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순왕후 김씨 (貞純王后ㆍ1745~1805ㆍ59세)"는 자신보다 10살이나 연상인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아가는데 지대한 역할을 하였으며, "순조"가 즉위한 후, 친정 집안의 당파인 "노론 벽파"를 위해, 300여 명에 이르는 "천주교도"를 학살한 사악한 여인이었다.
1. 정순왕후 김씨 (貞純王后ㆍ1745~1805 (순조5)ㆍ향년 59세)
영조 (英祖ㆍ21대 왕ㆍ1694~1776ㆍ재위 1724~1776))의 계비ㆍ김한구(경주 김씨)의 딸ㆍ살아생전, 대군은 커녕 공주도 출산하지 못했다. 임신했다는 기록도, 유산했다는 기록도 없다.
영조의 총애는 깊었지만, 나이차(51세)가 심했기 때문에, 임신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당시 영조의 나이 66세, 정순왕후는 15세로 조선 개국 이후 가장 나이 차가 큰 혼인이었다. 1735년에 태어난 영조의 아들(사도세자)과 며느리(혜경궁 홍씨)보다 10살이나 어렸다.
15세가 되던 해에 66세인 영조의 계비로 간택되어, 책봉 (51살 차) "친정 집안"을 위해, 정계의 전면에 나서 권력을 휘둘렀던 여인으로, "영조" 생전에는 "김한구(아버지)"의 당파와 뜻을 같이하여, 자신보다 10살이나 연상인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아가는데 지대한 역할을 하였으며, "순조"가 즉위한 후에는 친정 집안의 당파인 "노론 벽파"를 위해, 300여 명에 이르는 "천주교도"를 학살한 사악한 여인이었다ㆍ이러한 행적은 새로운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며, 개혁을 향해 서서히 나아가려던 조선의 역사를 퇴보시키는 결과를 초래했으며, 조선의 정치를 "외척 중심"으로 하게 함으로써, 돌이킬 수 없는 파국으로 몰고 가는 계기를 만든 장본인이기도 했다.
• 재 위 : 왕 후 : 1759~1776 (17년간)ㆍ전임자(정성왕후)→ 후임자(효의왕후ㆍ정조의 비) / 왕 대비 : 1776~1800 (24년간)ㆍ전임자(선의왕후)→ 후임자(효의왕후ㆍ정조의 비) / 대왕대비 : 1800~1805 ( 5년간)ㆍ전임자(인원왕후)→ 후임자(순원왕후)
• 출 생 : 경기도 여주(驪州) 사저
• 사 망 : 경복궁 교태전(交泰殿)
• 능 묘 : 원릉(元陵ㆍ경기도 구리시 동구릉 내)- 영조(英祖ㆍ제21대ㆍ재위 1724~1776)와 함께
• 별 명 : 예순 왕대비ㆍ예순 대왕대비
• 배우자 : 영조(66세)ㆍ정순왕후(15세) - 조선시대 가장 많은 나이차 (51년 차)의 결혼 / 1735년에 태어난 영조의 아들인 사도세자ㆍ며느리(혜경궁 홍씨)보다 10살이나 어렸다.
• 자 녀 : 없음 - 대군ㆍ공주 없었음 (임신했다는 기록도 없고, 유산했다는 기록도 없다.)
• 부 모 : 김한구(金漢耉ㆍ오흥부원군)ㆍ원풍부부인 원씨
• 가 족 : 오빠- 김귀주(金龜柱ㆍ1740~1786)ㆍ동생- 김인주(金麟柱)
• 본 관 : 경주 김씨(慶州 金氏)
김씨가 입궁하였을 때, 조정은 "소론"에 동정적인 "사도세자"가 "대리청정"을 하고 있었는데, 긴장한 "노론"은 "영조의 계비"로 들어온 "정순왕후 김씨"를 중심으로 "사도세자 폐위 모의"에 들어가, "혜경궁 홍씨"의 친정인 "풍산 홍씨" 가문과 함께, "사도세자"를 "뒤주"에서 아사하게 만든다. 그러나 "사도세자"의 사후에 "홍봉한(혜경궁 홍씨의 아버지)"이 "영조"의 신임을 얻어 중책을 맡자, "정순왕후 집안"에서 긴장하게 된다.
비록 "풍산 홍씨ㆍ경주 김씨" 집안이 "사도세자"를 제거할 때는 같은 "노론"의 입장에서 일을 함께하였으나, 막상 이권다툼이 발생하자 정적으로 변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노론 : 소론"으로 벌어지던 당쟁이 "홍씨 집안 : 김씨 집안", 즉 외척간의 싸움으로 바뀌게 된다. 많은 죽음의 위기를 넘기면서 왕위에 오른 "정조"는 즉위를 하자마자, 아버지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 갔던 "정후겸ㆍ홍인한ㆍ숙의 문씨ㆍ문성국(문씨의 동생)" 등 사건의 관련자들을 문초하여 귀양 보낸 후, "혜경궁 홍씨" 아버지 "홍봉한"을 제외하고는 모두 사사시켰다.
물론 "정순왕후 김씨"의 동생 "김귀주"도 예외 없이 귀양에 처해졌다. "정순왕후"는 비록 "왕 대비"였으나, 이 시기는 숨죽이며, 때를 기다릴 수밖에는 없었다. "정조"의 개혁정치가 채 정착되기도 전에, "순조"를 왕세자로 책봉하고, "노론 시파 김조순"의 딸을 "세자빈"으로 책봉하였는데, "정조"는 그해에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만다. 이러자 숨을 죽이고 기다리던 "정순왕후 김씨"에게 때가 온 것이다.
"순조"가 11살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조정 대신들이 왕실의 최고 어른인 "정순왕후 김씨"에게 "수렴청정"을 청했는데, 이 때 그녀는 7번이나 거절을 했다고 하나, 이는 어디까지나 형식이었고, 결국 "희정당"에서 "수렴청정"의 예를 거행하는데, "노론 벽파"를 대거 등용하고, "정조"와 함께 했던 "시파ㆍ신서파의 남인" 세력들을 제거하는데, 심혈을 기울인다.
1번째가 바로 "천주교 탄압"으로, 당시 "남인"들이 오랫동안 정권에서 소외당하면서, 천주교를 수용하였기에, 이를 이용하여 정계에서 제거하려 한 것인데, 그리하기를 1년 만에 조정을 "노론 벽파" 세상으로 바꾸었다. 그러나 어느덧 조정에서는 "순원왕후 김씨(순조 비)"의 아버지 "김조순"이 세력을 키우고 있었으며, 섭정을 거두고 난지 1년 후인 1805년, 그녀는 "노론 벽파" 중심의 조정을 세우고, 세상을 떠났다.
2. 영조와의 결혼 (51세 차)
1757년, 정비인 "정성왕후(貞聖王后)"가 승하하자, "영조"는 부왕인 "숙종"의 유지에 따라 후궁들 중에서 새 왕비(王妃)를 책봉하지 않았다. 1759.06.09일, 정식 "중전간택"을 통해, "김한구"의 딸을 새 왕비로, "창경궁"에서 혼례를 올렸다.
3. 영조의 계비 간택 당시 (야사)
영조가 세상에서 가장 좋은 꽃이 무엇이냐고 질문하자, 규수들이 모두 "장미ㆍ모란" 같은 꽃을 언급할 때, 백성을 따뜻하게 하는 "목화 꽃"이 가장 좋다고 대답했다. 가장 넘기 힘든 고개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보릿고개"라고 답해서 왕비로 채택되었다고 한다. 가장 맛있는 음식은 무엇이냐는 질문에 "소금"이라고 대답했다. 가장 깊은 것은 "바다ㆍ강ㆍ뒷동네 연못" 등이 아닌 "사람의 마음"이라고 대답했다.
또한 간택 후보들이 앉을 방석에 후보들 아버지의 이름을 새겨 놓았는데, 그녀는 여기에 앉지 않았다고 한다. 왕이 이유를 묻자 "어찌 딸 된 자가 아버지의 존함을 깔고 앉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4. 정조의 독살설
"정조"가 죽기 전, 마지막 죽음을 본 사람은 "정순왕후 김씨"이다. "대비ㆍ왕비"라 하더라도 국왕의 임종을 지킬 수 없게 한 예법을 어기면서, "정조"의 임종을 맞이했으며, 당시 그녀는 직접 탕약을 가지고 "정조"에게 가져갔다.
"내가 직접 받들어 올리고 싶으니, 경들은 잠시 물러가시오" 이에 "심환지" 등이 명을 받고 잠시 문 밖으로 물러나왔는데, 잠시 후 방 안에서 "곡"하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리고 죽음을 맞은 2달 후, "승정원 일기"에는 "정조 독살설"이 기록이 있다. "정조"의 갑작스런 사망은 개혁의 절정으로 치닫던 순간이었다.
"정조"가 세상을 떠나기 1달 전 만해도 상당히 정국 구상을 밝혔기 때문에, 1달 후에 세상을 떠났을 때는 그 만큼 큰 충격을 받았다. 특히 "정조"와 같은 입장에 서 있던 "남인"들 사이에서는 "독살설"이라고 주장했다.
"정조"는 자신의 병을 "홧병"이라고 생각했다. 사망하기 보름 전부터 기록된 "정조"의 병은 "해묵은 홧병ㆍ그로 인한 종기"였다. "정조"는 "내약원"을 불신을 했다. "내약원(궁중의 주치의)"이 진찰을 청하자, 이를 거부한다. 당시 "내의원" 최고 책임자는 "좌의정 심환지"며, 그는 정적관계에 있던 "노론 강경파" 영수였다.
"정약용"은 "여유당전서"에 의원을 시켜 왕을 죽인 정승이라고 적은 인물이 바로 "심환지"였고, 그가 썼다는 독약이 "연훈방"이었다. "정조"는 "연훈방" 치료 이후에 끝내 숨지고 만다. 여기서 "독살설"을 제기하는 "정약용ㆍ장시경"은 "연훈방"을 뜻하는 것은 "독약"이라고 한다.
5. 정조와 사이 친밀?
"영조" 후기, "영조"의 양대 척신 가문인 "김귀주(정순왕후 친정 오빠)ㆍ경주 김씨"측과 "풍산 홍씨(혜경궁 홍씨 친정)"측은 "영조" 말년에 계속적으로 대립했다. 남편 "영조"가 승하하고, 손자인 "정조"가 즉위하자, "왕대비(王大妃)"로 승격되었다. "홍인한(정조 외조부)ㆍ정후겸" 등 "영조" 척신 일파의 숙청을 단행했다.
"영조"시기, "김귀주"는 후일 "정조"가 중용하는 "청명당"과 함께 행동했다고 알려져 있으며, "정조"가 즉위하자, "한성판윤"을 제수받고, "홍인한ㆍ정후겸" 탄핵에 동참했다. 그런데 "정조"는 "홍인한ㆍ정후겸"에 대한 처분이 마무리되자, "김귀주"가 "혜경궁"에게 문안하지 않았다는 핑계로 흑산도로 귀양 보냈다. 이날 연석에서 "정조"는 "김귀주"를 귀양 보낸 실제 이유는 "영조" 때, "김귀주"가 외조부 "홍봉한"을 탄핵한 데 있음을 밝혔다.
이로 인해 "정조ㆍ정순왕후" 사이에 어떤 긴장 관계가 생겼는지 여부는 현재로선 확인할 수 없다. 세간에는 "정조ㆍ정순왕후"가 극심한 대립관계였다고 알려져 있으나, "일득록"에는 "정순왕후"를 향해 친밀한 감정을 나타내는 기록이 전하고, "정순왕후"는 "정조"의 행록을 쓰며, "정조"가 자신을 극진히 공양했음을 과시하고 있다.
6. 홍국영과 효의왕후 (정조 비) 사이가 안 좋은 이유
"효의왕후(정조 비)"와 "홍국영"의 사이가 안 좋은 것은 "홍국영"의 욕심 때문이 아닐까 싶다. "홍국영"이 "정조"를 도운 것은 사실이지만, 나름대로 권력을 유지시키고 싶었던 마음이 있었다. 그리하여 자신의 여동생을 "정조의 후궁(원빈 홍씨)"로 들이기도 했고, "원빈 홍씨"가 아이를 낳지 못하자, "정조의 조카"인 "상계군(사도세자의 서자ㆍ은언군의 아들)"을 "원빈의 양자"로 삼아 "정조"의 후사를 이으려고 한다. 그러다가 "홍국영"은 일이 여의치 않자, "상계군"에게 "역모 죄"를 씌워 죽이게 된다.
7. 신유박해 (辛酉迫害): 정약용의 유배ㆍ세계 천주교 역사에서 가장 큰 교회박해
"순조"때, "수렴청정"을 하는 동안, "정학(正學)이 밝아지면, 사학(邪學)은 저절로 종식될 것"이라며, "천주교"를 묵인한 "정조"와는 달리, "천주교"를 강경하게 탄압하였다. 급기야 1801년 "사학(邪學ㆍ천주교)"의 엄금을 하교하여, 세계 천주교 역사에서 가장 큰 교회박해인 "신유박해"를 일으켰다.
이러한 대대적인 "천주교 탄압정책"은 "천주교"를 묵인하던 "정조의 천주교 해법론"을 오히려 "천주교"를 확산시키는 무능한 해법으로 규정하여, "정조의 천주교 해법론"을 부정하는 것이었으며, "노론 벽파"의 정적인 "남인ㆍ시파(時派)"의 제거를 목적으로 한 숙청이었다. 이로 인해 "남인" 출신인 "정약종(정약용 3째 형)ㆍ이승훈"이 처형되었으며, 이미 배교한 "이가환"도 장살 당하였으며, "정약용"은 유배형에 처해졌다. "신유박해" 이후, "황사영 (정약현(정약용 1째 형)의 사위)"에 의해 "황사영 백서 사건"이 벌어짐으로써, 조선 내에서의 천주교 탄압은 더욱 거세어졌다.
8. 순조 시대 : 수렴청정 (4년)
1800년 손자 "정조"가 승하하고, 증손자 "순조"가 11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대왕대비"로 승격되었으며, "정순왕후"는 왕실의 제일 큰 윗전 즉 "대왕대비"로서 4년 동안 수렴청정을 행하였다. 그녀는 자신과 대립되는 "소론 시파"들을 대거 숙청하였으며, "은언군(정조 이복동생)ㆍ홍낙임(혜경궁 홍씨 동생"을 처형시켰다.
"정조"가 설치한 "장용영"을 폐지하였으며, "정조"가 묵인하던 "천주교"를 대대적으로 탄압하여 "남인ㆍ소론 시파"들을 축출하였다. 또한 "정조"가 내쳤던 "김관주ㆍ김용주"등 "노론 벽파" 관료들을 대거 등용하였다. 1802년, "정조"의 유지에 따라, "김조순(안동 김씨ㆍ정조의 친위세력)"의 딸을 "순조 왕비"로 책봉하고, "김조순"에게 관직을 제수하였다.
1804년, "수렴청정"을 거두고, "순조"의 친정이 선포되자, "김조순(안동 김씨ㆍ순조 장인ㆍ정조의 친위세력)"에 의해, 대부분의 "노론 벽파" 관료가 숙청되고, 자신의 영향력도 약화되어 허망한 말년을 보내다가, 1년 뒤인 1805.02.11일(음력 01.12), 경복궁 교태전(交泰殿)에서 승하하였다. 능은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 내에 위치한 원릉(元陵)으로 영조와 함께 묻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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