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4대왕 "세종 (世宗ㆍ1397~1450ㆍ53세)"은 언어학자ㆍ업적에 대한 존경의 의미를 담은 명칭인 "세종대왕(世宗大王)"으로 자주 일컬어진다. 많은 분야(과학 기술ㆍ예술ㆍ문화ㆍ국방 등)에서 뛰어난 왕이었다. 백성들에게 농사에 관한 책을 펴냈지만, 글을 읽지 못해 보지 못하는 모습을 보고, 1444년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는 효율적이고 과학적인 문자 체계인 "훈민정음 (訓民正音ㆍ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을 창제(1444.01월)ㆍ반포(1446.10.09)하였다. 조선의 왕 중, 왕세자에게 양위를 하지 않고, 승하(죽음)한 최초의 왕이다.
1. 세종 (世宗ㆍ1397~ 1450ㆍ재위 1418~1450 (32년)ㆍ향년 53세)
• 재 위 : 1418 ~1450 (32년) • 출 생 : 한성 준수방 고을 (현, 서울 종로구 통인동) • 본 명 : 이도 (李祹) • 왕 계 : 태종→세종 → 문종→ 단종→ 세조 • 부 모 : 부 - 태종 (太宗ㆍ1367~1422ㆍ재위 1400~1418(18년))의 6남 (양녕대군 위로 3형은 졸)
• 처 : 소헌왕후 심씨 (昭憲王后 沈氏ㆍ1395~1446)ㆍ심온(沈溫)의 장녀 : 외척의 발호를 경계한 "태종"에 의해, 집안이 멸문당한 시어머니 "원경왕후"와 마찬가지로, 그녀 또한 시아버지 "태종"에 의해, 아버지 "심온"을 잃는다. 남편 "세종대왕"을 이해하고 내조를 했고, 조선역사상 "내명부"를 가장 안정적으로 다스렸고, 이는 "세종"의 업적에 좋은 영향력을 끼쳤다고 평가받는 최고의 국모
• 후궁(11): 빈 (3ㆍ嬪 ): 신빈 김씨ㆍ혜빈 양씨(단종의 유모)ㆍ영빈 강씨 / 귀인(2ㆍ貴人): 귀인 박씨ㆍ귀인 최씨 / 숙의(1ㆍ淑儀): 숙의 조씨 • 소용(1ㆍ昭容): 소용 홍씨 • 숙용(1ㆍ淑容): 숙용 홍씨 / 원(1ㆍ淑媛): 숙원 이씨 • 상침(1ㆍ尚寢): 상침 송씨 • 사기(1ㆍ司記): 사기 차씨
• 자 녀 : 아들(18)ㆍ딸(7): 문종(5대)ㆍ세조(7대)ㆍ안평대군(세조가 시사)ㆍ임영대군ㆍ광평대군ㆍ화의군ㆍ금성대군(세조가 시사)ㆍ계양군ㆍ평원대군ㆍ의창군ㆍ한남군ㆍ밀성군ㆍ수춘군ㆍ익현군ㆍ영응대군ㆍ영풍군ㆍ영해군ㆍ담양군ㆍ정소공주ㆍ정의공주ㆍ정현옹주ㆍ정안옹주ㆍ이름 미상 옹주(3)
• 형 제 : 태종 아들(15)ㆍ딸(19) : 양녕대군ㆍ효령대군ㆍ충녕대군 (세종대왕)ㆍ성녕대군ㆍ경녕군ㆍ함녕군ㆍ온녕군ㆍ혜령군ㆍ근녕군ㆍ희령군ㆍ후령군ㆍ익녕군ㆍ이름 미상 왕자(2)ㆍ이름 미상 대군(1)
① 양녕대군 (讓寧大君ㆍ1394~1462ㆍ68세ㆍ양(讓): 사양할 양)ㆍ화가ㆍ시인ㆍ묘역 : 지덕사(至德祠)당ㆍ상도역(7호선) 2번→ 양녕로 300m (동작구 상도동 산65-42)
시를 잘 짓고, 그림을 잘 그렸으나, 작품들은 대부분 인멸되거나 실전되었다. 1404년(태종4) 왕세자에 책봉되고, 1409년부터 태종이 정사를 보지 않을 때 정치에 참여했고, 1412~1413년까지 태종이 대리청정을 1년간 하였다. 자유분방한 성격으로 태종과 마찰을 빚다가, 유정현 등의 상소로 폐위되고, 3째 "충녕"이 왕세자가 되었다. 세자 폐위 이후에도 자유분방한 활동이 문제시되어 여러 번 탄핵을 당하였으나, 세종의 각별한 배려로 처벌을 받은 적은 없었다. 1453년, "계유정난"이 일어나자, "수양대군"의 편을 들어 그를 독려했고, 심지어는 "안평대군"을 사사시키라고 간청했으며, "계유정난"이 끝나자 "단종"을 죽이라고 간청했다고 한다. 일설에는 자신의 자리를 빼앗은 동생 "세종"에 대한 보복이라는 설이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
② 효령대군(孝寧大君ㆍ1396~1486ㆍ90세)ㆍ정치인ㆍ서예가ㆍ묘역 : 청권사(淸權祠)당ㆍ방배역(2호선) 4번→ 50m (서초구 효령로 135)
어릴 적부터 글 읽기를 좋아하여 30세 전에 이미 학문과 덕성을 이룩하였고 붓글씨에도 능해 명필이었다고 전해진다. 불교를 좋아하여 승도를 모아 불경을 강의하였다. 불교를 심오하게 믿어 조정의 숭유억불 정책하에서 불교 보호의 방패 역할을 감당하였다. 활쏘기에 능숙하였고 효성이 지극하여 부왕으로부터 사랑을 많이 받았다.
"태종 이방원"의 3째 아들로 태어났다. 1408년(태종8), "충녕군(忠寧君)"에 봉해졌다가, 1412년(태종12), 둘째 형 "효령군(孝寧君)"과 함께 "대군"으로 진봉된다. 1418년, 1째 형 "양녕대군"이 왕세자에서 폐위되면서, 세자로 책봉되었고, 얼마 후 부왕의 선위로 즉위하였다. 즉위 초반 4년간 "태종"이 대리청정을 하며, 국정과 정무를 주관하였고, 이때 장인 "심온"과 그의 측근들이 사형에 처해졌다.
영의정 때, 아우 "심정"이 "태종에 대한 불경죄"로 처형당하고, "심온"도 수원에서 사사되었다. 이후 주변의 "소헌왕후 폐출 주장"을 일축했고, 건강이 좋지 않았던 그는 "김종서ㆍ맹사성" 등을 등용하여 정무를 주관하였는데, 이 통치체제는 일종의 "내각 중심 정치제도"인 "의정부서사제"의 효시가 되었다.
법전과 문물을 정비하였고 조세 제도의 확립에도 업적을 남겼다. 과학 기술에도 두루 관심을 기울여, "혼천의ㆍ앙부일구ㆍ자격루ㆍ측우기" 등의 발명을 전폭적으로 지원했고, 신분을 뛰어넘어 "장영실ㆍ최해산" 등의 학자들을 적극 후원하였다. 국방에 있어서는 "이징옥ㆍ최윤덕" 등을 북방으로 보내, "평안도ㆍ함길도"에 출몰하는 "여진족"을 국경 밖으로 몰아내고, "4군 6진"을 개척하여, "압록강ㆍ두만강" 유역으로 국경을 확장하였다. 또한 "이종무"를 파견하여, 왜구를 토벌하고 "대마도"를 정벌하였다. 백성들을 옮겨 살게 하는 "사민정책(徙民政策)"을 실시하여, 국토의 균형된 발전을 위해서도 노력하였다.
2. 건 강
세종은 젊은 시절에는 비만하여, 몸집이 거대하였고, 둔한 모습이었으나, 노년에는 비쩍 말랐을 것으로 추측한다. 정력가이기에 성병 중 하나인 "임질"에 걸려서 일평생 고생하기도 하였다. "육식ㆍ학문"을 좋아하는 버릇이 있었으며, 운동은 거의 하지 않았다. 평소에도 "육식"을 매우 좋아하였고, 가장 "육식"을 좋아했을 때는 신하들이 세종의 건강을 염려하여 "고기반찬"을 치웠더니, 심각한 병에 걸리듯 앓아누워 버렸다고 한다.
운동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종기(背浮腫)ㆍ소갈증(消渴症ㆍ당뇨병)ㆍ질(風疾)" 등을 평생 동안 앓았다고 한다. 시각 장애를 앓아 고생한 기록도 있다. "세종실록 92권 (1441, 세종23)"에서의 "내가 두 눈이 흐릿하고 아파서 봄부터 어두운 곳에서는 지팡이에 의지하지 않고는 걷기가 어려웠다." 등의 내용으로 세종이 시각 쪽에 장애가 있었다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고, 재위 32년 중 20여 년간은 시각에 장애를 느꼈으며, "승하(훙서)"하기 전 8년 동안은 거의 앞을 보지 못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 시기에 정사를 보기 어려웠기 때문에, 세자에게 선위하겠다는 뜻을 여러 차례 밝혔다.
"충녕대군"이던 어린 시절, 지나칠 정도로 "독서"만 하여, "태종"이 "세자 방의 모든 책을 치우고 쉬게 하라"고 하자, 매우 상심하다가 우연히 병풍 틈에서 발견한 "구소수간(歐蘇手簡)"을 발견하고 기뻐하며 책이 다 닳도록 읽는다. "태종"이 모든 책을 돌려줄 때까지 그 책을 1,000번 이상 읽었다고 한다.
3. 묘 : 영릉 (英陵)ㆍ합장릉ㆍ경기도 여주
죽어서도 "부왕 태종"의 곁에 있고자 하여, "태종"의 능 근처인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 내곡리(현 서울 서초구 내곡동) 대모산" 근처인 "구룡산"에 안장되었는데, "풍수지리에 좋지 않다"는 이유로 1469년(예종1) "경기도 여주"로 이장되었다. 그러나 이장 후 1년도 안 돼, "예종"이 갑자기 사망하여 "흉지가 아니냐"는 논란이 나왔으나 곧 무마되었다. "세종"의 능은 "영릉(英陵)"이란 이름으로 현재 "경기도 여주시"에 위치해 있으며, "소헌왕후"와 한 봉분 안에 함께 묻혀있는 "합장릉"이다.
4. 훈민정음 (訓民正音)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뜻이다. "훈민정음"이라 부르는 대상은 2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1444.01월(음력 1443.12)에 "세종"이 한글창제 당시에 부른 이름이고, 또 하나는 반포일 기준인 1446.10.09일(음력 09.10)이다.
"훈민정음 서문"은 한문으로 기록되었으며, 이를 한글로 "번역(언해)한 서문"이 "세조 연간"에 발행된 "훈민정음 언해본"에 기록되어 있다. "세종어제 훈민정음 : 나라의 말이 중국과 달라, 문자와 서로 통하지 아니하므로, 이런 까닭으로 어리석은 백성이 이르고자 할 바가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능히 펴지 못하는 사람이 많노라. 내가 이를 위해 가엽게 여겨, 새로 28글자를 만드노니, 사람마다 하여금 쉽게 익혀 날마다 쓰는 것이 편안케 하고자 할 따름이니라." (나랏말싸미 듕귁에 달아, 문자와로 서르 사맛디 아니할세. 이런 젼차로 어린 백셩이 니르고져 홀배이셔도, 마참내 제 뜨들 시러펴디 몯할노미 하니라. 내 이랄 위하야 어엿비 너겨 새로 스믈 여듧 짜랄 맹가노니, 사람마다 해여 수비 니겨 날로 쑤메 뼌한킈 하고져 할따라미니라)
• 해례본 (解例): "해례(解例)"란, 훈민정음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문자 창제 과정을 종합해 기록하였다는 의미이다. 세종 때, 간행한 최초 원본(한문서적)과 동일한 "훈민정음의 판본(원본)"이다. "훈민정음 간송본" 역시 세종연간에 발행된 첫 판본으로 보기는 어렵기에, 역사학계에서는 "원본"이라고 부르지 않고, "훈민정음 해례본"이라고 부른다. (훈민정음 원본은 "한문서적"으로, 당시 존재하던 한문으로 한글을 해설해야 했다)
"해례본"이 발견되기 전에는 "세조" 때, 간행된 "언해본"만 존재하였는데, "언해본"에는 한글의 제작 원리를 기록한 부분이 누락되어 있어, 일제강점기까지 "한글 자모는 한옥 창살을 보고 만든 것"이라는 온갖 루머가 난무했다. "해례본"이 발견됨으로써 한글 자음은 "인체의 발음기관"을 본뜬 것이고, 한글 모음은 "천지인 삼재(三才)"를 "음양오행"의 원리에 따라 배치해 만들었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 언해본 (諺解): "한문"으로 기록된 "해례본"을 "훈민정음"을 이용해, 옮긴(언해ㆍ諺解) 책이다. 가장 오래된 판본은 1459년(세조5)에 발간된 "월인석보(月印釋譜ㆍ불경 언해서)"의 권두에 수록된 것이다. "훈민정음" 모습을 떠올릴 때 연상되는 "나랏말싸미~"도 "언해본"에 "훈민정음"으로 수록된 서문의 첫 구절이다. "세조" 때, "월인석보"가 발간되었으므로, 선대 왕 "세종"이 직접 지었다는 뜻인 "세종어제"를 추가하였는데, 사실 "세종" 등의 "묘호"는 임금이 죽은 뒤에야 붙었으므로, "훈민정음" 창제 당시에 쓰인 책에 "세종어제"라는 말이 쓰였을 리 만무하다. (어제(御製): 임금이 몸소 글을 짓거나 물건을 만듦)
5. 양녕대군이 폐세자가 된 이유 : 어리(於里ㆍ자살)
양녕대군(태종 아들)의 첩ㆍ실록에 자색이 있었다고 기록될 만큼, 뛰어난 미녀였다고 한다. 외모평가가 거의 없는 실록에 기록된 미녀는 "어리ㆍ장희빈" 2명이다. "양녕대군"과 사이에서 태어난 "현주(縣主)"가 1명 있는데 그녀는 "상장 이종경(李宗慶)"과 혼인했다. (세자의 서녀는 정3품 현주(縣主)이고, 적녀는 군주다)
1416년, 왕세자 "이제(양녕대군)"가 22살 때였다. 원래는 "곽선(郭璇ㆍ중추원 부사)의 첩"이었으나, 왕세자 "이제(양녕대군)"의 눈에 들어 세자의 첩이 된다. 첩이긴 해도 이미 혼인한 몸이었던 자신에게, "양녕"이 흑심을 드러내자 강하게 거부하였다. 그러나 "양녕"의 구애는 계속되었고, 남편인 "곽선"조차도 세자인 "양녕"을 어쩔 수 없어 쩔쩔매기만 하다 결국 "어리"를 내주게 되고, 궁궐로 불러들여 사랑을 나누게 된다. 결국 이 사건으로 인해, "양녕"이 "폐세자"가 되고, 자신도 일시 구금되는 처지가 된다. 그런데 이 사실을 몰래 고자질한 이가 왕세자 "이도(충녕대군)"였다는 것이다.
"양녕"은 "어리" 이전에도 "기생출신 첩"을 들이고, 공부는 나몰라라 하고, 매 사냥을 즐기고 있었기 때문에 "태종"은 "양녕대군"을 꾸짖었다. "양녕대군"이 "어리"를 자기 정실부인인 "숙빈 김씨(김한로(金漢老)의 딸)"의 친정에 숨기고, "어리"가 "양녕대군"의 딸을 임신한 것까지 드러나, "태종"이 대노하여 질책하자, "양녕대군"은 "아바마마도 첩 많으면서, 왜 내가 축첩하는 것은 안 되는 것입니까?" 라며 반박하는 내용의 수서(手書)를 올려, "태종"을 당황케 한 일도 있다. "태종"은 답답했는지, "영의정 유정현ㆍ좌의정 박은"에게 수서를 보여주며, "세자를 어쩌면 좋냐"며 한탄했다.
그 외에도 "양녕대군"은 기생들과 놀고, 매사냥을 즐기며, 꾀병을 부려 서연(書筵ㆍ왕세자에게 경서를 거론하던 자리)을 피하는 등 온갖 말썽이란 말썽은 다 부렸다. 계속해서 큰 사고를 치는 바람에 "양녕대군"은 결국 폐세자가 되었고, 그를 대신하여 훗날 "세종대왕"이 되는 "충녕대군"이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3째 동생인 "충녕대군"에게 왕세자 자리가 넘어간 이후, "양녕대군"의 출궁을 청하는 상소가 거듭되어 "태종"은 하는 수 없이 출궁을 명하였고, "태종"은 "양녕대군"을 유배 보내면서도 "동궁전"에서 쓰던 기물들도 모두 딸려 보내고, 수발을 들 노비들, 생활비까지 줘가며 사는 데 부족함이 없게 해주었다. 이때 신하들은 "어리"를 참수하라고 요구했으나, 물리치고 함께 "광주"로 같이 보내주었다.
그러나 "양녕"은 "태종"이 상왕이 된 후에도 계속 사고를 쳐서, 견디다 못한 상왕 "태종"이 그를 가두다시피 하고 철저히 감시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런데 "양녕"이 갑자기 사라진다. "태종"은 빨리 "양녕"을 찾으라고 명령을 내렸다. "양녕"의 장인인 "김한로"의 첩과 "양녕"의 유모는 "어리"에게 쳐들어가서 "대체 언제까지 우리 나으리의 신세를 망칠거냐!"며 "어리"를 구타했고, "어리"는 자신의 신세에 대한 한탄 때문인지 그날로 목을 매어 자살해 생을 마감한다. 그런데 가출한 "양녕"은 고작 이튿날 다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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