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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천재 ④ 정약용 (1762~1836)ㆍ조선의 다빈치 (최고 지식인)

by 당대 제일 2022. 10.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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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茶山)  정약용 (丁若鏞ㆍ1762~1836ㆍ74세)"은 조선 최고의 지식인으로, 생전 500여권 이상의 저작들을 출간하였는데저작들의 대부분은 "전남 강진 (다산초당ㆍ외가 해남 윤씨 별장)" 유배생활 19년간" 집필한 것이다. "혜경궁 홍씨 (정조의 생모)ㆍ홍국영 (정조의 최측근)"과 인척 관계이기도 하다.

 

1. 정약용 (丁若鏞ㆍ1762~1836ㆍ향년 74세) 

조선후기 문신실학자저술가시인철학자과학자공학자거중기 발명가 (화성성역의궤에 실림)ㆍ"수원 화성" 건축 당시, "기중가설 (起重架說)"에 따른 "활차녹로 (滑車轆轤ㆍ도르래)"를 만들고, 그를 이용하여 "거중기"를 고안하였고, 서양의 문물이 앞서있다는 것을 알고 "서학(천주교)"에 심취한다.

"이승훈(매형6살 위)""이벽(큰형 처남8살 위)" 친하게 지내면서, 학문으로 명성이 높은 "이가환(이승훈 외삼촌)"을 만났는데, 그는 "성호 이익(1629~1690)"의 종손으로 당시 "이익"의 학풍을 계승하는 중심인물이었으며, "성호 이익"의 학문을 접하면서, "실학사상"의 토대를 다졌다.

"율곡 이이유형원성호 이익"을 통해서 내려온 "조선 실학사상"을 집대성했다"중농주의 실학자"로서, "토지의 무상 분배, 공동 노동- 공동 분배"를 함으로써, 토지 불평등을 개선하고자 한 "사회주의" 토지 정책인 "여전론과 정전론"을 상상하였다"정전론"은 토지를 "우물 정()"으로 나누면, 모두 9구역의 땅이 나오는데, 이중 8구역은 8명의 농민들에게 나누어 주어 농사를 짓도록 하고, 1구역은 공동 노동을 하자는 것이다.

"여전론""(閭ㆍ이문 여)"를 농민들이 "공동 노동ㆍ공동 분배"하는 생각이다. 이를 실천하기 위한 방법이 1819"정약용""전라 강진군"에서 유배를 할 때 상상한 "정전론"이다"유교 경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통해, 당대 조선을 지배한 "주자학적 세계관"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을 시도했다.

   3대 주요 저서 (1 2): 목민심서흠흠신서경세유표       스승 : 부친  정재원 (진주 목사)    

 출 생 : 경기도 광주부 초부면 마재 (,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사 망 : 마현리 자택 (회혼일(혼인 60주년) 아침에 별세)

  유 언 : 죽기 전, 자녀들에게 신신당부로 이른 말ㆍ 한양을 벗어나는 순간 기회는 사라지니, 무슨 일이 있어도 한양에서 버티라.

  : 다산(茶山)여유당(與猶堂)사암(俟菴)탁옹(籜翁)태수(苔叟)ㆍ자하도인(紫霞道人)철마산인(鐵馬山人)문암일인(門巖逸人)

  별 칭 : 삼미 (三眉)- 다산이 어릴 때, "천연두"를 앓았다가 나았는데, 그때 "오른쪽 눈썹" 그 자국이 남아, 눈썹이 셋으로 나뉘었기에, "삼미(三眉)"라 불렸다.

  학 력 : 1783(정조 7)- 세자 책봉 경축 "증광시"에 합격하고, "회시""생원" 1789(정조13)- 식년 문과 갑과(甲科) 아원(亞元) 급제

  : 풍산 홍씨(1761~1839)- 1776.04월에 혼인ㆍ 10번 임신하여, 첫 임신 때 유산하고, 63녀를 낳았지만, 42녀가 요절하였는데, 요절한 자녀들은 대부분은 "천연두"로 사망하였다.

  자 녀 : 63(아들 정학연아들 정학유정씨 등 21녀 만 생존) ㆍ1: 정학연(1783~1859)ㆍ2: 정학유(1786~1855)ㆍ3: 정씨(1793~ ?)1: 4일 만에 사망3: 3세 때 천연두로 사망ㆍ4 : 3세 때 천연두로 사망ㆍ5: 태어난 지 얼마 안 돼, 천연두로 사망2: 3세 때 천연두로 사망6: 4세 때 천연두로 사망

  부 모 : 부 : 정재원 (진주 목사) ㆍ1째 모 : 의령 남씨 (정약현) ㆍ2 모 : 해남 윤씨 윤소온 (고산 윤선도의 5대 손녀윤두서의 손녀윤덕렬의 딸)  3형제와 딸 1명 (정약전정약종정약용- 4째 아들, 9세 때 생모 사망)ㆍ3 모 : 서모 김씨 - 생모 해남 윤씨 별세 후, 소실로 들어와, 정약용 형제를 양육 (이복동생 : 정약횡)

 저 서 : 회혼시 - 다산이 남긴 마지막 시      문 집 : 여유당전서    •  한 시 : 보리타작

 자찬묘지명 (自撰墓誌銘) : 다산이 회갑을 맞던 해, 자신이 직접 쓴 자신의 일대기

  삼미자집 (三眉子集) : 다산10세 이전에 지은 글을 모은 문집 (7세 지은시- 바다)

  저 서 : 맹자요의춘추고징상서고훈매씨서평주역사전역학서언대학공의대학강의중용자잠중용강의아언각비-이담속찬문헌비고간오소학주관소학기언심경밀험상례사전상례외편상의절요제례고정의례문답상례작의악서고존시경강의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대동수경풍수집의마과회통

2. 3대 주요 저서 (1 2) : 목민심서흠흠신서경세유표

 목민심서 : 백성을 다스리는 "지방 목민관 (牧民官ㆍ수령)"의 치민 (治民)에 관한 요령감계(鑑戒) 될 만한 마음가짐태도 등을 저술한 책

 흠흠신서 : "곡산부사"로 재직할 때, 실제 수사했던 사건들을 바탕으로 서술한 판결형벌치옥 (治獄)에 대한 주의와 규범에 관한 책ㆍ사람의 생명에 관한 일을 가벼이 처리하지 않도록 유의할 점을 적었다.

 경세유표 : 관제군현제와 전제(田制)부역공시(貢市)창저(倉儲)군제과거제해세(海稅) 상세(商稅)마정(馬政)선법(船法) 등 국가 경영에 관한 일체의 제도 법규에 대하여 적절하고도, 준칙(準則)이 될 만한 것을 논정(論定)한 책

 마과회통몽수전 : 어릴 적에 "천연두"에 걸렸으나, 왕족 출신의 "명의 이헌길"의 진료로 살았다 훗날 "이헌길" "마진기방"을 바탕으로, 한층 발전된 홍역 치료서 "마과회통"을 집필하고, 이것은 현대 의학이 들어오기까지 수많은 조선의 생명들을 구한다 또한 그는 "이헌길"의 생애를 다룬 "몽수전"을 집필하기도 했다.

정약용

3. "혜경궁 홍씨(정조의 생모)홍국영(정조의 최측근)"과 인척 관계

장인 "홍화보""홍국영"의 증조부 뻘, "혜경궁"에게는 조부 뻘이 된다"홍이상"2째 아들 "홍영(1584)"4"홍탁(1597)"13년 나이차였고, "홍영"의 증손자 "홍중기(홍만용의 아들)""홍만기(홍탁의 손자)"가 동갑이었다.

"홍만기(홍탁의 손자)"40세가 다된 늦은 나이에 아들 "홍중후"를 봤다"홍중후"1687년생으로 8촌인 "홍중해(홍국영의 고조부)""홍중기(혜경궁 홍씨의 증조부)"와는 29세와 38세의 나이차이가 난다. 따라서 같은 친척임에도 "항렬" 차가 많이 나게 되었다.

4. 형 제 (형 :  정약현정약전정약종 / 매형 :  이승훈)

① 정약현 (1751~1821): 이벽(천주교 신자)의 누이와 혼인, 장녀 정난주- 황사영(1775~1801)과 결혼

사영 백서사건  : 천주교 순교자, 1801(순조1) 황사영이 당시 베이징에 머물던 구베아 주교에게 편지를 보내려고 한 사건(백서란 명주 천에 쓴 편지라는 뜻)

황사영은 신유박해의 경위와 실태순교자들의 약력청나라 천주교 선교사 주문모 신부의 처형사실조선 정치계의 실정전교하는데 필요한 방안 등을 적었으며, 조선정부가 종교의 자유를 허락하도록 중국 정부에 조선을 강소성이나 사천성 같은 청나라의 한 성으로 편입시키거나, 청나라의 황제가 간섭해줄 것을 요구했으며, 심지어는 서양 열강들이 군대를 보내 무력시위에 나설 것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편지는 편지를 보내는 도중 압수되었으며, 황사영은 1801년 신유박해 때 처형되었다.

②  정약전(1758~1816) : "자산어보 (玆山魚譜ㆍ총 3권)"의 저자

"자산어보"1801(순조1) "신유박해"(천주교 박해사건), "전라도 흑산도"에 유배되어 1814(순조14)까지 생활하면서, 이 지역의 해상 생물에 대해서 분석하여 편찬한 해양생물학 서적ㆍ155종의 생물을 "인류(鱗類: 비늘 유)무린류(無鱗類: 비늘 무)개류(介類: 딱딱한 껍질)잡류(雜類: 물고기가 아니지만 물에 사는 생물)로 분류하여, 설명했다 이 분류방식은 당시까지 동양최고의 박물지인 명나라 이시진의 "본초강목"과 비교했을 때, 새로운 생물군을 찾아내고, 좀 더 구체적으로 나누었다는 점에서 우수했다

본초강목 (本草綱目) : 명나라의 이시진(1518~1593)이 지은 "약초학 연구서", 27년의 세월을 걸쳐 현지조사, 표본채집하여 작성3번 수정800여 종의 문헌을 참고했다. 초목금수충어 등 1,892종을 7항목에 걸쳐 해설하였으며, 1596년 남경에서 출판하였다.

③ 정약종(1760~1801): "신유박해" 때 순교자

 장남 "정철상"도 같이 순교ㆍ후처 (유소사)후처소생 : 정하상정정혜(丁情惠, 1796~1839) 역시 "기해박해"로 순교

④ 누이 : 매형 이승훈 (李承薰1756~1801ㆍ45세)에게 출가

"이승훈"은 조선 최초로 "천주교회에서 세례"를 받았으며, 천주교 순교자ㆍ1785(정조9), 명동의 "김범우"의 집에 처음으로 "조선 천주교회"를 세웠다 "이벽이가환정약용정약종정약전(3형제)"와 함께 주일 미사강론을 행하면서, 성서를 한글로 번역하여, 천주교인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북경교회 체제를 인용해, 자신이 "주교"가 되고, "권일신정약전최창현유항검이존창" 10명에게 "신부직"을 수행하게 해, 교회를 운영해 나갔다.(1786, 가성직제도)

1790, "음서"로 관직에 나가, "의금부 도사(都事)"가 되었고, 1791(정조15, 신해년) "서부도사"를 거쳐, "평택현감"이 되기도 하였으나, 그해 "신해박해"(천주교의 전국적 전파를 막으려는 조정의 탄압)가 일어나, 관직이 박탈되었다 1795, "주문모 신부 입국사건"으로 유배되었으며, 1801"신유박해" , "서대문 형장"에서 사형되었으며, 1868년 그의 뒤를 이어 아들손자가 순교하고, 1871년 증손까지 순교하여, "4"에 걸친 순교자 집안이 되었다.

5. 평 가

다산은 "유형원성호 이익"을 통해서 내려온 "조선 실학사상"을 집대성했다. 근대의 "남인학파"의 불평의 비판과 정치적으로 비현실적인 태도에 비하여, 그는 "남인학파" 중에서도 정치적으로 다분히 실제적인 경험을 지녔고, 자기의 학문사상의 체계화를 정리한 귀양지 "강진"에서 귀양살이를 보내기까지의 중앙 관리의 경력지방행정의 경험연천(連川) 방면의 암행어사 행각 청년시절의 왕환(往還)과 부친의 임소(任所)에 수행한 견문귀양살이 등은 그대로 생생한 교훈이며, 평생을 통하는 힘이었는데, 이와 같은 그의 사상에 현실적인 인식과 자료로 제공되었다.

다른 "실학자"들처럼, "성리학천문지리역상(曆象)산학(算學)의복(醫卜)"에 관련된 저서는 물론 "목민심서흠흠신서경세유표"등은 모두 "다산학의 귀결"이라고 할 수 있는 "사회경제사상의 총괄 편"으로, 정박명절(精博明切)하며, 탁견(卓見)이 아님이 없다.

이러한 사상이 급속도로 붕괴해 가던 "조선 사회"에 적절히 적용되지는 못했지만, 다산이야말로 조선조 학계에 전개된 진보적인 "신 학풍"을 한 몸으로 총괄, 정리하여 집대성한 "실학파"의 대표인 것이다일찍이 "위당 정인보""선생(茶山) 1인에 대한 요구는 곧 조선사의 연구요, 조선 근세사상의 연구요, 조선 심혼(心魂)의 명예(明銳) 내지 전조선 성쇠존망에 대한 연구이다."고까지 평하여, 그의 학문술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나타내었다.

20세기 초까지, "노론계" "남인"에 속하는 다산이 죽은 지, 130년이 지난 뒤에도 증오와 적개심을 유지하였다한국에 서점의 개념이 도입된 1890년대 이후, 자유롭게 책을 사서 읽을 수 있었음에도 그의 저술들을 외면하였고, "윤치호""노론계" 인사들이 "그의 책을 읽지도 사지도 않는다."고 지적하였다"어젯밤 추도식을 지낸 다산 정약용이야말로 이조가 배출한 아니 박해한 위대한 학자이다.(중략 그는 16년 동안 유배 상활을 하면서 매우 광범위한 주제를 다룬 70여 권의 귀중한 원고를 남겼다 그런데 요즘에도 노론계에 속하는 인사들은 그가 남인이었다는 이유만으로 그의 책을 읽지도, 사지 않는다." (윤치호 일기, 1935.07.17.일자)

6. 철학 사상

당시 "주자학"을 절대시하여, "이기설예론" 등의 논쟁에만 골몰하던 학계의 현실을 개탄하고, 보다 참되고 가치 있는 "경세치용의 실학"을 건설하기 위하여, "한대" 이후의 오도된 "유학"을 거부하고, "공자맹자"의 원시유학 "수사학(洙泗學)"으로 돌아가, "유학"의 본질을 파헤쳐, 후인에 의하여 왜곡되고, 날조된 이론을 바로 잡으려고 하였다.

"이이유형원이익""경세학적 태도"를 이어받아, 새 시대의 새 학문을 건설하려고 하면서, 당시 "중국"에 유입되고 있던 "서양의 종교과학" 등에 접촉하여, 이에 긍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새 학문의 목적을 "고증경세(經世)목민(牧民)" 등에 두고, "공자"로부터 재출발하여 독자적인 체계를 수립하였다"()""유형천(有形天)주재천(主宰天)역리천(易理天)"으로 구분하고, "주재천"에의 신앙을 강조하였고, "천명"을 정치적으로는 "인심"으로, 윤리적으로는 "정명(正命)"으로 보아, "백성을 위한 군자의 사명" 강조하였다.

"주자""천리설(天理說)이기설(理氣說)"을 부정하고, "천명이 도심(道心)에 있다"는 입장을 취하였다"인성론(人性論)"에 있어, 인간의 본성은 "기호(嗜好)"라는 "성기호설(性嗜好說)"을 주장하고, 사람에게는 "도의지성(道義之性)""금수지성(禽獸之性)"의 양성(兩性)이 있음을 밝혀, 이들 양자 간의 갈등을 인정하였다"인물성동이논변(人物性同異論辨)"에 있어, "한원진""인물성이(人物性異)"를 지지하면서도, "기질(氣質)의 성()은 같되, 본연의 성은 다르다"는 새로운 입장을 취하고, "주자학""기질지성청탁수박설(氣質之性淸濁粹駁設)"을 부정하였다.

"주자의 이기론(理氣論)"을 전면 거부하고, "공자맹자의 양기설(養氣說)"을 다시 주장하고, 이를 "목민(牧民)사상"과 연결 지었다"역리(易理)"의 성립과정을 합리적과학적으로 해명하여, "음양(陰陽) 64()" 등을 미신적인 교리(敎理)로 보는 데 반대하였다"성인(聖人)"을 신격화하는 데 반대하고, 인간은 누구나 "()을 다하면 성인이 될 수 있다"고 하였다. "공자의 충서(忠恕)효제(孝悌)" 이외에 "()"를 강조하여, 윗사람의 아랫사람에 대한 의무명으로 하였다"성정중화론(性情中和論)"에 근거하여, "예악중화론(禮樂中和論)"을 전개하고, 원시 유교의 "왕도(王道)사상"을 강조하였다

요컨대 다산은 "한나라" 이후, "유학의 병폐타락을 성리(性理)훈고(訓話)문장(文章)과거(科擧)술수(術手)" 5가지로 지적하였다다산은 "공자"에게로 돌아가, 보다 합리적이고 건전하며, 실제적인 "신유학(新儒學)"을 건설하여, "조선 봉건사회"의 모순을 극복하려고 한, "주체적혁명적 사상가"였다고 할 수 있다.

7.  부친에게서 글을 배우다

1762(영조38), 경기도 광주부 초부면 마재 (,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서 태어났다. "진주 목사"를 지낸 부친 "정재원"에게서 학업 하였다7살 때에 "바다"라는 시를 지은 것이 남아있는데, 10살 이전의 어린 시절에 지은 시를 모아, "삼미자집(三眉子集)"이라는 책을 내었다9세 때, 모친상을 당해, 맏형수 "경주 정씨"와 새엄마인 "서모 김씨"의 사랑을 받으면서 자랐다.

1776, 결혼하던 해에 부친 "정재원"이 벼슬길에 다시 나가게 되어, "한양"으로 올라가 살게 되었다15세 때에는 아버지를 따라 "화순"으로, 19세 때는 "예천"으로 가서 살게 되었다1783, "세자 책봉 경축 증광시"에 합격하고, "회시""생원"이 되었다22세 때,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 들어갔는데, 학문이 뛰어나 "정조"의 총애를 받았다23세 때, 큰형 "정약현"의 처남 "이벽"을 통해 "천주교"를 접하게 된다.

8.  대과 급제

1789(정조13), "대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진출하였다"규장각"에서 "정조"의 총애를 받아, 공부를 하면서 한강에 배와 뗏목을 잇대어 매고, 그 위에 널빤지를 깔아, "배다리"를 만들기도 하였다이후 10여 년간 "승정원의 가주서예문관 검열"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아, "노론 벽파"의 모함으로 인해 "서산 해미"에 유배되었으나, 11일 만에 풀려났다이후 "사간원홍문관"의 요직을 역임하였다.

1791, "수원 화성 설계"에 참여하여, "거중기"를 활용하였다1794, "성균관"에서 강의를 하게 되고, 10월에 "경기도 암행어사"로서 "연천삭녕" 등을 순찰하고 1799년에 "승정원 동부승지"가 되었다그러나 "천주교" 신부인 "주문모 신부"가 교우 "강완숙" 등의 헌신적인 도움을 받아, 전교를 하다가 적발된 "주문모 사건"에 휘말려, 그해 음력 7월에 "금정찰방"으로 좌천되었다이어 "병조참지좌부승곡산부사" 등을 지냈다.

9. 이계심의 조세 저항운동

"곡산부사"로 부임하기 전, "이계심"이라는 농업노동자의 조세저항운동인 "이계심의 난"이 일어났다. "정약용은 민중들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조항 10여 조를 가지고, 직접 나온 이계심을 처벌하지 않고, 관리의 부패에 항의하는 자들에게는 천금을 주어야 한다."고 말함으로써 그의 용기를 격려하였다.

, 다산은 "민중들을 국가의 권위와 법으로 억누르는 게 아니라, 생존권을 요구하는 민중들의 항의를 귀담아듣는 애민 관리"였던 것이다1799, "형조참의"가 되었는데, 곧 탄핵을 받아 "자명소(自明疏)"를 올리고, 사퇴하였다.

10. 유배ㆍ천주교 박해 연루(신유박해)

1800, "천주교"를 일시적인 종교적 현상으로 이해하여 묵인하는 온건한 정책을 펴던 "정조""노론" 진영에서 천주교에 대한 강경책을 주장하자, "사교(邪敎)는 자기 자멸할 것이며, 정학(正學)의 진흥으로 막을 수 있다."라는 그러니까 "성리학이 바르게 교훈된다면, 성리학에 반하는 천주교는 스스로 없어질 것이니 탄압할 이유가 없다"는 논리로 이를 거부했다. 하지만 "윤지충권상연""천주교 예식"으로써, 모친의 장례를 치른 "진산사건"이 일어나자, 관련자들을 처형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천주교""성리학 전통"을 부정할 경우에는 탄압하였다.

"정조"가 승하하자, 이듬해 정월, "조선 교회""대왕대비 정순왕후 김씨""천주교 탄압령"을 시작으로 탄압을 받았는데, 이를 "신유박해"라고 부른다. "정약용"과 둘째 형 "정약전"은 셋째 형 "정약종"과는 달리 이미 "천주교"를 버린 뒤였으나, "노론"에서는 이미 이들을 제거할 생각이었다하지만 "정약종""천주교 신자"일 뿐, "정약전정약용""천주교"에 거리를 둔 점이 확인되면서 사형에서 유배로 감형되었다그리하여 "정약용정약전"은 유배되었으며, "정약종""천주교" 신앙을 버리지 않아, 참수를 당해 죽었다

다산은 18년간 "경상도 장기전라도 강진" 등지에서의 유배기간에 "목민심서경세유표" 등의 저술 대부분이 이루어졌으며, "정약전"도 물고기의 생태를 기록한 "자산어보"라는 명저를 남겼다고난을 겪음으로써, 학자로서의 지성이 자라는 새로운 경험을 한 것이다1818(순조18) 음력 5, "귀양"이 풀려, "승지(承旨)"에 올랐으나, 음력 8월 고향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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