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도전 (鄭道傳ㆍ1342~ 398ㆍ56세)"은 조선 건국 직후부터, "참모" 역할을 버리고, 실질적 "주상의 길"을 걸은 것, "주원장"과의 대결에 집중하느라, "이방원"의 야심을 확실히 견제하지 못한 것들이 건국 6년 만에 그가 허무하게 무너지게 만든 핵심 요인들이었다.
1. 평 가
① 역사에서 보기 드문 "참모"였다.
"이성계"를 도와, "조선왕조"를 창업했을 뿐만 아니라, 새 왕조의 "건국이념ㆍ대외관계ㆍ경제체제ㆍ정치체제ㆍ사회체제ㆍ종교철학ㆍ도시구조" 등을 거의 혼자 힘으로 설계했다. 그는 중국의 전설적 참모인 "주공단ㆍ장량(장자방)ㆍ주은래(저우언라이)"등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었다. 어쩌면 이들보다 더 나았는지도 모른다. 이들은 "정도전"처럼 국가의 구도를 전면적으로 설계하지는 못했다. 이들이 더 나은 게 있다면, 이들의 나라가 정도전의 나라보다 땅덩어리가 훨씬 더 컸다는 점뿐일지 모른다.
• 주공단 : BC 11C에 활약한 친형인 주나라 무왕, 조카인 성왕을 보좌한 자
• 장량 (장자방) : BC 3C에 유방을 도와 한나라를 건국한 자
• 주은래 (저우언라이): 모택동(마오쩌둥)과 함께 중화인민공화국을 건설한 자
• "이방원"에게 피살된 장소 : 경복궁 정문인 광화문에서 왼쪽 부근에서 피살됐다. 묘(墓)의 위치는 알려지지 않는다.
• "이방원"의 무덤 (헌릉): 서울 서초구 내곡동의 국가정보원 옆에 있다.
② 자신을 차별화하는 내면적 특성이 있었다.
그 특성 때문에, 훨씬 더 왕성하게 활동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바로 그것 때문에 "정도전"은 이들보다 훨씬 더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내면적 특성은 바로 그의 "야심"이었다.
그것은 참모로서의 "야심"을 분명히 뛰어넘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주군의 자리"를 빼앗으려 한 것은 아니지만, 그는 "주군"을 이용해서 자신의 의지를 펼치겠다는 마음을 품었다. 자기를 헌신해서 주군의 의지를 성취하고자 하는 일반적인 "참모들"과는 달랐던 것이다. "정도전"은 "이성계를 왕으로 만들겠다."는 목표만 품었을 뿐, "이성계의 뜻을 세상에 펼치겠다."는 목표는 품지 않았다.
"태조실록"에 수록된 "정도전 졸기"에 따르면, 조선건국 직전에 정도전이 술자리에서 자주 하던 말이 있다. "한나라 고조 유방이 장량을 기용한 게 아니라, 장량이 한고조 유방을 기용한 것이다." "이성계"가 자기의 머리를 이용하는 게 아니라, 자기가 이성계의 군대를 이용하고 있다는 뜻을 이런 식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는 자기 자신을 결코 참모로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참모"치고는 아주 "불순"한 참모였다.
BC 11C에 활약한 "주공단"은 친형인 "주나라 무왕"을 보좌할 때나, 조카인 "성왕"을 보좌할 때에, 혹시라도 자신이 야심적인 인물로 비치지 않을까 항상 고심했다. 고대 중국 역사서인 "서경" 에 따르면, 그는 "무왕ㆍ성왕"을 염려하는 글을 써서 상자에 넣은 뒤, "이런 사실을 아무한테도 알리지 말라"며, 주변 사람들에게 입단속을 시켰다. 이 문서는 훗날 세상이 "주공"단을 의심할 때, 그를 구하는 수단이 됐다.
세상은 그가 혹시라도 조카인 "성왕"의 자리를 빼앗지 않을까 하고, 경계의 눈초리를 보냈다. 그런 시점에서 세상에 공개되어, "주공단"을 구한 것이 "아무한테도 알리지 말라"고 했던 바로 그 문서였다. 어쩌면 그는 그런 것을 염두에 두고 문서를 미리 작성해두었는지도 모른다. 이 사례는 "주공단"이 2인자의 철학에 얼마나 충실했는지를 보여준다.
BC 3C, "유방"을 도와 한나라를 건국한 "장량(장자방)"은 자기 역할이 끝나자마자, 스스로 초야로 돌아갔다. "내 주량은 딱 여기까지야"라며, 소주 두 잔만 비우고 일어서는 사람처럼, 그는 자기의 역할을 건국의 도우미에 명확히 한정했다. 덕분에 다른 참모들처럼, "토사구팽"을 당하는 불행을 겪지 않을 수 있었다. 그는 "2인자의 미학"을 잘 실천한 인물이었다.
"모택동(마오쩌둥)"과 함께, "중화인민공화국"을 건설한 "주은래"도 그런 사람이었다. 본래 "모택동"보다 상급자였다. 하지만 "대장정" 중인 1935.01월에 열린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 제1차 확대회의"에서 "모택동"과의 지위가 역전된 뒤, 그는 한마디 불평도 없이 "모택동"을 충실히 보좌했다. 그는 수십 년간, "모택동"과 함께하면서도 항상 "모택동"을 어려운 사람처럼 대했다.
③ "정도전"은 조선 건국에 성공한 뒤부터, "2인자의 길"에서 사실상 벗어났다.
그의 활약상은 분명히 왕인 "이성계"를 무색케 하는 것이었다. 형식적인 주상은 "이성계"이고, 실질적인 주상은 "정도전"이었다고 봐도 무리가 아니다. 그는 신생국 조선의 거의 모든 것을 직접 다 설계했다.
그 바쁜 와중에도 "불씨잡변" 이란 책을 써서 불교 비판과 유교 확립에 나서고, "조선 경국전" 등을 비롯한 법률까지 직접 만들고, 고려시대 역사서인 "고려국사" 까지 편찬했을 정도다. 이뿐 아니라 "정도전"은 "한양의 4대문"과 각 동네의 "지명"까지 직접 만들었다. "군사훈련의 매뉴얼"을 만들었음은 물론이고, 그것으로 훈련한 군대를 갖고, "요동(만주)정벌"을 단행하려 했다.
1392~1398년의 "조선"은 분명히 "정도전"의 뜻대로 움직이는 나라였다. "주공단ㆍ장량ㆍ주은래" 등이 옆에서 지켜봤다면, "이성계는 왜 저 자리에 앉아 있는 거야?"라며 의아해했을 것이다. 그러나 "정도전"은 자신이 평생 이룩한 결실을 끝내 지켜내지 못했다. 그는 주군의 아들인 "이방원"에게 의외의 일격을 받고, 건국 6년 만에 허무하게 무너졌다.
④ "요동을 지배하는 나라ㆍ재상 중심의 나라"처럼 그가 세운 청사진은 그의 죽음과 함께 흙 속에 묻히고 말았다.
사실, "정도전"의 실패는 그가 참모 역할을 버리고, "실질적 주상"이 되는 그 순간에 이미 예고된 것인지도 모른다. "정도전"은 조직력ㆍ자금력이 약해서, 자기 조직을 갖지 못한 사람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능력이 우수하고, "이성계"의 신임이 두텁다 해도 그가 자기 뜻대로 국가를 이끌어가는 데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기질적으로 지도자가 될 인물은 아니었다. 이에 더해, "이방원(이성계 아들)"을 잘 다루지 못한 것도 "정도전"을 무너뜨린 결정적 요인이었다.
"이방원"을 포함한 왕족들의 "사병"을 혁파하고, "요동 정벌"이란 기치 아래 온 나라를 단결시킨 "정도전"은 "고작 왕자 이방원"을 제대로 견제하지 못하고, 허무하게 무너졌다. 그런데 "정도전"이 "이방원"을 제대로 견제하지 못한 이유와 관련해서는 좀 더 많은 검토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단순히 "이성계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이방원"에 대한 견제를 소홀히 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정도전"은 "이성계"도 마음대로 다룬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이성계의 아들"을 제대로 공략하지 못했으니, 그가 왜 그렇게 했는지를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⑤ "정도전"의 학교 선배인 "정몽주"가 "이성계"는 물론 "정도전"까지 제거하려 했을 때, "선죽교 테러"를 통해, "이성계ㆍ정도전"을 모두 살린 인물이 바로 "이방원"이었다.
하지만, 이런 이유 때문에 "정도전"이 "이방원"을 봐준 것은 아니다. 이것만으로는 "정도전"이 "이방원"을 공략하지 못한 이유를 온전히 설명할 수 없다. "정도전"은 "대의ㆍ명분"을 중시하면서도, 필요에 따라서는 "인륜"을 과감히 저버릴 수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은사"인 "스승 이색"도 정치적으로 제거한 인물이다. "이색"은 1388년에 "쿠데타(위화도 회군)"로 성립한 "이성계ㆍ조민수 정권"에 동참한 뒤, "조준"과 손잡고, "이성계"를 견제했다. 그러자 "정도전"은 같은 "이색"의 제자인 "정몽주"와 함께 "이색"을 실각시키고 지방으로 귀양을 보냈다. 이처럼 "정도전"은 경우에 따라서는 "군사부일체의 윤리"도 저버릴 수 있는 인물이었다. 스승도 제거한 인물이 "주군의 아들"을 제거하지 못하란 법은 없다.
"한고조가 장량을 기용한 게 아니라, 장량이 한고조를 기용했다"는 말처럼, 주군을 수족처럼 활용한 사람이었으니, 주군의 아들이 자기 앞길에 방해가 된다는 판단이 섰다면 어떻게 해서든지 제거하려고 했을 것이다.
⑥ 그럼, "정도전"이 "이방원"을 사전에 제거하지 못하고 기습을 당한 이유는 무엇일까?
"정도전"이 죽은 이후, 역사 기록의 주도권을 잡은 쪽은 "이방원"이었다. 그렇기에 "이방원" 쪽이 만든 기록 속에서는 "이방원"의 위상이 두드러질 수밖에 없었다. "이방원" 계열이 만든 "태종실록" 등을 보면, "이방원"이 "정도전"을 제거한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 이전에 이미 "정도전ㆍ이방원 라이벌 구도"가 형성돼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을 갖기가 쉽다. 하지만, 그런 "라이벌 구도"가 일찍부터 형성돼 있었다면, "정도전"이 "이방원"에 대해 그처럼 방심했던 이유를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
"왕자의 난" 이전에 있었던 "사병 해체작업" 때, "정도전"은 "이방원"의 병력을 철저하게 해산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방원" 측은 무기ㆍ병력을 숨겨둘 수 있었다. "왕자의 난" 당일에도 "정도전"은 한가롭게 술을 마시다가, 기습을 당했다. 만약 "정도전ㆍ이방원 라이벌 구도"가 일찍부터 형성돼 있었다면, "정도전"이 이처럼 여유를 부리지는 못했을 것이다.
"정도전"이 "이방원"의 이복동생인 "이방석"을 "세자"로 만들어준 일 때문에, "정도전ㆍ이방원"의 관계가 소원해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두 사람 사이에 명확한 라이벌 구도가 형성된 것은 아니다. 그래서 그런 구도가 일찍부터 존재했던 것처럼 말하는 "이방원" 측의 설명은 어딘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갖지 않을 수 없다. 객관적 사실만 놓고 보면, "정도전"의 라이벌은 국내가 아닌 국외에 있었다.
⑦ "정도전의 라이벌은 바로, "명나라 태조 주원장"이었다.
"주원장"은 "이성계"보다 "정도전"을 더 경계했다. 그는 조선이 보낸 문서인 "표전문"에 자기를 모욕하는 표현이 있었다면서, "이성계"에게 "정도전을 명나라로 압송하라"고 거듭거듭 요청했다.
하지만, 문서에 적힌 표현을 빌미로 트집을 잡는 것은 "주원장"의 주 특기였다. 젊은 시절에 머리를 깎고, 탁발승 생활을 한 적이 있는 그는, 신하들의 문서에서 "빛 광(光)자나 대머리 독(禿)자"만 나와도, "이거 누구 보라고 쓴 거냐?"며, 정치 탄압을 가하곤 했다. "주원장"이 조선이 보낸 문서의 내용을 공개하지 않은 것을 보면, 그 문서에도 별 내용이 없었을 것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 그저 "정도전"을 죽일 명분을 찾고자, 그런 쇼를 벌였다고 볼 수밖에 없다.
"주원장"이 "정도전"을 경계한 것은 "정도전"의 실력도 실력이지만, 무엇보다 그의 야심이 무서웠기 때문이다. "정도전"은 무역흑자를 늘리고자, "명나라"와 무역 분쟁을 일으키고, "고구려 고토"를 수복하고자, "요동정벌"까지 추진했다.
"표전문 사건"이 있기 전, "주원장"을 방문한 뒤, 귀국길에 오른 "정도전"은 "북경 동북쪽"에 있는 "산해관(만리장성의 관문)"을 지나면서, "잘되면 좋지만, 안 되면 한바탕 붙어야겠어."라는 말을 흘렸다. "명나라를 상대로 전쟁을 벌이겠다"는 의중을 내비친 것이다. 이 발언은 옆에 있던 사람들을 통해, "주원장"의 귀에 흘러 들어갔다.
이런 이유로, "주원장"은 "정도전"에 대한 경계심을 노골적으로 표출했고, 이 때문에 두 사람의 라이벌 구도가 국제적인 관심거리로 떠올랐다. 14C 후반, 세계 최강은 "동아시아"를 지배한 "명나라"였다고 볼 수 있다. 세계 최강인 "명나라"를 지배하는 "주원장"이 "정도전"을 가장 무서워했다면, 당시 세계 최고의 라이벌은 "정도전ㆍ주원장이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렇게 "정도전ㆍ주원장 라이벌 구도"가 국제정치를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당시로서는 어느 누구도 "정도전ㆍ이방원" 구도를 떠올리기가 쉽지 않았다. 물론 "이방원" 측은 자신들의 라이벌이 "정도전" 측이라고 생각했겠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들만의 생각일 가능성이 높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정도전"이 "이방원"의 위험성을 간과했을 가능성이 있다. "정도전"은 "이방원"이 자기를 미워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자기를 대적할 만한 수준은 아니라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래서 그렇게 허무하게 기습을 당했을 가능성이 있다.
2. 한양 천도 (漢陽 遷都) : 경복궁의 궁궐내, 전각 이름 뜻 (내용)
1392.07.17일,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고, 1392.08월부터 "정도전"은 새로운 도읍지 건설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는데, 이는 고려의 "구신(舊臣)ㆍ세족(世族)"이 도사리고 있는 "개경(開京ㆍ개성)"은 신왕조 정착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 그의 견해엿다. "정도전"은 1394.08월부터 "개경"을 떠나 새로운 도읍 건설을 추진하여, "한양(漢陽)"을 새 왕조의 도읍으로 정하였다. "한양"을 조선의 새 수도로 결정한 것은 물론, 한양 도시설계에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경복궁 (景福宮)"의 위치도 그가 잡은 것으로, "무학대사(無學大師)"는 "인왕산(仁旺山)"을 주산(主山)으로 궁궐을 세워야 한다고 했으나, 그는 반대하였다. "무학대사"가 추천한 위치는 동향(東向)이며, 터가 너무 좁아 왕도(王都)로 적당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결국 "정도전"의 뜻대로 "경복궁"이 현재의 자리에 세워지게 되었다. "한성부"의 각 궁궐ㆍ전각ㆍ문(門)의 이름을 짓고, 도로ㆍ수도의 행정분할도 결정하였다.
1394년, 새로운 사회에 맞는 사상으로 "유교(儒敎)ㆍ성리학(性理學)"을 정식 국교로 채택할 것을 주청하였으며, 그 해에 "심기리편(心氣理篇)"을 지어, 불교ㆍ도교(道敎)를 비판하고, 유교(儒敎)가 실천덕목(實踐德目)을 중심으로 하는 "인본주의(人本主義) 사상"이라고 주장하였다. "태조 이성계"의 허락 아래, 종묘(宗廟)ㆍ사직(社稷)ㆍ궁궐의 터 등이 들어설 자리를 정했을 뿐만 아니라, 각종 궁궐ㆍ각 전각(殿閣)의 이름도 모두 "정도전"이 지었다.
전각ㆍ거리의 이름을 지을 때는 "유교적 덕목"이 잘 나타나도록 "근정(勤政)ㆍ인정(仁政)" 등의 단어를 사용하였다. 또한 4대문ㆍ4소문의 이름과 현판을 짓기도 했고, 종묘의 제례법ㆍ음악(音樂)도 제정하였다.특히 "몽금척(夢金尺)ㆍ수보록(受寶錄)ㆍ문덕곡(文德曲)" 등 수많은 악장을 지어, "태조 이성계"의 공덕을 찬양하였는데, 이 악장은 조선조 500년간 연주되었다.
조선이 건국되고 3년이 지난 1395.09.29일, "한양"의 "북악산" 아래 넓은 터에는 "390여 칸" 규모의 새 궁궐이 들어서는데, 200년 가까이 조선왕조에서 "법궁(法宮)"의 지위를 유지한 "경복궁(景福宮)"이다. 새 궁궐의 영건을 축하하며 잔치를 베푸는 자리에서, 술이 거나해진 "태조 이성계"는 정도전에게 궁궐과 각 전각의 이름을 짓도록 명하였다.
과연 정도전은 무엇에 근거하여 "궁궐의 이름"을 지었을까? <태조실록- 1395.10.07일>의 기록에는 정도전이 중심이 되어, 각 건물의 이름을 짓게 된 동기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자세한 설명을 하고 있다. "판삼사사(判三司事) 정도전"에게 분부하여, 새 궁궐의 여러 전각 이름을 짓게 하니, 정도전이 이름을 짓고, 아울러 이름 지은 의의를 써서 올렸다.
새 궁궐을 "경복궁(景福宮)"이라 하고, "연침(燕寢)을 강녕전(康寧殿)"이라 하고, 동쪽에 있는 "소침(小寢)을 연생전(延生殿)"이라 하고, 서쪽에 있는 "소침(小寢)을 경성전(慶成殿)"이라 하고, 연침(燕寢)의 남쪽을 "사정전(思政殿)"이라 하고, 동루(東樓)를 "융문루(隆文樓)"라고 하고, 서루(西樓)를 "융무루(隆武樓)"라 하고, 전문(殿門)을 "근정문(勤政門)"이라 하며, 오문(午門)을 "정문(正門)"이라 하였다.
"근정전"은 국가의 중대한 의식을 거행한 건물로 "경복궁"의 중심이었으며 조선왕실을 상징하는 건물이다. 현존하는 최대의 건물이다. "정전(正殿)"인 "근정전"의 이름에 대하여서는 부지런함이 위정자에게 중요함을 강조하였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정도전이 모든 일에 부지런해야 함을 말한 것이 아니라 "부지런할 바"를 알아서 부지런히 정치해야 한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실록>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근정전(勤政殿)"과 "근정문"에 대해 말 하오면, 천하의 일은 부지런하면 다스려지고, 부지런하지 못하면 폐하게 됨은 필연의 이치입니다.작은 일도 그러 하온데, 하물며 "정사"와 같은 큰일이야 더 말할 나위 있겠습니까. "서경(書經)"에 말하기를 "경계하면 걱정이 없고 법도를 잃지 않는다" 하였고, 또 "편안히 노는 자로 하여금 나라를 가지지 못하게 하라. 조심하고 두려워하면 하루 이틀 사이에 일만 가지 기틀이 생긴다. 여러 관원들이 직책을 저버리지 말게 하라. 하늘의 일을 사람들이 대신하는 것이다"고 했으니, "순(舜)임금"과 "요(堯)임금"의 부지런함입니다. 그러나 임금의 부지런한 것만 알고, 그 부지런할 바를 알지 못한다면, 그 부지런한 것이 너무 복잡하고 너무 세밀한 데에만 흘러서 볼만한 것이 없을 것입니다. "선유(先儒)"들이 말하기를, "아침에는 정사를 듣고, 낮에는 어진 이를 찾아보고, 저녁에는 법령을 닦고, 밤에는 몸을 편안하게 한다."는 것이 임금의 부지런한 것입니다. 또 말하기를 "어진 이를 구하는 데에 부지런하고, 어진 이를 쓰는데 빨리 한다"고 했으니, 신(臣)은 이것으로써 이름 하기를 청하옵니다.
정도전은 "침전(寢殿)을 강녕전(康寧殿)"이라고 한 의미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다.
"강녕전(康寧殿)"은 왕이 일상을 보내는 거처이었으며, "침전"으로 시용한 전각이다. "서경(書經) 홍범구주(洪範九疇)"에는 사람이 살면서 누릴 수 있는 "5가지 복(福)"이 나열되어 있는데, 이 중에서 3번째가 바로 "강녕(康寧)"이다. "수(壽,장수)ㆍ부(富,부귀)ㆍ강녕(康寧,평안)ㆍ유호덕(攸好德,덕을 좋아함)ㆍ고종명(考終命,천명을 다함)"의 5가지 "복(福)"은 그 중간인 "강녕"을 들어서, 다 차지할 수 있다고 여겼다. 정도전은 한가하고 편안하게 혼자 거처할 때에도 마음을 바르게 해야, 왕의 자리가 세워지며, "5복"을 누릴 수 있다고 말했다. 한가하고 아무도 없는 와의 사적인 공간에서도 스스로 경계하여 마음을 바로 할 것을 바라는 마음이 배어있는 곳이 "강녕전"이었다. <실록>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강녕전"에 대해 말씀드리면, "서경 홍범구주"의 "5복(五福)"중에 3째가 "강녕(康寧)"입니다. 대체로 임금이 마음을 바르게 덕을 닦아서 황극(皇極)을 세우게 되면, 능히 오복을 향유할 수 있으니, "강녕"이라는 것은 "5복"중의 하나이며, 그 중간에 들어서 그 남은 것을 다 차지하려는 것입니다. 옛날 "위(魏)나라 무공(武公)"이 스스로 경계한 시(詩)에 "네가 군자와 벗하는 것을 보니 너의 얼굴을 상냥하고 부드럽게 하고, 잘못이 있을까 삼가는구나. 너의 방에 있는 것을 보니 다른 사람이 보지 않는 곳에서도 부끄러움이 없도록 하는구나."고 하였습니다. 대체로 공부를 쌓는 것은 원래가 한가하고, 아무도 없는 혼자 있는 곳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원 하건데, 전하께서는 "무공(武公)의 시(詩)"를 본받아 안일한 것을 경계하며,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두어서 황극(皇極)의 복(福)을 누리시면, 성자신손(聖子神孫)이 계승되어 천만대를 전할 것입니다. 그래서 "연침(燕寢)"을 "강녕전"이라 했습니다.
"사정전(思政殿)"은 "편전(便殿)"이며, 임금이 평상시에 머물면서 정사를 돌보던 곳이다.
"정전(正殿)"인 "근정전(勤政殿)" 바로 뒷 편에 위치하며, 사이에 "사정문(思政門)"이 있고, "사정전" 뒤로 "향오문"을 통해 "강녕전"으로 연결된다. "편전(便殿)"을 "사정전"이라 한것에 대해서는 "정사(政事)"를 함에 늘 생각하고, 생각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실록>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사정전"에 대해 말하면, 천하의 이치는 생각하면 얻을 수 있고, 생각하지 아니하면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대개 임금은 한 몸으로서 높은 자리에 계시오니, 만인의 백성은 슬기롭고ㆍ어리석고ㆍ어질고ㆍ불초함이 섞여 있고, 만사의 번다함은 옳고ㆍ그르고ㆍ이롭고ㆍ해됨이 섞여 있어서, 백성의 임금 된 이가 만일에 깊이 생각하고 세밀하게 살피지 않으면, 어찌 일의 마땅함과 부당함을 구처(區處)하겠으며, 사람의 착하고 착하지 못함을 알아서 등용할 수 있겠습니까. 이 "전(殿)"에서는 매일 아침 여기에서 정사를 보시고, 만기(萬機)를 거듭 모아서 전하에게 모두 품달되면, 조칙을 내려 지휘하시매 더욱 생각하지 않을 수 없사오니, 신(臣)은 "사정전(思政殿)"이라 이름 하옵기를 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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