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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물 • 악녀 (10인) • 부덕 (6인)

부덕 ② 어우동 (기생ㆍ1430?~1480ㆍ성종 때)

by 당대 제일 2022. 9.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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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어우동 (1440?(1430?)~1480ㆍ39(49)세)"은 "성종" 때, 조정의 고위 관료들이 연루된 "성 스캔들 사건"의 주인공으로 처형되었다. "시"는 작품성이 높이 평가되었으며, "그림"도 잘 그렸으나, 음란한 여성ㆍ부덕을 어긴 여성의 한사람으로 지목되면서 대부분 인멸, 실전되었다.

 

1. 박 어우동 (朴 於宇同1440(? 1430?)~ 1480향년 39(49))

조선 전기(성종 때)의 왕족시인서예가작가기생무희교형으로 처형

본래 "양반가 출신"으로, 호색하여 외간남자와 관계하다가 남편(왕족 태강수 이동효령대군(세종대왕 )의 손자)에게 소박당한 후, "기녀"가 되었다"성종" , 조정의 고위 관료들이 연루된 "성 스캔들 사건"의 주인공으로 처형되었다.

출 생 : 충북 음성(陰城)군 음죽현 :  "괴산 갈읍리(葛邑里)"에는 그곳에서 생산되던 "고추의 품질이 뛰어나, 기생 어우동이 괴산 청결고추 때문에 눈물을 흘렸다"는 전설이 전해지기도 한다.

사 인 : 사형 (사약형조선 한성부)

별 칭 : 어을우동(於乙宇同): 실록 /  어우동(於宇同) : 용재총화송계만록(松溪漫錄)대동시선해동시선연려실기술

간 통 : 오종년 (사헌부 관리): 기생 생활 전  /  방산수 이난 (方山守 李瀾): 남편의 6계양군(세종의 서자)4째 서자  /  수산수 이기 (守山守 李驥): 남편의 8정종의 9째 아들 "석보군"의 서손자  /  학유(學諭) 홍찬(洪燦): 과거급제자

내금위 구전(具詮)학유 홍찬(洪燦)생원 이승언(李承彦)서리 감의향(甘義享)서리 오종련(吳從連)서리 감의형(甘義亨)생도 박강창(朴强昌)양인 이근지(李謹之)사노 지거비(知巨非)ㆍ어유소(魚有沼)노공필(盧公弼)김세적(金世勣)김칭(金偁)김휘(金暉)정숙지(鄭叔墀)

변 론 : 방산수 이난(方山守 李瀾): 계양군(세종의 서자)4째 서자ㆍ그녀의 재색에 매료되어, 정이 매우 두터워서, 이난은 자기 팔뚝에 먹물로 이름을 새겼다 뒤에 체포되었을 때, 끝까지 그녀를 변호하고, 선처를 호소

남 편 : 태강수 이동(泰康守 李仝)- 영천군(효령대군(태종 2 세종 2째 형))5째 아들)의 서자 이혼기녀성 스캔들 사건(고위 관료 연루)

자 녀 : - 이번좌, 아들- 아버지 미상

부 모 : - 박윤창(朴允昌, 승문원 지사)- 정귀덕(鄭貴德, ?~ 1488, 8년 뒤, 박성근에 의해 살해)ㆍ오빠- 박성근(朴成根, ?~ 1488)

자유분방한 생활은 마침내 조정에까지 알려졌으며, 풍속을 어지럽혔다는 이유로 체포당하게 된다탄핵은 계속되었고, 특히 "동부승지 김계창"의 끈질긴 탄핵을 받게 된다조정에서는 이 사건을 두고 "사형""유배"로 주장이 나누어졌으나, 결국 "성종""승정원""양사" 핵을 승인하여, 1480(성종11) 10.18일에 "삼종지도(三從之道)"를 문란하게 했다는 죄명으로 "군기감" 앞에서 처형되었다.

11.13일에는 "종부시"의 상언으로 왕실의 족보인 "선원록"에서 그녀의 이름이 삭제되었다그러나 그와 간통했던 사람들은 가벼운 벌만 받았고, 어우동이 죽은 뒤 모두 사면되거나, 실직에 복귀하였다"어우동"과 간통한 혐의가 있던 남자들에 대한 처벌은 관대하였다여러사람들의 이름이 거론되어, 실제로 문초를 당하기도 했지만 대부분 죄가 면해졌다1482.08.08(성종13)의 실록에 의하면, "어우동"과 간통한 자들은 이미 모두 석방되었다.

"조선조 최대의 스캔들 사건"의 주인공이었으나, 그녀와 통정한 인물들은 모두 사면되었고, 그녀만 사형당하여, 동정여론이 일기도 했다. 미모와 재주는 회자화되어 많은 구전으로 전해졌다전설에 의하면, "어우동"에게는 일찍부터 마음에 두었던 이웃집 남자가 있었지만, 그 남자의 집안이 한미하여 부모가 반대하였고, 그녀는 눈물의 이별을 한다.

그 뒤 집안의 정략에 의해, 종실인 "태강수 이동"과 결혼하게 된다후사를 잇지 못한다는 이유로 "어우동"은 시댁의 무시와 냉대를 견뎌냈다그러던 중, "어우동"은 딸 "번좌"와 함께 버려졌다.

그녀가 축출된 배경은 "연경비"라는 "기생 또는 첩"을 사랑해서, 억지로 "어우동"의 허물을 잡아 쫓아내었다는 설과 "어우동"이 집에 은그릇을 만들려고 찾아온 "은장이"와 간통을 해서 "이동"이 쫓아냈다는 설이 존재한다"은장이(銀匠)"을 불러, "은기(銀器, 은그릇)"를 만드는데, "어우동""은장이"를 보고 좋아하여 거짓으로 "계집종"처럼 하고 나가서 서로 이야기하며, 가까이하려고 했다그 사실이 알려져, "어우동"은 친정으로 쫓겨 가게 되었다는데, 이는 누명이라는 반론도 제기되고 있다.

그 뒤 여러 남성과 사귀었고, "거문고" 등의 재주를 높이 사서, 당대의 명사와 유생, 부녀자들까지 그의 집에 수시로 출입하였는데, 단순한 시문과 서신을 주고받는 사이와 연인 등 다양한 사람들이 존재했으며, 이혼한 뒤였는데도 "왕족의 내였다."는 이유로 "간통"으로 혼자 사사 당했다.

1480(성종11) "어우동"과 관련된 "성문란 행태"가 발각되어, "김종직사림파이덕숭(李德崇)"등의 탄핵을 받고, "어우동""의금부"에 잡혀갔다이때 풍기문란으로 문초를 당했으나, 남성들은 모두 혐의를 부인했다그녀가 체포되었을 때, "방산수 이난"이 그를 변호하였고, 그의 권고로 사실을 밝혔다"어우동"을 변호하는 인물로는 "방산수 이난""친어머니 정씨" 등 소수였다. 그의 어머니 "정귀덕" "사람이 누군들 정욕(情慾)이 없겠는가? 내 딸이 남자에게 혹하는 것이 다만 좀 심할 뿐이다" 하였다탄핵은 계속되었고, 특히 "동부승지 김계창"의 끈질긴 탄핵을 받게 된다.

조정에서는 이 사건을 두고 "사형""유배"로 주장이 나누어졌으나, 결국 "성종""승정원""양사" 핵을 승인하여, 1480(성종11) 10.18일에 "삼종지도(三從之道)"를 문란하게 했다는 죄명으로 "군기감" 앞에서 처형되었다.

"어유소노공필김세적김칭김휘정숙지"등의 "사대부 고관"인 남자들은 모두 혐의를 부인하였고 , "중인"이었던 "박강창홍찬"등은 하옥되었다조정에서는 이 사건을 두고, "사형""유배"로 주장이 나뉘었으나, 결국 "사림파""훈구파"의 맹공을 받고 "삼종지도(三從之道)"를 문란하게 했다는 죄명으로 혼자 사사 당했다조선사회의 "악녀의 한사람"으로 비판받아오다가, 1910(융희4) "대한제국" 멸망 이후 복권되었다.

"불륜간통"을 일으킨 "범죄자"라는 주장과 성리학적 도덕주의에 의한 "희생양"이라는 시각이 양립하고 있다규범을 거부한 조선여성의 한사람으로도 평가되고, 또한 "체제의 희생양"이라는 시각도 존재한다.

이혼하였지만, "왕족의 아내로 그녀의 자유분방한 성생활"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것이었고, 유교 윤리를 표방하고 있던 조선 사회가 그녀를 포용할 수는 없었다는 시각도 있다"어우동"에 대한 기사는 "성종실록"에 소상히 기록되어 있는데, 그것을 적은 "사관(史官)"들은 그 내용의 등재를 꺼려했다 한다.

2. 자유연애 편력

관계를 맺은 남자들과 당시 스캔들의 소상한 내용이 "용재총화성종실록대동야승"등에 기록되어 전한다.

과거 급제자 희롱 : "과거 급제자"를 희롱한 일로 소문이 확산된다 이미 더 이상 꺼리 낄 것이 없는데다, 대담해진 그녀는 자기가 적극적으로 나서기도 했다 한번은 과거에 합격하여 "유가(遊街)"를 하는 "홍찬"을 본 "어우동"은 문득 간통하고 싶은 마음이 일었다 그 후 길에서 만나자, 소매로 그의 얼굴을 슬쩍 건드렸다 이에 "홍찬"이 그녀의 집으로 가서, ""을 통하기도 했다.

상대가 "양반"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서리(書吏) 감의향"이 길에서 "어우동"을 만나자 희롱하며, 그녀의 집에까지 따라가 간통하기도 했다.

자신의 마음의 든 사내에게는 특별히 자신의 이름을 "문신"하도록 강요했다 :  "전의감 생도"였던 "박강창"은 팔뚝에 "어우동"이라는 글자를 새겨 넣게 되었다 "서리(書吏) 감의향" "어우동"을 사랑하여, "등판"에다가 이름을 새겨 넣기도 했다 또한 그녀가 가장 사랑하여, 팔뚝에다가 "감의향"의 이름을 새겼다 한다.

남편의 8촌이자, "정종"9째 아들 "석보군"의 서손자인 "수산수 이기(守山守 李驥)"를 만나 간통하게 된다  :  "이기"는 어우동의 미모에 혹하여, 어우동의 몸종을 불러내, 누구의 딸인지, 아내인지를 물었고, 여종은 "내금위(內禁衛)의 첩()"이라고 하자, "이기"는 어우동을 불러들였다.

이웃집에 살던 "어유소"는 자신의 조상을 모신 "사당"으로 "어우동"을 데려가서 간통하였다.

"김휘"는 어우동을 "사직동"에서 만나, 길가의 "인가(人家)"를 빌려서 정을 통하였다.

그밖에 "내금위(內禁衛) 구전(具詮)학유(學諭) 홍찬(洪燦)생원(生員) 이승언(李承彦)서리(書吏) 감의향(甘義享)서리 오종련(吳從連)서리 감의형(甘義亨)생도(生徒) 박강창(朴强昌)양인(良人) 근지(李謹之)사노(私奴) 지거비(知巨非)"와 간통하였다 "어유소(魚有沼)노공필(盧公弼)김세적(金世勣)김칭(金偁)김휘(金暉)정숙지(鄭叔墀)"등도 거론되었다.

3. "어우동" 사망 후 8년 뒤, "박성근(오빠)"에 의한 "정귀덕(모친)" 살해

오빠 "박성근"은 자신의 어머니인 "정귀덕" 살해했는데, 살해 이유는 어려서 본 어머니의 "간통 사실" 발고한 것이 원인이었다"박성근은 전()군수(郡守) 박윤창(朴允昌)의 아들이며, 음녀(淫女)인 어우동(於宇同)의 오라비다.

음죽현(陰竹縣)에서 살았으며, 그의 어미 정씨(鄭氏)도 또한 크게 음행(淫行)함이 있어서, 박성근이 어렸을 때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나는 어미가 잠잘 때에 발이 넷이 있는 것을 보았다."하였더니, 정씨가 이 연유로 미워하고, 밤이 되면 반드시 박성근을 궤()속에 유폐(幽閉)시켰으며, 의복이나 음식은 비복의 소생과 다름이 없었다.

그가 장성함에 이르러, 또한 토지와 노비를 적게 주어서 박성근이 이것을 원망하더니, 종형(從兄)집의 종 내은산(內隱山)내은동(內隱同)과 공모(共謀)하고는, 정씨가 그의 조카 정소(鄭韶)의 집에 가 있음으로 인하여, 드디어 정씨의 종 왕석(往石)과 내은동내은산 등을 강도같이 만들어 가서 죽였는데, 박성근이 정소(鄭韶)와 함께 꾀했다고 공초(供招)하였으므로, 장신(杖訊) 중에 옥()에서 죽었다."고 하였다.

4. 논 란

사형 여부 논란

"어우동"을 처형한 것을 "강상에 관련된 일"이라며, 당연하다 보았다. 그러나 사림파 관료인 "김정국(金正國)"은 엄한 형벌로 아랫사람을 교화하려는 것은 잘못이며, "어우동" 처형을 역시 합당하지 못한 것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성종"은 그녀를 살리려 하였으나, 일부 강경 "사림파"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당시 조선이 차용한 "명나라"의 형률인 "대명률(大明律)"에는 간통의 처벌 규정이 남녀 공히 "() 80"였다처녀든 총각이든 "혼인 외의 성관계"를 가지면 간통이고, 간통에 대해서는 "곤장 80"를 맞게 돼 있었다그런데 유부녀는 10대를 더해 "90대 형"이었다. 원칙적으로는 "90대 형"이 적합했고, 당시는 이미 이혼한 상태였으므로, "80대 형"이 정확한 적용이었다.

양반사회의 위선

"어우동"의 스캔들에 연루된 인물들 중, "지거비"를 제외한 인물들은 모두 조선조의 "양반"들로, "내금위장의 "이라고 신분을 밝혔음에도, 그를 데려간 "왕족"과 조상을 모시는 사당으로 데려가서 간통하는 등, 근엄한 "유학자", 유교적 도덕성을 이념으로 한 "양반사회"의 위선이 외부에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이는 공공연한 비밀이었는데, "김종직" "사림파"의 상소를 통해, 알려지게 되었다.

4. 예술적 재능과 작품

"성관계"에만 국한되지 않고, "시문""가야금"을 잘 다루고, ""을 잘 추었던 탓에, 여러 문사들이 그녀를 보고자 직접 찾아오기도 했다그녀는 자신의 신분을 "기생내금위의 첩과부"라 소개했고, 이들 여러 남성과 양반들이 그의 집에 출입하였다모든 남성을 "성적"으로 유혹하지는 않았고, "시문""서신"만을 주고받는 관계도 있었다.

"어우동"은 감히 "글쓰기"를 하며, 세상에 도전한 주인공이 되었다"기생"이라는 신분을 이용해 수많은 남자들과 "여염집"여자들이 꿈도 못 꾸는 자유로운 "문우활동"을 했다여자가, 그것도 "기생"이 글을 쓰고, "서예"를 한다고 "사대부"들이 비웃었지만, 그는 계속 "그림""서예" 계속 했고, 사람들을 탄복시킬 정도로 실력을 갈고 닦았다.

어우동의 "거문고가야금"등의 재주는 잊혀졌고, 다만 음탕한 여인의 대명사처럼 구전되어 왔다여러 작품을 남겼으나, 몇 수의 "시조"가 전한다"권응인(權應仁)"은 자신의 저서 <송계만록(松溪漫錄)>"어우동"의 시인 "부여회고(扶餘懷古)" 시를 소개하면서 "음부(淫婦)이면서 이와 같이 시에 능하니, 이른바 재주는 있고, 행실이 없는 사람이란 바로 이것이다."라고 하며, 그녀의 시적 재능은 인정하면서도 폄하하였다.

<대동시선>에는 그녀가 지은 "부여회고(扶餘懷古)"라는 시가 실렸으며, <송계만록>의 글을 소개하였는데, "호서(湖西)의 창()으로 농부의 딸이었으나, 단정하지 않아 그 시가 뛰어나나 싣지 않는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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