 "의 귀화인이다. "원나라 "가 축출되고, "명나라 "가 기세를 올리던 때에, 수많은 망명객들이 조선으로 몰려올 때, 아버지도 그런 사람들 틈에 끼어 조선에 들어왔으리라 짐작된다. 그렇다면 양반은 아니더라도 양인 정도의 신분을 얻었을 것이다.

그런데 자식인 장영실이 어찌하여 "천민"이 되었을까? 해답은 바로 "조선왕조실록"에 나온다. 어머니가 "동래현 기생"이었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관기(官妓)"였으므로 관청에 소속된 "관노"가 된다. 이런 고통스런 환경 속에서도 그가 과학자로 거듭날 수 있었던 것은 기술자였던 아버지의 자질을 이어받았기 때문이다. 기술자로서 "장영실"의 이름은 "태종" 대부터 한양까지 알려져 있었다. 어린 시절 그가 틈틈이 "동래현 병기 창고"에 들어가, 낡고 못쓰게 된 "병장기"를 손질하면서 천재적인 자질을 발휘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관상감" 출신의 "남양 부사 윤사웅"의 추천으로 한양에 올라와 궁중에서 일하게 된다.

2. 물시계 제작

"세종"은 실용주의자로서, 장영실의 적성을 중요하게 생각하여, 부왕의 뒤를 이어 중용하였다. "세종"은 장영실을 1421년(세종4) "윤사웅(尹士雄)ㆍ최천구(崔天衢)" 등과 함께 중국에 보내어, "천문기기"의 모양을 배워오도록 했다. 귀국 후, 1423년(세종5, 34세?)에 "천문기기"를 제작한 공을 인정받아 "면천"되었고, 다시 대신들의 의논을 거쳐 "종5품 상의원(尙衣院) 별좌"에 임명되었다. 1424년(세종6), 그를 "정5품 행사직"으로 승진시켰고, "갱점지기(更点之器)"를 만들라고 명했다. 그래서 나온 것이 첫 "물시계"였다.

3. 천문학에서 활약

"세종"의 명에 따라 1432~1438년까지 "이천(李蕆)"의 책임 하에 "천문기구 제작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그 과정에 수력에 의해 자동으로 작동되는 물시계인 "자격루(일명 보루각루, 1434년)ㆍ옥루(일명 흠경각루, 1438년)"를 만들어 "세종"으로부터 총애를 받았다. 이때 제작된 "옥루"는 해가 뜨고 지는 모습을 모형으로 만들어 시간, 계절을 알 수 있고, 천체의 시간, 움직임도 관측할 수 있는 장치로 "흠경각(欽敬閣)"을 새로 지어 그 안에 설치했다.

이때 만들어진 천문 기구에는 천문 관측을 위한 기본 기기인 "대간의(大簡儀)ㆍ소간의"를 비롯하여 휴대용 해시계인 "현주일구(懸珠日晷)ㆍ천평일구(天平日晷)"ㆍ방향을 가리키는 "정남일구(定南日晷)"ㆍ"혜정교(惠政橋), 종묘(宗廟)" 앞에도 설치한 공중시계인 "앙부일구(仰釜日晷)"ㆍ밤낮으로 시간을 알리는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ㆍ규표(圭表)" 등이 있다. 이러한 공으로 1433년(세종15)에는 "정4품 호군(護軍)"의 관직을 더하였다.

4. 금속활자 발명 참여

"천문기구" 제작이 끝난 후에도 "금속제련 전문가"로 관료생활을 하였다. 1434년(세종16), "이천"이 총책임자였던, "갑인자(구리로 만든 금속활자)"의 주조에 참여하였다. "갑인자"는 약 20여만 자에 달하며, 하루에 40여 장을 찍을 찍어도 자본이 흐트러지지 않았고, 판본이 깨끗하였다.(그 이전에는 2장만 찍어도 자본이 흐트러져서 자본을 교정한 후에 다시 찍을 수 있었다)

5. "세종 어가 (가마)"와 함께 무너진 성공신화

1442.03월(세종24, 53세?), "세종"이 온천욕을 위해 "이천"을 다녀오던 중, 기술자로서 "정3품 상호군(上護軍) 장영실"이 책임을 지고 있던 "세종 어가"가 갑자기 부서지는 사건이 일어났다. 조정에서는 이를 "임금에 대한 불경죄"로 간주하고, "의금부"에서 책임을 물어, "곤장 80대ㆍ삭탈관직"을 구형했으나, "세종이 형벌을 2단계 감해 주었다"고 한다. "대호군 장영실이 안여(安輿: 임금이 타는 가마) 만드는 것을 감독하였는데, 튼튼하지 못하여 부러지고 허물어졌으므로 의금부에 내려 국문하게 하였다." < 세종실록 1442.03.16일 자>

"세종"이 "어가(御駕)"에 올랐다가 부서지는 사고가 일어났다. "어가"는 장영실이 설계하고, "장인 임효돈"이 제작한 것이었다. 그 일로 인해, 대간의 탄핵을 받은 장영실은 졸지에 죄인의 몸이 되고 말았다. 대신들은 때를 만난 듯 그를 성토했고, "파직"과 함께, "곤장 100대에 처해야 한다"고 상주했다. 그런데 "세종"의 조치는 뜻밖이었다. "저간의 공이 있으니, 곤장 80대로 감해주라"는 것이었다. 

그 동안 장영실을 중용하고 아꼈던 "세종"의 마음이 왜 그렇듯 냉정하게 돌아섰던 것일까? 그 후 장영실의 자취는 역사에서 사라졌다. 사생활은 물론이고, 말년의 행적조차 깨끗하게 묻혀버렸다. "1개 관노"에서 "종3품 벼슬"까지 올랐던 그의 영광도 거기에서 끝이었다. 어쩌면 미천한 출신 성분 때문에, 사가들로부터 외면당했을 수도 있다. 혹은 그가 갑작스런 지위 상승으로 인해 오만하고 나태해져서, 완벽주의자 "세종"에게 버림받았을 수도 있다. 단초는 있다. 그가 몇 차례 "뇌물 수수"로 벌을 받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정도의 잘못으로 저간의 빛나는 업적이 상쇄될 수는 없다. 더군다나 그는 과학입국을 지향하던 세종대왕의 대표선수가 아니었던가. 그러기에 오늘날 그의 말년 행적을 둘러싸고 다양한 추측이 나돌고 있지만 대부분 드라마틱한 상상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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