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신 (奸臣)"은 군주의 눈ㆍ귀를 가리고, 온갖 아부ㆍ아첨ㆍ감언이설로 절대 권력자의 눈ㆍ귀만 즐겁게 해주는 자이며, 국가와 백성을 위한 공욕 (公慾)보다는 개인의 영달을 위해, 절대 권력에 빌붙고, 권력을 이용하여 부정부패 등을 일삼아 사리사욕(私利私慾)을 채우는 자로, 자신의 욕망을 위해 권력을 탐하는 "간신"은 눈치도 빠르고, 때론 잔악한 면도 있으며, 임기응변에도 능한 "처세술의 달인"이다. 비열하고 배신을 일삼는 사람이지만, 그만큼 머리가 비상하게 잘 돌아간다.
1. 조선시대 3대 간신
① 류자광 (柳子光ㆍ1439~1512ㆍ73세ㆍ세종21~중종 7) : 서자 출신ㆍ무오사화ㆍ갑자사화 장본인
② 임사홍 (任士洪ㆍ1445~1506ㆍ61세ㆍ세종27~중종 1) : 임숭재 (4째 아들)ㆍ외척 (성종과 사돈)
③ 김자점 (金自點ㆍ1588~1651ㆍ63세ㆍ선조21~효종 2) : 음서 출신ㆍ왕실 인척 (인조와 사돈)
2. 류자광 (柳子光ㆍ1439~ 1512ㆍ73세): 서자 출신ㆍ무오사화ㆍ갑자사화 발생 장본인
조선 중종 때, 정치인 (의정부 좌찬성)ㆍ무신ㆍ"서얼 (庶孼)"출신으로 "6조 (六曹)"에 임명된 첫 사례ㆍ"사림파"에 의해, "전형 (典型)"이 될 만한 특징이 있는 "간신 (奸臣)"으로 비판받았다.
"세조 (이시애의 난)ㆍ예종 (남이의 옥)ㆍ성종ㆍ연산군 (무오사화, 갑자사화)ㆍ중종"의 총애를 받았다. "이시애의 난(1467)ㆍ남이의 옥(1468)ㆍ중종반정(1506)"에 참여, "김종직"과 원한 관계ㆍ"서얼(庶孼)출신"으로서 "무사"가 되었다가, "이시애의 난" 진압 때, 세운 공로로 "세조"의 총애를 얻었다.
"남이의 옥(1468)" 처리로 "예종"의 총애를 얻었다. 1468.11월 "남이"가 살던 집→ "예종"이 "류자광"에게 하사ㆍ사형당한 "강순"의 아내 "중비(仲非)"와 "민서(閔敍)"의 첩의 딸 "민말금(閔末今)"을 노비로 하사
1485년(성종14) "한명회"가 은퇴하면서, 조정에서 실력자가 된다. 사림파 "공격에 가담하여, "무오사화(1498, 연산군4)"와 "연산군의 갑자사화(1504, 연산군10)"을 도왔다.
"중종반정"에도 동참하였고, "기묘사화(1519,중종14)이후, 10년 뒤에 "사림파" 재집권 이후, 역적으로 단죄되었다. (이시애의 난 : 버려진 함경도 호족인 이시애가 지역감정이 덧씌워진 중앙권력과의 갈등으로 일으킨 난)
5명의 임금(세조ㆍ예종ㆍ성종ㆍ연산군ㆍ중종)"을 모시면서 수많은 사람을 음해하고 무고하여 죽음으로 몰고 가면서, 본인은 출세가도를 달렸다. 혹자는 "훈구(공신)세력ㆍ사림(士林ㆍ선비)세력"이 "서자 출신"으로 승승장구하던 "유자광"을 무시하자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었다고도 말한다. 그는 조선시대 관직에 나갈 수 없는 "서자"에서 "정1품"까지 올랐으며, "무령부원군"의 봉작까지 받았다.
1908년,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 이완용"의 주도 아래, "유자광"은 복권된다. "유자광"은 "첩의 자식"이란 굴레 속에서 멸시를 받고 자랐다. 재주ㆍ용맹을 뛰어났으나, 서출이라 관직에 나가지 못하고, "감사(직업군인)"의 길을 택한다. "이시애의 난(1467ㆍ세조12)" 진압에 참여하고, "남이 장군"을 모함(1468ㆍ세조13)하여 죽게 만드는 과정에서 공훈을 인정받아 "공신첩"을 받았다.
"연산군" 때, 일어난 "무오사화 (1498ㆍ연산군4)ㆍ갑자사화 (1504ㆍ연산군10)"을 일으킨 장본인이다. "박원종ㆍ성희안ㆍ유순정" 등이 주도아래, "중종반정 (1506)"이 일어나자 "반정 세력"에 가담하여 공신이 된다. "사간원ㆍ사헌부" 등에서 "유자광"을 탄핵하는 상소가 빗발쳤고, 1512년 몇 번의 유배지를 옮겨 다니는 과정에서 병들어 죽었다.
2. 임사홍 (任士洪ㆍ1445~1506ㆍ61세) : 임숭재 (4째 아들)ㆍ외척 (성종과 사돈)
외척ㆍ성리학자ㆍ음서로 출사ㆍ"폐비 윤씨 사사사건"을 연산군에게 통보 • 임사홍 부인 : 효령대군 (태종 이방원의 2째 아들 )의 손녀 • 1남 (임광재) : 현숙공주(예종의 딸) 남편 • 4남 (임숭재) : 휘숙옹주 (성종의 서녀) 남편
어려서부터 머리가 비상하였다. "음서제(양반 자제 특채)"로 조정에 들어갔지만, 관직에 있으면서 과거에 합격하였다. 한때 "유자광ㆍ임사홍"은 결탁하여 권력을 남용하기도 했다. "임사홍ㆍ임숭재 부자"는 "연산군"의 명으로 조선 팔도의 미인을 뽑아 한양으로 보내는 "채홍사"의 역할도 하였다.
그가 "채홍사" 노릇을 적극적으로 임했던 것 같지는 않다. "미인이 많다고 소문난 평안도에서 미인을 뽑아오라고 보냈더니 뽑기는 뽑았지만, 기준에 두루 맞는 미인이 하나도 없어 안 되겠다"는 보고를 올린 내용이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그는 처음에는 할 수 없다고 피하다가, 마지못해 "채홍사"로 방방곡곡을 돌아다녔다. 그러자 연산군은 벌컥 성을 내며 신하들 앞에서 그를 매도하였다. 이후에도 그는 "채홍사"를 회피하거나 소극적으로 하였다. 그러자 연산군은 그가 "이극균"과 친했던 점을 언급하며 그를 위협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사사롭게는 사돈이면서, 주군이었던 "성종"의 유지를 헌신짝 버리듯 하고, 배신의 길을 걷는다. "성종"은 승하하기 직전, "폐비 윤씨의 일을 앞으로 100년간 발설하지 말라"고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임사홍"은 주군을 배신하고, "신수근"과 결탁하여, "폐비 윤씨"의 일을 "연산군"에게 말해 "갑자사화"의 피바람을 만든다.
1504년(연산군10), "갑자사화"로 "김종직"의 문인이었던 "임희재(3남)"도 죽는다. 1505년, "연산군"에게 빌붙어 아버지 "임사홍"과 함께 승승장구하며, 국정을 농단했던 "임숭재(4남)"가 병으로 죽는다. 1506년, "중종반정"이 일어나면서 뛰어난 학식과 비상한 머리를 가졌던 "임사홍"은 척살되고, 얼마 후 "부관참시"까지 당한다.
즉위 직후, 사초의 기록을 우연히 찾아 본 "연산군"은 "정현왕후"가 자신의 생모가 아니며, 생모인 "폐비 윤씨가 사사 당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연산군"은 생모인 "폐비 윤씨"를 왕후로 추숭하려는 사업을 시도했고, 이때 "사림파" 관료들은 "선왕 성종"의 유지를 이유로 "폐비 윤씨"의 추숭을 반대했다. 이때 "임사홍"은 "신수근ㆍ유자광" 등과 함께, "고령군부인 신씨(폐비 윤씨 생모)"를 "연산군"과 만나도록 주선한다. "임사홍"은 "신수근"과 함께, 궐내에 출입하던 "유자광"을 통해 "연산군"에게 선을 댔다.
"생모 사사" 외에 외할머니가 그때까지 생존해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된 "연산군"은 "임사홍"을 통해 외할머니 "고령군부인 신씨"를 만났고, 신씨가 전해 준 "피 묻은 적삼"을 보고 이성을 상실했다.
4명의 아들 중 총명했던 "3남 임희재"는 "연산군"의 살육을 비판하다가 죽임을 당했다. 그러나 "임사홍"은 아들 "임희재"가 죽임을 당하던 날에도 슬픈 내색을 하지 않고, 평일과 다름없이 그의 집에서 연회를 베풀고 고기를 먹으며 풍악을 울리니, "연산군"이 사람을 시켜 이를 엿보고는 더욱 신임과 은총을 더하였고, 사람들은 그를 무서운 사람이라며 경계하였다.
1504년 이후로, 앞서 자기를 비난한 자에게 일일이 앙갚음하였고, 이미 죽은 사람까지도 모두 "부관참시"하였다. 후대의 "사림파"들이 기록한 실록의 평가에 의하면, 온 조정이 그를 승냥이나 호랑이처럼 두려워하여 비록 세 "신씨(愼氏ㆍ신수근ㆍ신수겸ㆍ신수영) 형제"라 할지라도 또한 조심스럽게 섬겼다고 한다.
3. 김자점 (金自點ㆍ1588~1651ㆍ63세) : 음서 출신ㆍ왕실 인척 (인조와 사돈)
김세룡 (김자점의 장손) : 효명옹주 (인조 서장녀ㆍ후궁 귀인 조씨 (숙원 조씨))와 결혼
"인조반정(1623)"의 공신으로, 사사롭게는 "인조"와 사돈이며, "영의정"에까지 오른 인물이다. 성미가 모질고 사나웠으며 일처리도 엄하고 급했으므로 이서(吏胥)들이 그를 호랑이처럼 두려워하였다. 어려서 "대학자 성혼"의 문하에서 잠시 수학하였고, "음서제"로 "광해군" 때, 조정에 출사한다.
1624년, "이괄"은 "인조반정"의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난을 일으켰다. "인조"와 함께 한양을 버리고, "공주"로 도망갈 때, 감옥에 있던 "사림(북인)" 수십 명을 죽였다. "인조ㆍ후궁 귀인 조씨(숙원 조씨)" 사이에서 태어난 "효명옹주"가 "손자 김세룡"과 혼례를 올린다. 1644년, "인조반정"의 1등 공신인 "심기원" 등을 역모혐의로 죽인다.
한때 "임경업 장군"을 두둔하고 감싸기도 했으나, 정치적 입장이 달라지자, "심기원 역모사건"에 "임경업이 연류되었다"고 무고하였고, 결국 "임경업 장군"은 "김자점"에 의해 억울하게 죽는다.
"후궁 귀인 조씨(숙원 조씨)"와 작당하여, "소현세자(인조 장남ㆍ33세)ㆍ민회빈 강씨"를 죽이고, 3명의 아들을 제주도로 귀양 보내고, 그중 둘을 유배지에서 사망하게 하는 일에 앞장섰다.
1649년, "인조"가 죽고 "효종"이 즉위하면서, "친청(親淸)파"로 북벌에 반대했던 그는 탄핵 당한다. 1650년, 유배 중, "효종의 북벌정책"을 "청나라"에 밀고하였고, 1651년 "인조ㆍ후궁 귀인 조씨(숙원 조씨)" 사이에서 태어난 "숭선군"을 임금으로 추대하려던 역모가 적발되어, 그는 "거열형"에 처해졌는데, 흔히 아는 "거열형"이 아닌 사지를 토막 내고, 마지막에 목을 자르는 형벌을 받았다.
"인조반정"에 참여하였고, "인조"의 인척이었으며, "친청파" 정치인이었다. "음서제"로 관직에 올라, "의정부 영의정"에 이르렀으며, "낙흥부원군"에 봉군되었다. "인조반정" 모의에 가담하였으며, 1623년 반정을 꾀해 군대를 모아 "홍제원"에서 "이괄" 등의 군사와 합류하였고, 반정에 성공한 공로로 "동부승지"로 특별 승진하고, "도원수"가 되었으며, "정사공신 1등관"에 녹훈되고, "낙흥군"에 봉해졌다.
"이괄의 난" 때, 옥에 갇힌 "기자헌" 등 북인 인사 40명의 전격 처형을 건의하기도 했다. 그 뒤 "도원수"로 "병자호란" 당시 대처미숙으로 파면되었다가 복직하여, "병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이 되고, "심기원" 일파를 제거한 뒤,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올랐다. 이후 "친명파"이자, 북벌론자인 "임경업 장군" 등을 제거한 뒤, "효종"이 즉위하고 "송시열" 등의 등용으로 "북벌론"이 대두되자, "효종의 북벌"을 "청나라"에 밀고하였다. 이후 유배되었다가 "아들 김식의 역모사건"이 발생하자, 사형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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