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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물 • 악녀 (10인) • 부덕 (6인)

악녀 ⑧ 희빈 장씨 (경종 모ㆍ1659~1701)

by 당대 제일 2022. 9.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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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빈 장씨 (禧嬪 張氏ㆍ장옥정 (張玉貞)ㆍ1659~1701ㆍ향년 41세)"는 경종(景宗ㆍ20대)의 어머니로, 조선시대 최고의 미모이며,  조선 왕조 역사상, 유일하게 "궁녀 출신"으로 "왕비"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여인이었다.

 

1. 희빈 장씨 (禧嬪 張氏장옥정 (張玉貞)1659~1701향년 41)

조선 최고의 미모숙종(19)의 빈(숙종보다 2년 연상)경종(景宗20)의 어머니ㆍ조선 왕조 역사상, 유일하게 "궁녀 출신"으로 "왕비"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여인

1701(숙종36) "숙빈 최씨"의 발고로 "인현왕후"의 죽음을 기원하는 "저주 굿"을 한 혐의를 받고, "숙종"에게 "자진"을 명받았으나, 끝내 이를 거부하고 사약을 마시고, 사망하였다인현왕후 (숙종의 계비자녀 없음송시열의 외가친척)와 암투 장희빈 사사

그녀의 아들인 "경종"이 사망하고, "숙빈 최씨"의 아들인 "영조"가 즉위하자, "인현왕후"의 오빠 "민진원" 위시한 "노론" "인현왕후"의 폐위와 죽음의 범인이자, "3대 환국(기사환국갑술환국신임사화)"의 원흉으로 정의하여 비난하였다"또한, 이 시기에 집필되어, 민간으로 보급된 "인현왕후전수문록"등의 "언문 소설""야사집"중요 사료로 활용되었다.

1701년 이후 "노론"에 의해 "질투의 화신투기의 화신악의 화신"으로 평가되어 왔으나, 1910(융희 3) 대한제국 멸망 이후, "인현왕후"와의 애증관계의 희생양으로, 현대에 와서는 사료의 다양성과 새로운 시각의 해석으로 "남인""서인"의 권력다툼의 희생양, 또는 "남인"이 밀었던 "비빈"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 조선시대 3대 요부 중 1명 :  장녹수(연산군 9번째 후궁ㆍ1466?~1506ㆍ39세)  / 상궁 김개시 (金介屎ㆍ본명- 김개똥ㆍ광해군때 성은 상궁ㆍ ? ~ 1623)" / 장희빈 (장옥정 (張玉貞)ㆍ숙종 빈ㆍ경종 모ㆍ1659~1701ㆍ41세) 

출 생 : 서울 은평구 불광1331번지 일대

사 망 : 창경궁 취선당(就善堂)

사 인 : 사형 (사약 형)자진

본 명 : 장옥정 (張玉貞)

별 칭 : 장희빈(張禧嬪)대빈궁옥산부대빈(玉山府大嬪)

남 편 : 숙종 (19)

자 녀 : 2- 경종(景宗1688~1724재위 1720~1724)성수(盛壽1690~1690100일전에 급사)

부 모 : - 장형(張炯, 사역원 봉사(8, 역관 출신))- 계실인 파평 윤씨ㆍ역관(驛官) 장현(張炫)의 종질녀

재 위 : 전임(인현왕후)장희빈(인현왕후) : 후궁(숙원1686~1688)후궁(소의1688~1689) 후궁(1689)왕비(1689~1694)후궁(1694~1701)사망

2. 장희빈의 죽음 : 자진이냐? 사사냐?

"노론"의 입장에서 집필된 <수문록인현왕후전>에는 장희빈이 "숙종"에 의해 강제로 "사사"된 것으로 묘사되어 있는 것에 반해, 정사 기록인 <숙종실록ㆍ승정원 일기>에는 "자진"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인현왕후 전" 묘사된 장씨의 최후이다.

"옛 한무제도 무죄한 구익부인을 죽였거니와, 이제 장녀는 오형지참(五刑之斬)을 할 것이요. 죄를 속이지 못할 바로되, 세자의 정리를 생각해서 감소감형하여 신체를 온전히 하여, 한 그릇의 독약을 각별히 신칙하노라." 궁녀를 명하여 보내시며 전교하사"네 대역부도의 죄를 짓고 어찌 사약을 기다리리요 빨리 죽임이 옳거늘 요약한 인물이 행여 살까 하고 안연히 천일(天日)을 보고 있으니 더욱 죽을 죄라 동궁의 낯을 보아 형체를 온전히 하여 죽임이 네게 영화라, 빨리 죽어 요괴로운 자취로 일시도 머무르지 말라." "네 중궁을 모살(謨殺)하고 대역부도함이 천지에 당연하니 반드시 네 머리와 수족을 베어 천하에 효시(梟示)할 것이로되 자식의 낯을 보아, 특은으로 경벌을 쓰거늘 갈수록 태만하여 죄 위에 죄를 짓느냐?"

장씨 눈을 독하게 떠, 천안(天顔, 용안)을 우러러 뵈옵고, 높은 소리로 말하기를"민씨 내게 원망을 끼치어 형벌로 죽었거늘 내게 무슨 죄가 있으며, 전하께서 정치를 아니 밝히시니, 인군의 도리가 아닙니다." 살기가 자못 등등하니 상감께서 진노하사, 두 눈을 치켜뜨시고 소매를 걷으시며, 여성하교하여 이르시기를"천고에 저리 요악한 년이 또 어디 있으리요. 빨리 약을 먹이라."

장씨, 손으로 궁녀를 치고, 몸을 뒤틀며 발악하여 말하기를"세자와 함께 죽이라. 내 무슨 죄가 있느냐?"

상감께서 더욱 노하시어 좌우에게"붙들고 먹이라."하시니, 여러 궁녀 황황히 달려들어 팔을 잡고 허리를 안고 먹이려 하나, 입을 다물고 뿌리치니 상감께서 내려보시고, 더욱 대노하사 분연히 일어나시며"막대로 입을 벌리고 부으라."하시니, 여러 궁녀 숟가락 청으로 입을 벌리는 지라(중략상감께서는 조금도 측은한 마음이 아니 계시고"빨리 먹이라."하여, 연이어 세 그릇을 부으니, 경각에 크게 한 번 소리를 지르고, 섬돌 아래 고꾸라져 유혈이 샘솟듯 하니, (중략상감께서 그 죽음을 보시고 외전으로 나오시며"시체를 궁 밖으로 내라."하시고  (후략)

<조선왕조실록ㆍ승정원 일기>가 공개된 것은 최근의 일이기에, 지금껏 <인현왕후전>등 민간에 널리 보급된 소설과 야사에 묘사된 장희빈의 최후의 모습이 정설로 신봉되어 왔으며, "정사"가 공개된 후에도 죽음의 과정이 정확히 기록되어 있지 않기에 "사사 역시 자진의 한 형태이니, 사사된 것이다"로 절충되어 해석되는 실정이다.

하지만 <숙종실록ㆍ><승정원일기>에는 "사사 설"을 부정하는 기록이 존재한다.

"숙종""승정원"에 명하여, 정식으로 장희빈의 "자진"을 명한 1701년 음력10.08일의 유시(酉時), "판중추부사 서문중우의정 신완이조판서 이여""숙종"을 청대하여, 마지막으로 장희빈의 구명을 청하였고, "숙종" 뜻이 완고하여, "자진의 명"을 번복할 수 없을 깨닫자, 구명을 포기하고 장희빈을 자진시키는 수단에 대해 물었다

이에 "숙종""사약"이외에는 달리 방도가 없다고 답하자, "서문중"들이 말하길"왕세자를 낳고 기른 사친에게 유사(攸司)의 형벌을 쓰는 것은 <주례(周禮)>에서 금한 것"이며, 궁 안에선 "사사"를 할 수 없으니, "사제"로 내보내 사약을 써야 하는데, 이는 유사의 형벌이 되는 것이라 지적하고, "공족(公族)의 사죄(死罪)는 전인(甸人)에게 넘겨 목매어 죽인다."고 간언하였다.

자리에 함께한 모든 대신에게 사실 여부를 확인한 "숙종""자진"을 명한 것은 유사의 형벌을 쓰려고 한 것이 아니었다고 답하였으며, 앞서 "승정원"에 명하여, 장희빈에게 "자진을 명하는 교지"를 적어, 장희빈에게 내리도록 했던 "어명" 역시 "유사의 형벌"이라는 "서문중" 들의 지적에 따라 즉시 회수토록 하고, 대신 다음날 "조보(朝報)""자진의 명"이 있었음을 싣도록 하였다이는 장희빈이 "사사"되었을 가능성이 사실상 희박함을 증명한다.

3. 장희빈ㆍ인현왕후의 대립과 사망

그녀의 일족은 비록 "문신 사대부 가문"은 아니었지만, 조선에서 손꼽히는 "대부호"였으며, 사회적 위치 또한 결코 떨어지지 않았다"조사석"의 도움으로 "대왕대비전"의 궁녀였던 장희빈은 "인조"의 계비이자, "숙종"의 증조모 뻘인 "자의대 조씨"를 웃전으로 모셨고, "자의대"의 각별한 애정을 받았다.

"숙종""초비(初妃) 인경왕후 김씨""천연두"로 요절한 뒤, "숙종"의 총애를 받기 시작한다"경신환국(1680)" 말에 ""에서 강제 출궁이 되었다가, 7년 후인 1686년에 다시 입궁한다"경신환국(1680)" 당시 "장현 일가""복평군 형제"와 절친한 사이여서 보복을 견제한 것이거나, "계비 간택(1681, 계비-인현왕후)"을 위해, 장희빈을 "숙종"의 곁에서 치운 것일 가능성이 있다.

"대왕대비 조씨""숙종"부부에게 과거 대비 "김씨"가 출궁시켰던 그녀의 궁녀 장희빈을 재 입궐시킬 것을 권고하였다고 하기도 하고, 그녀를 그리워하는 "숙종"을 안타깝게 여긴 "인현왕후""숙종"에게 간해 그녀의 "재입궁"을 주선했다고도 하며, 1686.02.27일에 "후궁 간택령"이 있었던 시기에 재 입궁이 이뤄진다.

"인현왕후"는 궁녀 장희빈의 교만함을 훈계하겠다며, 아랫사람에게 장씨를 매질토록 시키기도 하였다"숙종""인현왕후""숙의 김씨"에게서 장희빈을 떨어뜨리기 위해, "중궁전""후궁"의 처소가 있는 "창덕궁"이 아닌 "창경궁"에 비밀리에 인부를 불러, "장희빈"의 처소를 새로 건축하였다"인현왕후"는 직접 "숙종"에게 장희빈을 쫓아낼 것을 종용하기도 하였는데, "숙종"에게 "명성왕후 김씨" 꿈에서 계시를 내리길, 장희빈이 원한을 품고 환생한 짐승의 화신이며, 불순한 무리(남인)의 사주를 받고 입궁했으니 쫓아내야 한다고 발언했던 기록이 <숙종실록>에 실려 있다.

"장희빈 팔자에 본디 아들이 없으니, 노고하셔도 공이 없을 것이다"는 주장도 했는데, 이는 모두 훗날 "인현왕후 민씨""폐서인"이 되어, 폐출되는 이유가 된다"숙종장희빈" "원자(경종)" 탄생하자, "인현왕후" 매우 노여워했다1688"숙종"의 장남 "(, 경종(景宗))을 낳았으나, "서인"의 반응은 싸늘하여, "대왕대비 조씨"의 상()중임을 앞세워, "숙종"의 득남에 "축하연"커녕, "하례인사"조차 드리지 않았다.

또한, "숙종"의 어명을 받고, 장희빈의 산후조리를 도우기 위해, 입궁하는 장희빈의 "생모 윤씨""지평 이익수" 명으로 "사헌부"관원들이 그녀를 가마에서 강제로 끌어내리고, 그녀의 하인들을 눈앞에서 매를 때리고 체포하는 "옥교 사건"이 발생하면서, 장희빈에 대한 "서인"의 공격에 소극적으로 대응하던 "숙종"을 강하게 자극하였다.

"옥교 사건"발발한 지 불과 2개월 후, 1689.01.15일에 "숙종""왕자 윤"에게 "원자 명호"를 내려 "묘사직"에 고했고, "왕자 윤""후궁"소생이라는 사실에 방심하고 있던 "서인""숙종"의 선언에 당황했다.

1689.02.01(숙종15), "인현왕후"의 외가친척이기도 한 "송시열"이 이미 "종묘에 고한 원자 정호를 철회하라"는 비판상소를 올리자, "숙종"은 진노하여 "송시열"을 치죄하라는 명을 내리지만, "서인"으로 이루어진 "승정원"에서 명을 받들지 않았다"숙종"은 분개하여 "삼사승정원 사간원"등 왕의 최측근 요직에 있던 "서인"을 파직하고, "경신환국"때 실권하여 은신 중이었던 "남인"을 조정으로 불러 교체해버린다.

1689.04.23, 중전 "인현왕후 민씨" 생일이었는데, "숙종""대왕대비 조씨"의 국상기간 등을 이유로 "탄일 하례 의식"을 생략하라는 어명을 내렸지만, 국모의 당연한 권한이라는 이유로 어명이 무시되고, "중전 인현왕후 민씨"에게 하례가 올려졌다24일에는 "중전 인현왕후 민씨""숙종"과 크게 말다툼을 하면서, 그녀 자신의 입으로 "진실로 나의 죄이다어찌할 것인가? 폐출시키려거든 폐출시키라."는 과격한 언사들을 입에 담는다. "숙종"이 분노하여, "인현왕후""폐서인"하고 싶다는 의사를 피력한다.

25일 밤, "오두인박태보""서인"86인이 상소를 올려, 전날 "국모"의 위엄을 훼손한 "숙종"의 발언을 맹렬히 비판하며, "중전 민씨"의 명예를 회복할 것을 요구했고, "숙종"은 이 상소에 극노한다"서인" 86인을 친국하였고, "인현왕후"의 친오빠 "민진원 형제"에게도 국문을 내렸다이에 "서인"이 정계에서 완전히 축출되고, "남인"이 정계를 독점하게 되는 "기사환국"이 발발했다.

05.02, "숙종"은 당시 "사대부"여성으로선 입에 담을 수 없는 발언을 했던, "중전 인현왕후 민씨"의 언사를 낱낱이 폭로하여 공개적으로 망신을 시킨 후, "폐서인"하여 강제로 출궁시켰다"인현왕후"가 폐출된 후, "숙종"은 새로운 "계비"를 간택하지 않고, "원자"의 생모인 장희빈을 왕비로 삼을 것을 선포하였고, 05.13, 장희빈의 "왕비 명호"가 정해졌다이는 "후궁 소생""원자""왕비 소생의 정통성"을 얻게 되는 사건임과 동시에, "중인"출신이자 "궁녀" 출신인 "후궁이 국모의 위"에 오르는 조선 역사상 최초의 사건이었다.

1690.06.16, "원자 윤""왕세자"로 책봉되었다1690.07.19, "중전 장희빈""숙종""차자(次子)"이자 첫 "대군(大君)""성수(盛壽)"를 출산하였다"대군 성수(盛壽)"는 탄생한지 100일이 되지 않은 09.16일에 돌연 급사하였다둘째 왕자가 사망한 다음 달인 1690.10.22일에 "책봉식", 올려 정식으로 "왕비"가 되었다.

1694(숙종20), "서인""김춘택한중혁"등이 "폐비 복위운동"을 꾀하다가 고발되었다이때에 "남인"의 영수이자, 우상(右相)으로 있던 "민암(閔黯)"등이 이 기회에 반대당 "서인"을 완전히 제거하려고, "김춘택"등 수십 명을 하옥하고, 범위를 넓히어 일대 "옥사"를 일으켰다이때 "숙종"은 갑자기 마음을 바꾸어, 옥을 다스리던 "민암"을 파직하고 사사하였으며, "권대운목내선김덕원"등을 유배하고, "소론 남구만박세채윤지완"등을 등용하고, "중전 장씨""희빈 장씨"로 강등시켰는데, 이를 불러 "갑술환국"이라 한다"민진원"은 저서인 <단암만록>"숙빈 최씨""봉보 부인"을 통해, "김춘택"과 전략을 나누어, 거사를 이룩하는데, 큰 공헌을 세웠다고 기록했다

"갑술환국"이 발발 12일 째인 된 1694.04.11, "숙종"은 돌연 "장희재"를 긴급구속하고, 훗날 길일을 잡아 "서궁(덕수궁)"으로 입처 할 "폐비 민씨(인현왕후)""서궁 입처"를 길일과 상관없이 당장 다음날로 할 것을 명하며, "폐비 민씨(인현왕후)"의 사가에 "수직(호위)"를 붙였다"인현왕후"의 복위가 확정된 후, "장희재""갑술환국" 발발 직전에 "유생 김인"이 고발했던 "숙빈 최씨" 독살 사주 혐의로 국문된다.

04.12, "폐비 민씨(인현왕후)""서궁(덕수궁)"으로 입처했다는 소식이 전달되자, "민씨가 스스로 죄를 간절히 뉘우치고 있으며, 두 자전(慈殿, 장렬왕후와 명성왕후)3년상을 함께 보낸 아내이니, 쫓아냈던 것은 지나친 처사였다.""민씨(인현왕후)""중전"으로 복위시키고, "중전 장씨""왕후새수(王后璽綬)"를 거둬, "희빈(禧嬪)"의 옛 작호를 돌리고, 거처를 옛 처소인 "창경궁 취선당"으로 옮기라는 "비망기"를 내린다.

이에 대해 환국을 위해 투합했던 "노론""소론"이 강경히 대립하게 되는데, 이는 "노론""인현왕후" 복위를 목적했고, "소론""희빈 장씨""왕비"로 둔 채, "인현왕후""폐서인"인 상태로 "별궁"에 모셔 편안한 여생을 맞기만을 목적했던 탓이다이로 인해 장희빈의 부모인 "장형""윤씨고씨""부원군부부인"의 작호가 취소되었으며, 장희빈 역시 강봉되어, "취선당"으로 거처를 옮기게 되었으며, 그녀의 "왕비 옥보"는 관례대로 부수어져, "승정원" 묻혀졌다

이 사건을 계기로 "소론""장희빈", "노론""인현왕후"를 지지하는 세력이 되었는데, "소론"영수인 "남구"만은 중립을 지켰다1701년 음력 08.14, 오랜 지병을 앓던 "인현왕후 민씨"가 사망하였고, 조정 한편에선 "장희빈" 다시 왕비로 복위시키는 움직임이 전개되었다.

이는 당연한 수순이었지만, "노론""숙빈 최씨"에게 치명적인 상황이었으며, "숙종"에게도 좋지 않은 상황이었다.  1701.09, "인현왕후"와 함께 "노론"에 있던 "숙종"의 후궁 "숙빈 최씨""숙종"에게 장희빈이 "취선당" 서쪽에 "신당(神堂)"을 설치하고, "인현왕후"를 저주했다고 발고하였고, "인현왕후"는 병이 아닌 장희빈 의 저주에 의해 시해당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또한 "인현왕후"의 동복 오라비인 "민진후 형제""인현왕후"가 생전 "지금 나의 병 증세가 지극히 이상한데, 사람들이 모두 "반드시 빌미가 있다"고 한다", 그들에게 말한 바가 있었음을 "숙종"에게 발고했다.

"빌미"란 장희빈의 "저주"로 병에 걸렸다는 뜻이었다실제로 장희빈은 처소인 "취선당" 한편에 "신당"을 지었고, 굿을 하였다하지만 장희빈의 측근은 1699"세자 윤""두창"에 걸리자, 쾌유를 기원하기 위함이었다고 주장했다.

"신당"의 존재가 1699년부터 존재하였다면, "숙빈 최씨"를 비롯한 "궁인"전원은 물론 "숙종" 또한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며, 그러나 장희빈이 "신당"을 차려 "저주 굿"을 하였다는 의혹은 현재까지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숙종"은 먼저 "제주유배"중인 "장희재"에게 처형의 명을 내리고, 장희빈에게 "자진"을 명하는 "비망기"를 내린다이에 조정대신들이 반대하였으나, 이미 장희빈을 죽일 결심을 한 "숙종"의 뜻은 단호하였다.

"영의정 최석정""소론""장희빈에게 죄가 있다고 치더라도, 세자의 어미이니, 처우에 관대하게 하자"주장하였으나, 이 역시 기각되었다1701.10.07, "숙종""빈어(嬪御, 임금의 첩)"에서 "후비(后妃, 임금의 정실)"로 승격되는 일을 금지하는 법을 만들었고, 다음날 10.08일에 "승정원"을 통해 공식적으로 장희빈에게 "자진의 명"을 내렸다10.10, "숙종"은 장희빈이 이미 자진하였음을 공표하였다. 향년 41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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