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천추태후 (千秋太后ㆍ964~1029ㆍ64세)"는 아들 "왕송(7대 목종)"이 왕위에 오르자, 막강한 권력을 손에 쥐고 "섭정"을 하였고, 스스로 "천추궁"에 사는 자신을 가리켜, "천추태후(千秋太后)"로 부르게 하였다.
1. 고려 천추태후 (千秋太后ㆍ헌애왕후 (獻哀王后)ㆍ964~1029ㆍ향년 64세)
고려 왕족ㆍ왕비ㆍ왕건 손녀ㆍ대종(왕건 아들)-선의왕후에서 출생ㆍ12년간 섭정
경종(고려 5대 왕ㆍ사촌)의 3번째 왕비ㆍ목종(고려 7대 왕)의 모후ㆍ성종의 누이동생ㆍ묘는 "유릉(幽陵)"
경종(고려 5대 왕) 사후, 대궐 밖에 나가 살다가, 목종(고려 7대 왕) 즉위 후, 12년간 섭정을 하였다.
막강한 지방 호족 세력의 후손인 "헌애왕후 황보씨"는 "경종(고려 5대 왕)"의 3째 비가 되었으나, 18세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된다. 이후 "헌애왕후"는 외가 쪽 친척인 "김치양(金致陽)"과 자주 만나던 중, 사통하여 아들을 얻었다. 아들의 즉위를 위해 즉위에 걸림돌이 되던 친조카 "대량원군 왕순(大良院君 王詢ㆍ후일 현종(고려 8대 왕)"을 암살하려 하였다.
당시 고려사회는 조선과 달리 여성의 지위와 권리가 보장되고, "여성의 "성이 억압되지 않은 사회였다. "고려사(高麗史)"등의 사서(史書)에서는 "천추태후"를 "김치양"과 사통(私通)하여, 왕실과 나라를 어지럽힌 "음탕한 여인"으로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유교에 심취했던 "성종 (6대)"은 자신의 여동생인 "헌애왕후"에게 유교식 수절을 강요하고, "김치양"은 유배를 보낸다.
997년, "성종"이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나고, "헌애왕후"의 아들 "왕송(7대 목종)"이 왕위에 오르자, 막강한 권력을 손에 쥐고 "섭정"을 하였고, 스스로 "천추궁"에 사는 자신을 가리켜, "천추태후(千秋太后)"로 부르게 하였다.
• 시가 : 개성 왕씨(開城 王氏)
• 시조부 겸 조부 : 1대 태조 (太祖ㆍ재위: 918~ 943ㆍ877~ 943ㆍ향년 65세)
• 외숙부 겸 아버지 : 추존 대종 (戴宗ㆍ ? ~ 969)
• 아버지 겸 고모부 : 4대 광종 (光宗ㆍ재위: 949~ 975ㆍ925~ 975ㆍ향년 49세)
• 사촌 겸 남편 : 5대 경종 (景宗ㆍ재위: 975~ 981ㆍ955~ 981ㆍ향년 25세)
• 친 오빠 : 6대 성종 (成宗ㆍ재위: 981~ 997ㆍ961~ 997ㆍ향년 35세)
• 장남 : 7대 목종 (穆宗ㆍ재위: 997~1009ㆍ980~1009ㆍ향년 28세)
• 고종 사촌 : 헌숙왕후 (5대 경종의 제1비)
• 친 동생 : 헌정왕후 황주 황보씨 (경종의 제4비ㆍ현종의 모후)
2. 대량원군 왕순 (大良院君 王詢ㆍ현종)"에 대한 박해
아들이 18세가 되었지만, 그는 계속 섭정을 하였다. 1003년(목종 6)에는 "김치양"과 사이에서 아들을 낳게 된다. 목종에게는 자식이 없었고, "천추태후"와 "김치양"은 그 아들로 하여금 후사가 없던 "목종"의 뒤를 잇게 하려는 계략을 꾸민다. 그것은 "왕씨 왕조"가 "김씨 왕조"로 바뀌는 중대 사안이었다.
"천추태후"가 볼 때, 자신들의 구상을 방해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은 조카, 즉 동생과 "왕욱" 사이에서 비극적으로 태어났던 그 아이였으며, 이미 나이도 10대 중반을 넘고 있었다.
권력은 "천추태후"와 "김치양"이 쥐고 있었지만, 대의명분은 그 아이에게 있었다. "대량원군 왕순"은 자신의 이종 조카가 되지만, 아버지 쪽으로는 사촌 동생이었다. 비정상적인 출생이긴 하지만, 아버지 "왕욱"은 분명 "태조 왕건"의 아들이었다.
결국 그 아이 "왕순(王詢)"은 "성종"이 살아 있을 때만 해도 극진한 보호를 받았지만, "천추태후"의 천하가 열리면서, 생명의 위협을 받게 된다. 처음에는 "왕순"의 머리를 깎아, 강제로 출가시켰던 "천추태후"는 이후에도 여러 차례 사람을 보내 살해하려 하였다.
그러나 그때마다 "신혈사"의 승려들이 "왕순"을 피신시켜서 극적으로 목숨을 건졌고, 한 번은 살해에 성공하였지만, "천추태후"가 보낸 자객이 죽인 이는 비슷한 또래의 다른 "동자승"이었다.
3. 생애 후반
결국, "강조의 변"이 일어나 "김치양"은 목숨을 잃었고, "천추태후"는 유배를 갔으며, "목종"은 폐위되어 유폐지로 향하는 도중, "강조"의 부하들에 의해 암살당하고 말았다. 이로써 1009년 "천추태후"는 고려 정계에서 완전히 실각하였다.
한편, "강조" 등은 "대량원군 왕순"을 왕위에 추대하였는데, 바로 "고려 현종"이다. "천추태후"는 유배에서 풀려났고, "황주"에서 살다가, "현종" 20년 정월에 왕궁으로 돌아와, 64세를 일기로 "황주 명복궁"에서 일생을 마감했다. "숭덕궁(崇德宮)"에서 사망했다는 이설도 존재한다. 묘는 "유릉(幽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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