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정왕후 (文定王后 尹氏ㆍ1501~1565ㆍ63세)"능은 "태릉(泰陵ㆍ서울 노원구 공릉동)"이다. 동생인 "윤원형"에게 정권을 쥐게 하여 "윤원형"의 권력 남용을 방치하였고, 인종의 외척이자, 친척 외척인 "윤임"을 "을사사화"를 일으켜 죽이고, "윤원로"를 귀양보내기도 했다. 불교를 장려하고, "승려 보우"를 총애하여, 병조판서 직을 제수하였다.
1. 문정왕후 윤씨 (文定王后 尹氏ㆍ1501~ 1565ㆍ향년 63세)
조선 중종(中宗)의 제2계비ㆍ명종(明宗)의 어머니ㆍ명종의 섭정 (8년간)ㆍ"불교"를 장려하고, "윤원형"의 권력 남용을 방치하여, "사림파" 성리학자들로부터 악녀의 대명사로 낙인찍혀 후대에 이르러 까지 악녀의 대명사 중 한사람으로 비판받았다. 사람들은 "문정왕후"의 사망 소식을 듣고 "불여우 같은 년ㆍ독한 년ㆍ더러운 년"하면서 환호하였다.
대윤(大尹) "윤임ㆍ윤원로" 살해의 배후라는 의혹이 있다ㆍ"문정왕후"는 "장경왕후"의 오빠로 족숙인 "윤임"을 모함하여 죽이고, 다시 사촌 "윤춘년"을 시켜서 자신의 친형 "윤원로"를 죽인 "윤원형"의 누이이기도 했다.
또한 "윤원형"은 애첩 "정난정"을 끌어들여 "정경부인" 자리에 올리고, 조강지처 "김씨"를 독살한 인물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골육상쟁"의 배후에 "문정왕후"가 있었다는 것이다. 마지막에는 "윤원형ㆍ정난정"은 "강음현"에서 자결하게 된다.
• 묘 소 : 태릉 (泰陵)ㆍ선정릉 (宣靖陵 : 선릉- 성종ㆍ계비 정현왕후 / 정릉 - 중종) • 본 가 : 파평 윤씨
• 오 빠 : 윤원개ㆍ윤원량ㆍ윤원필 (소윤(小尹))
• 동 생 : 윤원로ㆍ윤원형 (1509?~1566ㆍ2째 부인 정난정 (천민 출신) )
• 시 부 : 성종 (成宗ㆍ 9대ㆍ재위 1469~1494ㆍ1457~1494ㆍ향년 36세)
• 남 편 : 중종 (中宗ㆍ11대ㆍ재위 1506~1544ㆍ1488~1544ㆍ향년 55세)
• 중종 장남 : 인종 (仁宗ㆍ12대ㆍ재위 1544~1545 (9개월 재위)ㆍ1515~1545ㆍ향년 30세) 태어나자마자 어머니 "장경왕후 윤씨"를 여의었다. 5살에 세자로 책봉되었고, 형제간의 우애가 두터웠으며, 중종이 병이 들자 침식을 잊고 간병에 정성을 다했으나 병을 얻었다. 1543년부터 대리청정을 하였고, 병으로 인하여 정사를 제대로 살피지는 못했다.
• 장 남 : 명종 (明宗, 13대, 재위 1545~1567, 1534~1567, 향년 32세) ㆍ경원대군 (왕비에 오른 지 17년만)
그녀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기억력이 남달랐는데, "천성이 강한(剛狠)하고, 문자(文字)를 알았다."고 한다. 1515년(중종10) "장경왕후(중종의 계비)"가 승하하여, 1517년(중종12)에 왕비로 간택, 책봉되었다. 1544년 "대비"가 되고, 1545년 장남 "경원대군"이 12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섭정"이 되어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였으며, 국왕의 고유 권한인 인사문제에 까지 개입하였다.
명종(明宗)이 12세로 즉위한 1545년부터 1553년까지 8년간 "수렴청정"으로 섭정하였다. "수렴청정" 기간 중 자신의 친정 남동생인 "윤원로ㆍ윤원형", 친정 사촌인 "윤춘년" 등을 기용하였으며, "불교 중흥책"을 펼쳐 "보우"를 중용, "선교양종"과 "승과"를 부활시켰다. 독실한 불교 신자인 그녀는 "승과"를 부활시키고, "승려 보우"를 가까이 하는 등, 불교에 대해 우호적인 정책을 실시했다. 1550년 "봉은사"에 "선종"을 두고, "봉선사(奉先寺)"에 "교종"을 두게 하여, "선ㆍ교 양종"을 부활시켰다.
한편 "윤원형(尹元衡)ㆍ상진(尙震)"과 더불어 300여 사찰을 국가공인 "정찰(淨刹)"로 하고, "도첩제(度牒制)"에 따라 2년 동안 4,000여 명의 승려를 뽑는 한편, "승과시(僧科試)"를 부활시켜 "휴정(休靜)ㆍ유정(惟政)" 등을 발탁했다. 동생인 "윤원형"에게 정권을 쥐게 하고, "인종"의 외척이자 자신의 친척이기도 한 외척 "윤임 일파"를 제거하기 위해, "을사사화"를 일으켜 "윤임"을 죽이고, 나중에는 "윤원로"를 귀양 보내기도 했다.
"승려 보우"를 총애하여, "병조판서 직"을 제수하는 바람에 대신들의 불만을 사기도 했다. 또한 남동생 "윤원형"의 첩이지만, 같은 불교 신자이기도 했던 "정난정"을 아꼈다. 하지만 이는 성리학자들의 강한 반발을 초래하게 되었고, 사후 그녀에 대한 악평의 원인 중의 하나가 된다. 문정왕후가 죽고 난 뒤, 불교는 "보우"가 "요승"으로 몰려 귀양 갔다가 살해당하는 등 다시 탄압받게 된다.
2. 평가ㆍ비판
궁중에 들어와서, 온갖 못된 음모를 꾸미고, "피의 숙청"을 서슴없이 자행한 조선조 최악의 여인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무속 신앙에도 깊은 관심을 보였고, "보우"라는 승려를 가까이 하여 불교를 크게 일으켰으나, 내세에 대한 두려움 따위는 전혀 없는 냉혈 인간이었으며, 모질고 독살스럽다는 비판도 있다.
"때로는 어진 어머니요 착한 아내처럼 행동하면서, 실제로는 악한 짓을 저질렀고, 나라를 위한 성의의 일단으로 불자가 되었다면서 결국은 불자의 이름을 더럽혔던 두 얼굴을 가진 여인임에 분명하다."는 혹평도 있다.
그녀의 지나친 "집권욕"은 결국 "명종" 때에 혼란을 가중시키는 원인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아무런 명분도 없이 단지 개인적인 감정을 앞세우고, 자신들의 권세를 유지하기 위하여, 형제를 사주하여 또 다른 형제를 죽였다는 비판도 있다.
흔히 의붓아들인 "인종"을 독살한 의혹의 배후인 "표독스러운 악후(惡后)"라는 평가와 조선 왕조 역사상 가장 "영민한 왕비"로 숭유억불 사회에서 불교가 유교 전통에 어긋나는 이단이지만, 조선왕실의 조상 때부터 믿어온 전통종교이므로, 존중해야 한다는 논리로 보호하였으며, 정치적 파란과 대신들과의 갈등에도 "중궁"의 자리를 굳세게 지킨 여걸이란 평가의 갈림길에 놓여 있다.
정치에 끼어든 여성이라는 부정적인 평가를 받아서, "숙종" 때 "숙종"의 어머니인 "명성왕후 김씨"가 무고죄로 처벌받게 된 오빠들을 변호하자, "남인"들이 "문정왕후"를 다시 보겠다면서 비아냥거리기도 했다.
그렇지만 "문정왕후"의 역사적 기록이 안 좋은 이유는 조선시대 같은 경우, "남성우월주의"사회였던 시절이라 여성이 정치에 나서는 것 자체를 용납할 수 없던 시절이었다. "문정왕후"의 정치적인 간섭부터, "사대부"들은 그녀를 곱게 보지 않았다. 그리고 조선은 "유교"를 국교로 숭상하던 국가였는데, 이를 무시하고 "불교"를 부흥시킨 인물로 "승려 보우"와 함께 불교를 중흥시킨 인물이기도 하다.
유교적 시각으로 보면, "문정왕후"와 "승려 보우"는 지탄과 문제의 대상이었지만, 불교계의 입장에서는 그들은 불교가 위축되던 조선 시절, 불교를 부활하고 중흥한 위대한 인물이기도 하다. 실제로 불교계에서 "승려 보우"는 현재까지도 위인으로 추앙받고 있다.
"문정왕후"의 불교 부활에는 여러 의미가 있었다. 그녀는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불교의 이념을 받아들여, "적서"를 차별하지 않아, 종친들에게도 관대했으며, "중중"이 죽고 3년 상이 지난 후, 후궁들이 출궁할 때에도 만류하여 궁궐에 살게 배려해주었다. "역모"에 연루되어 스스로 나간 "희빈 홍씨"와 "작서의 변"사건에 연루된 "경빈 박씨"를 제외한 모든 "중종"의 후궁들을 "중종"사후에도 모두 "궐"에 남아 살게 되었는데, "중종"의 후궁 중에서 장수한 후궁으로는 "중종"의 선원계보에 없는 "귀인 한씨"이다. 그녀는 "선조" 때까지 궁궐에서 살다가 죽는다.
"인간은 평등하다"는 불교이념을 받아들였던 "문정왕후"는 첩실인 "정난정"을 천한 신분이라고 무시하지 않고 아꼈으며, 그녀의 동생 "윤원형"도 "문정왕후"의 영향을 받아, 신분을 차별하지 않았고, "정난정"은 자신을 차별하지 않은 이들을 위해 충복이 되었다고 한다.
더 나아가 "문정왕후"는 "윤원형"에게 명하여, "서얼허통법"을 시행하기에 이른다. "서얼허통법"이란 "서출"도 과거에 응시할 수 있게 하는 제도인데, 당시 "사대부" 입장에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제도였다. 결국 "문정왕후"의 지원을 등에 업은 "윤원형"은 "명종" 8년10월 "좌찬성 윤원형"이 "영의정 심연원ㆍ좌의정 상진ㆍ우의정 윤개" 등과 함께 "서얼허통"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리게 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인재의 우열은 타고난 기질의 순수함과 그렇지 않음에 좌우되는 것이지 출생의 귀천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만일 재질이 뛰어난 사람이 첩의 몸에서 났는데, 서얼이라고 해서 등용하지 않는다면 어찌 왕자(王者)가 인재를 취함에 귀천을 가리지 않는 도라고 하겠습니까." "서얼(서출)"들도 과거를 볼 수 있게 하자는 과감한 주장이었는데, 이에 대해 "이조판서 안현(安玹)" 등은 반대를 했다. 그러나 "윤원형"은 다른 벼슬아치들과 합세하여, 결국 "서얼허통법"을 통과시켰다.
"서얼허통법"은 "인간은 평등하다"는 불교의 이념을 그대로 담고 있었고, 독실한 불교 신자였던 "문정왕후"의 지지를 받아, 통과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서얼허통법"이 통과되자, 전국 각지에서 억울한 일을 당한 노비들이 "윤원형"의 저택으로 몰려들었으며, 이를 "명종실록"에서는 "(주인에게) 죄를 지은 노복(奴僕)들이 서로 이끌고 모여들어, 그 수가 대단히 많다."고 기록되어 있다.
3. 인종의 사망한 원인에 대해 여러가지 설이 있다.
보통은 "인종"이 병약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인종"은 부왕(父王) "중종"이 죽자, 빈전에 조야로 상식(上食)을 올리고 곡을 하였다. 효심이 깊고 병약한 "인종"은 이 과정에서 병을 얻어, 1545년 30세의 나이로 승하하고 말았다.
"작서의 변"이나, "인종"이 갑자기 죽은 것 모두를 "문정왕후ㆍ정난정"의 흉계로 그리고 있다. 야사 속에서 그녀와 세력들은 밤낮없이 "인종"이 죽기를 기원하고, "동궁"에 불까지 지른다.
4. 수렴청정 기간
명분이나 이념보다는 오직 자신들의 정치적 생존을 위해 다른 정치세력들을 제거하는 것이 더 중요했던 이 시기, 현실정치에 염증을 느낀 많은 사림(士林)들이 시골로 내려가 서원을 세우고, 후학을 기르게 된다. 이것은 "조선조 성리학"의 발달로 이어졌다. "이황(李滉)ㆍ조식(曺植)"같은 뛰어한 성리학의 대가들도 이 시기에 태어났다.
5. 불교의 지지와 조식의 항명
"봉은사"에 "보우(普雨)"를 주지(住持)로 두고, 왕실에서의 불교 부흥을 위해 많은 작업을 했다. 여론을 무시한 채, 불교의 중흥을 위해서 파격적으로 "보우"를 등용했다. 그녀는 "보우"에게 벼슬을 주었으며, 자유롭게 궁궐을 출입하는 하는 것을 허락했다. 이는 엄청난 비판을 받았다. 특히 유생들의 극한 반대를 불러왔다.
유생들은 절을 부수고 승려를 폭행하며 "보우"를 참형(斬刑)에 처하라고 상소를 올렸다. "보우"를 탄핵하는 상소가 6개월 간 400여 건이나 쏟아져 들어왔다고 한다. 하지만 그녀는 어떤 비판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보우"도 "지금 내가 없으면 후세에 불법(佛法)이 사라진다."고 하면서 유학자들의 저항에 맞섰다.
그녀의 전횡에 가장 강경하게 비판의 글을 올린 사람은 "남명 조식"이다. "조식"은 "자전(문정왕후)은 과부, 명종은 고아"라는 직설적 표현으로 문정왕후의 치맛바람을 비난하면서, 당시를 "큰 나무에 100년 동안 벌레가 속을 먹어 진액이 다 빠진 형국"에 비유했다. 성균관 유생들을 비롯한 양심세력은 수업거부와 동맹휴학으로 집권층의 정책에 저항했다.
그녀의 불교지원, 나아가 "보우"와 그녀의 관계에 대해 나름의 판단을 갖기 위해서는 조선조의 종교적 배경에 대해 알 필요가 있다. 그녀의 정치적 견제세력이었으며, 그녀가 죽고 난 다음 조선조 정치를 장악한 사림들은 기본적으로 유교의 이상을 숭배하는 유학자들이다. 그들은 유교를 최고의 정치적 이념으로 삼아 조선조 정치를 장악했다.
이런 "사림"에 맞섰던 그녀는 "유교" 대신 "불교"를 통해 그녀의 권력을 위한 종교적 지지기반을 마련하려고 했을 것이라고 추정해볼 수 있다. 이런 점을 고려해보면, 그녀의 "불교 지지"는 "유교적" 정치세력인 "사림"에 대한 견제의 의미를 담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6. 보우와 문정왕후는 정말 사랑했을까?
• 문정왕후 윤씨 : 文定王后 尹氏ㆍ1501~ 1565ㆍ향년 63세
• 보우 : 普雨ㆍ1515~ 1565ㆍ향년 50세ㆍ명종 때 승려ㆍ문정왕후와 14살 차이
"보우 대사"가 "문정왕후"의 신임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재상이었던 "정만종"과의 특별한 친분 때문이었다. 그는 그녀의 전폭적 지지로 1548.12월 "봉은사(奉恩寺) 주지"가 되었고, 당시 급격히 쇠퇴해가던 불교를 부흥시키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불교의 중흥을 꾀하는 한편 유생을 견제하였다. 유생들의 횡포를 막기 위해 "봉은사ㆍ봉선사(奉先寺)"에 방(榜)을 붙여 잡된 사람들의 출입을 금지시켰다. 그리고 불교를 부활하기로 한 "문정왕후"는 "승려 보우"를 등용하여, 지금까지 "배불정책"에 의해 사라진 "선교 양종"을 복원하였다. 그리고 철폐된 "승과"를 부활시켰는데, 이때가 1550.12월(명종5)이었다.
이어 1551년(명종6)에는 "봉은사"를 "선종"의 본사로 삼고, "보우"를 "판선종사도대선사 겸 봉은사 주지"로 임명하였다. 그리고 "봉선사"를 "교종"의 본사로 삼고, "수진"을 "판교종사도대사 겸 봉선사 주지"로 임명한다. 이런 일련의 정책에 이어 부활된 "승과"가 실시되었다. 그리고 1551.11월(명종6) "도승"을 위한 "송경시험"을 치루고, 1551년(명종7) "양종"의 "승선"고시인 "승과"가 실시되었는데, 부활된 "승과"에서 선종 합격자 21명, 교종 합격자 12명이 배출되었다.
이와 같은 "불교 중흥책"의 결과, "교단"이 활기를 띠게 되고 유능한 인물이 모여들게 되는데, "선불교" 중흥의 큰 인물인 "서산대사 유정"도 이때의 승과를 통해 배출되어, 뒤에 "손교양종판사"를 역임하였고, "사명당 유정"도 그 후의 "승과"에 등용되었다. 이 당시 부활된 "승과"를 통해 배출된 인물들은 뒤에 일어나는 "임진왜란"의 극복에 많은 공을 세우게 된다.
이렇게 "문정왕후"의 업적들이 가려진 이유는 그녀가 유발한 정책들이 객관적으로 봤을 때는 훌륭한 정책임에도 불구하고, "사대부(양반)"들 입장에서는 반발을 유발하는 정책들이었기 때문에, 그녀의 악평은 "사대부"들의 관점에서 적혀진 "악평"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 보우 : 普雨ㆍ1515~ 1565ㆍ향년 50세ㆍ명종 때 승려ㆍ문정왕후와 14살 차이
"불교" 측에서 보면, 그는 말살의 위기에 처한 불교를 재건하고자 애썼던 "선사"이고, 끝내 목숨을 바친 "순교 승"이지만, 조선조 정치적 주도권을 잡았던 "유교 사림"의 입장에서 보면 그는 권력을 등에 업고 설쳐댄 "요승"이 된다. 1530년 "금강산 마하연암"에 들어가 수도하다가, 불심이 깊은 "문정왕후"의 신임을 얻어 1548년 "봉은사(奉恩寺) 주지"가 되었다.
그 후 선종ㆍ교종을 부활시키고, "문정왕후"가 섭정할 때에 그는 "봉은사"를 "선종(禪宗)의 본산(本山)"으로 삼았으며, "봉선사(奉先寺)를 교종(敎宗)의 본산"으로 삼았다. 이와 더불어, 승과를 부활시키고 도첩제를 다시 실시하게 하는 등, 숭유억불 정책으로 탄압받던 불교의 부흥에 노력하였다.
1551년, "선종 판사(禪宗判事)"가 되어, 권신 "윤원형ㆍ상진" 등의 도움으로 300여 개의 사찰을 나라의 공인(公認) 정찰(淨刹)로 만들었으며, "도첩제(度牒制)"에 따라, 2년 동안 승려 4,000여 명을 선발하여 자격을 인정해주었다. 그러나 "문정왕후"의 죽음으로 일시적인 부흥에 그치고 종막을 고하였다. 그러다 1565.04월(명종 20년) "문정왕후"가 죽었다. 대비의 장례를 마치자마자 유생들은 "보우"를 유배 보낼 것과 다시 불교를 탄압할 것을 주장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보우"는 삭탈관직 당했고, "명종"은 "보우"를 제주도로 귀양 보낼 것을 허락하였으며, "제주목사 변협"은 유배되어있던 "보우"를 "장살(杖殺, 때려죽임)"하였다. 그리고 "불교"는 다시 배척당하게 되고, "사림(士林)"의 나라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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