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적(盜賊)"은 다른 사람의 물건을 훔치거나 빼앗는 사람ㆍ그런 목적으로 결성된 범죄조직을 말한다. (비슷한 말로 비적ㆍ약탈자가 있다) "도둑"과 비슷한 단어이나, 보통 "무장한 강도 집단"을 "도적"이라 부른다. "중국"에서는 전통적으로 재물을 훔치는 것을 "도(盜)", 목숨을 빼앗는 것을 "적(賊)"이라 불렀다.
1. 조선시대 3대 도적
① 홍길동 (洪吉童ㆍ1440?~1510?ㆍ70세) : 연산군 (10대) 때ㆍ얼자 출신 도적
② 임꺽정 (林巪正ㆍ1504~ 1562ㆍ58세) : 명종(13대) 때ㆍ백정 출신 도적
③ 장길산 (張吉山ㆍ ? ~ ? ㆍ1650년대?) : 숙종(19대) 때ㆍ광대 출신 도적
2. 홍길동 (洪吉童ㆍ1440?~1510?ㆍ70세) : 연산군 (10대) 때ㆍ얼자 출신 도적
연산군(10대)때 "얼자"출신 도적ㆍ"허균"의 소설 "홍길동전(洪吉童傳)"의 모델이 된 실제 인물ㆍ1500~1501년(연산군6~7)사이, "충청도"를 무대로 일어났던 큰 도둑 무리의 "괴수"였다.
• 활 동 : "충청도" 일대 (얼자 출신) • 소 개 : 홍길동전 (교산 허균)
• 출 생 : 일본 "오키나와 이시가키지마(석원도) 야에쟌 박물관"에 소장된 "장전대주(홍길동 처남)"의 족보에는 1443년(세종25)에 태어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 출생지 : 전라도 장성현 아차곡 (아치실현ㆍ현재, 전남 장성군 황룡면 아곡1리 아치실)
• 부 인 : 고을노 : 조선에서 미질이 좋은 신품종의 볍씨(쌀)을 "오키나와"에 가져갔다. "오키나와" 일대에는 이미 "안남미(安南米)"라는 남방계의 "쌀"이 있었으나 질이 좋지 않았으며, 현재 "오키나와 야에야마(八重山)"지역에서는 "고을노"를 "풍요의 여인"으로 추앙하고 있다.
• 자 녀 : 3남 2녀 • 이복형 : 홍귀동(洪貴童)ㆍ홍일동(洪逸童)← 어머니는 남평 문씨
• 부 : 홍상직 (洪尙直)의 "얼자"로 태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홍징 (洪徵)"의 얼손
• 모 : 옥영향(玉英香)ㆍ관기(官妓)로 "홍상직"이 총애하는 여인이었다. 소설에서는 "춘섬(春蟾)"인데, 이는 "허균(홍길동전의 작가)"이 자신의 애첩 이름이 "추섬(秋蟾)"인데서 명명한 것이다. "춘섬"은 "봄 두꺼비"라는 뜻으로, 집안에 부귀ㆍ복을 가져준다는 것이다.
"홍길동"이란 "이름은 조선왕조실록 (연산군일기ㆍ중종실록ㆍ선조실록)"에 등장한다. "선조ㆍ광해군" 때, 활동했던 "허균"이 지은 최초의 한글 소설 "홍길동전"에서 영웅과 같은 의적으로 묘사했고, "숙종" 때, "성호 이익"의 "성호사설"에서는 도적으로 나온다.
1498년(연산군4), 조선시대 4대 사화 중 1번째 사화인 "무오사화"가 발생하였다. 공신(훈구)세력에 의해 많은 "사림(士林ㆍ선비)"세력이 희생을 당하였고, 이때는 "연산군"의 향락ㆍ폭정이 한참인 시기였다. 조정ㆍ지방에는 부정부패가 가득했고, 탐관오리에게 수탈당해 도탄에 빠진 백성은 도적이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1500.10.22일, "홍길동"은 체포되었고, 잔당들이 그 다음해까지 약탈을 일삼았던 것으로 보인다. "연산군일기(조선왕조실록) 39권"에 연산군 6년(1500) 홍길동 무리를 소탕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강도 홍길동을 잡았다 하니 기쁨을 견딜 수 없습니다."
"홍길동"이 "홍 판서의 서자"라는 것도 사실이 아닌 것으로 보이고, 죽었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으나 도망쳤다는 기록도 없는 것으로 보아, 처형되었을 것으로 보이기에, 소설처럼 "율도국"을 세우거나 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백성들에게 재물을 나누어주어 민심을 얻은 것도 아닌 듯하다.
홍길동이 관복을 입고, 첨지를 자처하며, 관부에 수시로 드나들었다는 것으로 보아, 대단히 대범할 뿐만 아니라, 관료와 결탁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단적인 예가 당시 "당상관"이던 "엄귀손"과의 관련성인데, "엄귀손"은 무식하였지만 무예에 뛰어나 "동래현령"을 거쳐, "당상관"인 "평안도 우후"(병마절도사 아래 관직)에 이르렀던 무관이었다. 그런데," 엄귀손"은 홍길동의 약탈한 장물을 관리하여 주었고, 그를 숨겨주기까지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소설 홍길동"은 조선 "광해군" 때, "좌참찬(左參贊)"을 지내다가, 반역죄로 능지처참된 "교산 허균(蛟山 許筠)"이 지은 소설이다. "한글소설의 효시"로 중국소설 "수호전"의 영향을 받아, "임진왜란" 후의 사회제도의 결함, 특히 "적서(嫡庶)"의 신분 차이의 타파와 부패한 정치를 개혁하려는 그의 혁명사상을 작품화한 것이다.
3. 임꺽정 (林巪正ㆍ1504~ 1562ㆍ58세): 명종(13대) 때ㆍ백정 출신 도적
임거정 (林巨正)ㆍ임거질정 (林巨叱正)으로도 부른다.
명종(13대)때, "경기도 양주(楊州)의 백정"출신 도적ㆍ"황해도ㆍ함경도"지방에서 활동했다. "관아"를 습격하고, 창고를 털어 곡식을 "빈민"에게 나누어 주어, "의적"이라고 불렸다.
• 활동 : 경기도 양주의 "백정(白丁)" 출신ㆍ"황해도ㆍ함경도" 일대 • 소개 : 성호사설 (성호 이익)
"성호 이익"이 저서인 "성호사설"에서 "조선의 3대 도둑"으로 "홍길동ㆍ임꺽정" 그리고 "장길산"을 꼽을 정도로 조선시대 대표적인 도둑이다. "조선왕조실록 (명종실록)", 1562년(명종17년)에 "임꺽정이 잡혔다"는 기록이 나온다. "국가에 반역한 큰 도적 임꺽정 등이 이제 모두 잡혀, 내 마음이 매우 기쁘다."라고 하였다.
"문정왕후ㆍ윤원형ㆍ정난정"등이 "명종"을 허수아비로 만들고, 권력을 전횡하며 국정을 농단하던 시기로, "명종"이 왕위에 올라 20년 후 "문정왕후"가 죽고, "윤원형ㆍ정난정"이 유배지에서 자살하기까지 조선은 무법천지였다. 백성의 삶은 도탄에 빠졌고 도적으로 만들었다. 1560년(명종15)부터, 점차 세력이 위축되던 중, 1562년 음력1월(명종17), "관군"의 대대적인 토벌 작전으로 인해, "구월산 (九月山ㆍ황해도 신천군 용진면ㆍ은율군 남부면/일도면에 걸쳐 있는 산ㆍH=954m)"으로 철수하여, 항전하다가 잡혀서 사형을 당했다.
처음에는 자신의 신분에 대한 불만을 품고, 무리를 지어 다니면서, 도둑질을 일삼았다. "백정" 출신으로, 정치의 혼란과 관리의 부패로 민심이 흉흉해지자, 불평분자를 규합하여, 민가를 약탈하였으나, 아전ㆍ백성들이 도와주어 잡지 못하였다.
1559년(명종14)부터, "황해도ㆍ경기도" 일대를 중심으로 "관아"를 습격하고, 관리를 살해하는 한편 창고를 털고, 빈민에게 양곡을 나누어 주는 등 의적 행각을 벌였다. "황해도 장연ㆍ옹진ㆍ풍천" 등지에서 "관군"이 토벌을 하려 했으나, "임꺽정"의 행각에 백성들이 호응하면서, "관군"의 토벌이 있을 경우, 미리 정보를 알려주어, 자신들의 근거지를 확보할 수 있었다.
1559년(명종14)에는 "개성"까지 쳐들어가 도둑질을 하자, "포도관 이억근"이 군사를 거느리고, 그의 소굴을 소탕하러 갔다가, 오히려 살해되기도 하였다. 1560.08월, 일당이 "서울"까지 출몰하였다가, "장통방(종로2가 부근)"에서 아내와 부하들이 체포되었고, 12월에 "서울 전옥서"에 갇힌 아내와 부하들을 구출하기 위해 계획을 세우던 중, "숭례문" 밖에서 "참모 서림(徐林)"이 체포되었다. "황해도"에서 형 "가도치(加都致)"가 "순경사 이사증(李思曾)"에게 체포되면서 세력이 크게 위축되었다.
1561년, "임꺽정" 일당을 잡기 위해, "경기도ㆍ강원도ㆍ평안도ㆍ함경도ㆍ황해도"의 군졸들이 대거 동원되어, "소탕작전"을 펼쳤다. 군졸들은 약간이라도 의심가는 사람이면, 모두 잡아 심문을 벌이면서, 민심이 흉흉해지고, 원망의 소리가 높아졌다. 이에 정부에서는 "평안도ㆍ황해도"의 감사와 병사에게 "도적 체포"를 일임하고, 다른 군사들은 돌아가도록 조치하였다.1562년 정월, "토포사 남치근(南致勤)"이 "구월산"으로 도망간 "임꺽정"을 추격하여 체포하였고, 서울로 압송되어 사형 당하였다.
4. 장길산 (張吉山ㆍ ? ~ ? ㆍ1650년대?): 숙종(19대) 때ㆍ광대 출신 도적
숙종(19대)때, "황해도 구월산(九月山)"을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활동한 도둑의 우두머리ㆍ"평안도 양덕ㆍ함경도 두만강" 유역까지 종횡무진으로 활동한 것으로 나온다. "숙종"은 "장길산"을 잡아들이라는 특명을 내렸지만, "장길산"은 끝내 잡히지 않았고, 또한, "홍길동ㆍ임꺽정"과 달리 체포 기사가 실록에 없는 것으로 보아, 체포되지 않은 것으로 추측된다.
"장길산"은 "서얼ㆍ승려"세력과 함께 봉기하여, 거사를 도모하려고 했다. 이는 17C 이후, 어지러워진 사회 속에서 사회 하층민들이 "새로운 왕조"를 세우고자 한 사건이었다. 북쪽에서 "인삼"을 가져다가, "군자금"으로 사용하는 등 "상업 활동"을 한 것이 특이하다.
• 활동 : 구월산 (九月山ㆍ황해도 신천군 용진면ㆍ은율군 남부면/일도면에 걸쳐 있는 산 (H= 954m)
• 소개 : 장길산 (황석영)
"장길산"이 "조선왕조실록"에서 처음 언급된 시점은 "1692년(숙종18)"이다. "조선왕조실록(숙종실록)"에 3번 나오며, "조선왕조시대" 중죄인의 조사ㆍ판결을 기록한 "추안급국안"과 "성호사설(성호 이익)"등에 단편적으로 언급되어 있다.
"숙종실록"에 장길산에 관한 기사가 짧게 언급되어 있으나, 생몰 연도나 다른 행적에 대해서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기록된 "장길산" 관련 기사는 2개이다.
① 하나는 1692년, "평안도 양덕현"에서 "장길산"을 잡으려 하였으나 실패하여, 고을 "현감"을 좌천시켰다는 기록이고, ② 다른 하나는 1697년, "이익화ㆍ장영우" 등의 반역 모의와 관련되어, 이들이 "장길산"과 연루되어 있다고 주장된 부분이다.
"실록"은 "장길산"이 도적 무리의 우두머리였고, 일부 반역에는 연루되어 있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본래 "광대" 출신이나, 용맹하여 "황해도" 일대에서 "도당"을 모아 도둑의 괴수가 되었다.
조정에서는 체포하려 하였으나, "장길산" 일행은 이를 염탐하고, 모두 달아났다. 조정에서 각 관찰사와 병사에게 엄명을 내리고, 많은 상금을 걸었지만, 그는 끝내 잡히지 않았다.
"1695(숙종21)~1699(숙종25)"까지 자연재해로 말미암아 흉년이 들고, 대기근이 발생하였다. "숙종"은 백성을 진정시키기 위해 여러 방책을 내면서 도적이 되지 말 것을 당부하였지만, 굶주림에 허덕이던 백성은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녔고, 도적이 된 자가 많았다고 한다.
1692년(숙종18), "평남 양덕" 일대로 이동하여 세력을 키운 그는, 뒤를 쫓는 "관군"을 피해, 무리를 이끌고 다시 "함경도 서수라" 등지로 달아나, 그곳에서 활약하였다.
1696년(숙종22), "이영창(서울 서얼출신)ㆍ스님 운부(雲浮ㆍ금강산 승려)"와 손잡고, 승려세력과 함께 봉기하여 거사를 도모하려 하였다. "장길산 사건"은 17C 이후, 어려워진 사회조건 속에서, 하류계층에 속했던 "서얼ㆍ승려ㆍ농민"등이 힘을 합하여, 새로운 왕조를 세우고자 한 "모반사건"의 하나였다.
특히 1697년의 "실록"에서 "숙종"은 다음과 같이 하교하였다. (조선왕조실록ㆍ숙종 31권)
"극적 장길산은 날래고 사납기가 견줄 데가 없다. 여러 도로 왕래하여 그 무리들이 번성한데, 벌써 10년이 지났으나, 아직 잡지 못하고 있다. 지난번 양덕에서 군사를 징발하여 체포하려고 포위하였지만 끝내 잡지 못하였으니, 역시 그 음흉함을 알 만하다. 지금 이영창의 초사를 관찰하니, 더욱 통탄스럽다. 여러 도에 은밀히 신칙하여 있는 곳을 상세하게 정탐하게 하고, 별도로 군사를 징발해서 체포하여 뒷날의 근심을 없애는 것도 의논하여 아뢰도록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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