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삼은 (高麗三隱)"은 목은 이색 (牧隱 李穡ㆍ1328~1396ㆍ68세)ㆍ포은 정몽주 (圃隱 鄭夢周ㆍ1337~1392ㆍ55세)ㆍ야은 길재 (冶隱 吉再ㆍ1353~1419ㆍ66세)를 말한다.
1. 목은 이색 (牧隱 李穡ㆍ1328~1396ㆍ68세)
찬성사(贊成使) 이곡(李穀)의 아들ㆍ이제현의 제자ㆍ경주 이씨(慶州 李氏) 익재공파(益齋公派)의 파조(派祖) ※ 이제현(李齊賢ㆍ1288~1367ㆍ79세) : 고려 후기 문신ㆍ성리학자ㆍ역사학자ㆍ시인ㆍ화가
고려 말기 문신ㆍ정치가ㆍ유학자ㆍ시인ㆍ사대부의 아버지 (여말선초 거의 모든 사대부들을 키워 낸 인물ㆍ계보에서 거의 최상단)ㆍ성리학을 고려에 소개, 확산시키는 역할을 하였으며, 성리학을 새로운 사회의 개혁, 지향점으로 지목하였다.
• 제자 (역성 혁명파): 정도전ㆍ남은ㆍ조준ㆍ하륜
• 제자 (절의파ㆍ관학파ㆍ사림파): 정몽주ㆍ길재ㆍ권근ㆍ이숭인 (정몽주 문하생)
"고려왕조의 존립"을 전제로, 개혁정치를 희구하였고, 급격한 전제개혁에도 반대하고 있었다. "이성계ㆍ정도전"의 "역성혁명"에 협조하지 않았고, 조선 개국 이후에도 출사하지 않았다. 1392.04월, "정몽주"가 피살되자 연좌되었으나, "정도전"은 그를 구하지 않았다. 그는 이후 다시 "금천ㆍ여흥ㆍ장흥" 등지로 유배된 뒤에 석방되었다.
1395년(조선 태조4) "태조"는 그의 재능을 아껴 "한산백(韓山伯)"으로 봉하여, 예를 다하여 출사(出仕)를 종용하였으나 끝내 고사하고, "망국의 사대부는 오로지 해골을 고산(故山)에 파묻을 뿐이다"고 하였다. 1396년, "여주 신륵사"로 가던 중, "여강(驪江ㆍ연자탄)"의 배 안에서 급병으로 갑자기 사망했으므로 사인(死因)에 대하여는 후세에 의혹을 남기고 있다. (다른 설은 정도전이 보낸 부하 자객에 의해 독살되었다는 설이다)
어려서부터 총기가 뛰어났고, 7세 때(1335, 충숙왕 복위4)부터 독서를 하기 시작했으며, 아버지의 친구이자 "안향ㆍ백이정"의 학문을 계승한 "이제현"을 찾아가 수제자로 "정주학"을 배웠다. 그의 학문은 "이색"으로 이어졌다. 1365년, "신돈"이 등장하고 개혁정치가 본격화되면서, 그는 교육ㆍ과거 제도 개혁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1371년, "신돈"이 제거되고, 이어 "공민왕"이 죽자 그의 정치활동은 침체기를 맞았다. 그 후 1375년(우왕1) 벼슬에 나아가, "정당문학ㆍ판삼사사"를 역임했다. 1386년, "지공거(知貢擧)"가 되고, "우왕"의 사부(師傅)가 되었다.
1388년, "위화도 회군"이 일어나자, "문하시중"에 임명되었다. 그는 "위화도 회군"을 군령을 위반하고, 왕의 명령을 거역한 행위로 이해했으므로, 주체세력이나 동조세력에 반감을 갖고 있었다. "위화도 회군"의 중심인물·동조세력은 당대의 대유(大儒)인 "이색"과 같은 반대세력을 제거함으로써 정치권력을 장악하고 개혁을 추진하고자 했다.
"정도전ㆍ오사충ㆍ조박"의 상소로 인하여, 그는 "장단"으로, 아들 "이종학"은 "순천"으로 유배되었다. 그 후, "김저(金佇)의 옥(獄)과 윤이(尹彝)ㆍ이초(李初)의 사건"에 연루되어 정치적 노선을 같이하는 "이숭인ㆍ변안렬ㆍ우현보" 등과 더불어 투옥되거나, "금주·여흥" 등지로 유배당하는 등 고려 말기의 정치권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조선왕조가 개창되면서 고려 말에 "결당모란(結黨謀亂)한 자"로 지목되어 "우현보" 등 56명과 더불어 논죄되어, 직첩을 빼앗기고, 서인(庶人)이 되어 "해도(海島)"에 유배되었다. "장흥"에서 석방된 후, 3년간 "한산"에서 지내고, 1394년(태조 3) "오대산"에 들어갔다가 이듬해 서울로 돌아왔다.
"이색"은 "원나라"에서의 유학과 "이제현"을 통하여, 이 시기 선진적인 외래사상인 "주자 성리학"을 수용했고, 이를 바탕으로 고려 말기의 사회혼란에 대처하면서 정치사상을 전개했다. 그는 "원의 주자학"을 받아들였으므로, 그 영향을 강하게 받게 되었다. "이(理)ㆍ기(氣)ㆍ태극(太極)"과 같은 "주자학"의 핵심개념을 사용하여, 만물의 생성과 변화를 설명했고, "주자학"의 수양론인 "성학론(聖學論)"을 전개했다.
그러나 "주자학"에서 말하는 "수양론"과 달리, 죽음과 인간적 고뇌와 같은 초인간적·종교적 문제는 여전히 "불교"에 의존했다. 또한 송대의 혈연·의리·도덕·윤리 등을 말하는 "도통론(道通論)"을 전개한 것이 아니고, "원의 형세론적 도통론"을 전개했다. 즉 그의 주자성리학의 발원지인 원의 영향과 불교의 영향 속에서 송대의 주자학과 구분되는 정치사상을 전개했다.
2. 포은 정몽주 (圃隱 鄭夢周ㆍ1337~1392ㆍ55세)
고려 말기 문신ㆍ외교관ㆍ유학자ㆍ경북 우항리 출신ㆍ이색의 문인이라고 하나 기록은 없다ㆍ손녀(정종의 서자 선성군의 부인 오천군부인)·서 손녀(한명회의 첩)
• 제자 : 길재(사림파의 비조)ㆍ권우(세종대왕 스승)ㆍ백이정ㆍ안향→ 이제현→ 이색→ 정몽주→ 권근→ 김종직→ 조광조→ 이이(율곡)
"고려 개경"에 거주하였던 그는 1360년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로 출사하여 여러 벼슬을 지내고, "성균관대사성ㆍ예의판서ㆍ예문관제학ㆍ수원군" 등을 지내며, "친명파 신진사대부"로 활동하였으나, "역성혁명ㆍ고려개혁"을 놓고 갈등이 벌어졌을 때, "온건개혁"을 선택하였다. "정도전"의 오랜 친구였으나, "역성혁명·온건개혁"을 놓고 갈등하던 중 정적으로 돌변했다. "역성혁명파"의 조선건국에 반대하다가, 1392.4월(공양왕 4) "이성계"의 문병차 돌아가던 길에 "개경 선죽교"에서 "이방원" 일파에 의해 암살되었다. "역성혁명"에 반대하여, "이성계"정도전" 일파를 제거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오히려 "이방원" 일파에 피살되었다.
암살 직후, "역적"으로 단죄되었으나, 후에 1401년(태종1) "태종"에 의해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의정부사"에 추증(追贈)되고, "익양부원군(益陽府院君)"에 추봉되었다. "태종"은 "정도전, 남은"을 제거한 후, "정도전" 등을 격하시키기 위해, 조선 건국에 반대하고 피살당한 그를 의도적으로 충절의 상징으로 격상시켰다.
※ 정몽주 묘에 얽힌 전설
언덕을 올라서 보면, 왼쪽이 "정몽주의 묘"이고, 오른쪽은 "저헌 이석형(樗軒 李石亨)의 묘"이다. "이석형(정몽주의 손녀사위)"은 "세종" 때에 과거에 급제하여, "세조" 때에 "신숙주ㆍ한명회"와 더불어 "훈구세력"의 대표 인물이다. "개성 선죽교"에서 "정몽주"는 "이방원"에 의해 살해된 후, "개성 근처 공동묘지"에 묻혔다. 후일 "이방원"이 왕위에 오른 후, "정몽주"의 후손에 의하여, 고향인 "경북 영천"으로의 이장(移葬)을 건의 받고, 이를 허락한다.
"경북 영천"으로 가던 중, 이 곳 "수지 근처"에서 "명정(銘楨, 상여 맨 앞의 벼슬을 나타내는 깃발)"이 바람에 날려, "이석형의 묘 자리"에 떨어진다. "정몽주"의 후손들은 이곳이 하늘이 정해 준 "명당"으로 알고, 상여를 멈춘다. 이곳이 "명당" 임을 알게 된 "정몽주의 손녀"는 친정보다는 시댁과 자손들이 더욱 번창하기를 비는 마음에서 밤새워 물을 퍼서, 자리에 뿌렸다.
다음 날, "묘 자리"를 파보니, 물이 많이 나와서, "정몽주"의 후손들은 옆의 현재의 "정몽주 묘" 터로 바꾸었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정몽주의 후손들은 그다지 번성하지 못한다. 그 덕분인지 "이석형의 연안 이씨(延安 李氏)" 가문은 번창하여, 후손들은 수많은 벼슬을 하게 되며, "달성 서씨(達成 徐氏)ㆍ광산 김씨(光山 金氏)"와 더불어, "조선의 3대 명문 가문"이 된다.
3. 야은 길재 (冶隱 吉再ㆍ1353~1419ㆍ66세)
고려 말기 문신ㆍ조선 초의 성리학자ㆍ충신의 대명사ㆍ금오산인(金烏山人)ㆍ사림파의 조상ㆍ고려가 망하자 관직을 버리고, 선산에 낙향하여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 전념하였다. 비록 조선의 관직에는 진출하지 않았으나, 동문들, 길러낸 제자들을 통해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 제자 : 김숙자(김종직 부)ㆍ배인경ㆍ최운룡ㆍ김종직ㆍ조광조등을 통해 사림파로 학맥이 계승
• 시조 : 오백 년 도읍지(都邑地)를 필마(匹馬)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依舊)하되 인걸(人傑)은 간 데 없다. 어즈버, 태평연월(太平烟月)이 꿈이런가 하노라.
"고려의 충신"하면 생각나는 "정몽주"도 처음에는 충신으로 쳐주지는 않았고, "길재"만 "고려의 충신"으로 쳐주었다. 1430.11.23일, "세종"이 "삼강행실도"를 만들 당시, 충신으로 누구를 써야 하는지 묻자, 신하들이 "고려 말에는 길재 밖에 없음"이라는 기록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래서 "길재"는 1431.11.11일 "삼강행실도"에 "충신의 대명사"로 기록된다.
11세 때, 절에 들어가 글을 배우고, 그 뒤 "정몽주"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집이 매우 가난해, 말ㆍ종도 없었고, 어머니에게 하직해 아버지를 두고 뵙지 못하는 것은 자식 된 도리가 아니라고 해서 "개경"으로 갔으며, 아버지를 섬겨 효성이 지극했고 계모 노씨가 그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공경ㆍ효도를 다해 노씨가 자신이 낳은 자식과 같이 대접해 이웃 마을에서도 칭찬할 정도였다. 우왕의 죽음을 듣고 상복을 입은 채, 해장을 먹지 않는 등 3년 상을 지내면서 어머니를 정성스럽게 봉양해 반드시 맛있는 음식을 장만했으며, 집안에 양식이 자주 떨어져도 늘 염려하는 기색이 없었다.
고려의 충신으로 "길재"의 이름이 남게 된 것은 1400년, "세자 이방원"이 "태상박사(太常博士)" 벼슬에 임명해 관직에 나와 줄 것을 수차례 권유했으나 그는 "이전의 인연을 생각해 불러준 게 고마워서 온 것이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겠다."면서 끝내 거절했다. "이방원"은 좀 뻘쭘했던지 벼슬을 내린 게 자기가 아니므로 왕에게 직접 가서 말하라고 보냈다.
결국 그는 "정종"에게 상소를 올려, "여자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고, 신하는 두 왕을 섬기지 않으니, 자기도 고향으로 내려가게 해달라"며 하사받은 벼슬을 완곡히 거절한다. 집이 가난한데도 벼슬을 거부한 게 "정종"이 보기에도 괴이했는지 신하들에게 "길재"가 누구냐고 묻기까지 했다. 당시 신하들은 "한미한 유자"라고 답한 것으로 보아 확실히 집이 가난했던 모양이다. "정종"이 어찌 해야하는지 "권근"에게 조언을 구했는데, 벼슬을 더 올려주거나 아니면 두고두고 이름을 남겨 모범으로 삼으라고 해서, 결국 "정종"은 "권근"의 조언으로 "길재"를 충절의 아이콘으로 삼게 된다.
한번은 "이방원"이 "길재"가 산골에서 가난하게 산다는 말을 듣고, 쌀과 콩 100섬을 보냈으나 그는 나라를 위해 아무 것도 한 일이 없다면서 받지 않았다고 한다. 후에 "세종"이 길재의 자손들을 등용하려 하자, 자신이 고려에 충성했듯이 후손들은 조선에 충성해야 한다면서 자손들이 관직에 나가는 것을 허락해 주었다. "세종"이 즉위하던 해인 1419년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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