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도전 (鄭道傳ㆍ1342~ 398ㆍ56세)"의 집안은 본래 "봉화지역"의 "향리(鄕吏)"였다. "고려시대"까지의 "향리(鄕吏)"는 "조선시대"의 "향리"와는 그 격(格)이 달라, 지방의 토착세력을 말한다. 정도전 집안은 "경상도 봉화(奉化)지역"의 "토착세력"인 셈이다.
1. 생 애
아버지가 "이곡(李穀)"과 나이를 잊은 두터운 친교가 있었기 때문에. "이곡"의 아들 "목은 이색(李穡)"과 가깝게 지낼 수 있었고, "성균관 진사"로서 "목은 이색"의 제자가 되었다. "이색"은 우리나라 초기 성리학자로 "안향(安珦)ㆍ백이정(白邇正)ㆍ이곡ㆍ이제현(李濟賢)"의 학맥을 계승한 인물이다. 그 후 성균관에서 "이색"과 스승과 제자로 다시 만나, 성리학에 대하여 한층 심도 있는 연구를 하였다.
"이색(李穡)"의 문하로서 "정몽주ㆍ이숭인ㆍ길재" 등과 당당히 겨루어 실력이 부족함이 없었으나 항상 뒷전으로 밀렸는데, 정도전의 외할머니가 "노비(奴婢)의 딸"이라는 것이다. 주류(主流)로부터 중심세력권의 진입을 거부당하는 비주류(非主流)였다. 이것이 정도전의 울분이었고, 비분의 원천이었다.
특히, 당시 동문수학한 동료들 중, "정몽주(鄭夢周)"와 마음이 맞아, 그가 말한 부패한 사회를 개혁하고 권문세족으로부터 농민들을 해방시켜야 된다는 사상에 "정몽주"는 깊이 감격하여 공조하였다. 이후 "정몽주"와는 오랜 친구로, 청소년기부터 권문세족과 외척(外戚)의 발호로 부패한 "고려사회"를 성리학적 이상향(性理學的 理想鄕)으로 개혁해야 된다는 사상을 품고, 정치적동지로서 협력하였으나 뒤에 "정적(政敵)"으로 돌변하게 된다.
정도전이 유년을 보낸 것은 "양주 삼각산(三角山)"이다. 그의 동지이자 훗날 정적(政敵)이 되는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의 시문집과 "포은봉사고서(圃隱奉使稿序)"의 기록에 "15~16세 때, 삼각산에서 성율을 공부할 때, 정몽주에게 대학과 중용에 대하여 가르침을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려 공민왕(恭愍王)"때인 1360년 과거에 급제한 뒤, 1363년 관직에 나갔다. 부친의 뒤를 이어, 과거에 급제한 정도전은 22살 때, "충주사록"에 임명되면서 관직생활을 시작하였다. "공민왕"이 "신돈(辛旽)"을 기용하자 그는 벼슬을 버리고, "삼각산" 옛집으로 낙향해서 은둔생활을 하였다. 또한, 정도전은 "공민왕(恭悶王)"의 "유학(儒學)육성"사업에 참여하여, 성균관 교관에 임명되었다. "정몽주ㆍ이숭인" 등도 참여하였다.
1370년 "신돈(辛旽)"에 의하여 "성균관"이 중건되고, 그해 스승 "이색(李穡)"이 "대사성"이 되자, 그는 "이색"'과 벗들의 천거로 "성균관 박사"가 되었다. "성균관 박사"로 있으면서, "정몽주" 등 교관과 매일같이 "명륜당"에서 성리학을 수업, 강론하였다. "권문세족"을 경계하고, 새로운 인재를 찾으려던 "시중(侍中) 신돈(辛旽)"에 의해, 신진사류가 중용되면서, 그 역시 요직에 앉았던 연유로 "신돈(辛旽)"의 일파로 몰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공민왕"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정도전에게 시련의 시작이었다. 1374년 "공민왕"이 "홍륜(洪倫)"등에 의해 암살당하자, 그는 이 사실을 명나라에 고할 것을 주장하다가 "이인임(李仁任)"등의 미움을 받게 된다.
"공민왕"의 뒤를 이어 "우왕(禑王)"이 즉위하였는데, "우왕"이 재위하던 때에는 정도전과 정치적 성향이 다른 "이인임(李仁任)" 등의 권문세족이 정국을 주도하였다. 양측의 충돌은 불가피하였고, 결국 "원(元)나라" 사신의 마중을 거부하였다는 이유로 정도전은 오늘날의 "전라도 나주(羅州)"에 속해있는 "회진현"에서 유배생활을 하게 되었다. "회진현"에서 유배생활을 하는 그곳에서 백성들의 삶을 직접 목격하고는 "위민의식(爲民意識)"을 키웠다.
정도전이 "회진현"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어느 날, 들녘에서 한 농부를 만났다. 그 농부는 정도전을 보고, 당시 관리들이 "국가의 안위와 민생의 안락과 근심, 시정의 득실, 풍속의 좋고 나쁨에 뜻을 두지 않으면서, 헛되이 녹봉만 축내고 있다"며, 질책하였다. 촌노(村老)의 이런 발언은 그에게 백성을 위하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다시 마음에 새기는 계기가 되었다.
정도전은 부패한 관료로 인한 피폐한 백성들을 구제하고, 도탄에 빠진 나라를 구하는 길은 오직 "혁명 "밖에 대안이 없다고 결론짓고, 이를 실행하기 위해서는 "이성계(李成桂)"의 군사력이 절실하게 느끼게 되었다. 정도전은 부(富)와 권력을 독점한 "권문세족"들로부터 전답(田畓) 등의 농토는 실제로 농사를 짓는 농민들에게 부여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여, "권문세족"들의 분노를 샀다.
1377년에 유배에서 풀려나, 4년간 선향인 "영주ㆍ안동ㆍ제천ㆍ원주"등을 오가며 유랑하며 지냈다. 그 후 1381년 가을 "삼각산" 옛집으로 돌아왔고, 1382년 유배가 완화되자, "삼각산" 옛집으로 돌아와 초려(草廬)를 지어, "삼봉재(三峰齋)"라 이름하고 학문과 교육에 힘썼다. 유배와 유랑살이를 통하여, 향민(鄕民)과 사우(士友)에게 걸식하기도 하고, 스스로 밭갈이도 했다. 이때 그는 가난과 기근으로 죽어가는 백성들과 그들을 수탈하는 권문세족의 횡포와 "사원경제"의 팽창으로 국가경영의 존폐위기 상황을 직면하고, 일대의 개혁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1383년 가을, 정도전은 드디어 비장의 결심을 하고, "함길도 함흥(咸興)"에 있는 "동북면 도지휘사"(都指揮使) "이성계(李成桂)"를 찾아갔다. 그는 "이성계"와의 오랜 대화로 세상사를 논하다가 그와 인연을 맺었다. "이성계"는 개혁(改革)을 주장하는 정도전 등에게 협력하기로 하고, 지원을 약속하였다. 그의 인물 됨됨이에 매료된 정도전은 그의 막료가 되었고, 이후 "역성혁명(易姓革命)"까지도 논의하게 되었으며, 이 일을 계기로 정도전은 "이성계"의 참모로서 큰 야망을 품게 되었다.
정도전은 1388년 "성균관 대사성"으로 올랐다가, 그해 음력 6월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으로 정권을 잡게 되자, "조준(趙浚)"등과 함께 "이성계"의 우익(右翼)이 되어, 토지개혁(土地改革)을 단행하였다. 그해에는 "우왕(禑王)"을 내쫓고, "이인임(李仁任)"의 주장으로 "창왕(昌王)"을 내세웠다. 이때 "우왕"의 측근인 "최영(崔瑩)일파"를 제거하였다. 정도전은 "밀직부사(密直副使)"로 오른 직후부터, "조준ㆍ남은ㆍ윤소종" 등과 함께 "전제개혁(田制改革)"에 착수하였다.
"조세제도"와 "토지제도"를 개혁하여, 개인이 함부로 토지를 사유(私有)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권문세족(權門世族)들이 보유하고 있는 토지를 몰수하고, 새로운 정권을 창출하는 데 필요한 자금을 확보함은 물론 백성들의 지지를 이끌어 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 정도전은 전국의 토지를 국가에 귀속시킨 뒤, "인구수(人口數)에 따라 토지를 분배할 것"을 건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스승인 "목은 이색(牧隱 李穡)"과 친구인 "정몽주(鄭夢周)"등과 의견이 달라지면서 서서히 멀리하게 되었다.
1390년 무관 "이초(李初)"와 "윤이(尹彛)"는 "이성계" 일파의 정변(政變)기도를 감지하고 함께 "명나라"로 건너가 "명 황제 주원장(朱元璋)"에게 호소하여, "명나라"의 힘을 빌려 "이성계"를 없애기 위하여 모의를 하고 있었다. "연경(燕京)"에 도착한 "이초"와 "윤이"는 "명나라 주원장(朱元璋)"에게, "이성계"와 정도전 등이 군사를 일으켜 명나라를 공격하려 한다고 거짓을 고하였다. 성균관 학생들과 함께 외세(외세)를 빌어 국내문제를 해결하려던 "윤이ㆍ이초 무고사건"의 배후인 "이색ㆍ우현보" 등을 "신우"(辛禑: 우왕이 신돈의 아들이라 함), "신창"(辛昌: 창왕 역시 신돈의 아들이라 함) "옹립의 죄"를 물어 처단할 것을 상소하였다.
"고려 우왕(禑王)"을 폐위시키고, "공양왕"을 즉위시켜, 정권을 장악한 "정도전ㆍ정몽주ㆍ이성계"세 사람은 권력의 중심에 나섰지만, 이때부터 삐걱거리기 시작하였다. 정도전은 "이성계"와 함께 새 왕조에 대한 건국 의지를 밝혔지만, "정몽주"는 "고려왕조" 내에서 점진적 개혁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392.06월, 정도전은 비로소 소환되어 정치 일선에 나서서 "새 왕조(王朝) 창업"을 위한 정지작업을 단행하여, 07.17일 "공양왕(恭讓王)"의 선양(禪讓)을 이끌어 내고, "이성계(李成桂)"를 임금으로 추대하여 새 왕조 "조선(朝宣)"을 건국하였다.
"태조(太祖)"로 즉위한 "이성계"는 나랏일의 모두를 정도전에게 일임하였다. 정도전은 "개국공신 1등"으로 인정되어 최고의 벼슬을 겸직함으로써, 정권과 병권(兵權)을 모두 장악하였다. 그리하여 정도전은 명실상부한 "조선의 2인자"가 되었으며, 건국 사업에 크게 이바지하여, 새 나라의 문물제도와 국책의 대부분을 결정하였다.
"조선 왕조"가 건국되자, 정도전은 왕명을 받아 새로운 왕조의 정책 방향을 제시하는 "17조의 편민사목(便民事目)"을 지어 발표하였고, 또한 조선의 건국을 반대한 정적 등 반대파를 일소하였다. 정도전은 "문하시랑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 겸 판의흥삼군부사(判義興三軍府事)" 등의 요직을 겸함으로써 권력을 한손에 쥐어, 조선의 핵심 실세가 되었으며, "행정ㆍ군사ㆍ외교ㆍ교육"에 이르기까지 조선의 전반적인 문물제도와 정책의 대부분을 직접 정비해 나갔다.
정도전은 고려 말 "배불론(排佛論)"의 주동자로 "불교"를 대체할 사상으로, "유교(儒敎) 성리학(性理學)"을 지목하였다. 그는 "유교"로써 "문교(文敎)"를 통일하고자 하여, "주자학(朱子學)"으로 미신(迷信)으로 여겨지는 "불교ㆍ노자교(老子敎)ㆍ무속(巫俗)" 등을 압도하고자 유감없이 그들에게 공격을 가하였다.
특히 그가 주장한 "요동정벌(遼東征伐)" 문제는 조선과 "명나라"의 주요한 외교문제로 비화되기도 하였다. 당시 "명나라"에서는 조선에서 파견한 "유구"와 "정신의"가 가지고 간 "표문(表文)"을 문제 삼았다. "유구"등은 결국 "명나라"에 구속되어 심문을 받게 되었는데, 이때 "표문"의 작성자로 정도전이 지목되었다.
"명나라"에서는 당장 정도전의 소환을 요구하였으나, 정도전은 가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국내에 있으면서, "진법(陣法)훈련"을 강화하여, "요동정벌"을 위한 제반준비를 진행하였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사병혁파(私兵革破)"를 둘러싸고, 왕자 및 공신들과 갈등을 초래하였다. 자신의 의도대로 "방석(芳碩)"을 왕세자로 책봉하는 데 성공한 정도전은 다시 개혁 작업에 착수하였다.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는 자신의 아들을 왕세자로 책봉하기를 간절히 소원하였고, "태조 이성계 "역시 "방석(芳碩)"을 총애하여, 대소신료들은 "태조"의 의중에 따라, 8째 아들인 "방석(芳碩)"을 세자로 책봉하였다. 세자를 누구로 임명하느냐는 문제에 관해서, 당초의 의론은 "시절이 태평하면, 적장자(嫡長子)를 내세우고, 난세(亂世)에는 공이 많은 왕자를 세워야 한다."는 원칙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왕과 강비(康妃)의 의도와 "배극렴(裵克廉)"의 주장으로 "의안대군 이방석(宜安大君 李芳碩)"을 왕세자로 세웠다.
그러나 전처 "한씨"소생의 왕자들은 자신들을 배제되고, 중전의 막내아들이 왕세자가 된 것에 대하여 모두 분개하였고, 이것이 훗날 "제1차 왕자의 난"의 원인이 되었다. "태조 이성계"의 전처(前妻)인 "한씨"소생의 아들 중, 5째인 "이방원(李芳遠)"은 정치적 야심이 가장 컸던 탓에 이 일로 격분하였다.
이어 개인 소유의 "사병혁파안(私兵革破案)"과 "과전법(科田法)"의 시행을 건의하여, 왕족과 공신들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지나치게 급진적(急進的)이고, 일방적인 정도전의 정책에 대하여, "태조 이성계"는 그의 상소(上疏)를 수용하는 것을 머뭇거렸고, 점차 반발하는 사람들이 늘어갔다.
정도전은 이방원을 비롯한 "왕자들의 사병(私兵)조직"을 중앙정부에 귀속시키려 했다. 왕자들의 힘을 빼놓는 동시에 자신이 중심에 서 있는 "중앙집권정치"를 확고히 하겠다는 1석2조의 효과를 노린 것이다.
2. 죽음 : 이방원(5째)의 1차 왕자의 난ㆍ방원의 난ㆍ무인정사(戊寅靖社)
1398.10.06일 밤, "이방원(李芳遠)"은 "이숙번(李叔蕃)"의 군사들을 거느리고, "경복궁" 앞에 포진하였다. 쿠데타를 단행한 것이다. 하여튼 "이방원"에 의하여 죽임을 당할 때, 두 아들 "정영ㆍ정유"는 아버지를 구하려고 달려들다가 살해되고, 얼마 후 조카 "정담(鄭澹)"은 큰 아버지와 사촌들의 죽음 소식을 듣고 집에서 자살하였다.
맏아들 "정진"은 삭탈 당하여, 수군(水軍)으로 충군 당하였다. 그에게는 종친(宗親)과 공신(功臣)들을 모해(謀害)하고, 왕자들을 모함하여 살해하려 했다는 죄명을 쓰고 억울하게 피살당하였다.
정도전의 죽음은 그 자신의 "재상(宰相) 중심주의" 혹은 "중앙집권체제"를 확립하는 가운데 이루어졌다. 막강한 "사병(私兵)세력"을 보유하며,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고 있는 "왕자"들과의 "마지막 힘겨루기"에서 패배한 것이다.
정도전과 그 일가는 1398년 음력 8월, "이방원"에 의하여 말살 당하였으나, 맏아들 "정진(鄭眞)"만 살아남아 수군(水軍)으로 충군되었다가, 1411년(태종11)에 복직되어 "나주목사"로 중용되었으며, 세종(世宗) 때에 이르러 "형조판서"를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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