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조선/인물 • 악녀 (10인) • 부덕 (6인)

3대 기생 ① 황진이(개성)ㆍ이매창(부안) + 1명

by 당대 제일 2022. 10. 8.
반응형

 

"황진이 (黃眞伊ㆍ진랑(眞娘)ㆍ1506~156761)"는 중종 때 기생으로, 그녀를 짝사랑하던 한 남성이 혼자 연모하다가, 어머니 "진현금"을 찾아가 청혼을 하였으나, 어머니의 반대로 무산되었고, 남성은 "상사병"에 걸려 죽게 되었고, 뒤에 이 사실을 접하고 "기생"이 되었다 한다. 

 

1. 황진이 (黃眞伊) : 진랑 (眞娘)ㆍ1506~1567향년 61

중종ㆍ명종 때(16C 초ㆍ중순) 활동했던 기생, 조선 중기의 시인ㆍ기녀ㆍ작가ㆍ서예가ㆍ음악가ㆍ무희중종 때, "개성의 황씨 성"을 가진 진사(맹인?)의 서녀(庶女)로 출생다정다감하면서도 "기예"에 두루 능한 "명기(名技)"이기도 했다.

뛰어난 "시 재주ㆍ학식ㆍ민감한 예술적 재능"을 갖추었다. 재주와 함께 출중한 용모로 더욱 유명하였다. 당시 "생불"이라 불리던 "지족선사"를 10년 동안의 "면벽 수도"에서 파계시키는가 하면, "호기"로 이름을 떨치던 "벽계수"라는 왕족의 콧대를 꺾어놓기도 하고, 당대 최고의 은둔학자 "서경덕"을 유혹하기도 했다. "화담 서경덕"을 유혹하려 하였다가 실패했다고도 한다. (대표작 : 만월대 회고시ㆍ박연폭포 시)

• 출 생 : 경기도 개성부         • 사 망 : 경기도 개성부 (묘소 : 경기도 장단군 장단면 판교리)       • 사 인 : 병사

• 별 칭 : 명월 (明月ㆍ기생 이름)

• 지족선사 (知足禪師): 생불(生佛)ㆍ천마산 지족암의 승려ㆍ10년 동안의 면벽 수도

 벽계수 (碧溪水): 왕족ㆍ세종 손자 "영해군파 길안도정(吉安都正) 의(義)"의 5째 아들 "이종숙"1508년생인종"  "황해도 관찰사"가정이 있어 황진이의 사랑을 거절

 서경덕(徐敬德): 최고의 은둔학자ㆍ진심으로 가슴에 품었던 인물 (사제 관계)"거문고주효(酒肴)"를 가지고 방문, "당시(唐詩)"를 배웠다.

 이사종 : 명창ㆍ6년 동거 (이사종 집에서 3년ㆍ황진이 집에서 3년)

 이생 : 재상의 아들ㆍ금강산 유람 동행ㆍ절에서 걸식하거나, 몸을 팔아 식량을 얻기도 함

※ 세부내용은  이 tistory 내에 있는  " 황진이 " 참조하시길요~

 

2. 이매창 (李梅窓) : 1573 (선조)~ 1610 (광해군)ㆍ향년 37세

 조선 중기 여류시인ㆍ"부안의 기생"으로, "개성 황진이"와 조선 명기의 쌍벽을 이루었다고 한다. "시문ㆍ거문고"에 뛰어났고, 가사ㆍ한시ㆍ시조ㆍ가무ㆍ현금에 이르기까지 다재다능한 예술인이었다. 선비들이 그녀의 시비를 세워 줄 정도로, 사랑을 받았다

"율곡 이이 (李珥ㆍ1537~ 1584ㆍ47세)"의 누나 이름도 "이매창 (李梅窓)"이다. (이이의  아버지는 "이원수 (李元秀)"이다)

• 호 : 매창       • 본 명 : 향금 (香今, 자- 천향)      • 활 동 : 전북 부안        • 시 기 : 선조ㆍ광해군 때

• 별 칭 : 계생 (癸生ㆍ계유년에 출생)ㆍ계랑 (癸娘ㆍ桂娘)       • 부 모 : "아전 이탕종"의 딸

•  "부안"에 있는 묘에 세운 비석은 1655년(효종6) "부풍시사"가 세운 것인데, 1513년(중종8)에 나서 1550년에 죽은 것으로 잘못 기록되어 있고, 그의 문집 "매창집" 발문에 기록된 생몰연대가 정확한 것으로, 37세에 요절하였다고 한다.

• 당대의 문사인 "허균 (許筠ㆍ1569~1618ㆍ49세ㆍ소설 홍길동전 작가)ㆍ이귀ㆍ유희경" 등과 교분이 깊었다고 한다.  "유희경의 시"에 "매창"에게 주는 시가 10여 편 있으며, "가곡원류"에 실린 "이화우(梨花雨) 흣날닐제 울며 쟙이고 이별한 님"으로 시작되는 "매창"의 시조는 "유희경"을 생각하며 지은 것이라는 주가 있다.  "허균의 성소부부고"에도 "매창"과 시를 주고받은 이야기가 전하며, "매창"의 죽음을 전해 듣고, 애도하는 시와 함께, "매창"의 사람됨에 대하여 간단한 기록을 덧붙였다고 한다.

• "매창" 시문의 특징은 가늘고, 약한 선으로, 자신의 숙명을 그대로 읊고 있는 것이며, 자유자재로 시어를 구사하는 데서, 그의 우수한 시재를 엿볼 수 있다. 여성적 정서를 읊은 "추사(秋思)ㆍ춘원(春怨)ㆍ견회(遣懷)ㆍ증취객(贈醉客)ㆍ부안회고(扶安懷古)ㆍ자한(自恨)" 등이 유명하다.

① 수사 (愁思)

평생치학식동가 (平生恥學食東家),  독애한매영월사 (獨愛寒梅映月斜) , 시인불식유한의 (時人不識幽閑意), 지점행인왕자다 (指點行人枉自多) 

떠돌며 밥 얻어먹기를 평생 부끄럽게 여기고, 찬 매화에 비친 달을 홀로 사랑했었다. 고요히 살려는 나의 뜻 세상 사람들은 알지 못하고, 행인들이 손가락질하며 잘못알고 있어라.

② 증취객 (贈醉客)

취객집나삼 (醉客執羅衫), 나삼수수렬 (羅衫隨手裂), 불석일나삼 (不惜一羅衫), 단공은정절 (但恐恩情絶) 

취객이 명주옷자락을 잡아당기니, 나삼수수렬(羅衫隨手裂) 온 자락이 손을 따라 찢어지네. 불석일나삼(不惜一羅衫) 옷자락 하나야 아깝지 않겠소만,  단공은정절(但恐恩情絶) 다만 고마운 정까지 끊어질까 두렵소.

3. 그 밖의 1 명 : 김부용 (평남 성천)ㆍ산홍 (진주)ㆍ이난향 (서울) 중 1명

① 김부용 : 김이양의 소실호- 운초 (雲楚)시기-  정조 때

 활 동 : 평남 성천전북 부안→ 기생→ 김이양의 "소실"

• "정조" 때, "평남 성천"에서 이름 높은 기생이었다.  후에 "김이양의 소실"로 들어감에 따라, 아주 높게 보지는 않는다.

• 시를 잘 지어 유고집으로 "운초집(雲楚集)"이 있다. 일제 때, "김호신"이 편찬한 "부용집(芙蓉集)"이 전하며, "안서 김억"이 가지고 있던 사본으로 출판한 것이 "조선역대 여류문집(朝鮮歷代 女流文集)"에 수록되어 있다.

② 산홍 : 명월관의 진주 기생

1906년(광무10), "이지용(을사오적 중 1인ㆍ내부대신ㆍ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종손ㆍ고종의 5촌 조카)"가 "산홍(명월관의 진주기생)"을 보고 마음을 빼앗겨, 천금을 내놓고, "소실"로 삼으려 하자, "산홍"은 큰소리로 "기생에게 줄 돈이 있거든, 나라를 위해 피 흘리는 젊은이에게 주라!"고 하였다 한다. 이에 "이지용"이 노하여, "산홍을 때렸다"고도 하고, "죽였다"고도 하는데, 확실하지는 않다.

③ 이난향 (1900?~ ?) : 본명- 선비ㆍ평양 태생ㆍ조선권번 소속

15살에 서울로 와서, 19세에 당대 가장 유명한 4대 기생조합 중 하나였던 조선권번에 소속했다. 그녀의 열정은 "가곡"으로는 "첫 레코드판을 녹음한 주인공"이기도 하며, 해당 레코드판은 현재 "국악음반 박물관"에 소장중이다. 모든 노래를 두루 잘 불렀다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잔 노래와 가사"가 장기로, 그녀의 노래는 가사전달이 분명했고, 명쾌한 시감으로 정평이 났다. "가곡 전수관 관장"을 맡고 있는 "인간문화재 조순자 명인(1944~)"이 그녀에게 가르침을 사사 받은 제자이다.

"하규일(1867~1937ㆍ근세 가곡의 거장ㆍ이왕직 아악부 지도사범)"으로부터 "정악ㆍ가무"일체를 배웠고, "하규일"은 자신의 모든 제자를 통틀어 가장 뛰어나다고 인정했다. 인기가 절정일 때, 한 신문사 기자와 결혼하여, "기생 일"을 청산하고, 집안일에 전념했지만, 음악에 대한 열정은 대단하여, 결혼 후에도 틈날 때마다, "하규일"에게 노래를 배우며, 연달아 "노래 4바탕"을 배웠을 만큼, 가곡 수련에 열성적이었다고 한다.

• "이난향"이 언급된 "삼천리 8권 6호"에 실린 내용

"이난향"의 본 이름은 "선비"이다. 1919년부터 기생으로 나섰으니, "난향"이 나이 19세였고, "평양"이 그녀의 고향이었으며, 춤 잘 추고 노래 잘하고, 양금 잘 타기로 그 당시 장안의 남자들은 어느 누구 모르는 이가 없었다. 더욱이 "난향"은 얼굴 잘나고, 거동 곱고, 말소리가 맑을뿐더러, 하나 물으면 열을 아는 재주덩어리였으니, 그것은 "난향"의 맑은 두 눈동자와 넓죽한 이마에 그 재주가 들었다고나 할 것으로, 글 잘하는 사람들도 "난향"이요. 돈 잘 쓰는 궐자들도 "난향"이었다.

그러더니 "난향"이 기적에 몸을 둔 지, 15년째 되는 소화 8년(1933년) 봄, 꽃피고 새 지저귀던 때. 그녀의 나이도 30년의 고개를 넘게 되니, 머지않아 닥쳐올 얼굴의 주름살을 막을 길 없음을 느꼈던지, "난향"은 "영남"의 어떤 부호의 사랑과 짝을 지어, 화류계에서 사라져 버렸으니.  지금에는 아들 딸 많이 낳고, 무심한 세월만을 손꼽고 있으리라.

4. 다른 1 명 : 논개ㆍ초요갱ㆍ홍랑 중 1명

① 논개 (論介ㆍ주 논개(朱 論介)ㆍ의기ㆍ1574~1593ㆍ향년 19세ㆍ전북 장수 출신ㆍ선조 시대)

조선 선조시대 열녀ㆍ의기ㆍ충절을 기려 "의암(義巖)"이라고 한다. 재주ㆍ지혜가 뛰어나고, 시문(詩文)에 능하였다. (정부문서에는 기록이 없음ㆍ전부 스토리)

• 병마절도사 최경회(崔慶會ㆍ1532~1593ㆍ향년 61세ㆍ문신ㆍ임진왜란 때 의병장)의 후처?ㆍ첩실? 임진왜란 때, 진주성을 지키러 왔던 의병장 (4대 의병장 중 1인)

• 온 시점 : 진주성 전투(1차) 직전에, "최경회 장군"을 따라 "진주"에 옴

• 논개에 대한 최초의 기록 : 어우야담(조선중기ㆍ유몽인 편찬) 임진왜란 전후의 야사ㆍ설화 등 기록

• 1설 : 임진왜란 때,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진주성"이 함락되자, "진주성 촉석루"에서 만찬을 즐기던 일본 장수의 허리를 깍지 낀 손으로 휘어잡아, 왜장과 함께, "남강(南江)" 물속으로 투신하였다.→ 사당 "의기사(義妓祠)"

• 2설 : 진주전투(2차)이후, "최경회"가 사망하자, "논개"는 고운 옷을 입고, 바위(의암ㆍ의로운 바위) 끝에 선다. 그때 왜군 장수 1명이 접근하자, 껴안고 뛰어내렸다.

논개

② 초요갱 (楚腰䡖) : "세종"의 아들들을 홀린 전설의 기생

 조선 최고의 "기녀"로, 허리가 잘록하고, 풍만한 엉덩이가 "초나라 미인을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박연(朴堧ㆍ1378~1458ㆍ문신ㆍ음악가)의 유일한 "궁중악" 수제자기녀(妓女) 출신ㆍ"경국지색"의 기생ㆍ조선 최고의 "요부"로 "한양" 최고 기생ㆍ"어우동황진이"와 함께, 그녀들 보다 더욱 뛰어난 기예를 갖춰, "조선"을 뒤흔들었던 기생천한 "기생" 신분으로 "세종"의 "아들 3위 관료들"을 농락하였다.

• "조선왕조실록"에 16번 거론된 "경국지색"의 기생ㆍ상대한 남자들이 대단한 인물들 : 단종실록(7번)ㆍ세조실록(5번)ㆍ예종실록(4번)

 홍랑 (선조 때, 함경도 홍원 기녀)ㆍ고죽 최경창

• "선조" 때, "함경도 홍원"의 이름난 절세미인의 기녀어려서부터 미모시재시문에 뛰어났다. 둘도 없는 효녀였으며, 어머니를 잃고, 기적에 몸을 얹었다. "교하면 다을리"에 묘가 있다.

• 고죽 최경창 (崔慶昌ㆍ1539 (중종34)~1583 (선조16))

"전라도 영암"에서 자랐으며, 28세에 "문과"에 급제, 정언ㆍ종성 부사를 역임했다. 문장ㆍ학문에 능해, "이이ㆍ송익필ㆍ최립" 등과 함께 "팔문장"으로 일렀으며, 당시에 뛰어난 "백광훈ㆍ이달"과 함께, "삼당시인"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악기 다루는 재주도 뛰어났는데, 어렸을 때에 "고죽"이 "서호강"을 건너는데, 왜구들이 쫓아왔다. 이에 "고죽"이 피리를 불었는데. 소리를 들은 왜군들은 "저 배에는 귀신(神人)이 있다"며 쫓아가기를 포기했다.  파직 후, "최경창"은 평생을 변방의 한직으로 떠돌다가 1583년에 45살의 젊은 나이로 객사했다.

• 고죽 "최경창"과의 사랑

"최경창"은 "홍랑"에 대한 애틋한 시, "飜方曲ㆍ증별ㆍ우" 등 3편을 남겼다. "홍랑"이 다시 "최경창" 곁으로 돌아온 것은 최경창이 죽고 난 이후의 일이다.  "고죽이 죽은 뒤, 홍랑은 스스로 얼굴을 상하게 하고 그의 무덤에서 시묘살이를 했다"고 되어있다.  절세미인이었던 홍랑이 자기 얼굴을 자해하고, 최경창 묘 옆에서 10년을 시묘살이를 했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에는 "최경창"의 시고를 등에 짊어지고 다녀서 병화를 면하였다. "최경창"의 시가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은 "홍랑"의 순전한 사랑 때문이었다.  "홍랑"이 죽자, "해주 최씨"문중에서 지극한 마음을 받아주어, 문중사람으로 받아들이고, "최경창"의 묘에서 내려다보이는 곳(최경창의 무덤 아래)에 "홍랑"의 묘를 쓰고, 장사를 지내줬다. 지금도 "최경창"부부의 "합장묘" 바로 아래에 "홍랑"의 무덤이 있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