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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인 : 김만덕 (조선 최초CEOㆍ1739~ 1812ㆍ정조 때)

by 당대 제일 2022. 9.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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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덕 (金萬德ㆍ1739~1812ㆍ향년 73세ㆍ기녀ㆍ제주 출생)"은 조선의 여자 상인이며, 조선 최초의 여자 CEO이다. 1793년 "제주도"에 "대기근"이 닥치자, 전 재산을 풀어, 육지에서 사온 쌀을 모두 "진휼미"로 기부하여, 빈사 상태의 "제주도 백성"들을 구제하여,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였다.

 

1. 김만덕 (金萬德ㆍ1739~1812ㆍ향년 73세ㆍ기녀ㆍ제주 출생)

조선의 여자 상인조선 최초의 여자 CEO제주에서는 "의녀(義女) 김만덕"으로 불린다"김응열(중개상인)"의 딸로 태어났으며, 어려서 부모를 잃고, 12세 고아가 되었다1793"제주도""대기근"이 닥치자, 전 재산을 풀어, 육지에서 사온 쌀을 모두 "진휼미"로 기부하여, 빈사 상태의 "제주도 백성"들을 구제하여,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였다.

묘 비 : 1812(순조12), 73세를 일기로 별세한 "김만덕의 묘"

"가운이마루 길가"에 조성되었으며, 1977 정월 "제주시 건입동""모충사"로 이묘되었다 "김만덕 묘비(金萬德 墓碑)"2007.01.24"제주특별자치도"의 기념물 제64호로 지정되었다 1812(순조12)에 세워져 지금도 남아 있는 "묘비문"에는 "김해 김씨"로 되어 있다 그러나 당시에는 "수로왕" 후손뿐만 아니라, "경순왕" 후손의 일부도 본관을 "김해"로 썼다. 이를 구분하기 위해 "선김(先金)""후김(後金)"으로 부르다가, 1846(헌종12)에 국왕의 윤허를 받아 "후김(後金)""경주 김씨"로 썼다.

2.  생 애

"김응열(중개상인)"의 딸로 태어났으며, 어려서 부모를 잃고, 12세 고아가 되었다친척 집에서 겨우 목숨을 이어가던 그녀는 나이든 "기녀" 집에 의탁하였다어른이 된 후, 그녀는 "기녀"가 천시 받는 직업임을 알게 되어, "제주목사 신광익"에게 탄원하여 "양인(良人)"으로 환원되었다.

"양인"이 된 그녀는 "객주(客主)"를 차려, 제주 특산물인 "미역말총양태(갓의 재료)"를 육지의 "옷감장신구화장품"과 교환하여 판매하는 "상업"에 종사하여, 돈을 많이 벌었다

"이앙법(모내기)"의 등장으로 농업기술이 발전하면서, "상업"도 같이 발전한 18세기 조선의 시대 변화를 읽은 것이었다하지만 그녀는 "내가 편안하게 사는 것은 하늘의 은덕"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검소하게 살았다.

3.  "노블레스 오블리주" 실천

1793, "제주도"에는 3개 고을에서만 600여 명이 아사할 정도로 심각한 흉년이 계속되었다1795, "정조""흉년이 들어 농작물을 재배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20,000여 섬의 구호식량이 없으면 장차 제주백성들이 다 굶어 죽을 것입니다."라는 장계를 받자, 20,000여 섬의 구호식량을 보내지만, 그마저도 수송선박 12척 중, 5척이 침몰하면서, 구호정책은 실패했다.

이때 그녀는 전 재산을 풀어, 500여 석의 쌀을 사왔는데, 이중 450여 석을 모두 "구호식량"으로 기부하여, 굶주림으로 죽어가던 "제주도" 민중들을 구원했다1796, 그녀의 선행이 알려지자, "정조""제주목사 이우현"을 통해, 그녀의 소원을 물어보는데, "김만덕""한양에서 궁궐을 보고, 금강산을 보고 싶다"고 하였다.

대답을 들은 "정조""관의 허락 없이, 제주도민은 섬 밖으로 나가지 못한다."라는 규칙을 깨고 "김만덕"의 소원을 들어주었다또한 "내의원 차비대령행수(內醫院 差備待令行首)"로 삼아, "정조"를 알현할 자격을 주고, 그녀의 선행에 대한 보답을 하였다.

전 재산을 풀어,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의녀(義女) 김만덕"의 알현을 받은 "정조""너는 한낱 여자의 몸으로 의기(義氣)를 내어, 기아자 1,100여 명을 구하였으니 기특하다."라고 칭찬한 것을 보면 당시 "만덕"의 선행이 얼마나 큰 의미가 있는지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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