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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전 ④ 건국 : 주요 인물은 누구? (이성계ㆍ최영)

by 당대 제일 2022. 10.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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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이성계 (太祖ㆍ1335~1408ㆍ재위 1392~1398(6년)ㆍ73세)"는 당시 "신흥 무인"의 대표였고, 고려 말, "급진 사대부"의 수장이었고, 이에 비해 "최영 (崔瑩ㆍ1316년~1388ㆍ72세)"은 고려 정통 귀족가문의 후예였고, 권문세족과 깊이 연관된 "친원파"였다

 

1. 이성계 - 최영 관계

"이성계"는 당시 "신흥 무인"의 대표였고, 고려 말, "급진사대부"의 수장이었다.  이성계 조상은 본래 "전주"에서 살다가 "강원도"를 거쳐 "함경도 지방"으로 옮겨가 그 지역의 유력자로 성장했다. 그러나 "원나라"가 그 지역을 공격했을 때, "이안사(이성계 고조부)"는 이에 항복했고, 그 후 대대로 "원나라"의 관리를 지냈다.  그러나 "원" 쇠퇴기에 "공민왕"이 "쌍성총관부"를 공격할 때, 아버지 "이자춘"과 이성계는 이에 동조, 왕의 신임을 얻었다. 그리고 "이자춘"과 함께 출정하여 "여진족 토벌"과 고려군을 지원함으로써 그는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이성계"는 자신의 조상들이 "친원 부역 했다"는 심각한 가문적 결함이 있었고, 이것에서 벗어나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이색ㆍ정몽주ㆍ정도전ㆍ조준ㆍ윤소종" 등의 고려 말 신진사대부들과 적극적으로 교류했다는 학계의 유력한 설이 있다.

이에 비해 "최영"은 고려 정통 귀족가문의 후예였고, 권문세족과 깊이 연관된 "친원파"였다. 유서 깊은 가문 출신으로 딸은 "우왕"의 왕비가 되었다.  "이성계"가 신흥 무인 세력의 대표라면, "최영"은 "구 세력의 대표라"고 할 수 있었다.  "태조"는 개국 이후 "최영"을 복권하였고, 손녀사위 "맹사성"을 등용했다.

2.  태조 이성계 (太祖ㆍ1335~1408ㆍ재위 1392~1398 (6년)ㆍ73세)

고려 말 장군ㆍ정치가ㆍ조선을 건국한 초대 국왕ㆍ본관 전주(全州)ㆍ송헌거사(松軒居士)

1335년, "고려 동북면 화령(함남 금야군)"에서 "이자춘"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공민왕ㆍ우왕" 시대에 홍건적과 왜구 토벌에서 영웅적 공로를 쌓아 입지를 다졌다.  1388년(우왕 14) 철령 이북 영토 문제를 두고 "명나라"와 갈등이 빚어지자, 이에 대한 타개책으로 "우왕"은 "명나라 요동 정벌"을 명한다.  "우군도통사(右軍都統使)"로서 요동 정벌을 위하여 북진하다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정권을 장악하였고, "공양왕"에게서 선위 형식으로 "개경 수창궁"에서 1392년 즉위함으로써 조선을 개국하였다.

"정도전ㆍ남은ㆍ조준ㆍ윤소종"등의 급진개혁파 사대부들과 전제 개혁을 비롯한 각종 사회 개혁을 단행한 끝에 "조선"을 개국했고, "한양"으로 천도해 왕조 기틀을 다졌다. 퇴위 후 "태상왕"이 되었다.

3.  최영 (崔瑩ㆍ1316년~1388ㆍ72세)

고려 말 장군ㆍ정치가ㆍ서녀 : 영비 최씨 (우왕(고려 32대 왕)의 후궁)ㆍ손녀 사위 : 좌의정 맹사성

평소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아버지 "최원직"의 유언을 받들어, 평생 여색재물을 멀리하였다. 군관으로 출사하여 "우달치"에 임명된 뒤, 관직은 육도 도순찰사, 양광, 전라도 왜적 체복사 등을 거쳐 "문하시중"에 이르렀다.

1374년, 제주도에서 일어난 "목호(牧胡)의 난"을 진압했고, 1376년(우왕 2)에는 왜구의 침략 때, 육군을 이끌고 "논산군 연산"의 개태사(開泰寺)로 올라오는 왜구를 홍산(鴻山)에서 크게 무찔러 "철원 부원군(鐵原府院君)"에 봉작되었으며, 여러 번 왜구와 홍건적을 격퇴하고 "안사공신(安社功臣)"에 책록되었다.  "이인임" 등을 멀리하였고, 1388년 "이인임ㆍ염흥방"을 제거하였다. 유교 사대부와 동맹을 맺은 "이성계"와 대립하다가 "명나라"가 "서북면"을 요구하자 "요동정벌"을 주장하여, "요동정벌군 총사령관 겸 팔도도통사"에 임명되었다.

1388년(우왕 14) 5월 선봉대가 "압록강" 어귀의 작은 섬 "위화도"에 도착하였다. "최영"은 압록강을 건너 진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이성계"는 이에 불복, 군대를 돌려 거꾸로 수도 "개경"으로 향했다. 쿠데타가 시작된 것이다.  "이성계"는 "요동 정벌"을 반대하면서, 4가지 이유를 들었다. (4 불가론)

소 (작은나라)로서 대 (큰나라)를 거역할 수는 없다    농사철에 군대를 동원할 수는 없다    모든 군사가 북쪽으로 몰려간 틈에 왜구가 쳐들어올 소지가 있다    여름이라 비가 자주 내리므로 활의 아교가 녹아 쓰기 어렵고 군사들은 전염병에 시달린다.

"위화도"에서 "최영"이 각별히 신임하여 자신의 가보인 보검까지 하사했던 "좌군도통사 조민수"는 "우군도통사 이성계"의 설득으로 회군에 협력하기로 결정, 말머리를 돌려 "개경"으로 돌아왔다.  당시 "개경"에 있던 "정도전ㆍ정몽주ㆍ조준"는 "이성계"에 대한 반감ㆍ반대 여론을 무마시켰다.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이를 맞아 싸우다가 "이성계" 일파에 붙잡혀 이내 투옥, "경기도 고봉(高峰: 고양)"에 유배되었다가 뒤에 "개경"으로 소환된 뒤, 죽임을 당하였다. "이성계"는 "최영"이 역모를 꾸몄다고 "우왕"에게 고하였고, 그 시신을 길에 내버리도록 하였다.  그러나 그의 최후가 너무도 당당해서 뭇 사람들이 감동한 나머지 시체가 버려진 곳을 지나는 사람마다 경의를 표했다고 한다.  이때 자신에게 탐욕이 있었다면 무덤에 풀이 자랄 것이고, 결백하다면 무덤에 풀이 자라지 않을 것이라 유언하고 최후를 맞이하였다. 실제로 그의 무덤에 풀이 자라지 않았다.

4.  태종 이방원 (太宗ㆍ1367~1422ㆍ재위 1400~1418(18년)ㆍ55세)

조선 3대 임금ㆍ이성계 5째 아들ㆍ정안군 (靖安君)ㆍ이성계를 도와, 조선 건국에 공을 세움

2차례의 "왕자의 난"을 통해 정적을 제거하고 권력을 잡았으며, 동복형 "정종"의 양위를 받아 즉위하였다. 왕위에 올라 공신들을 축출하고, 사병을 혁파하였으며, 호패법과 6조 직계제를 실시하였다. 자신의 처가와 사돈 등을 비롯한 왕실의 외척을 숙청하여 왕권을 강화하였다. 이성계의 아들들이 대개 "무인"으로 성장했지만, "이방원"은 어릴 때부터 무예ㆍ격구보다는 학문을 더 좋아했다고 한다.

1382년(15세)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383년(16세) "문과"에 병과 7등으로 급제하였다.  "정몽주"는 "이성계"의 낙마 사건을 계기로 이성계 세력을 축출하고, 그간의 개혁 법령을 폐지하려는 계획을 세운다. "정몽주"는 이성계의 병문안을 빌미로 이성계의 가택을 방문하는 등 치밀함을 보인다. "이방원"은 아버지 이성계에게 "정몽주"를 제거할 것을 권고하였으나 이성계는 신의를 지키겠다는 마음으로 반대하였다.

결국 "정몽주"는 결코 회유할 수 없는 인물이라고 결론을 내린 그는 무사를 보내 제거할 것을 지시하였고, 결국 "선죽교"에서 "정몽주"를 타살하였다.  "정몽주"가 죽은 후에 이 자리에서 "대나무가 솟았다"고 하여, "선죽교"라 부르게 되었다. 이어 그는 "이색ㆍ그의 두 아ㆍ제자인 이숭인ㆍ길재"등을 축출하여 반대파를 제거했다.

5.  원경왕후 민씨 (1365~1420ㆍ55세) :  태종의 왕비ㆍ세종의 어머니

"태종"이 새로 후궁을 들이는 일ㆍ친정 식구들 문제ㆍ양녕대군의 폐위 문제를 두고 갈등하였다. 왕조에서 "문정왕후ㆍ명성왕후"와 더불어 가장 정치성이 강한 왕비였으며, 성격 또한 담대하였다. "태종"의 외척 숙청 과정에서 아우들이 모두 사사되면서 친정은 멸문의 화를 입었다.

"태종"은 외척의 세력이 강해지는 것을 경계하여, "원경왕후" 남동생 4형제를 모두 숙청하였다.  "태종"은 처음에 "민무구ㆍ민무질"을 귀양보냈다가, 장인인 "민제"가 죽은 후인 1410년에 사약을 내렸으며, 6년 후인 1416년에는 "민무휼ㆍ민무회" 형제에게 자결을 명하였다.

6. 남은 (南誾ㆍ1354~1398ㆍ44세) :  개국 공신

문신 (고려 말기ㆍ조선초기)남재 (형ㆍ조선 개국공신ㆍ영의정)ㆍ남지(아우ㆍ우상절도사)

어려서부터 기억력이 뛰어났고, 글을 잘 지었다. 또한 무인의 기질도 있었다.  1373년(공민왕 23), 음서로 문관 관료에 첫 천거되고, 1374년 문과에 급제하여 "우왕" 때 삼척에서 왜구를 무찔렀다. 고려 권문세족들의 부패에 염증을 느낀 그는 그 뒤에 개혁을 주장하는 "이성계ㆍ정도전ㆍ정몽주" 등의 신진사대부에 가담, 그 중 "정도전" 등과 함께 "이성계" 세력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1395년(태조 4) "명나라"로 보낸 "정조사(正朝使)"가 가져간 이성계의 친필 표문(表文) 중 "명나라 홍무제"의 비위를 거슬리는 단어가 있어 "사신 정총" 등이 살해되고 형벌을 받았으며, 그 글의 초안자인 "정도전"을 "명나라"로 압송하도록 압력을 가해오자, 사신들을 달래서 되돌려 보냈다.  군량을 비축하였으며, 사람을 보내 요동 주변의 정세를 파악, 정탐케 한다.  그 뒤 은밀히 요동 주변의 지리, 지형, 지물을 기록한 진도(陣圖)를 제작하는 등 요동정벌을 계획하기도 하였으나 이들의 요동 정벌 계획은 "명나라"에 누설된다.

1397년 "명나라의 사은사"가 가지고 온 자문(咨文)에서 조선조정에 요동 정벌을 중단하라고 경고했다.  요동 정벌을 목적으로 "명나라"와 싸우기 위해 "정도전"과 함께 병력을 징발하는 한편, 왕족들과 여러 호족으로부터 몰수한 사병들을 새로 신설한 "의흥삼군부"에 병합한 뒤 그가 지은 "진도(陳圖)"에 따라 대대적인 군사 훈련을 실시하였다. 이러한 "정도전"의 개혁과 "명나라"와의 전쟁 준비는 같은 개국공신인 "조준" 등의 반발을 불러일으켜 끝내 결별하게 되고 만다.

"남은ㆍ정도전"은 함께 6월 확보한 병력으로 한양에서 "진도(陣圖) 훈련"을 하면서 "이성계"에게 출병을 요청하였는데, 이때 "조준"의 강력한 반대로 실행하지 못했다.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 때, 첩의 집인 "송현마루"에 모여 정사를 논하던 중, "이방원"에게 습격을 받고 "하경(河景)ㆍ최운(崔沄)"이라는 수행원을 데리고 도주하였으나, 붙잡혀 최후를 맞이하였다.  "이방원"은 그를 "정도전의 일파"라고 비난하면서도 그의 가족이나 친척에게 연좌제를 적용하지 않았고, 그의 형ㆍ동생ㆍ아들들은 계속 관직에 등용된다.

7.  조준 (趙浚ㆍ1346~1405ㆍ59세) :  개국 공신

고려 말기ㆍ조선 초기의 문신ㆍ무신ㆍ아들 : 조대림 (태종 2째 딸 경정공주 부군)

1371년(공민왕 21), "음서"로 문관 관직에 천거되었다가, 1374년(공민왕 24)에 과거(문과)에 급제, "공민왕ㆍ우왕" 시대에 문관ㆍ무관 관직을 두루 지내다가 1384년 관직에서 잠시 물러났다.  1388년 "위화도 회군" 후 "이성계"의 신임을 받고 관직에 전격 복귀하여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겸 대사헌" 등을 거쳐 "충의군(忠義君)"에 봉군되었다. 

"우왕"이 폐위되고 "창왕"이 즉위한 직후에 "밀직사사(密直司事) 겸 대사헌"의 지위로써 "문하시중 조민수"를 탄핵하여 축출시키고 이어 1389년 "창왕" 폐위 및 "공양왕" 보위 추대에도 개입하였다.  3년 후 1392년(공양왕 4)에 "정도전" 등과 함께 의기투합하여 "고려 공양왕"을 폐위하고 "이성계"를 추대하여 개국공신이 되었다.

그는 특히 경제ㆍ이재에 밝아 전제 개혁안을 통해 조선의 경제적 기초를 개편하였다.  정치적으로 동반자였던 "정도전"과는 요동정벌 문제로 결별한 뒤, "제1차 왕자의 난"에 협조하여 그 일파를 제거하는데 앞장섰다. 1403년 "영의정부사"가 되었다.  "태종 이방원"은 그를 가리켜 항상 "조정승"이라 칭하고 이름을 부르지 않았으며, 왕실의 총애를 받으며 권세를 누렸다.

 하조대 (河趙臺)

고려 말, "하륜ㆍ조준"이 이곳에 은둔하며 "새로운 왕조를 세우려는 혁명"을 꾀했고 그것이 이루어져 뒷날 그들의 성을 따서 "하조대"라 했다는 설과, "하씨" 집안 총각과 "조씨" 집안 처녀 사이의 이루어질 수 없는 애절한 사연으로 인해 명명되었다는 설이 있다.

하조대

8. 하륜 (河崙ㆍ1348~1416ㆍ68세) :  태종 최측근태종은 "장자방"이라 했다.

조선 초 문신ㆍ좌의정ㆍ"이인임(권문세족)"의 조카 사위아버지: 부사 하윤린ㆍ인품이 중후ㆍ침착ㆍ대범하였으나, 사사로운 인사 청탁ㆍ국유지 착복도 하였다시문에 능하였고, "이색ㆍ이인복"에게 배운 성리학 학문 외에도 역사ㆍ고전ㆍ음양ㆍ의술ㆍ풍수지리에 두루 능하였다. 예악(禮樂)ㆍ제도에 능통하여 개국 직후 대명외교에 차질이 없도록 하였다.

자신의 이상ㆍ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변절ㆍ권모술수로 보일 수 있는 수단까지도 불사하여 부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했다.  스승인 "이색"이나 동문인 "정몽주ㆍ이숭인ㆍ권근ㆍ길재" 등과 함께 정치적 입장을 같이 함으로써 초기에는 역성혁명에 반대하여, 조선 왕조 건국에 반대했다.  그러나 "정도전" 등의 권고로 "권근" 등과 함께 조선의 건국에 참여하였다.

"정도전"과 함께 "한양 천도"를 적극 주장했고, 1393년 "정도전이 쓴 "표전문이 불손하다"는 이유로 "홍무제"가 문책하자 "명나라"에 가서 사태를 해결하였다.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과 1400년(정종 2) "제2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을 도와 태종 즉위 후 좌명공신 1등에 책록되었다.

  정안대군 이방원과 만남

사람의 관상을 잘 보던 그는 "정안대군"을 보고서 장차 크게 될 인물인 것을 알았다고 한다. 그리하여 "민제(정안대군의 장인)"를 만나서 간청하기를 "내가 사람의 관상을 많이 보았으나 공의 둘째 사위만한 인물을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한번 그를 만나보기를 원합니다"고 했다. "민제"는 사위 "이방원"에게 하륜이 꼭 한번 보려 하니 한번 그를 만나보도록 하라며 만남을 주선해 주었다. 그의 부탁으로 "민제"를 통해 "정안대군"을 만나게 됐고, 이후 그의 심복이 되었다.

당시 여러 왕자 가운데 공을 세웠다고 자부했고, 야망이 크고, 머리가 뛰어났던 이방원은 왕위에 오르고자 하는 야심을 품고 있었다. 하륜은 정안대군의 야심을 간파했고 그의 측근이 되었다. 이후 "하륜"은 "제1차 왕자의 난과 제2차 왕자의 난" 당시 "이방원의 최측근"으로 활동했다. 

"하륜"은 2차례 "왕자의 난"을 실질적으로 계획하고 지휘했다.  "제1차 왕자의 난" 당시, "정도전"이 "남은"의 첩의 집에서 술을 마신다는 정보를 입수, "정도전ㆍ남은ㆍ심효생" 등을 불시에 습격하여 죽이고, "세자 이방석ㆍ이방번"을 제거했다.

9. 이인임 (李仁任ㆍ1312~1388ㆍ76세) : 고려 말 권신ㆍ이성계의 최대 정적 중 하나

한때 "신돈" 문하에 있었으며, "홍건적ㆍ원나라의 최유" 등을 물리쳤고, 10년간 "우왕"을 섭정하고, "문하시중"까지 올랐으나, "최영ㆍ이성계"에 의해 실각되었다.  "신돈"이 살해된 후 한직으로 밀려났다가 1374년(공민왕 23) 곧 "수문하시중"에 임명되고, "광평부원군"에 봉해졌다. 그 해 "공민왕"이 시해되자 "공민왕"을 죽인 "홍륜ㆍ최만생"과 그 일파를 모두 처형하고, 왕족으로 대통을 잇게 하려는 "명덕태후(공원왕후)"의 뜻에 반하여 "공민왕"의 유일한 아들인 "모니노"를 "우왕"으로 추대하여 정권을 잡았다.  정권을 장악한 후에는 "권문세족"의 수장으로서 "친원 정책"을 견지하여 "친명 정책"을 주장하던 신진사대부들과 개혁 세력의 관료들을 추방했고, 10년간 "우왕"을 직접 섭정했다.

그는 "불법ㆍ권력남용ㆍ부패ㆍ수탈"과 그다지 관계가 없었는데, 밑에 있던 "임견미ㆍ염흥방ㆍ도길부" 등의 탐학과 부패가 극심해, 1388년 "우왕ㆍ최영ㆍ이성계"가 주도한 "부패권문세족 대숙청"에서 이들이 모두 가족ㆍ친척ㆍ측근ㆍ악노(악질적인 노비)들까지 모두 사형될 때, "이인임"을 귀양만 보내는 것으로 마무리를 지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가족ㆍ친척들이 모두 살아서, 심지어 조선왕조에서 출사해 관리가 되었다고 한다.

10.  신의왕후 한씨 (神懿王后ㆍ1337~1391ㆍ54세) : "정종ㆍ태종"의 생모

1351년(15세) 이성계(1335)와 혼인6남 2녀ㆍ한씨는 이성계가 전쟁터를 누비는 동안 고향 집에서 집안의 대소사를 도맡아 처리하며 내조하였다. 이성계는 "개경"에서 명문거족 "강윤성" 딸인 강씨를 "경처(京妻)"로 맞이하였고, 한씨는 이성계의 "향처(鄕妻)"로서 "고려 동북면 화령(함남 금야군)"에 거주하며 집안의 대소사를 살폈다.

1388년(우왕 14), "위화도 회군" 때에는 "포천 재벽동"에 머물다가 아들 "이방원"의 인솔 하에 식구들과 함께 "동북면"으로 피신을 갔으며, 1391년(공양왕 3) 8월 무렵 병을 앓기 시작하여 09.23일에 사망하였다.

관계도

11. 신덕왕후 강씨 (神德王后ㆍ1356~1396ㆍ40세) : 이성계의 후처 (조선 1번째 왕비)

"개경"의 명문거족 "강윤성" 딸ㆍ2남1녀 (이방번ㆍ폐세장 이방석)ㆍ1370년 초반, 19살 차이 나는 이성계(1335)와 혼인ㆍ태조의 정치적 조언자정릉(貞陵ㆍ서울 성북구)의 주인

처음 만난 일화는 유명한데, 어느 날 호랑이 사냥을 하던 이성계가 목이 말라 우물을 찾았는데, 마침 그 우물가에 한 여인이 있었다. 이성계가 그 여인에게 물 좀 떠 달라고 청하니, 여인은 바가지에 물을 뜨고 나서 버들잎 한 줌을 물 위에 띄워주었다. 바로 그 우물가의 여인이 강씨였다.  이에 이성계는 "이 무슨 고약한 짓"이냐며, 나무랐다.

여인은 갈증으로 급히 달려온 바, 냉수를 마시면 탈이 날 것 같아 버들잎을 불며 천천히 마시라고 일부러 그리했다고 수줍게 대답하였다. 이 말을 듣고 내심 감탄한 이성계가 그 때서야 여인을 유심히 살펴보았는데 여인의 미색이 아주 빼어났다. 여인의 지혜와 미모에 이성계는 한동안 넋을 잃었다. 이 이야기는 "고려 태조장화왕후"의 만남에 대한 설화와 동일하다.

"장화왕후ㆍ신덕왕후"는 각각 나라를 세운 시조의 2번째 부인이며, 지방의 세력 있는 호족의 딸이라는 공통점을 가진다는 점에서 와전된 것이거나, 많은 지방에서 전해 내려오는 유사한 구조의 버들잎 설화가 "이성계"와 결부된 것일 수 있다.

1392년, "이성계"가 "해주"에서 말을 타다가 떨어져서 크게 다친 것을 계기로 "정몽주"가 그를 제거하려 했을 때, 생모인 한씨의 무덤에서 여묘살이를 하던 "이방원"을 급히 "해주"로 보내 이성계를 "개경"으로 불러냈다. 또한 이방원이 그해 음력 4월 자객을 보내, "정몽주"를 죽였을 때도 "대신을 함부로 죽였다"며 크게 꾸짖던 이성계의 분노를 무마시킨 것도 강씨였다.

1396년, "신덕왕후"가 죽자, 태조는 몹시 애통해하며 명복을 빌기 위해 능 옆에 조그만 암자를 지어 매일 아침과 저녁마다 향차를 바치게 하다가, 다시 1년간의 공사를 거쳐 "흥천사(興天寺)"를 지어주기도 하였다. "태조"는 "흥천사"가 완공되자마자 그 때부터 능과 절을 둘러보는게 일상사가 되었다.

"신덕왕후"가 승하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 "의안대군"을 포함한 "신덕왕후"의 아들들은 모두 제거되었고, 사위도 살해당하고, 딸인 "경순공주"는 여승이 되었다.  강씨는 "신의왕후 한씨" 소생의 장성한 왕자들을 제치고, 자기 소생의 왕자에게 다음 왕위를 물려주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뜻이 맞은 "정도전"과 정치적 연합을 하여 "의안대군"을 왕세자로 만들었다. 그러나 장남도 아니고, "후처 소생의 차남이 왕세자가 된다"는 것을 "정안대군"을 비롯한 "신의왕후"의 아들들은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성계"는 계비인 "신덕왕후"의 아들 "방석"을 지명했다.

"신의왕후"의 5째 아들이자, 가장 정치적 야심이 컸던 "이방원"은 격분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그 분노는 강씨가 죽은 후에도 이어져 훗날 "태종"이 "서얼 금고령ㆍ적서 차별"을 제도적으로 만들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 정릉 (貞陵ㆍ서울 성북구 정릉동)

"신덕왕후 강씨"의 능으로, "태종 이방원"은, 정릉 파괴와 이전을 지시했다. "태조" 사후, "신덕왕후"를 "후궁"으로 격하시켰다. 1396년, "정동(貞洞) 영국대사관 자리"에 있었던 것을 1409년 (태종 9)"에 옮겼다.

"태조"가 특별히 가까이 "정동"에 두었던 "신덕왕후의 능 정릉"을 1409년(태종 9) 당시 4대문 밖 "경기도 양주 지역"이던 "서울 성북구"로 이장했고, 묘의 봉분을 완전히 깎아 무덤의 흔적을 남기지 말도록 명했으며, 파헤쳐진 정릉의 "병풍석ㆍ난간석"은 1410년 홍수로 무너진 "광통교" 복구에 쓰였으며 목재는 "태평관" 건축에 사용되었다. 능 앞에 세워진 "원찰" 역시 붕괴되어 재목으로 쓰인다.  "광통교"를 보수하는데 사용하게 하여, 온 백성이 이것을 밟고 지나가도" 했다.

그녀의 묘소가 훼철되는 날, 많은 비가 쏟아졌으며, 하늘에서는 울음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신덕왕후 복위" 문제는 왕대를 이어가며 논의를 거듭한 끝에 1669년(현종 10) "우암 송시열"에 의해 마침표가 찍혔다. 88년간 이어져온 논쟁이었다. 이로써 "신덕왕후"는 복위되어 "종묘"에 모셔지고 "정릉"은 왕릉으로서의 상설을 갖추게 되었다.  왕비로 복권되는 날에도 엄청난 비가 왔는데, 백성들은 그의 원혼이 흘리는 눈물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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