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조선시대 3대 기인 (奇人)ㆍ이인 (異人)
"기인 (奇人)ㆍ이인 (異人)"이라는 것은, 일반인과 함께 세상을 살지만, 말ㆍ행동ㆍ정신ㆍ사상이 보통사람과 다른 사람으로, 일반인보다 가진 재주가 신통하고, 비범한 사람이다.
① 김시습 (매월당 (梅月堂)ㆍ金時習ㆍ1435~1493ㆍ58세) : 세종17~성종24 : 생육신ㆍ학자ㆍ승려
② 정렴 (북창(北窓)ㆍ鄭 磏ㆍ1506~1549ㆍ43세) : 중종 1~명종 4 : 문장가ㆍ산수화가ㆍ경기도 포천현감
③ 이지함 (토정(土亭)ㆍ李之菡ㆍ1517~1578ㆍ61세) : 중종12~선조11 : 포천 현감ㆍ아산 현감
2. 김시습 (매월당 (梅月堂)ㆍ金時習ㆍ1435~1493ㆍ58세): 생육신ㆍ학자ㆍ승려
일설에는 그가 사육신의 시신을 몰래 수습하여, 노량진 (노량진 사육신 공원)에 암장했다고 한다.
1447년(12세) 중시 백일장 장원 급제하였으나, "수양대군"이 자행한 "단종"에 대한 왕위 찬탈에 불만을 품고, 은둔생활을 하다 승려가 되었으며, 벼슬길에 오르지 않았다. 1493년, "충청도 홍산군 무량사"에서 병사하였다.
저 서 : 금오신화(조선 최초의 한문소설)ㆍ신귀설ㆍ태극설ㆍ화엄일승법계도주병서ㆍ법화경별찬ㆍ고금제왕국가흥말론ㆍ위치필법삼대론
조선왕조에서 가장 뛰어난 천재 문인 "김시습"은 "시ㆍ소설ㆍ평문" 등 수많은 위대한 문화유산을 남겼고," 문학가ㆍ사상가ㆍ철학가ㆍ종교인"이다. 사상과 철학이 담긴 여러 저서에는 "인간의 마음ㆍ우주의 이법ㆍ귀신의 세계ㆍ유불선 종교 철학ㆍ도덕과 가치관ㆍ국가와 사회와 가정의 질서ㆍ성인과 임금과 신하" 등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한 것들이 총망라되어 있다.
조선왕조 최고의 사상가인 그의 사상은 "성리학(유교)ㆍ불교ㆍ단학(도교)" 등 다방면에 "무불통지(無不通知)한 달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의 사상은 "동양의 철학과 사상, 즉 유불선(유교ㆍ불교 ㆍ도교)"를 넘나드는 폭넓은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세조(수양대군)"의 왕위찬탈에 비분강개한 그는 끓어오르는 울분을 절제하며, 조선 팔도를 유랑하면서 수많은 저서를 남기고, 방랑으로 점철된 삶을 산다.
어려서부터 천재로 소문이 자자했던 그는 "세종대왕"의 부름을 받고, 5살에 궁궐에 들어간다. 어린 "김시습"이 쓴 글을 보고, "세종대왕"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옛글을 모방하여 "세종대왕"이 반포한 훈민정음 28자는 "신라 눌지왕 때, 박제상(363~419)"이 저술한 것으로 알려진 "징심록(澄心錄)에서 발췌했다"고도 한다.
"박제상"이 저술한 "징심록"과 "백결선생 박문량(박제상 아들)"이 저술한 "금척지(金尺誌)"를 보고 "징심록 추기(澄心錄追記)"를 썼다. "징심록"의 한 부분이 "부도지"다.

2. 정렴 (북창(北窓)ㆍ鄭磏ㆍ1506~1549ㆍ43세): 문장가ㆍ산수화가ㆍ경기포천 현감
"부친 정순붕"이 "을사사화"의 주역이 되자, 이를 적극 말리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여, "포천현감 직"을 버리고, "경기도 양주 괘라리"에 은거하면서, 속세와 인연을 끊는다. 산속에 은거하면서, "한양" 쪽은 보지도 않기 위해, 문ㆍ창문을 모두 "북쪽"으로 내어 살았다. "정염"의 호가 "북창(北窓)"이 된 바로 이 때문이다.
"도교(단학)"의 신선술 수련서인 "용호비결(북창비결)"을 저술하였고, 미래의 예언을 담은 "궁을가"를 썼다. "용호대사"로도 불리는 "정염"은 조선왕조 시대 "도교의 내단" 사상, 즉 "단학의 중시조" 또는 "비조"로 모셔지고 있다.
어려서부터 총명함이 남달랐다. 따로 스승을 모시고 공부하지 않았으며, 책을 1~2번 보면 모두 외웠고, 천문ㆍ지리ㆍ의약ㆍ복서ㆍ율려ㆍ산수ㆍ한어(漢語)와 배우지 않은 외국어도 능통했다. 맑은 영혼으로 신(神)에 통했으며, 선"가(禪家ㆍ불교)의 육통법"을 시험하기 위해 입산 3일 만에 "유불선(유교ㆍ불교ㆍ도교)"에 정통하였다.
애초에 관직에 뜻이 없었으나, 아버지 "정순붕"의 강압적인 권유로 "과거(사마시)"에 응시하여 잠시 관직에 있었다. "문정왕후ㆍ윤원형" 등 소윤 세력은 "명종"을 허수아비 왕으로 만들고, 부정부패와 매관매직 등 권력을 전횡한다. 아버지 "정순붕"은 "대윤" 등 "사림세력"을 죽이는데, 앞장선 공로로 "우의정"까지 올랐다.
아버지 "정순붕"은 "명종(13대)"이 즉위한 해에 일어난 "을사사화(1545)"에서 "윤원형" 등 소윤 세력과 결탁하여, "윤임" 등 대윤 세력을 숙청하는 일에 앞장섰던 인물이다. 재위 8개월 만에 갑작스럽게 승하한 "인종(12대)"는 "북창 정염(정북창)"을 항상 마음에 두고 있었다.
"중종(11대)" 때, 개혁정치를 했던 "조광조"는 "동소문(혜화문)" 밖에서 가죽신을 만드는 "갖바치"를 자주 찾아가서 학문적 고견을 들었다. "조광조ㆍ갖바치"는 양반ㆍ천민이라는 신분에 구애받지 않고 마음을 터놓은 벗이었으며, "조광조"에게 "갖바치"는 정신적 지주였다.
"조광조"는 "갖바치"를 왕세자(인종)에게 후일에 반드시 크게 써 줄 것을 건의하였다. 그래서 "인종"은 세자시절부터 병풍 위에 "영의정 갖바치ㆍ좌의정 서경덕ㆍ우의정 정북창" 등 3정승의 이름을 써놓고 있었다.
"화담 서경덕"의 수제자인 "박지화"와 절친하였고, "고경명ㆍ남사고" 등과도 교유하였다. "미수 허목(허미수)"은 그를 "정염(정북창)은 남과 더불어 말할 때는 단 한마디라도 공자의 학문에서 벗어난 적이 없으니, 이미 그 깨달음은 중(선禪)과 같고, 그 행적은 노자와 같았으나, 사람을 가르치는 데는 한결같이 성인으로 종(宗)을 삼아서였을 것이다."라고 평하였다.
"이유원 (李裕元, 1814~1888)"이 쓴 "임하필기" 제24권 "문헌지장편(文獻指掌編)"에서는 "정렴은 신묘하게도 여러 나라의 언어를 이해하였다. 일찍이 중국에 들어갔는데, 유구국(琉球國) 사람이 그를 찾아와 "주역(周易)"을 가르쳐 달라고 청하자, 그는 즉시 유구국의 말로 가르쳐 주었다. 관(館)에 있던 여러 나라 사람들이 그 소문을 듣고서 그를 찾아오자 각기 그 나라의 언어로써 대화를 나누니, 그를 천인(天人)이라고 칭찬하면서 놀라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하여 여러 나라 언어에 능통한 이로 소개하고 있다.

3. 이지함 (토정(土亭)ㆍ李之菡ㆍ1517~1578ㆍ61세): 포천 현감ㆍ아산 현감ㆍ목은 이색의 7대 후손
"이이"와 친하여 "성리학"을 배우라는 권고를 받았으나, 욕심이 많아 배울 수 없다고 거절했다. 당대 최고의 선비(학자)였던 "이이ㆍ조식" 등 많은 학자와 교류하였고,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뛰어난 학자이며 기인이었다.
재물에 욕심이 없어, 평생 가난한 생활을 하였고, 항상 베옷과 짚신을 신었다. 평탄하지 않은 인생사에 조선 팔도를 유랑하며, 솥으로 된 갓을 쓰고, 나막신을 신고, 남루한 옷을 입고 다녔다고 한다. 선조 때, 뛰어난 행실로 벼슬에 올라, "포천 현감"을 거쳐, "아산 현감"을 지냈다. 관내 걸인의 수용과 노약자의 구호에 힘쓰는 등 민생문제의 해결에 큰 관심을 가졌다.
• 이이 : (이지함을) 물건에 비유하자면, 기화이초(奇花異草)와 진금괴석(珍禽怪石) 같다.
• 조헌 : 마음이 깨끗하고 사욕이 적어서 고결한 행실은 세상에 모범이 되었다.
• 조선왕조실록 : 백성을 다스림에 있어서는 돌보는 정성을 다했으며, 맑은 마음에 욕심이 적고 뛰어난 식견을 가졌다.
• 토정 : 마포나루에 자기가 사는 집을 흙으로 쌓고, 그 위를 평평하게 해서 정자를 지은 것에서 유래
• 토정비결 (土亭秘訣): 신수 석중결ㆍ석중결(石中訣)ㆍ이지함이 지은 도참서(圖讖書): 중국에서 유행하던 여러 가지 술서(術書)를 인용해 엮었다. 개인의 사주(四柱) 중 태어난 연ㆍ월ㆍ일 3가지로 "육십갑자(六十甲子)"를 이용하여 1년 동안의 신수를 12달별로 사람들의 길흉화복을 예언하고 있다.

"토정비결"은 "이지함" 사후 300년이 지나서, 일반백성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토정비결"은 "이지함"이 저술한 것이 아니라는 의견이 있다. "고손자 이정익"은 고조부의 유고를 모아, "토정유고"를 간행했다.
맏형 "이지번"과 함께, "개성의 서경덕"으로부터도 글을 배웠다고 한다. "성리학(주자학)ㆍ주역(역학)ㆍ천문ㆍ지리ㆍ산술ㆍ노장사상(도교)ㆍ불경ㆍ의약ㆍ복서" 등 다양한 학문에 통달한 박학다식한 천재였으며, 뛰어난 재주를 겸비한 기인으로, 괴상한 행동과 예언 등의 일화가 많다.
명문 집안 양반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종증조부 이개"는 "단종복위 운동"에 연류되어, 멸문지화를 당했고, "아버지 이치"도 "갑자사화"에 연류되어 유배되었고, "명종" 때 당시 사관이었던 "친구 안명세"는 "문정왕후ㆍ윤원형 일파"를 비판하는 글을 써놓아 참형을 당했다.
처갓집은 "정종(2대)"의 후손이었으나, 역모에 연류되어, 장인이 능지처참을 당하면서 처가도 몰락한다. 평탄하지 않은 인생사에 그는 조선 팔도를 유랑하며, 솥으로 된 갓을 쓰고, 나막신을 신고, 남루한 옷을 입고 다녔다고 한다.
그가 벼슬길에 나선 것은 그가 56세 되던 1573년(선조6)에 이르러서다. 선비로서 학식과 인품이 뛰어난 그는 주변의 천거로 "포천 현감"으로 발령받는다. "포천 현감"으로 부임하자, 산해진미를 차려 놓은 밥상을 보고, 백성이 먹는 평범한 밥상을 차려 올리라고 하였다.
팔도를 방랑할 때, 소금을 만들어 팔고, 물고기를 잡아 팔고, 바가지를 만들어 파는 등의 경험을 바탕으로 자신이 직접 실험해 보았던 염업ㆍ수산업ㆍ수공업 등으로 백성을 더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획기적인 대책을 조정에 건의하기도 했다. "충청도 아산 현감"으로 있을 때, 세계 최초의 사회복지기관인 "걸인청"을 만들어 빈민구제에도 힘썼다. "조헌(임진왜란 의병장ㆍ학자)"도 큰 영향을 받았으며, "조카 이산해"는 숙부 이지함에게 학문을 배워 "영의정"에까지 오른다.
'조선 > 인물 • 악녀 (10인) • 부덕 (6인)' 카테고리의 다른 글
3대 기생 ① 황진이(개성)ㆍ이매창(부안) + 1명 (2) | 2022.10.08 |
---|---|
5대 개차반 (왕족): 사도세자ㆍ양녕대군ㆍ임해군ㆍ정원군ㆍ순화군 (2) | 2022.10.08 |
3대 간신 : 류자광ㆍ임사홍(임숭재)ㆍ김자점 (2) | 2022.10.08 |
3대 도적 : 홍길동ㆍ임꺽정ㆍ장길산 (2) | 2022.10.08 |
고려 삼은 (三隱) : 이색 ㆍ정몽주ㆍ길재 (2) | 2022.10.08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