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진이 (黃眞伊ㆍ진랑(眞娘)ㆍ1506~1567ㆍ61세)"는 중종 때 기생으로, 다정다감하면서도 "기예"에 두루 능한 "명기(名技)"이기도 했다. "박연폭포 (朴淵瀑布)ㆍ서경덕 (화담ㆍ徐敬德ㆍ1489~1546ㆍ도학자ㆍ주기파(主氣派)의 대학자ㆍ 독학으로 사서육경 연마ㆍ평생을 은둔하며,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과 더불어, "송도 3절 (松都三絶)"로 불린다.
1. 황진이 (黃眞伊ㆍ진랑(眞娘)ㆍ1506~1567ㆍ향년 61세)
중종ㆍ명종 때(16C 초ㆍ중순) 활동했던 기생, 조선 중기의 시인ㆍ기녀ㆍ작가ㆍ서예가ㆍ음악가ㆍ무희ㆍ중종 때, "개성의 황씨 성"을 가진 진사(맹인?)의 서녀(庶女)로 출생ㆍ다정다감하면서도 "기예"에 두루 능한 "명기(名技)"이기도 했다.
뛰어난 "시 재주ㆍ학식ㆍ민감한 예술적 재능"을 갖추었다. 재주와 함께 출중한 용모로 더욱 유명하였다. 당시 "생불"이라 불리던 "지족선사"를 10년 동안의 "면벽 수도"에서 파계시키는가 하면, "호기"로 이름을 떨치던 "벽계수"라는 왕족의 콧대를 꺾어놓기도 하고, 당대 최고의 은둔학자 "서경덕"을 유혹하기도 했다. "화담 서경덕"을 유혹하려 하였다가 실패했다고도 한다. (대표작 : 만월대 회고시ㆍ박연폭포 시)
• 출 생 : 경기도 개성부 • 사 망 : 경기도 개성부 (묘소 : 경기도 장단군 장단면 판교리) • 사 인 : 병사
• 타 명 : 진랑 (眞娘) • 별 칭 : 명월 (明月ㆍ기생 이름) • 부 모 : 부- 진사 황씨ㆍ모- 진현금 (陳玄琴ㆍ기생 또는 천인 출신ㆍ시각장애인)
• 지족선사 (知足禪師): 생불(生佛)ㆍ천마산 지족암의 승려ㆍ10년 동안의 면벽 수도
• 벽계수 (碧溪水): 왕족ㆍ세종 손자 "영해군파 길안도정(吉安都正) 의(義)"의 5째 아들 "이종숙"ㆍ1508년생ㆍ인종" 때 "황해도 관찰사"ㆍ가정이 있어 황진이의 사랑을 거절
• 서경덕(徐敬德): 최고의 은둔학자ㆍ진심으로 가슴에 품었던 인물 (사제 관계)ㆍ"거문고ㆍ주효(酒肴)"를 가지고 방문, "당시(唐詩)"를 배웠다.
• 이사종 : 명창ㆍ6년 동거 (이사종 집에서 3년ㆍ황진이 집에서 3년)
• 이생 : 재상의 아들ㆍ금강산 유람 동행ㆍ절에서 걸식하거나, 몸을 팔아 식량을 얻기도 함
"시ㆍ그림ㆍ춤" 외에도 "성리학적 지식ㆍ사서육경"에도 해박하여 사대부, 은일사들과도 어울렸다. "성리학적 학문적 지식"이 해박하였으며, 시를 잘 지었고, 그림에도 능하였다. 많은 선비들과 이런 저런 인연과 관계를 맺으면서 전국을 유람하기도 하고, 그 가운데 많은 시와 그림을 작품으로 남기기도 했다.
그러나 "임진왜란ㆍ병자호란" 등으로 인해 대부분 실전되었고, 남은 작품들도 그녀가 음란함의 대명사로 몰리면서 저평가되고, 제대로 보존되지도 않아 대부분 인멸되었다. 신분 특성상 "황진이"라는 이름이 "정사(正史")에 등장하지는 않으며, 여러 "야사(野史)"들을 통해 그에 대한 내용이 전해 내려오고, 조선시대 내내 음란함의 상징으로 여겨져 언급이 금기시되었으나, 구전과 민담의 소재가 되어왔다.
2. 인 물
용모가 출중하며, 성격이 활달해 남자와 같았다고 한다. "협객"의 풍을 지녀, 남성에게 굴복하지 않고, 오히려 남성들을 굴복시켰다고 한다. 덕이 있는 선비들과 교류하기를 좋아했으며, 편협하지 않은 지식인이었다는 평도 있다.
그녀는 홀어머니 슬하에서 자랐지만, 양반집 딸 못지않게 학문을 익히고, 예의범절을 배운 것으로 봐서는 물질적으로는 큰 어려움이 없었던 것 같다. 8살 때부터 "천자문"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10살 때 벌써 웬만한 한문 고전을 읽어내고, 한시를 지을 정도로 재능을 보였으며, "서화"에도 능하고, "가야금"에도 뛰어났다고 한다.
3. 기생이 된 이유
"기생"이 된 이유는 확실하지 않다. "시각장애인"이던 어머니가 "기녀 출신"이었다는 설과 짝사랑하던 남성의 존재를 알게 되었기 때문이라는 설, "서녀 출신"임을 비관하여, 스스로 "기녀"가 되었다는 설 등이 있다.
그녀를 짝사랑하던 한 남성이 혼자 연모하다가, 어머니 "진현금"을 찾아가 청혼을 하였으나, 어머니의 반대로 무산되었고, 남성은 "상사병"에 걸려 죽게 되었고, 뒤에 이 사실을 접하고 "기생"이 되었다 한다. 다른 설로는 어머니가 "기생 또는 천인 출신"으로, "서녀 출신"임을 비관하여 스스로 "기녀"가 되었다고 한다.
4. 최 후
묘소는 "경기도 장단군 구정현 판교동 (현, 경기도 장단군 장단면 판교리)"에 있다. 사망 일자와 정확한 사망 이유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죽기 전에 나 때문에 천하의 남자들이 자정하지 못하였으니, 내가 죽거든 관을 쓰지 말고, 동문 밖 개울가에 시체를 두어, 여인들로 하여금 경계로 하여 주시오"라는 유언을 남겼다고도 한다.
일설에는 "황진이"의 유언에 따라 그대로 하였는데, 한 남자가 거두어 장사 지냈다는 전설도 전한다. 일설에는 죽은 뒤, 시신을 매장하지 않고 일부러 들판에 버려졌다는 전승까지 누군가에 의해 유포되기도 했다. "사대부"의 위선에 대한 조소와 미모로 남성을 유혹한 것 등이 문제시되면서, 조선시대 내내 음란함의 상징과 사대부에 대한 모욕적인 행실 등이 문제시되어 언급이 금기시되었으나, 구전과 민담의 소재가 되어왔다.
5. 남성 편력
용모가 출중하고, "노래ㆍ춤ㆍ악기ㆍ한시"등에 두루 능했기 때문에, 당시 선비들은 그녀와 하룻밤을 보내는 것을 대단한 자랑거리로 여기게 되었다. 그래서 그녀와 당대의 내로라하는 선비들에 대한 많은 일화들이 남게 되었다.
당시 "생불"이라 불리던 "지족선사"를 10년 동안의 면벽 수도에서 파계시키는가 하면, 당대 최고의 은둔학자 "서경덕"을 유혹하기도 했다. 그러나 당대의 석학의 한사람이던 서경덕(徐敬德)을 유혹하는 것은 실패하였으나, 오히려 그의 학문과 고고한 인품에 매료되어, "사제 관계"를 맺기도 한다. "거문고"와 "주효(酒肴)"를 가지고, 그의 "정사"를 자주 방문, 그에게서 "당시(唐詩)"를 배웠다고 한다.
나이가 들면서 한 남자를 의지하고 싶은 마음에 "벽계수"를 사랑하기도 했으나 사랑이 이루어 지지 못하고, 크게 상처를 받고 방황을 했다고 한다. "벽계수"와 사랑을 이루지 못함에 슬픈 세월을 보내며, 방랑을 하다가 쓸쓸히 삶을 마감했다는 이야기는 마음을 숙연하게 한다. 당시 "벽계수"라는 인물은 왕손으로써, "세종"의 손자 "영해군파 길안도정(吉安都正)의(義)"의 5째 아들인 이종숙"으로 알려진다.
"이종숙"은 1508년생으로 "인종" 때, "황해도 관찰사"를 지냈으며, 풍류에 능하여, 황진이 명성을 듣고 찾아가 놀기는 했으나, 그와 가정은 이룰 수없어, 황진이의 사랑을 거절하고 떠났다고 한다. "이종숙"의 묘는 "원주시 문막읍 동화리"에 있다.
"명창 이사종"과는 그의 집에서 3년, 자기 집에서 3년, 모두 6년을 같이 살다가 헤어졌다. 풍류 묵객들과 "명산 대첩"을 두루 찾아다니기도 해, 재상의 아들인 "이생"과 금강산을 유람할 때는 절에서 걸식하거나, 몸을 팔아 식량을 얻기도 했다고 한다. "이사종"과 헤어지고 다시 개성으로 되돌아왔으나, "지족선사"를 잊지 못해 다시 찾아갔다.
그러나 황진이의 재 방문에도 수행 중이던 "지족"은 요지부동이었고, "지족암"에서 끄떡없이 앉아 있는 "지족"에게 다가가, 꽃을 꽂고 수행 중이던 "지족"의 무릎을 베고 잠을 청하기도 하고, 말도 걸어 보았지만 "지족선사"는 그대로였다. "지족! 그대 같은 큰 위선 덩어린 없을 거요!" 황진이의 지적에 놀란 "지족"은 다시 무심한 얼굴로 돌아갔다. 다시 암자로 찾아가 황진이가 "지족"의 무릎을 베고 잠이 들었다. 한참 뒤 어깨를 쓰다듬는 손길이 느끼고, "지족"이 그를 깨우니 지족이 덤덤한 웃음으로 말을 건네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지족선사"와의 관계도 오래가지 못하고, 다시 떠나게 된다.
6. 작품 세계
"시조"를 통해 뛰어난 문학적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시들은 "남녀간의 애정"을 노래하면서도, 정교하고 빈틈이 없는 점 등 완성도가 높이 평가되었다. 또한 기발한 이미지와 알맞은 형식과 세련된 언어구사를 남김없이 표현하고 있는 점에서 높이 평가된다.
"서민출신"이나 "교방(敎坊)"에서 대성하여, "시서음률(詩書音律)"이 당대의 독보였고, 많은 문인과 교유했다. 그의 작품은 기교적이면서 자유롭게 애정을 노래하고 있으며, 국문학사상 전통적인 민족의 리듬으로 "교방" 여성들의 정한을 시조로 나타낸 데 그 의미가 있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대한 체념을 "청산은 내 뜻"이라고 역설적인 자기 과시로 표현하거나, 왕족인 "벽계수"를 유혹할 수 있는 등의 재치는 황진이만이 할 수 있는 독보적인 것이었다. "황진이 시조에 이르러서야 기녀 시조가 본격화되는 동시에 시조 문학이 높은 수준에 달했다고 할 수 있다"는 평도 있다.
주로 사랑에 관한 내용을 담은 그녀의 작품들은 "사대부 시조"에서는 생각할 수 없었던 표현을 갖춤으로써 관습화되어 가던 "시조"에 활력을 불어 넣었다고 평가된다. 주로 "연석(宴席)"이나 "풍류장(風流場)"에서 지어졌고, 또한 "기생의 작품"이라는 제약 때문에 후세에 많이 전해지지 못했다.
황진이 사후, "음란하다"는 이유로 사대부들에게 지탄을 받았고, 사대부들에 대한 조롱과 풍자, 유혹 등의 행실이 문제시되어, 언급이 금기, 기피되었다. 작품들 역시 "음란함"의 상징으로 몰렸고, "전란"을 겪으면서 대부분 사라졌으며, 남은 작품들 또한 사대부에 대한 조롱과 풍자 등이 문제시되어 제대로 보전되지 못하여 대부분 인멸, 실전되었다.
시와 작품들 중 일부는 "청구영언ㆍ해동가요ㆍ동국시선ㆍ가곡원류ㆍ대동풍아(大東風雅)"등의 문헌에 전하고 있으며, "금계필담ㆍ어우야담" 등에도 그에 대한 일화가 일부 전해져 내려온다.
• 한 시 : 박연폭포시(朴淵瀑布詩)ㆍ영초월시(咏初月詩)ㆍ등만월대회고(登滿月臺懷古)
• 시 조 : 청산리 벽계수야ㆍ동짓달 기나긴 밤을ㆍ내 언제 신의 없어ㆍ산은 옛 산이로되ㆍ어져 내일이여
• 산은 옛 산이로되 (인생무상)
산은 옛 산 그대로인데, 물은 옛날 그대로의 물이 아니로다.....밤낮으로 흘러가고 있으니, 옛날 물이 남아 있을쏘냐?.....인걸(뛰어난 사람)도 물과 같아서, (한번 가면) 다시는 오지 않는구나.
• 청산리 벽계수야 (인생무상에 대한 극복)
청산리(靑山裏) 벽계수(碧溪水)야.....수이 감을 자랑마라 일도창해(一到滄海)하면 다시 오기가 어려우니.....명월이 만공산(滿空山)하니 쉬여간들 엇더리
• 청산은 내 뜻이요 (변하지 않는 사랑)
청산은 내 뜻이요 녹수는 님의 정이요.....녹수 흘러간들 청산이야 변할손가.....녹수도 청산을 못 니져 우러 예어 가는고
• 동짓달 기나긴 밤을 (연정(戀情): 정든 임을 그리는 애틋한 마음)
冬至(동지)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버혀내여.....춘풍(春風) 니불 아래 서리서리 너헛다가 .....어론님 오신 날 밤이여든 구뷔구뷔 펴리라.
• 어져 내 일이야 (임을 그리워하는 회한 (悔恨)의 정)
어져 내 일이야 그릴 줄을 모로던가.....이시라 하더면 가랴마는 제 구태여 보내고.....그리는 정은 나도 몰라 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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