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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물 • 악녀 (10인) • 부덕 (6인)

조선 천재 ① 신숙주 (1417~1475) : 세조 최측근ㆍ8개 국어 능통

by 당대 제일 2022. 10.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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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주 (申叔舟ㆍ1417~ 1475ㆍ58세)" 는 훈민정음 창제자의 한사람 (세종 때, 집현전 학사로 성삼문ㆍ박팽년ㆍ정인지 등)ㆍ뛰어난 학식과 글재주로 "6대 왕"을 섬겼으며, 왕실과 인척관계를 형성하였다ㆍ생전에 4번이나, "공신(정난공신ㆍ좌익공신ㆍ익대공신ㆍ좌리공신)"에 책록되었다ㆍ"세조"의 최측근(계유정난ㆍ세조 반정 적극지지)ㆍ의정부 영의정 (9년 역임)

 

1.  신숙주 (申叔舟ㆍ1417~ 1475ㆍ향년 58세)

문신 (종묘배향공신 94)언어학자외교관군인사상가시인윤회(정인지의 문인)의 손녀사위ㆍ후대 : 화가 "신윤복"(신말주 손자신공섭 서자신수진의 7대손)역사학자 "신채호"(직계 18대손)ㆍ"사육신, 생육신 김시습, 한명회, 권람" 등 다양한 인맥을 형성한 인물이기도 하다.

"집현전 학사", "중국어일본어몽골어여진어유구어(琉球語)" "동아시아 8개 국어"에 능통했다. 그는 "이두"는 물론, "중국어일본어몽골어여진어"를 두루 구사하였는데, "훈민정음"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이들 언어를 비교분석하고, "조선인"의 발음과 비교분석하여, 유사점차이점을 가려냈다.

"사육신"과 함께, "세종"의 유언을 받들어, "단종"을 보필하기로 약속했으나, 변절하여 "수양대군(세조)"의 편에 가담하였다. "단종복위 운동실패" , "단종금성대군의 처형"을 강력히 주장하여 관철시켰고, "남이의 옥사" , "남이장군 처형"에도 적극 참여하여, 사후 "사림파도학자"들로부터 비판과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사육신생육신 : 1456(세조2) "단종복위 운동" 도모발각되어 죽은 신하, 벼슬을 버리고 초야에 묻혀 산 충신

사육신 : 성삼문박팽년(집현전 학사 동기)하위지이개유응부유성원

생육신 : 김시습원호이맹전조려성담수남효온(또는 권절)

"그림"을 잘 그려서, "일본여진베이징"의 지도를 만들었으나, 후에 모두 실전되었고, 많은 "" 다양한 저작작품을 남겼으나, 후일 "사림파"에 의해, "역적"으로 단죄되면서 그의 "작품글씨"들은 "중종 때임진왜란정유재란병자호란 때" 다수 소각되거나, 멸되었다임종 직전, 문병 온 "성종"이 조언을 묻자, "일본과의 화친 관계를 잃지 마소서"라고 유언하였다

 글씨를 잘 썼는데, "숭례문의 현판 글씨" 중 하나는 그의 "글씨체"라는 전설이 전한다. "서예"로도 재능을 발휘해, 특히 "송설체를 잘 썼다"고 한다사후, "음식을 한 지, 1주일 만에 상하는 식용 나물을, 그의 이름을 빗대, "숙주나물"이라 부르며, 오래도록 조롱하였고, 또한 "숙주나물"을 요리할 때, 머리 부분을 맷돌이나 방망이로 짓이기는데, 이 또한 "신숙주를 짓이기는 것"이라며, 놀렸다.

출 생 : 조선 전라도 나주군 노안면 금안리 오룡동              : 희현당보한재

묘 소 : 경기 의정부시 고산동 산5번지 야산 (의정부 교도소 건너편)

경 력 : 1439- "친시문과 을과" 급제, 1447- "중시문과" 급제

별 칭 : 동방거벽ㆍ1451(문종1), ""명나라 사신 예겸(倪謙)"이 조선에 오자, 왕명으로 "성삼문"과 함께 시 짓기에 나서, "동방거벽 (東方巨擘ㆍ동방에서 가장 학식이 뛰어난 사람)"이라는 찬사를 얻었다.

가 족 : 외조부- 윤회 (세종 때 명신외교관신설된 집현전의 조직을 정착시키는 데 크게 기여ㆍ집현전에서 불교를 배척하고, "맹사성"과 함께 "팔도지리지" 편찬  사촌누이 : 부부인 신씨 - 삼촌 신평(申枰)의 딸폐비 윤씨의 모친연산군의 외할머니     - 신장 (申檣공조참판) : ""을 좋아하여, 아들들의 이름에 ""을 뜻하는 의미의 ""자를 붙였는데, 5 아들들의 이름이 "신맹주신중주신숙주신송주신말주"였다.

 1남 처 (며느리): 한명회의 딸공혜왕후- 장순왕후 자매   /  1남 아들(손자) : 신종호 의창군 (세종의 서자) 사위  / 1남 손자(증손자): 신 항 - 혜숙옹주(성종의 서녀) 남편   /  4: 신정 - 후녕군 (태종의 서7) 사위   /  4남 딸 (손녀) : 신 씨 - 금천도정 이변(태종의 서자 "온녕군"의 손자)

서 예 : "몽유도원도"의 찬문- "송설체"의 유려한 필치화명사예겸시고- "해서체"의 진면목

작 품 : 봉사조선창화시권(보물 1404)화명사예겸시고일본 지도만주 지도북경 지도

저 서 : 보한재집(保閑齋集)사성통고(四聲通攷)ㆍ한재집- 1644(인조22) 신숙주의 6대손인 "신숙(申洬)""영주군수"로 있을 때, 서관에 소장되어 있던 문집의 완질을 빌려서, 모사한 것이 전한다사성통고- 후대에 실전되었지만, "중종" 때의 "한어 통역관"이자, 언어학자인 "최세진" 그의 "사성통고"를 참조하여, "사성통해(四聲通解)"를 짓기도 했다.

기행문 : 북정록(北征錄)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

편 저 : 농산축목서(농업축산업기술에 대한 서적)

편찬 참여 : 국조오례의려사고려사절요국조보감동국정운

평생 그를 주변에서 호위하며, 미래를 예지해준 "청의동자(靑衣童子)"가 있었다는 전설이 전한다. 야사에 의하면, 노비가 된 "정순왕후(단종비 송씨)""자신의 집 노비로 달라""세조"에게 청했다가 거절당했는데, 이는 소문으로만 전해지다가, 후에 "한사경- 김택영 저서"에 이 야사를 기록해두었고, 후일 일제시기에 "이광수"가 작품 "단종 애사"에 이 야사를 수록하여, 후대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438(세종20), "생원시진사시"에 모두 합격하고, 1439(세종21) "친시문과(親試文科)"에 급제하여 "세종" , "집현전 학사"로서 "성삼문박팽년정인지" 등과 함께 "훈민정음의 창제연구"에 기여하였다또한 "훈민정음"의 확산을 위한 사업에도 참여하여, 수많은 고전불경의 언해본 등을 만들어내기도 했다그는 특히 "외교국방"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는데, 당시 이 분야에 관련된 대부분의 저술에 그의 손이 미치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였다.

1447(세종29), "문과 중시(重試)"4등으로 합격하여, "당상관"이 되었으며, 이후 "계유정난 세조 반정"을 적극 지지하였고, "세조"의 최측근으로 활약했다"문신"의 신분이었으나 병력을 이끌고, "여진족왜구" 토벌에 여러 번 출정하였으며, "의정부 영의정" 1461~14641471~1475년까지 역임했다그는 퇴청 후에도 별도의 "서실"을 열고, 문인들을 길러냈다.

"세조" , "과거시험""주시관(主試官)"13회나 역임하여, 과거시험을 통해 인재들을 선발하여, "좌주-문생 관계"를 형성하니, 직접 길러낸 제자들 외에도, "좌주-문생 관계"를 통해 사람을 얻음이 당대에서 가장 많았다.

"다국어"에 능하였고, 탁월한 학식문재로써, 다양한 책을 편찬하고, 역사적학문적 소양이 깊어 학문 교육에도 업적을 남겼다"유교의 사서육경" 외에도 "풍수지리학노장 사상" 등에도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

"세조"의 문화통치를 위해, ""들의 귀감이 될 "국조보감"을 편찬했고, 국가 질서의 기본을 적은 "국조오례의"를 교정간행하였으며, "사서오경"의 구결을 새로이 만들었다또한 "세조실록예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고, "동국통감"의 편찬을 총괄하였고, "동국정운영모록(永慕錄)" 등을 찬수하였으며, "고려사고려사절요"의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일본""통신사 서장관"으로 다녀 온 후, 몇 번 "일본"을 왕래하면서, 보고 들은 것을 그대로 기록, 이를 토대로 "일본의 풍물관습언어정치 세력기후자연 조건일본과 외교 시 필요한 사항" 등을 상세하게 밝혀 놓은 "해동제국기"를 저술하여, 향후 "일본"과의 외교에 참고가 되게 하였다.

< 인물스승 >

어려서부터 총명하였으며, 기억력이 남달랐는데, 자라면서 열심히 공부하여 읽지 않은 책이 없었다그를 본 사람들은 모두 "그가 장차 큰 그릇이 될 것"이라 예견하고는 했다성격은 침착하여, 깊이 생각하고, 난 뒤에 말을 하였다신숙주는 아버지로부터 학문과 글씨를 배웠는데, 글재주에 뛰어났다.

뒤에 "윤회정인지"의 문인이 되어, 그들로부터 학문을 배워, "정몽주"의 학통을 사사하였다첫 스승인 "윤회" "하륜정도전"의 문인으로, 그를 통해 "이색백이정안향"의 학통을 사사하였다뒤에 그는 스승인 "윤회" "손녀 사위"가 되었다.

2.  긍정적 평가

그에 대한 당대의 평은 "대의를 따르는 과단성 있는 인물"이었으나, 후대에는 "사육신생육신" 등을 쫓는 "도학적 분위기"가 형성돼, "기회에 능한 변절자"로 평가되었다사돈이기도 한, "이행"은 많은 지식을 집대성하고, 실전실무에 적용시키는 능력을 높이 평가하였다.

신숙주는 "훈민정음" 연구에 오래 참여하였고, "집현전"에 근무하는 동안, 퇴근도 잊고 독서실에서 연구로 밤을 새는 일이 허다하였다또한 "집현전 학사"로 있으면서, 당직을 자청하였고, 당직이 아니라도 "서고"에서 날을 새는 그의 열정을 "세종"은 높이 평가했다"세종""세자"에게 말하기를, "신숙주는 문무에 두루 능하여, 국사를 부탁할 만한 자이다"고 하였다"세종세조"는 그를 각별히 신뢰하여, 큰 일이 있을 때마다, 그를 불렀다.

건국 초기, 불편했던 "조일(朝日)관계"를 정상화시켰고, "강원도함길도""체찰사(體察使)"로 파견되어 "여진"의 침략을 막았으며, 몇 십 년 동안 "예조판서병조판서"로 국가에 봉사하는 등 "조선시대" 가장 뛰어난 "명재상어학자외교가저술가번역가경륜가군사전문가"로 많은 공을 세웠으나 "세조의 반정공신"이라는 이유로 "사림파"에 의해, 그 공로가 폄하되었다"왕정의 비능률성"이 인위적으로 제거되지 않는 당시의 시대 상황에서 "신숙주가 일신의 영달만을 도모했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견해도 있다.

사후 50년 뒤, 편찬된 1525년의 "용재총화"에는 "신숙주"를 가리켜, "문장과 도덕에서 모두 일대의 존경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그는 "정난"에 희생되지 않고 살아남아, "한글 연구보급전승에 기여했다"는 평가가 있다

또한 "대의를 따른 과감한 인사"라는 평가도 있다그는 "세조"가 즉위하는 것을 돕고, 많은 중요한 직책에 올랐기 때문에, "변절자"라는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그는 가장 "위대한 신하" 중 하나였고, "훈민정음"을 창조할 때, 크게 공헌한 신하로 칭송받는다하지만 "훈민정음 창제""신숙주성삼문" "집현전 학자들의 공이 있다"는 얘기는 어떤 기록으로도 남아 있지 않다.

3. 정적  평가

성종 이후, "사림파"가 정계에 진출하면서, "신숙주""세종의 유언을 저버린 배신자동료들을 배신한 변절자"로 지목되어, 규탄의 대상이 되었다"사육신생육신"이라는 용어는 "중종" 이후, "사림파"가 만들었다이는 "사림파""대의명분"이라는 가치관에 입각한 폄하였다또한" 그가 사육신의 거사를 밀고했다"는 출처불명의 소문이 돌면서, "김시습" 등으로부터 심한 비판을 받기도 했다.

"세조"의 공신으로 있을 때는, 왕의 뜻에만 편승하여, "승순(承順)"만을 힘썼고, "예종" 때는 형벌을 내릴 때 공정함을 잃었으며, "남이강순의 억울함을 구제하지 않았다"하여 당대에 비판을 받기도 했다"유자광" 등이 "남이"를 처형할 때, 동조한 점 역시, "남이에 대한 동정론"과 함께 맞물려서, 그에 대한 비난의 소재의 하나로 활용됐다.

민족적 절의를 고양시킬 필요가 절실했던 "일제 강점기"에는 씌진 일종의 역사서인 "한사경- 김택영 "에서는 "세조" 즉위 전후의 생사를 오가는 권력투쟁의 와중에서, "신숙주"가 미모에 끌려 "단종비 송씨"를 노비로 들이겠다고 청했다는 허구적이면서도 다소 선정적인 이야기가 등장할 정도였다.

한때 "신숙주""지조의리"가 강조되던 시대에 씌어진 "단종애사- 이광수 저" "월탄 박종화""금삼의 피목 메이는 여자"등의 작품에서 부정적으로 묘사되기도 했다특히 "일제강점기" "단종애사"는 널리 읽히는 소설이었고, 이는 광복 이후,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다"단종애사"의 유행 역시, "신숙주"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를 확산시키는데 기여했다.

"신복룡(건국대 교수)""사람들이 드라마야사신숙주에 대한 부정적인 기록만을 신뢰하여, 신숙주를 일방적으로 부정적으로 평가했다"고 보았다"단종애사"를 읽은 대부분의 독자들은 비분강개할 수밖에 없다독자들은 "성삼문"을 비롯한 "사육신의 절의(節義)"에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반면, "수양대군"과 그의 추종자였던 "신숙주"에 분노한다.

특히 "성삼문""국문(鞠問)"을 당하고 죽던 날, "신숙주"가 집에 돌아오니, 아내 윤씨가 남편을 향해, "오랜 동지인 성삼문과 함께 절의를 지켜 죽지 않고, 돌아온 것을 힐책하고, 부끄러워하면서 다락에 올라가, 목을 매어 자살하는 장면"에서는 더욱 비감(悲感)함을 금할 수 없다"성삼문은 의인이요, 신숙주는 비겁자라는 것"이다또한 소설 "단종애사"속에서 절개를 지키지 않은 남편을 부끄러워해 "부인 윤씨가 자살했다"는 묘사는 역사적 사실과 전혀 다르다"윤씨""자연사"로 죽었으며, 사망 시기도 "신숙주"가 사신으로 파견되어 임무를 수행하는 도중이었다.

4. "세조"와의 관계

"신숙주""계유정난"의 공적면에서는 "한명회" 보다는 적을지는 모르나, "세조"에게 끼친 정치적 영향력과 개인적인 친분에서는 누구보다 앞섰다따라서 "정사를 논하는 것"과 관련하여, "신숙주"는 단연 "세조"의 오른팔 격이었다"세조"는 그의 호방하면서도 치밀한 성품을 높이 샀다.

"세조"는 그를 놀려줄 생각으로, "구치관"을 불러서, "구정승"이라 불렀다그러자 "구치관"이 대답하자, "()정승을 불렀는데, 왜 새 정승이 대답하느냐", "구치관신숙주"에게 벌주를 내렸다.

"세조""신정승"을 부르자, "신숙주"가 대답했는데, "새 정승을 불렀는데, 신숙주가 대답했다"며 벌주를 내렸고, "구정승"을 부르자, "신숙주"가 대답하자, "()정승"을 불렀는데, "신숙주"대답했다며, 벌주를 내렸고, "신정승"을 찾아 "구치관"이 답하자 "()정승"을 찾았는데, "구정승" 답한다며 벌주를 내렸다.

5. 사 상

① "성삼문"과 비교

"신숙주"와 달리, "성삼문"은 "정치적인 것보다는 학문적이며, 유교적인 성향을 더 짙게 갖추고 있는 인물"이었고, 그에게 "정치적 경륜"은 그리 중요할 것이 없었다. 그의 궁극적 관심은 "충군ㆍ절의ㆍ학문"이었다.

"신숙주"는 "현실이 중요한 것이며, 남는 것은 인간이 성취해 놓은 업적"이라고 생각했다. "성삼문"은 "이상이 중요한 것이고, 남는 것은 대의"라고 생각했다. "성삼문"의 이러한 생각은 "죽음과도 맞바꿀 수 있을 만큼, 꿋꿋한 것"이었다. "성삼문"은 죽어가면서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으며, "신숙주"는 "단종의 폐위ㆍ죽음"이 목숨을 걸 만한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죽지 않고 살아남아, 자신의 갈 길을 갔다.

② 개혁관

그는 "새로운 인재를 등용하는 것이 개혁"이라 생각했다. "성삼문ㆍ신숙주"의 정치개혁에 대한 처방은 비슷하면서도, 약간 다르다. "성삼문"은 "제도개혁보다, 마음을 바로 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강조하는 반면, "신숙주"는 "제도개혁보다 인재를 바로 등용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사람이 바뀌지 않고는 "제도의 개혁이 어렵다"고 판단했고, "개혁"이 어려운 이유로는 "기득권의 반발"을 지목했다.

③ "미신"에 대한 배격

그는 "무속ㆍ점술"등을 "미신"이라며, 비판하였다. 1443년(세종25) 10월,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가 귀국하는 길에 "현해탄 앞바다"에서 풍랑을 만나 배가 침몰될 위험이 닥치자, 당시 사공들은 점을 쳐서, 배가 좌초될 위기에 처한 것은 그 배에 승선한 임신한 여자 때문이라는 원성이 일며, 그녀는 바다에 던져, 용왕의 진노를 풀어야 된다고 하였다.

"임산부"는 바다에 던져질 위기에 처했으나, "신숙주"가 나서서 이를 말렸다. 그는 기후의 변화는 자연의 뜻이라며, "매사를 어떻게 점술과 예언에만 의존하려 하느냐"며, "남을 죽여서, 나 살기를 구하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차마 못할 일"이라면서 말렸다. 얼마 뒤 구름이 걷히면서, 풍랑이 멈추었고, 그의 기지로 "임산부"는 극적으로 목숨을 구하였다.

④ "명분론"에 대한 거부

"수양대군"을 따라, "명나라"에 사절로 파견되었을 때, "명나라"는 "영락제ㆍ건문제" 사이의 왕위 다툼이 끝나고, 이른바 "인선의 치"가 꽃을 피우고 있었다. "영락제ㆍ건문제"의 제권 다툼과 "영락제"가 "정화" 등을 중용하여, "문치ㆍ무역"으로 "명나라"를 번영시키는 것을 보고 마음을 달리 먹게 되었다. 그는 신흥국가로서 흥하는 "명나라"의 모습을 보며, 조선의 선비사회를 지배하는 "명분론ㆍ의리론"에 대한 비판적인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첫 스승인 "윤회"를 통해, "정도전ㆍ하륜"의 학통을 계승한 것과 "스승 정인지"를 통해, "정몽주"의 학통 등, 다양한 스승의 학문을 접한 것도 그가 1가지 사상에 얽매이지 않는 요인이 됐다. 이것은 뒤에 "성삼문ㆍ박팽년" 등과 현실정치에서 길을 달리 걷게 된 사상적 원인 중의 하나가 된다.

그는 "현실에 도움이 되지 않는 명분은 폐기처분해야 된다"고 하였다. "조선왕조 실록"에 의하면, 그는 "항상 근본적인 것만 밝히고, 지나치게 세세한 것은 따지지 않았으며, 대사를 처리하고, 대의를 결단하는 것이 강하(江河)를 터놓은 듯 시원스러웠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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