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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물 • 악녀 (10인) • 부덕 (6인)

악녀 ④ 장녹수 (연산군 후궁ㆍ10살 연상ㆍ1466?~1506)

by 당대 제일 2022. 9.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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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 (燕山君ㆍ1476~ 1506ㆍ재위 1494~1506(12년)ㆍ향년 29세)"이 사랑을 기울인 3명의 여인은 "장녹수 (張綠水ㆍ1466경? ~ 1506ㆍ향년 39세) ㆍ최전향 (崔田香ㆍ궁녀)ㆍ수근비 (水斤非ㆍ노비)"였다.

 

1. 장녹수 (張綠水1466? ~ 1506향년 39) 연산군보다 10살 위의 유부녀 (아들 1)

"연산군"의 후궁(9번째 여자)ㆍ기생/ 창기 출신으로 "후궁"에까지 오른 여인ㆍ더구나 아들을 둔 몸으로 "숙용"에, 아니 "후궁"의 지위에 오른 여자는 조선을 통틀어서 "장녹수" 뿐이다. 천하의 "요부(妖婦")로 "교사(嬌邪)"와 요사스러운 "아양"은 견줄 사람이 없었고, 거만하였다ㆍ"제안대군(예종의 2째 아들)"의 노비(어머니는 천민 출신의 첩)로 천인(賤人) 출신

"천비 출신 기생"으로, 어릴 적부터, 몸을 팔아 생계를 연명하며, 여러 남자를 전전하였다. 비록 얼굴은 보통을 넘지 못했으나,  30살이 넘어서도 나이에 비해 매우 앳된 동안(童顔)으로, 피부ㆍ몸매가 16살 처녀같이 고았다고 하며, 특히 목소리가 고와 노래에 타고난 재능이 있었고, 가무(歌舞)를 비롯한 다방면의 예술분야에 천재적인 재능을 겸비하였다고 한다. 성품이 영리하여 사람의 뜻을 잘 맞추었고, 특히 노래에 타고난 재능이 있었다.

※ 조선시대 3대 요부 중 1명 :  장녹수(연산군 9번째 후궁ㆍ1466?~1506ㆍ39세)  / 상궁 김개시 (金介屎ㆍ본명- 김개똥ㆍ광해군때 성은 상궁ㆍ ? ~ 1623)" / 장희빈 (장옥정 (張玉貞)ㆍ숙종 빈ㆍ경종 모ㆍ1659~1701ㆍ41세) 

: 참형 (斬刑"중종반정" 직후, "군기시(軍器寺)" 앞에서 참수)

남 편 : 연산군 1502년경에 만남 (1502~ 1506(25)- 장녹수 (35) )

자 녀 : 아들 (가노(家奴) 아들)(연산군 딸)

부 모 : 장한필 (충청도 문의현령 (文義縣令))- (천민 출신) → 몸팔아 생계유지 "제안대군 (예종의 2째 아들)"의 가노 (家奴) 노래ㆍ춤 공부→ 기생

그녀가 "제안대군(齊安大君예종(8대왕) 2째 아들)"의 노비와 결혼하고, "제안대군"의 여종이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친도 "제안대군"의 종이 아니었나 싶다어린 시절, 매우 곤궁하게 지냈는데, 가난하고 신분도 천한 여인이라 몸을 팔아서 생활하였고, 혼도 여러 번 하였다. 가난에서 벗어나려고, 여러 남자들에게 몸을 의탁하였고, 자식까지 두었다.

그러던 중, "제안대군의 가노(家奴)"와 혼인을 하여 "제안대군의 여종"으로 살다가, 아들 하나를 낳았는데, 가정도 힘들었는지 다시 생활전선에 나서게 된다. 그러나 이번에는 바닥에서 몸을 파는 수준에서 벗어나 노래춤을 배워 정식으로 기녀(妓女)생활을 하였다.

1502(연산군 83), "조선실록"에 처음으로 "장녹수"가 등장하는데, "연산군""승지"에게 그녀의 부친 "장한필(張漢弼)"의 내력을 조사시켰다는 기록인데, 이 해부터 장녹수에게 빠졌다는 기록도 있는 것으로 보아, 대략 이때 쯤 "연산군장녹수"가 만났던 것 같다 그녀와 하룻밤을 지낸 "연산군"은 완전히 녹수의 포로가 되었다.

"연산군""장녹수"를 가장 총애하였는데, "연산군"의 파멸은 "장녹수"로 인해 더욱 빨라졌다 "장녹수"의 최후는 비참하였다 "중종반정"이 성공하고 "연산군"이 폐위된 후, 반정군들에게 붙잡혀 "군기시(軍器寺)" 앞에서 참형(斬刑)되었는데, 수많은 사람들이 참수당한 그녀의 시체에 돌을 던지며, 욕설을 퍼부었다.

2. 인 물

천하의 "요부(妖婦)""교사(嬌邪)"와 요사스러운 "아양"은 견줄 사람이 없었고, 거만하였다창기(娼妓)춤과 노래 실력은 탁월했다고 하는데, 특히 노래를 아주 잘하여 입술을 움직이지 않고도 맑고 고운 목소리를 냈다고 한다.  시집을 갔었고, 아이까지 있는 상태에서 연산군이 만든 기생단체인 "흥청"에 소속된 기생이었다.

흥청 (興淸): 1504(연산군10)에 왕명으로 모집한 기녀(妓女)조선8도에 "채홍사(採紅使)채청사(採靑使)"를 파견, 제일 우수한 자들을 "흥청"이라고 하였고, 왕이 인정한 이는 "천과흥청"

3. "장녹수장희빈"의 차이점

"장녹수장희빈" 중에서 누가 더 권력의 중심에서 조정을 좌우하였을까? 아마 "장녹수"일 것이다.

장녹수는 "혼군(渾君)""연산군"을 이용, "임사홍"과 결탁하여, "사화(史禍)"를 일으키고, "인수대비" 결국 죽음으로 이끌었던 당시 최고의 실권자이었다다만 "장녹수"가 그렇게 정권을 뒤흔들 수 있었던 것은 궁전의 큰 어른이자, 한 시대를 풍미했던 여걸(女傑) "인수대비"를 죽음으로 몰아간 것도, 모두 "연산군"이 폭군이자 광인이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그에 비해 "장희빈""숙종(淑宗)"을 통해 신분을 초월하고, 왕비의 자리에 올라갔지만, "장녹수"와는 달리 도리어 막판에는 "숙종"에게 이용(利用) 당하는 모습이 되어버렸다"장희빈""남인의 거두"를 자처하며 정권에 큰 영향력을 미치기는 했지만, 훗날 날이 갈수록 "숙종"에게 역이용 당해, 환국(換局)의 구실로 가차없이 버려졌다.

다만 "장희빈" 역시 "요화(妖花)"인지라 "숙종"의 총애가 하늘을 찌를 때의 그 부귀와 영화는 "장녹수" 비할 바가 아니었다게다가 "장녹수"가 그저 "연산군의 애첩(愛妾)"이었다면, "장희빈"은 한 나라의 국모(國母), 국왕의 지어미요, 훗날 임금의 어머니로써 위세 또한 누려 보았으니, 궁궐에서의 위세가 권력에 비례한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4. "연산군"의 뚜쟁이

장녹수는 "연산군"의 환심을 얻기 위하여, "뚜쟁이 역할"도 서슴치 않았으니, 중종 원년(1506)09.02일의 실록이 이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대궐 안에서의 연회에 사대부 아내로 참여하는 자는 모두 그 남편의 성명을 써서 옷깃에 붙이게 하고, 미모가 뛰어난 이는 장녹수를 시켜, 머리단장이 잘 안 되었다고 핑계대고, 그윽한 방에 끌어들여 간통하였는데, 혹 하루를 지난 뒤에 나오기도 하고, 혹은 다시 불러 궁()에 유숙하는 일도 자주 있었다. 월산대군의 부인은 세자의 양모(養母)라는 핑계로 항상 궁에 머물게 하였고, 성종의 후궁 남씨도 대비(大妃) 가까운 곳에 있으면서, 총애를 입어 추한 소문이 바깥까지 퍼졌다."

1505(연산군11) 04.12"실록"은 연산군과 장녹수의 결탁에 의한 "음행(淫行)"으로 4~5일이 되도록 궁중에 유숙(留宿)한 사람의 명단을 다음과 같이 기록해 놓았다"왕의 음탕이 날로 심해, 족친(族親)과 선왕(先王)의 후궁을 모아, 왕이 친히 잔을 들어서 마시게 하였다.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으면, 장녹수와 궁인을 시켜, 누구의 아내인지 비밀히 알아보게 하여 외워두었다가 궁중에 묵게 하여, 밤에 강제로 간음(姦淫)하며, 낮에도 그리하였다.

4~ 5일이 되도록 나가지 못한 사람으로는 "좌의정 박승질의 아내남천군 이쟁의 아내변성의 아내총곡수의 아내권인손의 아내승지 유순의 아내생원 권필의 아내중추 홍백경의 아내 같은 이들이 있었다. 홍백경은 왕에게 고종 사촌형이 되는데, 홍백경이 죽고 부인이 과부로 살자, 왕이 그의 아름다움을 듣고 드디어 간통하였다."

5. 연산군장녹수의 관계

유일무이하게 "연산군"을 잘 다룰 줄 아는 여인으로, "연산군"을 젖먹이 어린애 다루듯 하였다"연산군"의 아명(兒名)"백돌"인데, 녹수는 연산군을 "전하"라고 부르는 대신, "백돌아"라고 부르고 다녔으며, "연산군""후궁"이 함부로 자신의 "아명(兒名)"을 부르는 것도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장녹수는 "연산군"을 조롱하기를 마치 어린아이 같이 하였고, 욕하기를 마치 노예처럼 하였다"연산군"이 비록 격노하였더라도, 그녀를 보면 즉시 희색을 띨 정도였다"연산군"은 그녀를 무척 총애하여, 모든 상벌이 "장녹수"의 입에서 이루어졌다.

그토록 가까울 수 있었던 이유는 "얼굴"이나 "나이"를 초월한 예술적 교감이 가능하였기 때문이다춤과 노래에 뛰어난 장녹수와 그러한 예술(藝術)을 이해했던 왕이었던 것이다또 하나는 누나와 남동생 같은 친근감이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어려서 아버지 없이 자란 "장녹수"와 어머니 없이 자란 "연산군"은 본능적으로 "부성애모성애"를 갈망하였을 것이다

왕의 총애를 바탕으로, 그녀의 오빠 "장복수"와 그의 아들을 양인의 신분으로 올려놓았으며, 형부 "효손"에게 "함경도 전향 별감(傳香別監)" 벼슬을 주는 등 권력을 함부로 남용하였다"장녹수"가 궁 안에 살고 있는데도 그녀의 집을 새로 짓기 위해 민가를 헐게 하였으며, "동지중추부사 이병정"은 장녹수의 집 하인에게 크게 모욕을 당했지만, 오히려 사재를 털어 뇌물을 바치고서야 화를 피할 수 있었다.

6. 연산군장녹수 만남

"연산군장녹수" 사이에 연분(戀分)이 싹트도록 한 사람은 삼촌 "제안대군(齊安大君)"이었다이미 폭정기에 접어든 "연산군"이 어느 날 "미복(微覆)차림"으로 한 잔 걸칠 요량으로 삼촌 집을 찾아갔다그곳에서 만난 것이 "장녹수".

이때부터 "연산군"은 장녹수의 치마폭에 묻혔고, 폭정의 정도는 더욱 심해졌다"제안대군"은 장안에서 이름난 "풍류 한량"이었는데, 조정에는 욕심이 없고, 오로지 기생들을 초대하여 자신의 집에서 "가무(歌舞)"를 즐기면서, 자신 역시도 기생들을 가르치는 것으로 세월을 보내고 있었던지라, 일설에는 제안대군이 개인적으로 기르는 기생들이 여럿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아마도 장녹수는 "제안대군"의 집에 소속된 기생으로 추정되고 있다"연산군"은 자주 "미복(微服)"차림을 하고 밖으로 돌아다는 것을 즐겼는데, 장녹수가 총애를 받기 시작한 것도 이 때일 것이다.

하루는 "연산군"이 숙부인 "제안대군"의 집으로 행차하여 술을 마시던 도중, "제안대군"이 자신이 기르는 아이 중에서 아주 괜찮은 아이가 있다며, "장녹수"를 친히 불러 가무를 하도록 하였다그러자 "연산군"이 한눈에 반하여, 장녹수를 친히 데리고 하룻밤을 보내고 싶다고 하였고, "제안대군" 역시도 그것을 흔쾌히 승낙하였다.

오로지 "풍류"만을 즐기는 사람이라, 여색(女色)과 권력욕이 없었는데, 그 때문에 세상 사람들은 "제안대군" 사내구실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라 여기고 있었다장녹수와 하룻밤을 보내고, "연산군"은 그녀를 잊지 못해 친히 궁궐로 불러들였다.

세상 사람들은 "천기(賤妓)"를 궁궐로 불러들여 "후궁"을 삼았다고 비난하였고, 왕실에서도 이 문제를 거론하여 "연산군"에게 장녹수는 "천기"이며, 이미 시집을 여러 번 가서 가정이 있는 여자라고 "후궁()" 삼는 것을 반대하였지만, 연산군은 대신들의 반대를 무시하고, 장녹수를 종4"숙원(淑媛)" 지위를 내렸다.

7. 연산군의 방탕한 생활

"연산군"의 깊은 총애로 "장녹수"는 차츰 우월감에 빠져 교만해져갔고, 안하무인이 되어갔다장녹수는"연산군" 총애를 받으면서, 생긴 권력을 함부로 남용하기 시작했다.

1505.12월에는 기생인 "운평(運平) 옥지화(玉池花)"를 장녹수의 치마를 밟았다는 이유로 "군기시(軍器寺)" 앞에서 목을 베어, 그 머리를 "취홍원(聚紅院)뇌영원(蕾英院)"에 돌려 보이고, "연방원(聯芳院)"에 효시(梟示)하기도 하였다1506.01월에는 "내수사"의 여종이었던 언니 "장복수(張福壽)"와 조카들을 면천해, 양인(良人)의 신분으로 올렸다관선(官船)을 이용하여, 평안도 미곡 7,000석을 무역하였다.

장녹수의 치마폭에서 "연산군"의 방탕은 시들 줄 몰랐고, 국정은 나날이 부패해갔다"연산군"은 장녹수의 기분을 맞춰주기 위해, "궁중놀이""연회"에 필요한 시설을 지었는데, 그때부터 "연산군" 몰락의 시작인 셈이었다. "정사"는 돌보지도 않고, 항상 여자를 끼고, 풍류에만 젖어 살면서, 백성의 원성은 자연히 높아져만 갔다전국에서 모아 올린 "미희"들과 음탕한 생활을 즐기며, "연산군"은 점점 포악해져 갔다.

"연산군" 때부터 "흥청"이란 말이 생겨나서, "흥청망청"이란 말로 바뀌게 되었다. "흥청"이란 기생을 뽑아, 1만 명을 채우려 했다고 한다급기야 "연산군""휘숙옹주"까지 범하는데, 그녀는 "임승재"의 부인이자, "성종"의 서녀였으며, "서매"이긴 해도 누이 뻘이었다배다른 누이동생을 범한 "연산군"은 한술 더 떠서, "백부 월산대군"의 부인인 큰어머니 "박씨부인"까지 간음해 버렸고, 큰 어머니 "박씨부인"은 부끄러움으로 얼굴을 들지 못했다.

"연산군"이 다녀간 뒤로 임신을 했고, 분함과 부끄러움으로 몸져 누워있던 "박씨부인"은 동생 "박원종(元宗)" 불러, 눈물로 하소연하였고, "박원종"은 분노의 주먹을 불끈 쥐었다"박씨부인"이 결국 목을 매어 자살을 하자, "박원종"은 복수의 칼을 갈았다.

8. 중종반정과 최후

그러나 장녹수의 영화는 1506.09.02일 발생한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그 빛을 잃고 만다1506.09.02, "연산군" 제거에 뜻을 같이한 "이조참판 성희안""박원종""반정"을 결행하여, "연산군"은 자리에 물러나고, 그 뒤에 "진성대군(중종)"을 새 임금으로 옹립하였다.

"연산군""강화도(江華島)의 교동"으로 "위리안치" 되었고, "왕비 신씨()"는 폐하여, 친정으로 보냈으며, "세자 이황"을 비롯한 왕자들은 각 고을에 안치시켰다"연산군""중종반정"에 의해 쫓겨난 날, "실록""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권력을 휘두르던 전비백견장녹수"의 행각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임금이 전비와 장녹수의 말을 따르지 않음이 없고, 하려는 것을 해 주지 않은 것이 없었다. 이들은 옥사(獄事)를 농간하고, 벼슬을 팔며, 남의 재물과 집을 빼앗는 등 못하는 짓이 없었다 조금이라도 자기 뜻에 거슬리면 반드시 화로 갚으므로, 왕실 가족이나 사대부 중 침해와 모욕을 받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주인을 배반하고 이익을 노리는 무뢰배들이 전비와 장녹수의 일가라 주장하며, 못된 짓을 하는 자가 셀 수 없었다 이들이 부모를 뵈러 출입 할 때면, 승지와 재상들이 앞에서 인도하고, 뒤를 감싸 마치 왕비의 행차와 같았다."

"연산군"이 실각(失脚)한 후, "전비백견장녹수"에게 찾아온 것은 참혹한 죽음이었다"실록"은 그녀들의 최후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전비백견장녹수"군기시(軍器寺, 병기 등을 만들던 관청, 현재의 서울시청과 서울신문사 사이) 앞에서 목을 베니, 장안 사람들이 다투어, 기왓장과 돌멩이를 그들의 국부(局部)에 던지며, "나라의 고혈이 여기서 탕진되었다"고 하였는데, 잠깐 사이에 돌무더기를 이루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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