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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물 • 악녀 (10인) • 부덕 (6인)

악녀 ③ 폐비 윤씨 (연산군 모ㆍ성종 비ㆍ1455~1482)

by 당대 제일 2022. 9.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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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비 윤씨 (廢妃 尹氏ㆍ1455~ 1482ㆍ26세)"가 "성종"의 얼굴에 손톱으로 상처를 냈다는 이야기는 "조선왕조실록"에 없다. 그냥 전해 내려오는 야사이다. 폐위되고, 3년 후 사사(賜死)되었다.  성종과의 슬하에 2명의 아들을 두었다.

 

1. 폐비 윤씨 (廢妃 尹氏ㆍ1455~ 1482ㆍ향년 26세)

조선 9대 왕 성종의 제1계비2째 부인ㆍ"연산군"의 친모ㆍ성종과의 슬하에 2명의 아들을 두었으며, 장남은 조선 10대 왕 연산군이고, 차남은 조졸하였다ㆍ 남편인 "성종"의 후궁들 문제로, 시어머니인 "인수대비"와의 고부갈등이 유명하다.

1473, 성종의 후궁으로 간택되어 "숙의(淑儀)"의 지위에 있다가, "공혜왕후"가 죽자 왕비로 책봉되었고, 폐위 전날, "성종"은 당시까지는 중전의 신분이었던 "윤씨"에게 하례를 금지하는 어명을 내렸다.

"폐비 윤씨""성종"의 얼굴에 손톱으로 상처를 냈다는 이야기는 "조선왕조실록"에 없다. 그냥 전해 내려오는 야사이다. 폐위되고, 3년 후 사사(賜死)되었다. 사사 당시 윤씨는 친정어머니 장흥부부인 신씨에게 "세자가 자라서 왕이 되거든, 피를 토한 금삼을 넘겨줄 것"을 유언했고, 이는 후일 "무오사화갑자사화"의 도화선이 된다.

"연산군" 즉위 후, 제헌왕후(齊獻王后)로 왕비의 작호가 추존되었으나, "중종반정"이 일어난 후, 왕후의 호는 삭탈되었다.

별 칭 : 숙의 윤씨(淑儀 尹氏)폐 제헌왕후 윤씨

왕 계 : 전임- 공혜왕후후임- 정현왕후

남 편 : 성종 (成宗1457~1494재위1469~1495(26))  "성종"의 능()에는 유해가 없다. "임진왜란" 당시 왜구들에 의해 무덤이 도굴 당하고 "재궁()" 마저 불을 질러 왕의 시신행방은 간 곳이 없었다. 후에 유해를 찾아봐도 끝내 찾지 못하자, 부장품으로 넣었던 옷을 불태워 새로 관을 짜서 옷을 태운 재를 담아 다시 안장했다.

자 녀 : 연산군(燕山君1476~1506재위 1494~1506(12)향년 29)대군

가 족 : - 함안부원군 윤기견(尹起畎)- 장흥부부인 신씨

외당숙- 신숙주오빠 윤구의 손녀사위- 이량(명종 때 권신명종비 인순왕후의 외삼촌)

본 관 : 함안(咸安)윤관의 11대손

2. 외모성격

야사에 의하면, 마치 "선녀"와도 같고, 등장하는 것만으로도 주위가 서늘해질 만큼의 미녀였다고 한다"연산군"은 키가 크고 말랐었는데, 키는 아버지 "성종", 전체적인 외모는 어머니 "윤씨"를 닮았을 수 있다. 야사에 "연산군""어머니의 얼굴이 보고 싶다"고 했을 때, 한 신하가 "그러면 거울을 보십시오"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고 한다.

투기심과 질투심이 많은 여자로 알려져 있다고 하지만, 야사에 의하면, "성종"이 자신의 처소인 "태전"에 들르지 않고, 다른 후궁들의 처소만 찾자, 여자관계가 복잡한 "성종"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러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또한 유교적 가치관적인 부녀자의 덕을 중시한 시어머니인 "인수대비"와는 달리, 비교적 자유분방하고 사랑을 중시하였다고 한다어린 시절 아버지를 잃고 자신이 직접 짠 베를 팔아 겨우 먹고 살았던 불행한 과거와 "성종"의 여자를 좋아하는 성격, 자신보다 친정 배경이 좋은 후궁의 임신으로 왕비 자리를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심리적인 불안이 경계선 성격장애로 만들었다는 설이 있다아들 "연산군" 역시 "경계선 성격장애 환자"라는 추측이 있다.

원자를 낳고 성격이 갑작스럽게 난폭해지면서, 서로 관계의 갈등이 생겨 다른 후궁에게 총애를 뺏길 수는 있지만 가만히 있으면 아들이 왕위에 오르고 편안하게 왕실의 최고 어른 대접을 받으며 호강할 수 있었지만, 쓸데없는 패악질을 부려 주변 사람들이 학을 떼게 만들어 결국 제 명을 재촉했다.

3. 폐비 사건

"공혜왕후(성종 중전)"가 몸이 약하고, 결혼 후 6년 가까이 아이가 없어 신하들이 후궁을 들일 것을 청해 "숙의 윤씨"가 첫 후궁으로 간택되었다1년 후 "공혜왕후"가 세상을 떠났고, 그로부터 1년 후 "성종"은 따로 중전을 간택하지 않고 후궁인 "숙의 윤씨"를 중전으로 승격하였다. 당시 "숙의 윤씨"는 임신 6개월이었다.

이렇게 "성종의 계비(2번째 왕비)"가 된 윤씨는 마침내 왕실이 고대하던 아들을 낳는데, 그 아이가 바로 "성종"의 적장자이자 훗날의 "연산군"이다. "연산군"은 적자였으므로 원자 칭호를 받게 되었다중전이 되고 1년이 지나지 않은 1477"성종"이 중전의 방에 갔다가 주술을 써놓은 "방양서"와 비상이 묻은 "곶감"을 발견하였다.

"성종"은 왕비를 폐위하고자 했지만, 신하들의 간곡한 부탁으로 철회하였다"원자"가 있는데 중전을 폐위하는 것은 안된다는 것이 다수 신하의 의견이었다.

"방양서비상"을 반입한 나인 "삼월사비"에게만 죄를 물어, "삼월"을 교수형에 처하고, "사비"를 장형 100대를 때린 후, 변방의 관비로 보내는 처벌을 내리는 것으로 사건을 매듭지었다. 그러나 1479, "성종"은 신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중전 윤씨"를 폐위하였다.

4. 왕비 폐출ㆍ폐비 윤씨의 사사 사건

평소에 질투심이 많았다고 알려져 있다고 하지만, 여자관계가 복잡한 남편인 성종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러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야사로 전해지는 이야기에는 "성종"이 자신의 처소인 "교태전"에 들르지 않고, 다른 후궁들의 처소만 찾자, 다른 후궁들을 질투하여 잡아다가 추궁, 취조하는 등의 행위를 하다가 "성종"의 눈 밖에 났다.

남편과 말싸움 중, 남편의 얼굴에 손톱자국을 낸 것이 발단이 되어, 시어머니인 인수대비의 분노를 샀다는 설이 있으며, 다른 설로는 삼사의 탄핵으로 폐출되었다는 설이 있으나, 그녀에 대한 왕실의 사후 예우를 본다면, 왕실의 눈 밖에 나서 폐위된 것이 유력하다.

또한 경쟁관계에 있던 성종의 다른 후궁들이 인수대비를 찾아가 윤씨를 비판하며, 그녀의 폐위를 부추기기도 했다이러한 일련의 사건 등으로 윤씨는 마침내 1479, 자신의 생일 바로 다음날인 06.21(음력 06.02) 왕비(王妃)에서 폐위되었다.

폐비(廢妃)된 이후 조정에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원자의 생모이자, 조강지처가 되는 윤씨"를 다시 왕비로 복위시켜야 된다는 상소와 시위가 끝임 없이 반복되었으며, 많은 조정대신들이 파직당하거나 유배를 갔다.

여기서 "윤씨를 복위시켜야 된다."고 하여 유배를 갔거나 파직당한 대신들은 연산군이 즉위함으로서 부귀영화를 누렸으나, 반대로 윤씨 폐위에 앞장섰거나, 복위에 동참하지 않았던 대신들은 무자비한 보복을 당했다. 대표적으로 한명회한치형윤필상 등이 있다.

인수대비는 원자가 더 자라서 자신의 어미얼굴을 기억할까봐, 하루빨리 새 중전(中殿)을 새워야 된다는 명분으로 훗날의 "정현왕후"가 되는 "숙의 윤씨 (淑儀 尹氏)"를 왕비로 책봉시켰다.

당시 조정에서는 그녀가 폐비(廢妃)가 된 이후, 자신의 행동을 뉘우치고 있는 반성하는 점, 세자의 생모라는 점 등을 이유로 들어 그녀를 살려 두고자 하였으나, "숙의 엄씨귀인 정씨" 등의 사주로 인해, 궁녀들이 성종의 모후인 "인수대비"와 성종에게 허위 보고를 하였다결국 윤씨는 1482.08.29일 사약을 받고, 사사되고 말았다.

윤씨의 나이 26살이었으며, 윤씨는 죽기 전에 자신의 피가 묻은 금삼을 친정어머니 장흥부부인 신씨에게 "세자가 자라거든, 이를 전달해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죽었다훗날 연산군이 왕위에 오르면서 이 사건에 대해 알게 되고, 결국 이 사건에 관련된 사람들을 처벌하면서 1504년에 "갑자사화" 등이 일어나게 된다.

그로 인해 "한명회한치형" 등이 부관참시를 당하고, 그 이외의 사람들이 사사되거나 유배되었다하지만 실제 역사 속의 "연산군"은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어머니의 죽음을 알고 있었다. "연산군"에 의해 제헌왕후(齊獻王后)에 추숭되고, 회묘는 "회릉 (懷陵)"으로 격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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