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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물 • 악녀 (10인) • 부덕 (6인)

악녀 ⑦ 상궁 김개시 (광해군 승은 상궁ㆍ? ~ 1623)

by 당대 제일 2022. 9.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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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궁 김개시 (金介屎ㆍ본명- 김개똥ㆍ ? ~ 1623)"는 "선조ㆍ광해군" 때의 상궁으로ㆍ"선조ㆍ광해군"에게 "승은"을 입은 "승은 상궁"이었고, "광해군"의 총애를 받아 권세를 누린 궁녀였으며, "서인"들이 주도한 "인조반정"을 성공하게 했다.

 

1. 상궁 김개시 (金介屎본명- 김개똥 ? ~ 1623)

"선조ㆍ광해군" 때의 상궁으로ㆍ"선조ㆍ광해군"에게 "승은"을 입은 "승은 상궁"ㆍ"광해군"의 총애를 받아 권세를 누린 궁녀ㆍ"서인"들이 주도한 "인조반정"을 성공하게 한 인물"선조"가 "약밥"을 먹고 갑자기 사망할 당시, "상궁 김개시" 등이 수라를 올리는 데 참여했는데, 당시 "이이첨이 상궁 김개시 등과 함께 선조를 독살했다"는 소문이 퍼졌다.

※ 조선시대 3대 요부 중 1명 :  장녹수(연산군 9번째 후궁ㆍ1466?~1506ㆍ39세)  / 상궁 김개시 (金介屎ㆍ본명- 김개똥ㆍ광해군때 성은 상궁ㆍ ? ~ 1623)" / 장희빈 (장옥정 (張玉貞)ㆍ숙종 빈ㆍ경종 모ㆍ1659~1701ㆍ41세) 

• 인 물 : 이름이 개시(介屎)로, 나이가 차서도 용모가 피지 않았는데, 흉악하고 약았으며 계교(計巧)가 많았다. (조선왕조실록- 광해군 일기)

• 성 명 : 이름은 "계축일기"에는 "가히"라고 등장하고, "연려실기술ㆍ공사견문록" 등에 각각 "개희(介姬)ㆍ가시(可屎)"라고도 표기되어 있는 점으로 미루어, 이름 "개시(介屎)"는 기존에 흔히 알려져 있는 "개똥이"가 아니라, "가히"의 "음차"인 것으로 보인다.

미모의 여인은 아니었으나, 민첩하고 꾀가 많아 "광해군"의 총애를 받았는데, 이를 배경으로 국정에 관여하여, 권신인 대북(大北)의 영수 "이이첨(李爾瞻)"과 쌍벽을 이룰 정도로 권력을 휘둘렀다. 이러한 권세를 힘입어 "매관매직"을 일삼는 등 국정을 크게 문란 시켰다. 이에 "윤선도(尹善道)ㆍ이회(李洄)" 등이 여러 차례 상소하여 논핵하였으나, 도리어 그들이 유배되는 등 "광해군" 일대를 통하여 권세를 누리었다. 

"조야집요"에 따르면, 그녀의 권력은 "중전 유 씨"를 능가하여, "광해군"이 어느 후궁의 처소에 침소를 드는 것까지 직접 정해줬다고 한다.  그녀의 폐해가 커질수록 여러 신하들이 상소를 올려, "김개시를 내치라"는 건의를 하였는데 "광해군"은 오히려 충신들을 유배 보내는 등 그녀를 전적으로 신임하였다고 한다.

"윤선도ㆍ이회" 등이 여러 차례 상소하여 논핵하였으나, 도리어 그들이 유배되는 등 "광해군" 일대를 통하여 권세를 누리었다. 그래서 "서인들"은 "광해군"이 "영창대군(광해군 이복동생ㆍ선조 적자ㆍ인목대비 아들)"을 귀양보내고, "인목대비(계비)"를 "폐서인"을 만들고, "명나라"에 반기를 든 일 등을 명분 삼아 반정을 일으키게 된다. 1623.03.13일(광해군 15) "서인"들이 주도한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반정군"에 잡혀 "요부"로 지목된 후, 처형되었다.

"인조반정" 하루 전까지 "상소"가 계속 올라왔었지만, "김개시"는 "광해군"의 마음을 돌리는데 성공했다. "광해군"은 수차례 "반정"에 관한 상소와 구체적인 "반정자 명단"이 올라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말을 듣고, 이를 묵살해버렸다.

"광해군"은 일찍이 반란의 조짐을 보고받았지만, 반정을 막을 수 없다는 걸 직감한 "김개시"는 거사를 도모하던 "서인 세력"과 결탁, "광해군"이 반란의 주동자들의 충신이라 믿도록 거짓말을 해왔다. "반정"의 조짐을 알게 된 후, 이를 "막을 수 없을 정도로 사태가 심각하다"는 것을 깨닫자, "광해군"을 배신하고, 거사를 도모하던 "서인 세력"과 결탁, "반정"의 주력 인물인 "김자점"에게서 뇌물을 받았고, "광해군"이 반란의 주동자들의 충신이라 믿도록 거짓말을 했다.

2.  "선조ㆍ광해군"에게 "승은"을 입은 "승은 상궁"

원래 "춘궁(광해군왕세자)"의 시녀였는데, "광해군"의 부왕인 "선조"의 눈에 띄어 "승은(承恩)"받았으나, "후궁의 첩지"는 받지 못하고, "특별상궁"이 되었다시간이 흐른 뒤, "광해군"이 왕이 된 후, 유년시절부터 가까이했던 그녀가 다시 승은을 입게 된다"승은"을 입은 뒤, "가희"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

"승은"을 입었으나, 신분이 미천하여 후궁들이 좋게 보지 않아 후궁들 사이에서 소란이 종종 발생했다이를 보다 못한 "광해군"은 그녀에게 "후궁 첩지"를 내리려 하였으나, "광해군" 대신들에게 원성을 살까봐 두려워 "승은 상궁"으로 남기를 청했다고 한다그런 마음이 갸륵하다며 "광해군"은 그녀를 더욱 총애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김개시"가 후궁 자리를 마다한 이유는, 후궁이 되면 궐내 출입이 자유롭게 하지 못하게 되니 행동에 제약이 많을테고, 그렇게 되면 궁 안팎 사정을 소상히 파악하여 왕의 소통 창구역할을 하기 어려웠을 거라는 생각에 마다했다고 한다

"광해군"이 그녀를 아낀 것도 여인으로써의 매력보다는 뛰어난 판단 능력과 정치적 감각이었기 때문이라고 알려져 있다.

"광해군"의 왕위 계승을 위해 "광해군" 추종하는 세력과 손잡고, 반대 세력을 숙청하였다.또한 여담이지만, "선조"의 독살 뒤에 그녀가 가담했을 것이라는 이야기도 자자하게 들리고 있는 실정이다

"선조"의 계비인 "인목왕후"와 대립관계였는데, "인목왕후""정명공주"를 회임하였을 때, "도깨비소동"으로 유산을 시키려 했다는 이야기가 "계축일기"에 기록되어 있다"광해군"이 즉위한 후에는 "선조"의 유일 적자인 "영창대군"을 죽음으로 내몰고, 그 어머니인 "인목왕후" 유폐하는데 성공하였다.

3. 이이첨 (李爾瞻1560~162363)

조선 중기 문신(예조판서대제학)외척(광창부원군)의병장(임진왜란 때)대북의 영수ㆍ"허균" 제거인물"임진왜란" 때의 공로로 "선무원종 공신"에 녹훈되었고, "광해군" 때의 정치활동으로는 "정운공신익사공신형난공신" 등에 녹훈되었다.

선조 말기, 왕가의 후사문제로 "북인"이 둘로 나뉘자, "대북"의 영수로 "정인홍" 등과 함께 "광해군" 지지했으며, "영창대군(광해군 이복동생선조 적자인목대비 아들)"을 세자로 옹립하려는 소북의 계획을 저지하였으며, "광해군" 즉위 이후 "류영경소북일파"를 제거하였다 "인목대비의 폐모론"을 주장하여, 폐서인 화하여 "서궁"에 유폐하고, "김제남"을 사사시켰다 "인조반정" 직후, 도피하려다가 "광주의 이보현"에서 반정군에게 잡혀 사형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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