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과 "명성황후 (明成皇后ㆍ민자영ㆍ민비ㆍ1851~1895.10.08ㆍ44세)"는 "북묘 (北廟)ㆍ북관왕묘"의 주인 박 씨(무당)을 "신령군 (神靈君)ㆍ진령군 (鎭靈君)"이라 불렀다. 자신들을 보호하는 "수호신령ㆍ수호진령"이라는 뜻이다.
1. 벼슬명 (군호) : 신령군 (神靈君ㆍ진령군 (鎭靈君)ㆍ ? ~ ?ㆍ박창렬 ( 朴昌烈)?ㆍ충주 출신?)
"고종ㆍ명성황후"는 "신령군 (神靈君)ㆍ진령군 (鎭靈君)"의 말을 듣고, "순종"의 병을 고치기 위해, "금강산" 12,000봉에 "굿"을 하도록 하여, 각 봉우리마다, "쌀 1섬ㆍ돈 천냥ㆍ무명 1필" 씩을 바쳐, 나라는 비정상적으로 운영됐고, 국고는 고갈됐다.
• 아들 : 김창렬 : 당상관의 관복을 입고 다니며 실세 노릇을 하자, 조정의 고위 관료들 중 몇몇은 진령군과 의남매를 맺거나 의자(義子)가 되기까지 했다.
• 양자 : 이유인 (건달ㆍ경상도 사람) : 1887.10.14일, "이유인"은 "고종"의 특명으로 "희천 군수"에 임명됐다. 이후 "양주목사ㆍ병조참판ㆍ한성부 판윤ㆍ함경남도 병마절도사ㆍ법부대신" 등 고관대작을 섭렵했다.
가난한 농사꾼의 딸ㆍ시집도 가난한 농사꾼에게 갔는데, 팔자가 사나워 일찍이 남편을 여의었다. 젊어 남편을 잃은 그녀는 먹고 살기 위해 무당이 됐다. 몸 주신은 "관왕(관우 장군)"이었다. 홀로 된 그녀는 얼굴도 예쁘고 몸매도 날씬했다. 젊고 예쁜데다 말주변까지 뛰어난 무당 박 씨는 점을 치거나 굿을 하면서 수많은 단골을 확보했다. 그들 중에는 무당 박 씨의 영험한 힘에 끌린 사람도 있었지만 얼굴과 몸매에 끌린 사람도 없지 않았기에 추문이 돌기도 했다.
이런 무당 박 씨에게 꿈같은 일이 벌어졌다. "충주 장호원"에서 "명성황후"를 만났던 것이다. "갑신정변" 이후, "고종ㆍ민비"은 "신령군"의 말을 곧 "관우 장군"의 말로 숭신했다.
명색이 국왕은 "고종"이었지만, 사실상 그 위에 "신령군"이 있었다. "신령군"이 밤에 궁궐에 들어가 하는 말은 다음날 아침, "고종의 왕명"으로 공포됐다. "신령군"에게 "밤의 여왕"이란 별명이 붙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날마다 왕실을 위해 산천 기도는 물론이요, 굿판과 제사는 쉴 날이 없었다. 게다가 민비는 "고종" 아뢰어, "봉군의 은전", 즉 "진령군"이라는 작호를 내렸다. 이렇게 신분상승을 한 그녀는 양반을 벼슬에 임명하고 내쫓는 것도 마음대로일 만큼 권세를 휘둘렀다.
"신령군"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그녀에게 빌붙으려는 자가 줄을 이었다. "고관대작ㆍ부인들ㆍ건달"까지 별의별 사람이 다 "북묘"에 드나들었다. 그들 중에 대표적인 인물이 "이유인"이었고, "신령군"이 추천한 인물들은 대체로 "이유인"과 같은 사람들이었다. 아니면 뇌물을 준 사람들이었다.
"고종ㆍ민비"는 "신령군이 추천했다"는 이유만으로 이런 자들을 고관대작에 임명했다. 이들이 하는 일이란 주로 "굿"을 부추기는 것이었다. 예컨대 "이유인"은 "금강산 정기를 한양으로 가져와야 나라가 태평해진다"는 감언이설로 민비를 미혹시켜, "금강산 12,000봉에 "굿"을 하도록 했다. 그 결과, 각 봉우리마다, "쌀 1섬ㆍ돈 1,000 냥ㆍ무명 1필" 씩을 바쳤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서, 나라는 비정상적으로 운영됐고, 국고는 고갈됐다.
1894년,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후, "친일 내각"이 들어서자, 새 정부 "개화파"는 "진령군"을 잡아 "혹세무민의 죄목"으로 옥에 가두었고, "진령군"이 모아 놓은 억만금을 모두 몰수한 뒤 풀어 주었다. 그녀는 "북묘(관우 사당)"에서도 쫒겨 나, "삼청골 오막살이"에서 숨죽이고 근근이 살다가 1895.08월 "을미사변" 때, 일본인들 손에 강력한 후원자였던 민비가 시해되자, 그 충격인지 사라졌다.
2. "충주 장호원"에서 "명성황후"와 만남
1882.06.10일(고종19), "임오군란" 때, "창덕궁"을 습격한 구식 군병들은 "민비"를 찾아 죽이려 했다. 가마를 타고 대궐 밖으로 도망치려던 "민비"는 얼굴을 아는 궁녀에게 들키고 말았다. 궁녀가 입짓으로 그녀가 탄 가마를 가리키자, 군병들이 달려들어 가마의 휘장을 찢고, "민비"의 머리채를 잡아 땅에다 내동댕이쳤다. "민비"는 난자당하기 직전이었다.
그때 군사들 틈에 끼여 있던 "홍계훈"이 나서며, "이는 내 누이로 상궁이 된 사람이다. 오해하지 말라"고 고함쳤다. 실제로 "홍계훈"의 누이 중에는 궁녀가 있었다. 긴가민가하며 군사들이 머뭇거리는 사이, "홍계훈"은 얼른 "민비"를 들쳐 없고 궁궐 밖으로 나갔다. 이렇게 극적으로 살아난 민비는 처음에는 "한양 관광방 화개동"에 있는 "윤태준"의 집으로 피신했다.
하지만 한양은 위험하다고 판단해 "충주 장호원"에 사는 먼 친척 "민응식" 집으로 도망갔다. 그때가 06.19일이었다. "장호원" 서북쪽에는 해발 770m의 "국망산(國望山)"이 있고, 이산의 남쪽 산발치에 "민응식"의 집이 있었다. 민비는 한양에서 온 양반규수처럼 변장하고 하루하루를 보냈다. 초조한 마음을 억누르기 힘들 때는 "국망산"에 올라, 멀리 한양을 바라봤다.
당시 한양은 민비 정적인 "흥선대원군"이 장악했다. "대원군"은 행방불명된 민비를 죽은 사람으로 간주하고 아예 장례식까지 치렀다. 이런 상황에서 민비가 살아서 입궁할 수 있을지는 전혀 기약할 수 없었다. 절망에 빠진 민비는 "귀신의 힘"에라도 의지하고 싶었을 듯하다.
당시 "민응식"의 집에 "신 씨"라고 하는 여종이 있었다. 이 여종이 마침 "무당 박 씨"의 단골이었다. 민비가 먼저 요청했는지, 아니면 이 여종이 민비에게 권했는지 알 수 없지만, 이 여종을 통해 민비와 "무당 박 씨"의 만남이 이뤄졌다. 눈치 빠른 "무당 박 씨"는 민비를 "한양에서 내려온 귀부인"이라 직감했다. 당연히 "무당 박 씨"가 민비의 환심을 사기 위해 온갖 말재주를 부렸을 것임은 능히 짐작할 수 있다. < 8월 보름 귀경해, 귀한 자리에 오른다.>
"무당 박 씨"는 민비를 쳐다보며, "귀인의 관상이 있어 장차 큰 운이 올 것"이라 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봐라"는 민비의 말에 "무당 박 씨"는 "이미 말씀 올린 바와 같이 귀인의 상을 하시었고, 지금 계신 이 댁에서 바라다 보이는 저 산은 국망산이라 부르며, 그 방향이 서북으로 향해 서울을 넘겨다보오니 반드시 8월 보름에 서울로 올라가 귀한 자리에 오를 것입니다"고 예언했다. 절망에 빠져 있던 민비에게 이보다 더 달콤한 예언이 있을 수 없었다.
그런데 이 예언은 "국망산"의 위치와 명칭을 견강부회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국망산"은 민비가 머물던 집의 서북쪽에 위치했는데, 이 방향은 계절로 치면 가을에 해당하고 달로 치면 7월ㆍ8월ㆍ9월에 해당했다. "국망산"의 "망"은 보름을 의미했다. "무당 박 씨"는 민비를 만나기 전, "여종 신 씨"로부터 민비에 관련된 이야기를 들었음에 틀림없다. 아무튼 "무당 박 씨"의 영험한 예언에 반한 민비는 매일 오라고 간청했다. 만남이 거듭되면서 흉허물 없는 사이가 돼갔다.
3. "예언"덕에 "명성황후"와 함께, 서울로 입성한 무당
"장호원"에 머물던 민비는 은밀히 "고종"에게 연락을 취하며, 때를 기다렸다. 변화는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생겼다. 07.08일 "청나라의 오장경"이 3,000명의 군병을 거느리고, "남양"에 상륙했던 것이다. 이어 07.13일 "흥선대원군"은 "한양"에 입성한 청나라 군병들에게 납치돼, "청나라"로 끌려갔다.
1주일 후인 07.20일 전 현감 "심의형"이 "오장경"에게 밀서를 보냈다. 민비가 "충주 장호원"에 은신해 있다는 내용이었다. 보고를 받은 "고종"은 "오장경"에게 부탁해, "충주"로 "청나라 군병"을 파견해 민비를 맞이해 오게 했다. "고종"은 먼저 "어윤중"을 "충주"로 보내 필요한 준비를 하게 했다. "영의정ㆍ제학ㆍ승지ㆍ한림ㆍ주서" 등 핵심 요직에 있는 관리도 모두 가서 민비를 영접하라 명령했다. 경호에 필요한 "청나라" 군병 100명과 "조선" 군병 60명도 파견됐다. "어윤중"이 "충주 장호원"에 도착한 때는 07.27일. 곧이어 도착한 "청나라ㆍ조선" 군병들이 집 주변을 호위했다. 저녁때가 되자, "한양"에서 파견된 관리들도 모두 도착했다.
07.28일 민비는 "장호원"을 떠나 "한양"으로 향했다. 올 때는 도망길 이었지만, 갈 때는 위풍당당한 왕비 행차였다. "어윤중"을 비롯한 고위관료들이 민비의 행차를 수행했다. 앞뒤에서는 청나라 군병과 조선 군병들이 경호했다. 07.29일 용인에서 숙박한 민비는 08.01일 "한양"에 입성했다. "무당 박 씨"는 민비와 동행해 한양에 입성했다.
처음 "무당 박 씨"는 8월 보름에 환궁한다고 예언 했지만, 실제 환궁한 시점은 08.01일이었다. 환궁한다는 예언 자체가 맞았고, 날짜도 얼추 맞았다. 그런 "무당 박 씨"를 보낸 것은 하늘의 뜻이고, 또 하늘의 뜻을 전한 "무당 박 씨"는 수호신령이 아니겠는가? 당시 민비는 이런 확신을 가지고 "무당 박 씨"를 데려왔을 듯하다.
"무당 박 씨"가 "한양"에 입성했을 때는 따로 거처가 없었다. 그래서 민비와 함께 궁궐에서 살았다. 민비는 남들에게 말 못할 온갖 근심걱정을 털어놓고 조언을 구했다. "무당 박 씨"가 아픈 곳을 만져주면 고통이 씻은 듯 없어지는 듯했고, 굿을 해주면 온갖 시름이 사라지는 듯했다. 이러면서 민비의 미혹은 커져만 갔다.
4. 1882~1884 : "북묘 (北廟)ㆍ북관왕묘" 건설
한동안 궁궐에 머물던 "무당 박 씨"는 "관우 사당"을 지어주면 그곳에 머물겠다고 했다. 유교 국가 조선의 궁궐에 무당이 오래 머물다 보면, 논란이 일어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이에 "동소문" 안쪽에 "관우 사당"이 건설됐는데, 공사는 1882년 연말에 시작돼 1884년 가을에 끝났다. 이 사당은 한양 북쪽에 있어서, "북관왕묘" 또는 "북묘(北廟)"라고 불렸다.
"북묘"는 "고종"이 앞장서서 공개적으로 건설했다. "고종" 역시 "민비"를 따라, "무당 박 씨"에게 미혹됐던 것이다. "북묘" 완성 후, "고종"은 비문을 몸소 짓기까지 했다. 비문에서 "고종"은 "어느 날 관우 장군이 나의 꿈속에 현몽하고 또 왕비의 꿈에도 현몽했는데, 자상하게 돌봐주는 듯해 자리를 물색해, 숭교방 동북쪽 모서리에 사당을 지었다"고 해, "북묘"를 짓게 된 경위를 밝혔다.
"고종"의 꿈에 "관우 장군"이 현몽한 시점은 임오년 봄이었다고 하며, 건장한 사람이 장검으로 "고종"을 해치려는 순간 "관우 장군"이 나타나 구해주는 꿈이었다고 한다. 며칠 후, 민비 역시 똑같은 꿈을 꿨다고 한다. 이 꿈을 통해, "임오군란" 직전 "고종ㆍ민비"가 죽음의 공포에 떨고 있었음도 짐작할 수 있다. 아울러 "고종ㆍ민비"는 자신들이 "임오군란"에서 무사히 살아난 이유를 "관왕"의 보호 때문이라 숭신했음도 짐작해볼 수 있다.
5. 1883 : "고종"의 "북묘" 완공 축하 참배
1883.10.21일, "고종"은 "북묘" 완공을 축하해 참배했다. 문무백관은 물론 왕세자도 함께했다. "북묘" 참배를 위해, "창덕궁"에서 "북묘" 사이에 새로 어로(御路)가 닦이기까지 했다. "고종"의 "북묘" 참배는 "승정원 일기"에 실리기까지 했는데 이런 내용이었다.
"고종이 천막에 들어가고 잠시 후 통례(通禮)가 무릎을 꿇고 아뢰기를 "천막 밖으로 가소서"하였다. 고종이 군복과 갑옷으로 바꾸어 입고 천막에서 나왔다. 찬례(贊禮)가 고종을 인도하여 정문으로 들어가 판위(版位)로 가서 북향하고 서게 하였다. 왕세자도 갑옷을 갖추고 들어와 자리로 갔다. 찬의가 "사배(四拜)"라고 외쳤다. 고종이 사배를 행하였다. 왕세자도 사배를 행하였다. 마친 후, 찬례가 고종을 인도하여 관우 장군의 신좌 앞으로 가서 무릎을 꿇고 청하기를 "무릎을 꿇으소서." 하였다. 고종이 무릎을 꿇었다. 도승지 이교익이 향을 받들었고, 동부승지 김낙진이 향로를 받들었다. 고종이 3번 향을 살랐다." < 승정원일기 – 1883.10.21.일(고종20) >
"고종"의 "북묘 참배"는 겉으로는 "관우 장군 참배"였지만, 실제는 "무당 박 씨 참배"였다. "북묘"의 주인이 "무당 박 씨"였기 때문이다. 설상가상 "신령군"에 대한 "고종ㆍ민비"의 미혹은 "갑신정변"을 거치면서 더욱 커졌다.
6. 1884.12.04. : 갑신정변 (급진 개화파의 3일 천하)
"김옥균" 등 급진 개화파 인사들이 "우정국 낙성식"을 틈타, "민영익" 등 친청파 인사들을 일망타진하고 정권을 장악하려 했다. 당시 한양에는 "일본군과 청나라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김옥균"이 의지하는 "일본군"은 100여 명에 불과했지만, "청나라 군대"는 1,000여 명이 넘었다. 이런 상황에서 "고종"을 확실하게 장악하려면 넓은 "창덕궁"은 적당치 않았다.
따라서 "김옥균"의 첫 구상은 거사와 동시에 "고종"을 "인천"으로 파천시키는 것이었다.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고종"과 함께 일본으로 가겠다는 속셈이었다. "일본"에 가더라도 "고종"만 장악하고 있으면, 얼마든지 만회할 수 있다는 것이 "김옥균"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일본 공사"의 반대로 "고종"을 "인천"으로 파천시키는 대신 "경우궁"으로 바꿨다. "수빈 박씨(정조의 후궁이자, 순조의 친어머니)"의 신주를 모신 "경우궁"은 규모가 작아 수비에 유리했다.
"김옥균" 등은 "우정국" 밖에서 불길이 오르면, 그것을 신호로 "친청파" 인사들을 척살한 후 입궁하기로 계획했다. 낙성식에는 "미국 공사ㆍ영국 영사ㆍ청나라 상무위원ㆍ일본공사관 서기관"을 비롯해, "윤치호ㆍ민영익ㆍ한규직ㆍ이조연ㆍ민병석" 등이 참석했다. 이들 중에서 표적은 "민영익"이었다. 이윽고 밖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민영익"이 무슨 일인지 알아보러 나가자, 자객이 달려들어 칼로 쳤다. 그러나 제대로 목을 베지 못하고 귀만 잘랐다. 칼을 맞은 "민영익"은 안으로 도망쳐 들어와 연회장에서 쓰러졌다. 순간 연회장은 아수라장이 됐다. 그때 "김옥균ㆍ박영효ㆍ홍영식ㆍ서광범" 등은 재빨리 자리를 빠져나와, "창덕궁"으로 가 곧바로 편전으로 들어갔다. 침실에 있던 "고종ㆍ민비"는 깜짝 놀라 일어났다.
이곳은 불안하니 거처를 옮겨야 한다는 "김옥균"의 주장에 "고종ㆍ민비"는 "창덕궁"을 떠나 "경우궁"으로 갔다. "김옥균"은 왕명을 위조해, "민씨 척족과 친청파" 인사들을 "경우궁"으로 오게 했다. 12.05일 새벽, "민태호ㆍ민영목ㆍ조영하ㆍ윤태준" 등이 입궁했다가 "고종"이 보는 앞에서 살해당했다. "고종"이 "죽이지 마라"고 명령했지만, 소용없었다. "고종"은 눈물을 흘리며 고통스럽게 울부짖을 뿐이었다.
"경우궁"으로 옮겨올 때만 해도 "고종ㆍ민비"는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지 못했다. 그렇지만 "민태호" 등이 눈앞에서 살해당하는 것을 보고서야, 그것이 "정변"임을 깨달았다. 민비는 그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고자 기지를 발휘했다. 12.05일 아침, "심상훈"이 "개화당 지지자"로 위장하고, "경우궁"에 들어와 민비를 알현했다. 그때 민비는 속히 밖으로 나가, "민영환"에게 내부 상황을 알리도록 했다. 아울러 소식을 전할 일이 있으면, 수라상 밑에 몰래 서찰을 붙여, 올리면 된다고 덧붙였다.
"심상훈"의 연락을 받은 "민영환"은 수라상 밑에 밀서를 붙여 보냈다. "경우궁"에서 "창덕궁"으로 옮기면 일이 수월하리라는 내용이었다. "고종ㆍ민비"는 "경우궁이 불편하니, 창덕궁으로 돌아가겠다."고 강하게 주장했다. "일본 공사"는 그 말을 듣고 "창덕궁"으로 옮기기로 결정했다. "김옥균"이 항의 했지만, 들은 체하지 않았다. 이미 "김옥균"은 믿었던 일본 사람들로부터 배신당하고 있었다.
7. 갑신정변을 겪으며, "밤의 여왕 (?)"으로 등극
12.06일 오후, "고종ㆍ민비"는 "창덕궁"으로 돌아왔다. 다음날, "위안스카이(袁世凱)"가 이끄는 청나라 병력이 "창덕궁"을 공격했다. 이 틈에 민비는 "세자ㆍ세자빈"을 데리고 "북묘"로 도망했다. "왕대비ㆍ대왕대비" 등도 모두 무사히 "북묘"에 모였다. 민비는 "고종"에게 글을 보내, 속히 "북묘"로 올 것을 요청했다.
당시 "고종"은 "창덕궁" 뒤편의 산속에서 위험에 빠져 있었다. 총탄이 쏟아지는 와중에 "고종"은 "김옥균"과 실랑이를 벌였다. 함께 "인천"으로 가자는 "김옥균"의 요구에 "고종"은 "나는 결코 인천으로 가지 않겠다. 대왕대비가 가신 곳으로 가서 죽더라도 한 곳에서 죽겠다."며, 버텼다. 하지만 "대왕대비"가 어느 곳으로 갔는지 알지 못하기에 무작정 버틸 수도 없었다.
마침 그때 "북묘로 오시라"는 민비의 글이 도착했던 것이다. "북묘"로 가려는 "고종"과 막으려는 "김옥균" 사이에 몇 차례 더 실랑이가 벌어졌다. "죽더라도 북묘로 가겠다."는 "고종"의 고집을 꺾지 못한 "김옥균"은 결국 "고종"을 내버려두고 "일본군"을 따라 "인천"으로 갔다. "고종"은 무사히 "북묘"에 도착해 가족들을 만났다. "고종ㆍ민비"가 자칫 죽을 수도 있는 위기상황에서 가족 모두가 무사히 "북묘"에 모일 수 있었던 것은 수호 신령의 도움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런 믿음을 "고종"은 "북묘" 비문에서 이렇게 표현했다.
이에 앞서 임오년 여름에 군란이 일어나 역도가 대궐을 범하여 재앙의 기미가 예측할 수 없었는데 곧 그들이 해산되어 차례차례 사로잡아 국법으로 처벌했다. 그 후 갑신년 겨울에 또 역란이 일어나 나는 대왕대비ㆍ왕대비ㆍ왕비 등과 더불어 관우 장군 사당으로 피신하였다. 당시 역적의 세력이 커서 놀라운 일이 순간에 일어날 상황이므로 황급하여 어쩔 줄을 몰랐다. 그러나 이윽고 흉도는 잡히고 적병은 도망쳐 피신했던 행차가 무사히 돌아오고 종묘사직이 편안해졌다. 전후에 걸쳐 변고가 생겨 위급할 때 보이지 않게 작용하여 위태로움을 바꾸어 편안하게 하였으니 이는 누구의 힘인가? 지난날 꿈속에서 만나 장차 자상하게 돌보아줄 듯한 일이 어찌 분명하고 크게 증험된 것이 아니겠는가?"
"갑신정변" 이후, "고종ㆍ민비"은 "신령군"의 말을 곧 "관우 장군"의 말로 숭신했다. 명색은 "고종"이 국왕이었지만, 사실상 그 위에 "신령군"이 있었다. "신령군"이 밤에 궁궐에 들어가 하는 말은 다음날 아침, "고종의 왕명"으로 공포됐다. "신령군"에게 "밤의 여왕"이란 별명이 붙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8. 무녀로 인해 국고 탕진ㆍ"고종"을 움직이는 인물ㆍ이유인 (양자)
"신령군"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그녀에게 빌붙으려는 자가 줄을 이었다. "고관대작ㆍ부인들ㆍ건달"까지 별의별 사람이 다 "북묘"에 드나들었다. 그들 중에 대표적인 인물이 "이유인"이었다. 그는 "경상도 사람"으로, 한양에서 건달 생활을 하던 중, "신령군" 소문을 들었다. 그는 "신령군"을 현혹시키기 위해, "이유인이라는 사람은 귀신을 능히 부리며, 풍우도 능히 일으킨다."는 헛소문을 퍼트렸다.
호기심이 발동한 "신령군"은 "이유인"을 초대해 정말 귀신을 부릴 수 있는지 증명해 보이라 했다. 그러자 "이유인"은 "그것은 쉬운 일이나 놀라실까 두려우니, 며칠간 목욕재계하신 후 보여 드리겠습니다."고 했다. 그 사이 건달들을 불러 준비를 마친 "이유인"은 약속한 날 한밤중에 "신령군"을 데리고, "북악산" 깊은 곳으로 갔다. "이유인"은 "내가 있으니 두려워 마시오."라고 말한 후, 머리동이를 휘두르며 "동방청제장군(東方靑帝將軍)은 현신하라"고 소리쳤다.
그러자 몸 전체가 청남색이고, 키가 10척이나 되는 귀신이 나타났다. 뒤이어 "남방적제장군"을 부르니, 입에서 붉은 피를 내뿜는 시뻘건 귀신이 나타나 입을 쩍 벌렸다. 혼비백산한 "신령군"은 귀신들을 쫓아버리라 소리쳤다. "이유인"의 명령에 귀신들은 안개처럼 사라졌다.
이 귀신들은 건달들이 변장한 것인데, "신령군"은 진짜 귀신으로 착각했던 것이다. "이유인"을 "자신보다 더 영험한 무당"이라 생각한 "신령군"은 그를 아들로 삼았다. 그리고 민비에게 뛰어난 인재이자, 충성심 높은 인물이라고 추천했다. 1887.10.14일, "이유인"은 "고종"의 특명으로 "희천 군수"에 임명됐다. 이후 "양주목사ㆍ병조참판ㆍ한성부 판윤ㆍ함경남도 병마절도사ㆍ법부대신" 등 고관대작을 섭렵했다.
"신령군"이 추천한 인물들은 대체로 "이유인"과 같은 사람들이었다. 아니면 뇌물을 준 사람들이었다. "고종ㆍ민비"는 "신령군이 추천했다"는 이유만으로 이런 자들을 고관대작에 임명했다. 이들이 하는 일이란 주로 "굿"을 부추기는 것이었다. 예컨대 "이유인"은 "금강산 정기를 한양으로 가져와야 나라가 태평해진다"는 감언이설로 민비를 미혹시켜, "금강산 12,000봉에 "굿"을 하도록 했다. 그 결과 각 봉우리마다, "쌀 1석ㆍ돈 10냥"을 씩을 바쳐졌고, 이런 일이 반복되면서, 나라는 비정상적으로 운영됐고, 국고는 고갈됐다.
"진령군"의 세도가 세상을 흔든지도 어느덧 11년. 대담무쌍하게 목숨을 걸고, "진령군"을 통렬히 규탄하는 상소를 올린 선비가 있었으니, "안효제(사간원 정언)"였다. "고종"은 대노하여 그를 "추자도"로 귀양 보냈다. 3년 뒤, "안효제"는 귀양이 풀렸고 다시 벼슬이 내려졌으나, 사양한 후 낙향했다. 이후로 강직한 선비들이 앞 다투어 그녀를 탄핵하는 상소문을 올렸으나, "도승지"가 감히 "고종"에게 올리지 못하고 쌓아 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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