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조선/인물 • 악녀 (10인) • 부덕 (6인)

왕 (10대) : 연산군 (燕山君ㆍ1476~1506ㆍ30세ㆍ재위 12년)

by 당대 제일 2022. 11. 18.
반응형

 

"연산군 (燕山君ㆍ1476~1506ㆍ30세)"은 훗날 폐위된 "광해군(15대)"과 함께, 조선왕조 대표적인 "폭군ㆍ패륜아의 전형"으로 지목된다. 성종(成宗) 장남ㆍ"적자" 신분으로 세자에 책봉ㆍ폐비 윤씨 아들(얼굴에 손톱자국을 내어 폐비가 됨)이었다. 한글사용을 금지했던 왕ㆍ극심한 피부질환자ㆍ예술적 재능이 많아, 술을 마시면 시와 춤을 잘 추었다. 1506년, "중종반정"으로 폐위되고, "강화군 교동도"로 유배되었다가, 그해 11월에 병으로 사망했다.

 

1. 연산군 (燕山君1476~ 1506재위 1494~1506(12)향년 30)

"중종반정" 당시, "이빨을 덜덜 떨면서, 올 것이 왔다"고 하면서, 저항도 하지 못하고 쫒겨난다.  "대군"으로 강등되어야 했으나, "후궁 소생" 왕자들에게 부여되는 "군"으로 강등 당했다.  "임사홍"의 집을 찾아가, "폐비 윤씨(성종의 2계비)"가 죽었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다고 한다.  성종 후궁(귀인 엄씨ㆍ귀인 정씨) 아들인 "이항ㆍ이봉"으로 하여, 때려죽이게 하고, 찢어서 젓갈로 담근 후 산야에 버렸고, "이항ㆍ이봉"도 사사하였다. 또한 윤씨가 폐비되는데 일조한 조모 "인수대비"의 궁에 칼을 들고 뛰어 들어, 미친 행동을 하며 무례를 범해, 결국 "인수대비"는 쇼크사 했다.

"인수대비 초상" 때는 "3년 상을 받을 사람이 못 된다"하여, 3년 상 대신 25일로 장례를 마쳤다.  1504년(연산군10), "폐비 윤씨 복위문제"와 관련한 "갑자사화"때 흥분하여, 96명을 죽였다.  "갑자사화" 이후, 왕의 전횡을 통제해줄 사람이 없어지면서 문제가 발생한다. (신언패, 김처선 척살 등)  그밖에 "민간 여자ㆍ반가 사대부의 여자"들을 자의나 강제로 입궐시켜, 성관계를 갖는 등 치세 후반에는 방탕한 생활을 하였다.  이때, 춤ㆍ노래에 능했던 "장녹수"가 궁에 들어가게 되고, "연산군" 눈에 띄어서 후궁이 되게 된다.

재 위 : 1494~ 1506 (12)     왕 계 : 전임- 성종후임- 중종 (中宗성종 2이복동생1488~1544재위 1506~1544(38))      부 모 - 성종 (成宗1457~1494재위 1469~1495 (26))ㆍ생모 - 폐비 함안 윤씨 (1455~1482)장남폐 제헌왕후 윤씨ㆍ법모 - 정현왕후 윤씨 (1462~1530)파평 윤씨중종 모친생모 윤씨 폐출 이후의 모친

: 폐비 신씨(거창군부인1472~1537) 영의정 신승선(愼承善)의 딸임영대군의 외손녀 성품이 온순하고 착하며, 어질고 얌전하기로 소문난 여인

후궁(13): 숙의(淑儀5): 숙의 이씨(아들- 양평군 이강수이돈수)ㆍ숙의 윤씨숙의 곽씨숙의 권씨숙의 민씨  /  숙용(淑容3): 숙용 장씨 (장녹수(張綠水)- 이영수)"중종반정" 직후, 참수ㆍ숙용 전씨 (전전비(田田非)"중종반정" 직후, "장녹수"와 함께 참수ㆍ숙용 조씨    /  숙원(淑媛1): 숙원 김씨 (김귀비(金貴非)"중종반정" 직후, 장녹수와 함께 참수  /  내인(內人1): 내인 정금 (- 이함금)  /  숙화(淑華1): 숙화 김씨 (나주 기생 백견(白犬))

자 녀 : 아들-1 : 원손(元孫) 요절  /  아들-2 : 폐세자 황 연산군 폐위 후, 유배지 정선에서 사사 (11)  /  아들-3 : 양평군 연산군 폐위 후, 유배지 교동현에서 사사 (8)  /  아들-4 : 창녕대군 성연산군 폐위 후, 유배지 황해도 수안에서 사사 (6)

연산군

"사림파"의 증폭되는 불만과 "훈구파"의 부당하다는 여론 속에 "중종반정"으로 폐위되었다"강화도"에 유배되었고, "강화군 교동도(喬桐島)"로 이배되었다가, 유배된 지 2개월 뒤인 그해 음력 11월에 "교동도"에서 "역질"을 앓다가, 11.06"역질, 화병" 등의 후유증으로 병사했다그는 숨을 거두기 직전, 부인인 "폐비 신씨가 보고 싶다."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사망 후, 민간에서는 "독살설"이 퍼졌다고 한다. 사망 당시 그의 나이는 향년 30세였다폐위되었기에 시호가 없으며, "진성대군(중종)"의 이복형이자. 처고모부가 된다조선 왕실의 족보인 "선원계보(璿源系譜)"에도 묘호와 능호 없이, 일개 왕자의 신분으로만 기록돼있다그의 재위기간의 실록 역시 "실록"이 아닌 "연산군일기"로 통칭되었다

모후 "폐비 윤씨"의 폐출 후, "정현왕후"의 손에 자랐으나, 자신의 생모가 "폐비 윤씨" 임을 알게 되었다그 뒤 어머니 "폐비 윤씨"를 왕비로 추숭하려 하자, "성종의 유명"을 내세워 왕비 추숭을 반대한 "림파" 문인들과 충돌하다가, "무오사화갑자사화"를 빌미로 사림파를 제거했다(사화란 사림파가 화를 입었다는 것이다)

또한 "폐비 윤씨 사사 사건"을 빌미로 발생한 "갑자사화"에서는 사림파와 양대 파벌을 이루던 훈구파와도 절연하여, "사림파"를 적대세력으로, "훈구파"를 비호감 세력으로 만들어, 독단정치에 접어들었다"폐비 윤씨"의 복위를 강하게 반발하는 "사림파"에 대한 반발로 치세 후반에는 경연 등을 없애고, 학문을 중단하였으며, "사간원사헌부"를 폐지하여, 언로(言路)를 막기도 했다그 뒤로 "사림파(시골 선비)"의 간쟁을 일절 무시하고, "훈구파(서울에서 정치를 하는 귀족)"의 공적을 과거로 치부해, 정사를 독단적으로 처리하였다국왕 보좌기관이던 "사간원사헌부홍문관예문관" 등을 대폭 축소하거나 감원하였다"유가불가" 대표적인 기관인 "성균관원각사(圓覺寺)""기생 양성소유흥장"으로 만들어, 국초(國初)의 여러 제도를 폐지하고 욕보였다.

외모 : "죽창한화(이덕형의 수필집)"에서 "흰 피부에 키가 크고, 수염이 적고, 눈은 충혈되었다"고 적고 있으며, 왕 모독죄로 구속된 김수명은 "임금의 허리와 몸이 가늘다"고 기록했다.

 흥청망청 : 흥에 겨워 마음대로 즐기는 모양ㆍ돈이나 물건 따위를 마구 쓰는 모양  민간 경제가 붕괴 (연산군의 가장 큰 악행ㆍ조세는 올리지 않고, 공물의 양을 올린다)

 채홍사 (採紅使) : 각 도의 미인을 찾아내는 관리 (기생 2,000명 관리)

 채청사 (採靑使) : 푸른 것을 캐는 사신어린 여인을 찾아내는 관리

⑤ 무오사화 (戊午士禍) : 1498년(연산군4) 음력 7월, "연산군ㆍ유자광"이 "김일손" 등의 신진세력인 "사림파"를 제거한 사화

사림파는 선왕(성종)의 유지를 이유로 들어, "폐비 윤씨 복권"을 반대하였다. 이 때문에 감정이 악화된 연산군은 사림파의 제거를 추진한다.  "성종실록"을 편찬할 때, "김일손"이 사초(사관이 기록한 역사기록)에 수록한 "김종직"의 "조의제문"이 세조의 "계유정난"을 비난한 것이라는 "이극돈ㆍ유자광"의 참소에 따라, "김일손" 뿐 아니라 많은 사림파들이 처형하거나 유배하고, 이미 사망한 "김종직"은 부관참시를 당하게 된다.

"조의제문"의 내용을 보면,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난하였을 뿐만 아니라, 세조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은 "예종ㆍ성종ㆍ연산군" 등은 왕권의 정통성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으며, "세조의 왕위 찬탈"에 참가한 훈구대신들 역시 비난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그래서 "무오사화"가 일어나서 많은 "사림파"가 화를 입게 된다.

⑥ 갑자사화 (甲子士禍) : 1504년(연산군10) 음력 10월, "폐비 윤씨 복위 문제"를 추진하면서 "성종"때 폐비를 찬성한 훈구 원로세력이 대부분 숙청당했다. 사망한 사람이 96명

1504년 훈구파 내에서 "궁중파ㆍ부중파" 간의 분란이 발생하자, "연산군"은 친모인 "폐비 윤씨"의 원한을 풀고자 하였다.  "폐비 윤씨"의 폐비 사태를 주도했던 "성종"의 두 후궁(귀인 엄씨ㆍ귀인 정씨)을 비롯하여 당시 관련자인 "훈구파ㆍ사림파" 대신들이 살아 있으면 처형하고, 이미 사망했으면 부관참시했다.  사실상 "갑자사화"는 "사림파"에게 화를 입히려고 한 것은 아니었으나, "사림파"가 대부분이었다.

2. "연산군"의 여인들

① 장녹수 (張綠水ㆍ1466경? ~ 1506ㆍ향년 39세) 연산군보다 10살 위의 유부녀 (아들 1명)

"연산군"의 후궁(9번째 여자)ㆍ기생/ 창기 출신으로 "후궁"에까지 오른 여인ㆍ더구나 아들을 둔 몸으로 "숙용"에, 아니 "후궁"의 지위에 오른 여자는 조선을 통틀어서 "장녹수" 뿐이다. 천하의 "요부(妖婦")로 "교사(嬌邪)"와 요사스러운 "아양"은 견줄 사람이 없었고, 거만하였다ㆍ"제안대군(예종의 2째 아들)"의 노비(어머니는 천민 출신의 첩)로 천인(賤人) 출신

"천비 출신 기생"으로, 어릴 적부터, 몸을 팔아 생계를 연명하며, 여러 남자를 전전하였다. 비록 얼굴은 보통을 넘지 못했으나,  30살이 넘어서도 나이에 비해 매우 앳된 동안(童顔)으로, 피부ㆍ몸매가 16살 처녀같이 고았다고 하며, 특히 목소리가 고와 노래에 타고난 재능이 있었고, 가무(歌舞)를 비롯한 다방면의 예술분야에 천재적인 재능을 겸비하였다고 한다. 성품이 영리하여 사람의 뜻을 잘 맞추었고, 특히 노래에 타고난 재능이 있었다.

• 사 인 : 참형 (斬刑ㆍ"중종반정" 직후, "군기시(軍器寺)" 앞에서 참수)      • 남 편 : 연산군 → 1502년경에 만남 (1502~ 1506ㆍ만 (25)- 장녹수 (35) )        • 자 녀 : 아들 (가노(家奴) 아들)ㆍ딸(연산군 딸)

 최전향 (崔田香ㆍ궁녀)ㆍ수근비 (水斤非ㆍ노비)

"연산군"에게는 "장녹수" 이전에 승은(承恩)을 입은 궁녀가 2명 있었는데, 바로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게 된 "최전향(崔田香)"과 "수근비(水斤非)"이다. "최전향"은 궁녀 출신으로 "연산군"에게 승은을 입은 궁녀이고, "수근비"는 원래 "관노(官奴)"였다가 자색이 곱다는 이유로 "연산군"의 눈에 들어, "연산군"이 "옥금이"라는 여자를 대신 "관노"로 내리고, "수근비"를 궁궐로 불러들여, 승은(承恩)을 입힌 여인이다.

당시 "장녹수"는 이 두 여인을 질투하고 있었는데, 질투하기로는 이 두 여인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장녹수와의 기 싸움에서 1달을 못가고, 궁 밖으로 내쳐졌다. "연산군"은 얼마 뒤에 장 80대씩을 때린 후,"최전향"은 "강계"로, "수근비"는 "온성"으로 유배를 보내고, 전 재산을 몰수한다. 그러다 2달도 채 되지 않아, 희대의 사건이 터져 버렸다.

1504년(연산군10) "장녹수"의 집에 "연산군장녹수"를 비난하는 "괴서(怪書)"가 붙었는데, 이때 귀양가 있던 "최전향수근비"가 주모자로 지목되었다. 그 후 두 사람의 일족 60여 명이(부모형제, 친척) 모두 잡혀와 고문을 당하였으나, 아무도 자백하는 이가 없었고, 다시 이웃사람 40여 명을 잡아다가 국문하였다.

"연산군"은 "최전향ㆍ수근비"를 "군기시"앞에서 알몸으로 사지를 찢고, 머리를 뽑아 문 위에 달았다. 능지처참하고, 머리를 외딴 섬에 묻게 하였다. 또한 가족들은 죽이고, 가까운 친척은 모두 멀리 귀양 보냈다. 손과 발은 하나씩 땅에 묻어 두었으며, 질투하고 음해한 자의 말로를 보게 한다는 의미로 잘린 머리를 궁녀들에게 억지로 돌려보도록 시켰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 연산군일기" 10년06.09일의 기록에서, 사관(史官)은 "이는 장녹수가 참소(讒訴)하였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모습이 고와서 장녹수가 마음으로 시기하여 밤낮으로 왕을 부추겨서, 두 사람의 부자형제를 하루아침에 다 죽였다"고 적고 있다.

※ 그 외의 "연산군의 여인들"에 대한, 자세한내용은 이 Tistory 내에 있는 "장녹수 (연산군 후궁ㆍ10살 연상ㆍ1466?~1506)"과 "장녹수 外, "연산군"의 여인들"을 참조하여 주세요.

월산대군 (月山大君1455~1489왕족성종의 형연산군의 큰아버지) 부인 박씨      판서 "윤순 (尹珣)"의 부인 구씨 (영의정 구치관 (1406~1470)의 증손녀)       생원 "황윤헌"의 첩       최유회 (崔有淮)의 딸       성세정 (成世貞1460~?성수침(成守琛도학자명필)의 숙부)의 상주 기생       남천군 이쟁 (南川君 李崝)의 부인 최씨       꿈 때문에 죽은 기생       운평(運平) 옥지화(玉池花) : 치마를 밟았다고 목이 잘리다.

3. 고문 행위

연산군은 고문행위는 전례를 찾아볼수 없는 악형을 가하여, 폭군으로 기록되기도 했다그의 치세 중에 행해진 고문들의 대표적인 것으로는 "압슬포락(炮烙근질하기)물구나무 후 물고문착흉(가슴을 구타)주리 틀기불판 걷게 하기능지처사촌참(寸斬토막토막 자르기)"등의 형벌이 있었다

또한 사형자 혹은 이미 죽은 자의 시신을 갈아서, 바람에 날려버리는 "쇄골표풍(碎骨瓢風)" 등도 당대에 행해진 악형이었다특히 "무오사화갑자사화" 등 두 차례나 큰 옥사를 일으켜 많은 사류를 희생시킨 점 때문에, 사림파의 집권 이후, 대한제국이 멸망하는 1910년까지 폭군의 전형으로 길이 남게 되었다.

또한 폐비 윤씨의 사사 당시, 약사발을 들고 갔던 "우부승지 이세좌"가 집에 돌아와 이를 말하자, 이세좌의 부인은 "우리 집안에 남자가 하나도 남아나지 않겠구나.", 한탄했다부인의 예언대로 연산군 치세 중, 그의 일가들이 연좌되어 처형당한다.

4. 논란의혹

유흥과 사냥터를 조성할 목적으로 민가를 부수고, 사람들을 쫓아냈다.

"중종실록"을 살펴보면, 연산군이 자신의 유흥을 사람들이 보지 못하게 하려는 목적과 사냥터를 조성할 목적으로 민가를 부수고 사람들을 멀리 쫓아내어, 철거민들이 발생했다고 전하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실제로 연산군일기(제위 911.02일자 기사)에 승지들에게 명한 것을 살펴보면"100척 이내에 민가가 있으면, 불가한 것이 조선의 국법인바, 왕이 이 민가들을 철거하라 명했다. 이 때가 겨울인 것을 감안하여, 민가를 철거당한 백성들에게 집터를 제공하고, 큰 집중간 집작은 집으로 등급을 나누어 무명 503015필을 지급하라 명했다 그리고 다시 명을 내려 지금이 겨울임을 감안하여, 봄이 될 때까지 기다려서 철거하라 하였다.불법 민가를 철거하는데 소정의 보상금을 지급하고, 장차 다시 집을 세울 터까지 제공하는 것은 폭군의 증거라 하기 어렵다.

 흥청망청의 기원, 음란 행위

각 도에 "채홍사(採紅使)채청사(採靑使)"등을 파견해서 "미녀양마(良馬)"를 구해오게 했으며, 균관의 학생들을 몰아내고 성균관을 놀이터로 삼고, 한성부내 각 사찰을 연회장, 유흥장으로 만드는 등 황음(荒淫)에 빠졌다이때 선발해서 들인 흥청들과 그들의 식비, 유흥비 등으로 국가 정사가 피폐해진다고 하여 "흥청망국"이라는 말이 나왔는데, 이 말은 곧 "흥청망청"의 어원이 되었다.

"채홍사채청사"를 파견하여, 사헌부홍문관성균관 등을 기생들이 있는 집단으로 바꾸었다고 전하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이 기생들은 고려시대 때부터 있었던 가무악단이며, 연산군과 교감을 나눈 여인은 광한선월하매 정도였다이는 "중종반정"측에서 연산군을 깎아 내리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했었던 것 같다큰어머니인 월산대군의 "부인 박씨를 범했다"는 소문이 돌았는데, 박씨는 50대의 노인이었고, 연산군은 혈기왕성한 30대 초반의 나이였으므로, 이 소문 역시 "중종반정" 이후, 자신들의 정당성을 내세우기 위해 조작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언문 탄압 관련

연산군 제위 9년 음력 07.20일에는 연산군을 비방하는 언문 투서가 발견된 것을 계기로, 언문을 아는 자를 모조리 잡아들이고 언문 서적을 모두 태워 버리는 등 언문 사용을 금한다는 명을 내렸지만, 이내 거두었다"악보를 쓰고 책을 편찬할 때, 훈민정음을 자주 사용하여, 이를 계속 탄압했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연산군은 "언문을 아는 사람을 잡아, 일일이 필적으로 대조하고, 언문 책을 불사르고 사용을 금지했다" 하는데, 그것에 대해서는 연산군의 문화적 잘못이라는 평이 있다.

5. 평 가

조선의 대표적 폭군으로 평가되어 왔다더욱이 "서총대(瑞蔥臺)"라는 유흥장을 만들면서 백성을 강제로 동원하고, 베를 무더기로 바치게 하여 즉 백성들의 노동력과 재산을 수탈하여 민심도 돌아서게 되었다또한 자신을 비방하는 한글 투서가 발견되었다 하여 한글의 사용을 금지하기도 했다또 그의 난행을 비방한 투서와 그 투서에서 연산군을 비방하는 자가 누구라고 지목하여, 왕에게 리라는 고변이 있었는데, 자신을 비방하는 글이 "언문으로 쓰여졌다."는 이유로 한글 교습을 중단시키고, 언문구결(諺文口訣)을 모조리 거두어 불태우게 했다.

그러나 "연산군 일기"의 재위 2/3에 해당하는 기록은 성군의 자질에 손색이 없는 기록이지만, 그 이후 1/3에 해당하는 기록은 "중종반정 세력"에 의해 앞뒤가 맞지 않은 내용으로 기록되어있다조순(경북 문화재전문위원) "연산군은 성현(成俔) "용재총화"에서의 표현처럼 "거문고 타는 사람이 오랫동안 없다가, 금상(今上)이 풍류에 뜻을 두어 이를 가르치시므로, 재주 있는 이들이 많이 나오고 있다."고 한 것처럼, 풍류의 멋과 융통성이 없는 군주는 아니었다연산군의 왕권강화가 신권을 누르고, 민권을 발양시키는 대로 나아갔다면, 그는 만고에 위인으로 역사에 조명을 받았을 것이나, 그 역시 군림하는 권력자로 남아, 아직도 그에 대한 어두움의 그림자가 없어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고 평했다.

박시백(화백) "조선왕조실록(휴머니스트)에서 연산군은 연산홍등의 아름다운 꽃과 나무를 좋아하고, 시를 짓는 사람이었다."고 했다또한 1505(연산군11) 음력 06.09, 신료들이 처음으로 헌천 홍도 경문 위무(憲天弘道經文緯武)라는 존호를 올렸으나, 자신에게는 과분하다고 물리친다그러나 마지못해 받는 듯하면서, 존호를 받아들인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