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학대사 (無學)"는 1344년(17세)에 승려가 되었으며, 태조의 신임으로 "왕사 (임금의 스승으로 책봉된 승려)"가 되고, 한양 "천도"를 도왔다.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사이가 소원해진 "태조ㆍ태종" 부자의 화해를 위해 여러번 "함흥ㆍ한성"을 오갔으나, 그의 노력에도 태조의 마음은 쉽게 바뀌지 않았다.
1. 무학대사 : 無學ㆍ계월헌 (溪月軒)ㆍ1327~1405 (78세)ㆍ경상 합천군
승려 (1344년(18세))에 승려가 됨ㆍ무척 신임한 태조에 의해 "왕사"가 되고, 한양 "천도"를 도왔다.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사이가 소원해진 "태조ㆍ태종" 부자의 화해를 위해 여러번 "함흥ㆍ한성"을 오갔으나, 그의 노력에도 태조의 마음은 쉽게 바뀌지 않았다.
부모는 왜구에게 끌려갔다가 돌아온 하층민 출신인데, 갈대로 삿갓을 만들어 팔았고, 어린 시절 또래에 비해 나이가 꽤 들어 보이는 등 지나치게 못생겨서 내다 버렸으나, 학들이 와서 아이를 감싸므로 부모는 그가 특별한 아이라 생각하여 도로 데려왔다 한다.
1364년 "나옹"은 "회암사"를 중건하고, "무학"을 불러 "수좌승"으로 삼았다. "나옹"이 사망한 뒤에"무학"은 전국을 돌며 수행하였는데, 이 때 "이성계"와 처음 만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무학"은 일찍이 "이성계의 꿈"을 해몽하여 "석왕사(釋王寺)"를 짓게 해준 인연으로 "이성계의 우우(優遇)"를 받았으며, 상지술(相地術ㆍ땅의 상을 보는 것)에 밝았다고 한다.
① 1401년(태종 2) "회암사 감주(監主)"가 되었으나, 이듬해에 사직하였고, "금강산 금장암"에 들어가서 여생을 마쳤다.
② 왕십리의 유래 : 무학이 조선의 새 수도를 정하러 돌아다니다가 왕십리에 이르러 이 터가 적당하다고 생각하는데 한 노인이 소를 꾸짖으며 "꼭 무학처럼 정도(正道)로 가지 않고 굽은 길을 가려느냐?"라고 꾸짖어 서방으로 10리를 더 가 경복궁의 터를 정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③ 선바위 : 서울의 성곽을 쌓을 때, "정도전ㆍ무학"은 "선바위"를 성곽 안으로 넣을지 밖으로 둘지 다투었는데 다음 날 눈이 왔다가 녹은 자리를 보고 성곽을 쌓게 되었고 결국 "선바위"는 성곽 밖에 놓이게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2. "이성계의 꿈" 해몽
• 서산대사 휴정 (西山大師 休靜ㆍ1520~1604ㆍ84세)ㆍ임진왜란 때 승장ㆍ사명당 스승
• 사명대사 유정 (泗溟大師 惟政ㆍ1544~1610ㆍ66세)ㆍ임진왜란 때 승장
이 이야기는 "서산대사"가 지었다는 "설봉산 석왕사기(釋王寺記)"에 기록된 것이라고 한다. "무학대사"가 "설봉산(경기도 이천)" 토굴에서 살고 있을 때였다. "이성계"가 아직 왕위에 오르기 전, 아주 이상한 꿈을 꾸었다.
꿈에 일만 마리가 넘는 닭이 일시에 "꼬끼오"하고 우는가 하면, 일천여 호가 넘는 큰 동네에서 한꺼번에 방아 찧는 소리가 쿵쿵하고 요란했다. 더욱 이상한 것은 "이성계"가 다 쓰러져가는 집에 들어가서, 서까래 3개를 지고 나왔는데, 꽃잎이 우수수 떨어지고, 거울이 땅에 떨어졌다는 것이다. "이성계"는 꿈이 하도 이상해서, 이웃 마을의 점쟁이 노파를 찾아갔다.
노파가 말하기를 "여인의 소견으로는 도저히 그 꿈을 해몽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설봉산 토굴에서 9년간이나 도를 닦고 있는 무학에게 가시면 풀이가 될 것입니다."
노파의 말에 따라 "이성계"가 설봉산 토굴에 가니, 과연 "무학대사"가 맞이하며, "당신이 찾아오실 줄 알고 있었습니다." "이성계"로부터 꿈이야기를 들은 "무학대사"는 해몽을 하기 시작했다.
"그 꿈은 매우 희귀한 꿈입니다. 일만여 호에서 닭이 울고, 일천여 호에서 방아소리가 난 것은 높고 귀하게 된 것을 축하한다는 뜻이고, 헌 집에서 서까래 3개를 지고 나온 것은 바로 귀하신 임금 왕(王)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꽃이 떨어짐은 곧 열매를 맺는다는 뜻이요. 거울이 땅에 떨어지면 소리가 난다는 뜻이니 모두가 왕이 되라고 독촉하는 길몽입니다. 그러니 당신은 군왕이 될 상을 가졌습니다. 오늘 이 일을 남에게 이야기 하지 마시오. 목숨이 위태할 것이니 극비에 부치십시오.
큰일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반드시 성인의 도움을 받아야 될 것이니, 이곳에 절을 짓고, 이름을 석왕사라 하고 천일기도를 드리도록 하시오. 그러면 반드시 당신이 왕업을 일으킬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3. 새 도읍 후보지는 "한양"이었다.
1392년(태조 1) 조선 개국 후 "왕사"가 되고, "묘엄존자(妙嚴尊者)"의 호를 받았으며 "회암사"에 있었는데, 개국 직후부터 "태조"는 도읍지를 옮기려 했다. 수도를 옮기려는 "태조 이성계"를 따라 "계룡산ㆍ한양"을 돌아다니며, 땅의 모양을 보고 도읍을 정하는 것에 의견을 내었다.
"(계룡산에 올라) 지세(地勢)를 두루 관람하고 왕사(王師) 자초(自超)에게 물으니, 자초는 대답하였다. "능히 알 수 없습니다." < 조선왕조실록 태조실록 3권 태조 2년 계유 2월 11일 >
"왕사 무학"이 어명을 받고 새 도읍지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이곳이 적당하다고 쾌재를 부르는 순간, 한 노인이 소를 타고 지나가다가 소리를 질렀다고 한다. "이놈의 소! 미련하기가 무학과 꼭 같구나. 바른 길을 버리고 굽은 길을 찾아가다니, 이럇!" 무학은 노인을 쫓아가 길지를 알려달라고 간청했다. 그러자 노인은 "여기서 서쪽으로 십리를 더 가면 알 일이다."라고 말하고 사라졌다.
무학이 노인의 말을 쫓아 가보니, 그 곳은 바로 "고려의 남경" 터였다. 다시 "삼각산"을 거쳐 "백악산" 밑에 도착한 무학은 "인왕산"을 주산으로 삼고, "백악ㆍ남산"으로 좌우 용호(龍虎)를 삼는 이곳을 궁궐터로 정하고, "태조"에게 아뢰었다.
"태조"는 무학의 말을 듣고 그 길지로 향하고, 그곳을 궁궐터로 정하였다. 본래 무학이 잡은 자리는 "종로의 필운동" 근처였다. 그런데 무학의 의견에 "정도전"이 반대하고 나섰다. "예로부터 제왕은 모두 남면하여 나라를 다스려왔고, 동향했다는 말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며 반대하였다.
"정도전"의 건의에 따라 다시 잡은 자리가 "북악산 밑(경복궁)" 자리였다. 백성의 생활이 채 안정되기도 전에 큰 역사를 벌임은 옳지 않다는 "천도 반대론"을 물리치고 1394년(태조 3) 8월 "태조"는 마침내 "천도"를 명령했다. 10월 "태조"는 각 관청당 2명씩만 남겨두고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개경"을 출발, "한양"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새 수도의 이름을 "한성부"로 고쳤다. 12월부터 본격적인 역사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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