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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물 • 악녀 (10인) • 부덕 (6인)

악녀 ⑩ 명성황후ㆍ민비 ② 평가ㆍ사망ㆍ가계도

by 당대 제일 2022. 9.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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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 (明成皇后ㆍ민자영ㆍ민비ㆍ1851~1895.10.08ㆍ44세)"은 "고종 (高宗26대 왕대한제국 초대 황제)"의 왕비이다. 1895.10.08일, "일본정부"의 사주를 받은 "미우라 고로(주한 일본공사)"가 "일본 낭인"을 궁중에 난입시켜, "건청궁(乾淸宮)"에서 "황후"를 난자시해(亂刺弑害)하고, 시신은 궁궐 밖으로 운반소각하였다.

 

1. 가계 : 명성황후 (明成皇后 閔氏민비1851~1895.10.08향년 44)

민치록(음서로 벼슬)의 재취부인 "한산 이씨"의 딸, "부인 오씨"에게서는 자녀가 없었던 것으로 추정, "한산 이씨"에게는 13녀의 형제가 있었으나 모두 죽고, 그녀만이 남았다.

가계

양자1: 민승호 (1830~187443) : 대원군 처남민비 양 오빠민씨 정권 수장의문의 폭사(대원군 소행?)

양자2: 민겸호 (1838~188243) : 대원군 처남민비 양 오빠병조판서별기군 창설임오군란 때 난병에 살해

민영익 (1860~191453) : 민비는 친정아버지의 제사를 받드는 유일한 혈육인 그를 끔찍이 아꼈다. 촌수로는 조카였지만, 나이 차이가 9세밖에 나지 않았기 때문에 친동생처럼 친하게 대했다. 1905년 을사조약 성립 후, 고종폐위 음모에 관련되어, 홍콩으로 망명

민영환 (1861~1905ㆍ43) : 1905.11"을사늑약 체결"에 반대하여 자결

2. 사망 : 명성황후 (1895, 43)고종 (1919, 67)순종 (1926, 52)

고종 (高宗1852~ 1919.01.21 (67)재위 1863~1907(44)): 153cm

독살설 소문인산일(장례일 31)31 만세운동 / 명성황후 (민비1851~ 1895.10.08향년 43)결혼 : 1866~ 1895 (29년간)

01.21"덕수궁 함녕전(침전)"에서 고종이 사망독살설 소문뇌일혈 (01.22일 조선총독부 발표 덕수궁 함녕전(침전): 석조전(덕수궁 내 근대식 석조 건물)을 건축했지만, 황제의 침실로 단 1번도 이용하지 않았고, 함녕전을 침실로 꾸준히 이용했다.

01.21아침 6: 덕수궁에서 무엇인가를 마시다가 갑자기 쓰러졌는데, 뇌일혈 또는 심장마비가 이라는 "자연사설"이 있는 반면, 아침에 한약식혜커피 등을 마신 뒤 이들 음료에 들어 있던 독 때문에 사망했다는 주장이 있다.

고종 시신 상태 : 다리가 심하게 부어올라 바지를 찢어야만 했고, 이가 빠져 있고, 혀가 닳아져 있었으며, 30cm 가량의 검은 줄이 목에서 복부까지 나 있었다. (비소 성분의 독살설 의심)

순종 (純宗1874~1926.04.25(52)재위 1910~1926(16))

심장마비로 승하인산일(장례일 610)610 만세운동

몸이 허약했고, 선천적인 자폐아가 아니었으나, 남자 구실을 못했다고 한다. 라디오를 들으면서 심장마비로 사망

김홍륙 (친일파역관? ~ 1898)이 고종의 각별한 총애와 러시아의 세력을 배경으로 온갖 전횡을 자행하던 중, 러시아와의 통상에서 거액을 착복한 사실이 드러나서 전남 신안군 흑산도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그러나 떠나기 직전인 1898.07.26, 원한을 품고, 고종이 즐겨 마시는 커피에 독약(아편) 넣어 살해하려고 한 독살사건이 발각되자, 반역죄로 교수형에 처해진다. 고종은 냄새가 이상하여 마시지 않았는데, 황태자는 마시다가 토하고 기절했다. 약의 부작용으로 총명했던 순종은 저능아자폐아로 전락해 버렸다.

고종

3. 부정적 평가

심지어 일부 극단적 평론가는 비슷한 시기, "청 제국"을 쇠퇴시킨 "서태후"와 동급을 취급하기도 한다. 보통 그들은 "서태후ㆍ명성황후"를 "19C 동양의 최악의 황후"라고 비판한다.

후대 역사학계의 평가는 "친일 급진개화파ㆍ수구적 척사파ㆍ일본 관변" 측으로부터 모두 좋지 않은 평을 얻었고, "척족정치의 악순환을 거듭케 했다"는 비판이 있다. 반면, 그러한 좋지 않은 평가는 "명성왕후의 정책 노선"이 그만큼 보수와 진보 사이에서 균형을 이루었다는 반증이라는 주장도 있다. 

 유길준

친구인 "윤치호"가 "명성황후를 살해한 범인"이라고 지목했던 "유길준"은 그녀를 "세계에서 가장 나쁜 여성"이라고 혹평하였다. 암살 직후, "유길준"이 미국인 은사 "모스"에게 보낸 날짜미상의 편지에서 "명성황후는 영국의 메리 여왕이나 프랑스의 마리 앙투와네트 보다 더 악하다"고 비판하였으며, 비판 사유로 당시 백성들 사이에서는 "국왕은 일개 인형이고 왕비는 그 인형을 갖고 노는 사람"이라는 시중의 소문을 근거로 제시하였다.

그는 "명성왕후를 개화당 살해의 배후"로 보았다. "모스"에게 보내는 편지 본문에서, "명성왕후가 도움을 청하기 위해, 러시아 공사와 비밀 접촉하고, 1894년 가을, "개화당" 모두를 살해하려는 계획을 꾸미다가, 대원군에게 발각되었다"고 하였다.

② 윤치호

"이기적인 인간"이라고 지적했는데, "명성황후"를 가리켜 한 마디로, "그 영리하고 이기적인 여인이 미신 섬기는 것의 반만큼이라도 백성을 열심히 섬겼더라면, 그녀의 왕실은 오늘 안전했을 것"이라고 비판했다. 권좌에 있는 내내 왕비의 신념은 "우리 세 사람(고종ㆍ명성황후ㆍ순종)만 안전하다면, 무슨 일이든 일어나도 상관없다."였다. 이러한 극단적인 이기심이 파멸로 나아갔다는 것이고, 무속 신앙 신봉에 대한 비판도 존재한다.

③ 황현 - 국고 탕진에 대한 비판

"매천야록(유학자 황현)"에 의하면, 명성왕후의 사치와 민씨 정권의 매관매직에 대해 매우 부정적으로 서술되어 있다. "고종ㆍ명성황후가 국고를 탕진했다"는 점을 지적ㆍ비판했다. 그리고 황현 자신의 저서 "매천야록"의 곳곳에서도 이를 언급하였다.

"고종ㆍ명성황후"는 원자가 태어나자, "원자가 잘 되길 빈다."는 핑계로 제사를 "8도 강산"에 두루 돌아다니면서, 지냈다.  이렇게 탕진하는 하루 비용이 "천금"이나 되어, "내수사"가 소장한 것으로는 비용 지출을 감당할 수가 없었고, 마침내 "호조나 선혜청"에서 소장한 공금을 빌려서 사용했지만, 그것이 위반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전혀 없었다. 1년이 채 못돼, "대원군"이 비축해 놓은 재물을 모두 탕진했다. 그래서 "매관ㆍ매직"까지 기승을 부렸다고 한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며 비아냥거렸다. "내전(왕비)는 돈목을 감소시키고, 대전(임금)은 돈목을 증가시키면 좋겠다."는 것이다.

④ "명성황후ㆍ척족 세력"의 부정적 평가

"명성황후ㆍ척족세력"은 "중인" 중심의 "개화파"와는 달리, 전통과 서양 문명을 절충하려는 "동도서기(東道西器)"의 정책 노선을 띠었다. 이 때문에 "급진 개화파"의 입장에서 "사대당 또는 수구당"으로 평가를 받기도 한다. 반면, "고종"의 입장에서는 그들은 "근왕파"로서, "고종"이 시도한 광무개혁의 지지 세력이었고, "을미사변" 이후에는 반일ㆍ의병운동을 배후에서 지원하였으며, "대한제국" 성립에도 큰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대원군"에 의해 척결된 "세도정치"를 다시 불러들였다는 비판과 외세를 이용하려 하여, 국내에 "일본의 침입을 촉진시켰다"는 부정적인 시각도 존재한다.

⑤ "외척"으로 편중된 권력

1874.11월, "흥선대원군"을 축출한 뒤, "황후"는 "민씨 일족"을 대거 등용하여, 조정에 진출시켰다. "민겸호"는 "선혜청"에 있으면서, 군인들의 급료를 착복하고, 급료에 모래를 섞어 주어, "임오군란"의 원인을 제공하기도 했다. (민겸호(1838~1882, 44세) 대원군 처남ㆍ민비 양 오빠ㆍ병조판서ㆍ별기군 창설ㆍ임오군란 때 난병에 살해)

"우복 정경세(1563~1633)"의 사위인 "문정공 송준길(1606~1672)"은 "민유중(1630~1687ㆍ인현왕후의 친정아버지ㆍ명성황후/여흥부대부인 민씨의 6대조)"의 장인이었다. "황후"는 "정경세"를 "우복 할아버지"라고 불렀고, "송준길 집안"에 대해서는 가까운 "외가의 의"를 지켰고, "정씨 집안"을 추대해서, 역시 외척같이 각별히 생각해 왔다. 그래서 "송씨ㆍ정씨" 두 집안의 후손들은 "고종"의 총애를 크게 받아, 과거에 급제해서 벼슬을 하는 사람이 부지기수로 많았다.

4. 연보

1851.11.17.: "본관 여흥"에서 "여성부원군 민치록"의 외동딸로 출생

1864.01.16.: 고종 즉위(조선 26)

1866.03.06.: 왕비로 간택(당시 15)12~17세 사이의 모든 처녀들에게 금혼령 / 삼간택 시, "김우근 딸조면호 딸서상조 딸유초환 딸"과 경쟁

1874.03.25.: "순종()" 출산

1873.11. : "고종 친정" 선포 (대원군 실각)

1882.06.09.: 임오군란

1882.06.10.: "명성황후", 대전별감 "홍계훈"의 등에 업혀, 장호원 "민응식의 집"으로 은신

1882.07. : "명성황후" 환궁

1884.12.04.: 갑신정변

1894.02.15.: 동학농민혁명

1894.07.25.: 청일전쟁

1894.07.27.: 갑오경장

1895.10.08.: "명성 황후" 시해 (을미사변)

1895.10.10.: "일본" 압력으로 인해, 죽음 이틀 뒤, "폐위"되어 "서인(庶人)"으로 강등

1895.10.11.: "고종"의 명으로 ""()으로 격상 문성왕후 (능호- 홍릉 "시호의 문성(文成) 정조의 시호와 같다"하여, 논의 끝에 "명성왕후"로 개칭 1897.10.12"대한"을 발표하고, "고종""황제 즉위"에 따라, 역시 "황후"에 추존되어, "명성황후"가 되었다 1897.11, 장례도 "국장"으로 또다시 치러져, "청량리 동"에 안치되었다가 현재의 위치로 이장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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