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선대원군 (興宣大院君ㆍ1820~1898ㆍ77세)"은 "이호준 (이완용의 양아버지)"과도 교분을 쌓게 되는데, "이호준"은 첩에게서만 아들 (이윤용)이 있었고, 정실부인에게는 아들이 없어, "이완용"을 양자로 맞이하였다. 대원군은 "이완용ㆍ이윤용(이완용의 이복 서형)" 형제를 신임하여, "이윤용"에게 자신의 첩이 낳은 서녀를 시집보내 사위로 삼았다. 훗날 "이완용ㆍ이윤용" 형제는 "친일파"가 되는데, 그 빌미를 대원군이 만들어준 셈이었다.
1. 척화비 : 병인양요 (1866.10/ 프랑스와 전쟁)ㆍ신미양요 (1871.06월/ 미국과 전쟁)
① 병인양요 (1866.10~12월)
1866년 (고종3), 대원군의 "병인박해 (천주교 탄압)"을 구실 삼아, "외교적 보호"를 명분으로 하여 "프랑스"가 일으킨 전쟁ㆍ"프랑스"가 "병인양요"를 일으킨 진짜 이유는 "천주교 박해"에 대해 보복한다는 구실로 침범하여 조선의 문호를 개방시키려는 것이었다. 이 사건으로 "조선의 쇄국 정책"은 한층 강화되었다.
조선에서는 "천주교"를 금하면서, "프랑스 신부"까지 포함하여 수 천명의 "천주교도들"을 처형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병인박해) "병인박해 때", "프랑스 신부 3명(리델ㆍ페롱ㆍ깔래)"은 지방에서 몸을 숨겨 살아날 수 있었다. 이들은 이 사실을 "중국"에 있는 "프랑스 관리"에게 알리기로 하였다. 이에 "리델 신부"는 "중국 톈진"에 있는 "프랑스 극동함대 사령관 로즈 제독"에게 조선에서의 "천주교도 박해" 사실을 알리고, 살아 있는 두 신부를 구출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로즈 제독"이 이끄는 프랑스 함대(7척)이 "강화도"를 점령하고, 프랑스 신부를 살해한 자에 대한 "처벌ㆍ통상 조약 체결"을 요구했다. 대원군은 요구를 묵살한 뒤, "훈련대장" 밑에 "순무영(巡撫營)"을 설치해 무력으로 대항했다. 조선군은 "프랑스 해군"이 방심하는 사이, 기습하여 "프랑스군(3명)"을 죽였다. 그러자 "프랑스 해군"은 40여 일 만에 물러났다.
② 신미양요 (1871.06월)
1866.08월, "제너럴 셔먼호(미 상선)이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통상을 요구하다가, "평양" 군민과 충돌하여, 선원과 배가 타 버리는 사건이 일어났다. 1871년(고종8), 조선과 "미국" 간 전쟁으로, "제너럴 셔먼호 사건"의 책임과 통상 교섭을 명분으로, 5척의 군함과 1,230명의 병력으로 조선의 주요 수로였던 "강화해협(강화도-김포 사이)"을 거슬러 올라왔고, 강화도를 공격했다.
조선 측의 거부를 무시하고, 무력으로 탐침을 시도하여 교전이 일어났다. 3일간의 교전 결과, 조선은 "광성보"가 함락되고, "순무중군 어재연"을 비롯한 수비 병력 대다수가 사망하였다. "미 해군"은 20일간 통상을 요구하며 주둔하였으나, 조선의 완강한 쇄국 정책으로 아무런 협상을 하지 못하고 철수하였다. "신미양요" 이후, 조선은 "척화비"를 세우고 쇄국 정책을 강화하였다.
③ 척화비 : 흥선 대원군의 쇄국 정책
대원군은 "서양 오랑캐가 침범함에 싸우지 않음은 곧 화의 하는 것이요, 화의를 주장함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 戒我萬年子孫 丙寅作辛未立)"는 내용의 "척화비"를 전국 각지에 세우고, 서양 세력과 교류하지 않겠다는 결의를 다지게 하였다.
2차례에 걸친 서양의 침입을 물리친 대원군은 서양 세력을 배척하는데 더욱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게다가 "병인양요" 이후, "독일인 오페르트"가 "남연군(대원군 아버지)"의 무덤을 도굴하려다 실패하고 달아난 사건이 일어나, 서양인을 배척하는 기운이 더욱 높아지게 되었다.
서양과의 통상ㆍ수교를 거부하는 정책은 "일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일본"은 서양의 근대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새로운 근대 국가로서의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의 세력을 넓히고자 조선에 수교를 요청하여왔다. 대원군은 서양 문물을 받아들인 "일본"도 서양과 똑같은 "오랑캐"라 생각했으며, 그들의 수교 요구도 서양 세력의 침범과 같은 것이라 여기고, 거절하였다.
서양 및 일본과의 수교를 거부하고, 그들을 배척하려는 조선의 대외 정책은 외세 침략의 위협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한 자주적 성격을 띠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대외 정책은 외세의 침략을 일시적으로 막아내는 데에는 성공하였으나, 조선이 서양의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는 시기를 그만큼 늦어지게 하여, 결국 근대화를 지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2. 강화도 조약 (1876.2월)ㆍ운요호 사건 (1875.09월)
① 운요호 사건 (1875.09월)ㆍ강화도 사건
통상 조약 체결을 위해, "운요호(일본 군함)"가 불법으로 "강화도"에 들어와 측량을 구실로 조선 정부의 동태를 살피다가, "조선 수비대"와 전투를 벌인 사건
조선을 무력 위협으로 개항시키겠다는 생각을 굳힌 "일본"은 조선의 "동해안ㆍ남해안ㆍ서해안"에서 중국에 이르는 뱃길을 연구한다는 구실로, 서해안을 거슬러 "강화도" 부근에 이르렀다. "운요호"가 먹을 물을 구한다는 구실로 "강화부 초지진 포대"에 접근하자, 조선군은 포격을 가하였고, "운요호"에서도 "초지진 포대"를 향해 발포하였다. "영종도"에 상륙한 일본군은 불을 지르는 등 못된 짓을 하다가 "일본"으로 돌아갔다.
"운요호 사건"이 있은 후, "일본"은 먹을 물을 구하기 위해 초지진에 접근했던 일본 배가 조선군의 포격으로 많은 피해를 입었다고 항의하며, 여러 척의 군함으로 "부산 앞바다"에서 무력시위 하였다. 이 사건은 일본이 저지른 불법적인 무력행위였다. 엄연히 주권이 있는 남의 나라 영토에 들어와, 사람을 죽이고 불을 지르고 집을 부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본은 조선과의 교섭 구실을 만들기 위해, 의도적으로 이 같은 무력행위를 일으켰던 것이다.
② 강화도 조약 (1876.2월)ㆍ조일수호조규ㆍ병자수호조약(丙子修好條約)
조선과 일본 제국 사이에 체결된 조약으로, 한일 관계에서 중요한 의의가 있다. 근대 국제법의 토대 위에서 맺은 최초의 근대식 조약이며, 일본의 강압적 위협으로 맺어진 불평등 조약 (서명 장소 : 조선 경기도 강화유수부 연무당 (인천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ㆍ일본과의 무역을 위해, "3개 항구를 연다는 것"을 포함하여, "일본의 경제 침략"을 가능하게 하는 조약들이 중심내용으로, 조선의 권익이 지켜지지 못한 불평등 조약이었다
1876년, 6척의 군함을 이끌고 "강화도"에 와서 군사적인 위협을 가하는 한편, 조선 정부에 담판을 요구하였다. 이 무렵 조선에는 여전히 쇄국을 주장하는 세력이 컸으나, 한편으로는 개항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세력이 싹트고 있었다. 결국, 조선이 발전하려면 세계 여러 나라와 통상 조약을 맺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회담을 벌였다. 여러 차례의 담판 끝에 "조선 대표 신헌ㆍ일본 전권대사 구로다" 사이에 "조약문(전문 12조)"이 "강화도"에서 조인되었다(1876.02월).
3. 논란ㆍ의혹
① "동학 농민 운동" 사주
"동학 농민군"에게 거병을 사주했다는 것은 "러시아 외교관"의 비밀 편지에도 나타난다. 1894.02.21일 자, 주일본 러시아 공사 "미하일 히트로포(Mikhail Hitrovo)"가 주조선 러시아 공사 "베베르(Karl L. Weber)"에게 보낸 비밀 정보에 따르면, "나의 정보원을 통해 다음과 같은 첩보를 받았다. 임금의 아버지(대원군)가 주모자로 나서서 중대한 폭동을 조성하고 있으며, 이 폭동은 오는 여름 혹은 아무리 늦어도 가을 이전에 폭발할 것이며, 공모자와 대리인들이 일본과 중국에서 무기를 구입하고 있으며 이미 4천여정의 소총이 구매되었는바, 그 중 일부는 일본에서 나왔고 소수의 일본인이 이에 가담하여 일을 같이 꾸미고 있으며, 이 음모에 대해 일본 정부는 전혀 모르고 있다는 등이다."라는 것이다.
② "명성황후ㆍ일가" 테러 의혹
"고종"의 친정 선언 직후인 1873.12.10일, "명성황후" 침전에 폭약을 설치해 "경복궁"에 대화재를 일으킨 세력의 배후 인물로 대원군이 의심받았다. 또한 대원군은 1874년 "민승호(명성황후의 친정 양오빠)" 집안 폭사의 배후로 지목되었다.
1874.11월, "민승호"가 정체불명의 불교 승려로부터 선물로 받은 꾸러미가 폭발, "민승호 부자ㆍ감고당 한산이씨(명성황후의 친모)"가 그 자리에서 폭사한다. 소포 폭탄이었다. "명성황후"는 대원군의 소행으로 여겨, 시아버지와 며느리의 관계는 더이상 돌이킬 수 없는 사이가 되어 버렸다. 물증은 없었지만, 대원군의 복수극이 분명했다. 한편 "민영익" 역시 폭사의 배후를 대원군으로 보고, 복수를 다짐하기도 했다. "임오군란"을 전후해 발생한 이 사건은 당대에 그가 하수인을 사주하였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③ "이준용ㆍ이재선" 추대 음모
• 손자 : 영선군 이준용(적장손ㆍ李埈鎔ㆍ1870~1917ㆍ46세) • 서자 : 완은군 이재선 (李載先ㆍ흥친왕 이재면/고종의 서형ㆍ1841~1881ㆍ39세)
1876년, "이준용(적장손))" 추대 음모에서 배후로 여겨지게 되나, 구체적으로 증명된 것은 없다. 그러나 1881년 "이재선(소실 계성월의 아들)"을 추대하려던 "이재선 역모 사건"에는 대원군의 측근인 "안기영ㆍ허욱ㆍ권정호ㆍ이두영" 등이 현장에서 체포되어, 그의 사주가 확인되었다. 그러나 대원군은 왕의 친부이므로 처형하지 못했고, 대원군의 측근 안기영ㆍ권정호ㆍ이두영ㆍ이재선(고종 이복형)"을 처형하는 선에서 사건은 마무리 지어졌다.
④ 도정궁 "이하전" 제거 개입 의혹
집권 전, 대원군은 "도정궁 이하전"의 제거에 가담하거나, 조장했다는 의심을 받았다. "유주현(대원군의 작가)"에 의하면, 1863년 무렵, 대원군을 "이하전" 사사의 배후로 의심한 "이상지"가 "운현궁"에 자객으로 들어갔다가, 천하장안에게 발각되었다는 설을 기술해 놓았다. "근세조선정감(박제형 저)"에 의하면, 남병철은 흥선대원군이 이하전 사사에 관해 의심했다고 한다. "안동 김씨 세도가와 의령 남씨 남병철은 흥선군을 깔보고 만나기만 하면 조롱했다.
그러나 흥선군은 이것을 오히려 영광으로 여겼다. 하루는 흥선군이 남병철의 집에 갔는데, 이날 남병철이 조용히 흥선군에게 이르기를, "그대가 이하전의 역모를 알고 있었지?”라고 했다. 흥선군은 깜짝 놀라서 일순간 얼굴빛이 흙색으로 변했다. 그리고 머리가 땅에 닿도록 엎드려서 "그대는 어찌해서 이러한 나쁜 연극을 꾸미는 것이오?"했다. 남병철은 크게 껄껄 웃으면서, "시백(時伯)은 어찌 그리 담이 작소."라고 했다."고 한다. "박제형"은 "벌써 남병철은 슬기로운 눈총으로 흥선군의 속마음을 알아차려 한번 시험해 본 것이었다. 흥선군은 그만 진땀이 나서 등을 다 적셨다. 집으로 돌아와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를, 오늘 내가 십년 감수했다"고 한다.
⑤ "개화파" 암살 사주
1894.09월, 대원군은 4회의 서신을 보내, "개화파" 암살 지령을 내렸다. "대원군 파"는 정국을 바꾸기 위해, 개화파의 중심인물(김홍집ㆍ이완용ㆍ유길준ㆍ박정양ㆍ김학우ㆍ김가진ㆍ안경수" 등 개화파의 중심인물을 제거하려고 시도하였으나, "김학우"만을 암살하는데 그쳐 성공하지 못하였다.
"개화파 제거" 계획은 대원군의 지휘하에 "고종주ㆍ김국선" 등이 담당하였다. 이 계획은 비록 "김학우(법무협판)" 한 사람을 암살하는데 그쳤지만, 이 사건이 "대원군 파"에 의해 자행되었으리라는 의혹이 강하게 일면서, "조희연ㆍ안경수ㆍ김가진" 등 "개화당"이라고 불리는 자들은 공포를 느끼고, 자신의 안전을 걱정하여 직무에 전념하지 못한 채, "안경수ㆍ김가진" 같은 사람은 지방관으로 전임하기를 원하였다. 1895.05.23일, "김학우(법무협판)" 암살에 관여한 인사들 가운데, 주동자였던 "고종주ㆍ전동석ㆍ최형식"은 특별법원에서 각각 "모반죄ㆍ모살죄"로 교형을 선고받고 처형되었으며, 하수인이었던 "고치홍ㆍ이여익ㆍ 서병규ㆍ이영배ㆍ김한영ㆍ장덕현ㆍ최형순" 등은 모살죄로 종신유형을 선고받고 "백령도ㆍ제주도"에 유배되었다.
⑥ "흥인군 (3째 친형)"과 갈등ㆍ살해 논란
자신보다 무능력하면서 욕심이 많았던 3째 형 "흥인군"을 의도적으로 무시했다. 대원군은 "흥인군"을 "경복궁 중건" 때, "영선도감 제조"로 임명하여 공사를 감독하게 했다. 그러나 1867.03월 "경복궁 중건" 1년 만에, "경복궁" 공사장에 화재가 발생하여, 전각과 재목이 방화로 소실되자, 대원군은 대노하여 책임을 물어 "흥인군ㆍ이경하"를 투옥ㆍ처형하려고 했으나, 중신들의 만류로 그만두었다. 대원군은 자신의 형을 못 마땅히 여겨,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10년 동안에도 한 발짝 내딛을 땅조차 빌려준 적이 없어서 "흥인군"은 오랫동안 불쾌한 감정을 가슴에 품고 있었다.
"민승호(명성황후의 양 오빠)"는 "흥인군"을 이용하여, 대원군의 동정을 엿볼 심사로 친밀감을 표했다. "명성황후"에게도 속뜻을 이야기했다. "흥인군은 무모하기 짝이 없는 어리석고 못난 사람입니다. 대원군 10년 집정기간 동안 부뚜막 아래 굶주린 개 같은 푸대접을 받았으니, 그 속은 불만으로 가득 차 있을 것입니다. 그런 위인인 만큼 조금 관대하게 대해주면 분명히 감복하여 시키는 대로 운현궁의 동태를 낱낱이 살펴 아뢸 것입니다."
"민승호"는 "흥인군ㆍ대원군"의 감정대립을 이용하여, "흥인군"을 으로 "대원군"을 이용하려 하였다. 그러자 대원군은 다시 "흥인군"을 이용해, "민씨 일파"의 동정을 염탐하려 하였다. "흥인군"은 재물을 탐하는 나쁜 버릇이 심했다. 그는 한때의 요행으로 작은 세도를 얻어, 대부호가 되는 것을 목적으로 닥치는 대로 돈과 재물을 긁어모았고, 이런 "흥인군"의 행동거지를 눈치채지 못할 대원군이 아니었다.
대원군은 예민한 촉수로 "흥인군"의 일거수일투족을 빠짐없이 감시하고 단속하면서, 거꾸로 "흥인군"을 통해 "민씨 일파"의 동정을 탐문했다. 그러자 애초 "민씨 일파"가 계획했던 "운현궁의 동태"는 알 길이 없어지고, "의정 대신"이라는 지위는 "흥인군"의 재물 욕심을 채워 주는 도구가 되고 말았다.
1875.11월, "흥인군" 집에 원인을 알 수 없는 방화가 일어났고, 이 또한 대원군의 소행이라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1882.06.10일, "임오군란" 당시, "흥인군"은 대원군의 사주를 받은 "임오군란 난군"에 의해 살해되었다. 난병이 "흥인군" 집을 포위하자, 그는 담장을 넘으려다 떨어져, 고환이 터져 결국 사망한다.
06.09일, "임오군란"이 발생하자, 그는 밤새 잠을 못 자고, 06.10일 새벽에 겨우 잠이 들었다. 그러나 집 밖에서 별안간 떠들썩한 바람에 급히 일어나, 뒷담을 뛰어넘으려 하였다. 담에서 떨어진 그는 고환이 터져 신음하다가, 난병의 창에 찔렸다. 대원군의 형으로 "민씨 일파를 도와주었다"고 하여, 대원군이 일으킨 난병에게 무참하게 참살당한 것이다.
⑦ 독재화
모든 "군사ㆍ정무"는 왕명으로 나갔지만, 실제로는 대원군이 직접 처결하였다. 대원군은 왕의 고유권한인 "인사권"도 자신이 독자적으로 처결하였다. 인사발령을 할 때는 언제나 그가 미리 후보 명단을 작성하여 자리를 채운 뒤에 올리면, "고종"은 그것을 따라 낙점만 할 뿐이었다. 이에 "명성황후와 조대비"는 "고종"에게 "당신의 나라인지, 대원군의 나라인지" 반문하였다.
황현은 이를 두고 독단적이라고 지적했다. "종전의 세도는 비록 한 사람이 주관하고 있을지라도 옆으로 아들과 조카, 인척들이 종종 한 몫을 하고 있었으므로, 서로 간섭하고 부족한 점을 보완하여 오직 실각하지 않을까 두려워했다. 그러나 대원군 때는 혼자 집권했기 때문에, 비록 음관 한 명이나 변방의 장수 한 사람이라도 대원군을 거치지 않고는 발령할 수 없었다."고 하였다.
⑧ "민씨 세도" 용인ㆍ권력투쟁
"세도정치를 거부했다"는 주장과는 달리, 대원군은 세도정치를 거부하지 않았다. 단지 세도가의 대상을 "안동 김씨ㆍ풍양 조씨"에서 자신의 처가 "여흥 민씨"로 바꾸었을 뿐이고, "여흥 민씨" 세력이 "유림"과 손잡고, 대원군을 축출(1874년)하기 시작하면서, "민씨 가"와 대원군의 협력관계가 악화되었다는 것이다. "임용한"에 의하면, "대원군은 세도정치를 거부하지 않았다. 대상을 바꾸었을 뿐"이라고 보았다.
대원군은 집안에 재산이 있던 왕족으로 가난한 "파락호"가 아니었듯이, "명성황후 민씨"의 집안도 아버지를 일찍 여의기는 했지만, 완전히 몰락한 양반가가 아니었다. "명성황후"가 8살 때 아버지 "민치록"이 사망한 것은 사실이지만, "여흥 민씨가"는 조선 시대에 왕비를 3번이나 배출한 명문가였고, "명성황후"는 그중에서도 핵심 인물인 "민유중"의 직계 자손이다. 대원군의 부인인 "여흥부대부인 민씨" 또한 "민유중"의 5대손인 "민치구"의 딸이다. "민치록"은 아들이 없어, "민승호(민치구의 아들)"을 양자로 삼았다.
"명성황후"는 시어머니 "부대부인 민씨"와 언니 동생뻘의 같은 항렬이며. "민승호"와의 인연도 남달랐다. "명성황후ㆍ부대부인 민씨"는 가까운 사이였고, "고종"도 어려서 "명성황후"를 알아서 "안국동 이모"라고 불렀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즉, "대원군"은 "철종" 처가인 "안동 김씨"를 몰아내고, 자신의 처가로 그 자리를 채운 것이다. 초창기에는 "민씨 정권"의 세도를 일부 용인했으나, 권력을 독식하려던 "민씨 일족"이 대원군을 축출하면서 다시 권력을 획득하려는 대원군과 독식하려는 "민씨 가문" 간의 권력 쟁탈전이 발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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