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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물 • 악녀 (10인) • 부덕 (6인)

부덕 ⑥ 허난설헌 (허균의 누나ㆍ1563~1589ㆍ선조 때)

by 당대 제일 2022. 9.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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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난설헌 (許蘭雪軒ㆍ1563~ 1589ㆍ25세)"은 "허균 (許筠ㆍ1569~1618ㆍ홍길동전 저자)"의 누이로, "신동"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글재주"가 뛰어났으며아름다운 용모와 천품이 뛰어났다.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여성 문인(한시시조서화산문수필- 213시인작가화가)이다.

 

1. 허 난설헌 (許蘭雪軒1563~ 1589향년 25)

"허균 (許筠1569~1618홍길동전 저자)"의 누이"재취 부인" 소생으로 "서자"와 비슷한 처지ㆍ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여성 문인(한시시조서화산문수필- 213)시인작가화가

산문수필- 300여 수를 "213" 정도가 현재 전한다. 서예그림에도 능했다. 봉건사회의 모순과 잇따른 가정의 참화로,  213수 가운데 속세를 떠나고 싶은 "신선시" 128수나 되었다

1577(선조10) "김성립(金誠立)"과 결혼했으나, 결혼 생활은 원만하지 못했다고 한다. 남편(김성립) 시댁과의 불화자녀의 죽음유산 등 연이은 불행을 겪으면서도 많은 작품을 남겼다죽기 직전, 방 안에 가득했던 자신의 작품들을 모두 소각시켰다 천재적인 시재(詩才)를 발휘당대에는 "고부갈등남편"과의 불화 등으로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으나, 사후 조선 후기에 이르러 그녀의 시들의 작품성과 예술성을 인정받게 되었다.

 호 칭 : 난설헌허난설재난설헌 허씨 (여자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조선시대의 관례)

출 생 : 조선 강원도 강릉부 초당동

사 망 : 조선 한성부 (묘소- 하남시)

사 인 : 병사 (사인은 미상)

본 명 : 허초희(許楚姬) / 타명 : 허옥혜(許玉惠)

: 난설헌(蘭雪軒)난설재(蘭雪齋)

남 편 : 김성립 (金誠立동지중추부사안동 김씨): 이조참판에 추증ㆍ사후 남편 "김성립""임진왜란 때(1592년 선조25)" 전사하고, "증 이조참판"에 추증되면서, 그녀 역시 "정부인(貞夫人)"으로 추증된다.

자 녀 : 1(희윤1582년 요절)1(1579년 요절) 임신 중이던 뱃속의 아이까지 사산

부 모 : - 허엽 (초당서경덕의 문인경상도 관찰사)- 강릉 김씨 부인(예조참판 김광철의 딸)

가 족 : 오빠 : 허봉 (許篈이이 탄핵(10만 양병설))귀양(1583)금강산에서 객사(1588)ㆍ동생 : 허균 (교산許筠홍길동전의 저자)이복 오빠 : 허성ㆍ10: 허준 (선조 때 어의허지(許芝)의 손자허론의 서자)

스 승 : 이달(손곡, 李達)- 학문을 배워 "천재적인 시재(詩才)"를 발휘하였다.

저 서 : 난설헌집취사원창

산 문 : 백옥루상량문 (白玉樓上梁文1570(선조3) 8세 때 작품)

그 림 : 앙간비금도(仰看飛禽圖)묵조도약도

아버지가 병에 걸려 서울로 올라오다 "상주 객관"에서 죽었으며, 오빠 "허봉""율곡 이이"를 탄핵했다는 이유로 귀양갔다가, 유배가 풀린 뒤에도 서울에 돌아오지 못하고, 방랑하다가 금강산 근방에서 죽었다어머니는 "전라도 진산"에서 여행하다가 소화불량으로 객사했으며, 아들과 딸을 일찍 잃고, 죽기 얼마 전에는 뱃속의 아기까지 잃는 등 불행한 일도 많이 겪었다.

조선 봉건사회의 모순과 잇따른 가정의 참화로,  213수 가운데 속세를 떠나고 싶은 "신선시" 128수나 되었다. 자신의 불행한 처지를 "시작"으로 달래어, 섬세한 필치와 독특한 감상을 노래했으며, 애상적 시풍의 특유의 "시 세계"를 이룩하였다. 많은 작품을 생전에 태워버렸으나, 세상을 떠난 후 동생 "허균"이 이전에 베껴 놓은 것과 기억에 남은 것을 모아, 그녀의 시를 "난설헌집"로 펴내 지금까지 전한다1590(선조23) "허균""난설헌집" 초고를 만들고, "유성룡"에게 서문을 받았다.

1. 인 물

일찍부터 그녀는 "신동"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글재주"가 뛰어났으며, 아름다운 용모와 천품이 뛰어났다어릴 때, 오빠와 동생의 틈바구니에서 어깨너머로 글을 배웠다"허난설헌"은 기억력이 좋고, 어린 나이에도 글을 잘 써서, 가족들을 놀라게 했다그녀의 나이 8세에 "광한전백옥루상량문(廣寒殿白玉樓上梁文)"을 짓는 등 "신동"이라는 평을 들었다.

딸의 재주를 아깝게 여긴 "허엽"은 직접 글을 가르치고, "서예""그림"도 가르쳤다아버지"허엽""서경덕""이황"의 문인으로 그가 서경덕의 문하에서 배운 "도학적 사상""난설헌""허균" 남매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여동생의 재능을 아깝게 여긴 오빠 "허봉"의 주선으로, 남동생 "허균"이 평소 친교가 있었던 중인 시인 "손곡 이달(李達)"에게 시와 글을 배울 때, 그녀도 함께 배울 수 있게 하였다.

2. 죽 음

1589(선조 22) 319일에 한성 자택에서 시름시름 앓다가 사망한다. 사인은 미상이었다1589년 초, 그녀의 나이 25 (27)에 아무런 병도 없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고서, 집안사람들에게 유언과 비슷한 시를 남겼다 한다.

今年乃三九之數   今日霜墮紅  :  금년이 바로 39수에 해당되니,   오늘 연꽃이 서리에 맞아 붉게 되었다.

碧海浸瑤海    靑鸞倚彩鸞    푸른 바닷물이 구슬 바다에 스며들고 푸른 난새는 채색 난새에게 기대었구나.

芙蓉三九朶     紅墮月霜寒   :  부용꽃 스물 일곱 송이가 붉게 떨어지니,  달빛 서리 위에서 차갑기만 해라.

"난설헌"은 죽기 직전, 방 안에 가득했던 자신의 작품들을 모두 소각시켰다그의 """작품"들은 친정집에 있었는데, 자신의 작품을 소각하라 명했으나, 그의 "시재"를 아깝게 여긴 "허균"이 이를 보관했다고도 한다.

오늘날 전해지는 "난설헌"의 작품 대부분은 그녀가 죽고 난 후, "허균"에 의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난설헌"이 죽자, 남동생 "허균"은 그리워하며, 추모하는 "" 한수를 남겼다.

"()이 깨지고 별이 떨어지니, 그대의 한평생 불행하였다 하늘이 줄 때에는 재색을 넘치게 하였으면서도, 어찌 그토록 가혹하게 벌주고, 속히 빼앗아 가는가 거문고는 멀리 든 채 켜지도 못하고, 좋은 음식 있어도 맛보지 못 하였네 난설헌의 침실은 고독만이 넘치고, 난초도 싹이 났건만 서리 맞아 꺾였네 하늘로 돌아가 편히 쉬기를, 뜬세상 한순간 왔던 것이 슬프기만 하다 홀연히 왔다가 바람처럼 떠나가니, 한 세월 오랫동안 머물지 못했구나."

3. 일 화

어느 날, 친구 중 누군가가 "난설헌"에게 "김성립이 기생집에서 술을 먹고 있다"고 전했다이에 "난설헌"은 안주와 술을 보내면서, ()를 한 구절 써 보냈다 "낭군자시무심자, 동접하인종반간 (郎君自是無心者,同接何人縱半間)"   "낭군께선 이렇듯 다른 마음 없으신데, 같이 공부하는 이는 어찌된 사람이기에 이간질을 시키는가."라고 했던 것이다. 편지를 본 "김성립"의 친구들은 그녀의 글재주에 탄복했다 한다.

어느 날, "김성립"이 서당학생들이나 과거에 응시하는 유생들이 모여 이룬 동아리인 "()모임"에 간다 하고 기생집에 갔다. "난설헌"은 남편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古之接有才(고지접유재) - 옛날의 접()은 재주()가 있었는데 今之接無才(금지접무재) - 오늘의 접()은 재주()가 없다."   이 편지에서 오늘의 "()에는 재()가 없다", 즉 재가 빠진 결과, "(, 여자)"만 남아 있다며, 남편을 조롱했던 것이다.

4. 평가

"시 재주"는 당대에도 알려졌으나, 남편을 기다리는 "" 조차도 음란하다며, 저평가 받았다"고부갈등""남편"과의 불화로 당대의 평가는 부정적이었다그러나 조선후기 사대부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재평가되어, 그녀를 규방의 유일한 시인이자, 뛰어난 천재로 인정하기 시작했으며, "영조정조" 때 이후, 중인과 평민 등도 문학과 시조 작시 등의 활동에 참여하면서 작품성과 천재성에 대한 평가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 뒤 "임진왜란""허균""광해군" 말년에 옥사당하면서 잊혀졌다가, 1940년 무렵 소설가 "월탄 박종화" 그녀의 시와 작품성을 평가하면서 다시 알려지게 되었다.

사회비평, 도교적인 가치관

가난한 집 "아씨"는 열심히 옷을 만들어도 그 옷의 주인이 되지 못한다면서, 사회의 불평등을 비평하는 "사회비평", "도교적인 가치관"등 다양한 가치관을 표현, 시인으로서의 재능을 보였다그래서 "이덕일(역사학자)""난설헌"의 시를 "임금노동자"는 그가 생산하는 소유물을 갖지 못한다는 "막스의 소외론"과 비교할 정도로 재능을 극찬하였다.  물론 "난설헌"은 문인으로서의 지성으로, "막스"는 사회학자로서의 지성으로 노동자의 소외를 말한 것이다.

"신사임당"을 대신할 여성의 모범

"김신명숙(여성운동가)""현대 여성의 모델"에 적합한 인물이라 평가하였다"허난설헌은 살려야 할 역사적인 인물이다. 현모양처의 전형 "신사임당"은 이제 "허난설헌"에게 자리를 물려줘야 한다. 한국적 여성주의자가 없는 상황에서 한국적 모델을 개발해야 한다.", 주장하였다.

"시대가 바뀌면, 그 시대가 요구하는 역사적인 인물도 바뀐다 조선시대로 국한시켜 보면, 여성들의 경우는 신사임당이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신사임당"도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실제로 그랬느냐는 것은 별개의 문제고, 그런 이미지가 만들어진 것이다. 남성들의 역사에서 남성들의 입맛에 맞게 만들어진 "신사임당"이 그 동안 권력을 갖고 영향력을 행사해왔다.

"신사임당"을 대신할 여성의 모범으로 "허난설헌"을 지목하였다"조선시대에 아내도 아니고, 어머니도 아니고, 나로서 존재하려고 했던 사람이다 나로서 존재하려고 몸부림쳤던 여성으로, 천재 시인이고, 아주 뛰어난 여성이었는데, 삶도 아주 드라마틱하고, 극적 요소도 갖추고 있다. 여성주의적인 시각에서 충분히 새로 조명되어야 할, 신사임당이 차지하고 있던 자리를 대신 차지할 만한 역사적 인물이라고 본다." 단순히 "허균의 누이가 아니다"는 것이다.

< 아들 딸 여의고서 >

지난해 귀여운 딸애 여의고, 올해는 사랑스런 아들 잃다니, 서러워라, 서러워라, 광릉 땅이여, 두 무덤 나란히 앞에 있구나.

사시나무 가지엔 쓸쓸한 바람, 도깨비불 무덤에 어리 비치네.

소지 올려 너희들 넋을 부르며, 무덤에 냉수를 부어놓으니 알고 말고 너희 넋이야, 밤마다 서로서로 얼려 놀 테지.

아무리 아해를 가졌다 한들, 이 또한 잘 자라길 바라겠는가. 부질없이 황대사 읊조리며서, 애끊는 피눈물에 목이 메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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