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선대원군"과 22살 차이가 나는 애첩으로 알려진, "진채선 (陳彩仙ㆍ1847~ ? )"은 최초의 판소리 여류 명창으로, 그녀의 생애는 객관적인 사실보다는 불확실한 구전이나 상상력의 산물이 대부분이며, 스승 "신재효"가 연정을 듬뿍 담은 "도리화가"를 지어 보냈다.
1. 진채선 (陳彩仙ㆍ1847~ ? ) : 최초의 판소리 여성 명창ㆍ대원군의 애첩 (22살 차)
최초의 "여류명창"으로 알려진 그녀의 생애는 객관적인 사실보다는 불확실한 구전이나 상상력의 산물이 대부분이며, 스승 "신재효"가 연정을 듬뿍 담은 "도리화가"를 지어 보냈다. 1867년, "경복궁" 중건 축하 "경회루 낙성연"에서 출중한 기예를 발휘하여 청중을 놀라게 했고, "흥선대원군"을 처음 만나 "애첩"이 되어(진채선 20살ㆍ대원군 47살) "운현궁"에서 살았으나, "대원군" 몰락 후, 곁을 떠나 어디서 죽었는지 확실치 않음. "명성황후"에게 죽임을 당하였거나, 중국ㆍ한반도 북부 등으로 도망쳐 조용히 살았을 수 있음.
• 출신 : 전북 고창현의 비천한 관기
• 출생 : 전북 고창군 무장면 (선대는 "무장"에서 건너왔는데, 고향은 "고창군 심원면 월산리 검당포")
• 스승 : 신재효- 판소리 지도ㆍ동리정사의 이론 선생ㆍ동리정사 설립자ㆍ판소리계의 신화적인 존재 / 김세종- 동편제 명창ㆍ동리정사의 실기 선생
"음률ㆍ가무ㆍ정악"에 능하고, "판소리(춘향가의 기생점고대목ㆍ심청가)"를 잘 불렀는데, 남성 명창들과 겨루어 손색이 없었으며, 독자적인 "더늠"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판소리 1마당을 완창하려면, 길게는 8시간이 걸린다. ) "더늠"이란 "명창"들이 직접 사설과 음악을 독특하게 새로 짜서, 자신의 장기로 삼아 부르는 대목을 말하는데, 그녀가 사설 창작 능력과 출중한 연창 능력을 겸비하고 있었음을 증명한다.
신분에 관해서는 "기생"과 "세습 무당의 딸"이라는 2가지의 설이 전해지고 있다. "이질녀 김막례"에 따르면, "무장"에서 살던 "진채선"의 조부가 생활이 어려워지자, "검당포"로 건너가 과부였던 "김단골"과 함께 살면서, 진씨 일가가 현지에 뿌리내렸다고 한다. "진채선"의 어머니 역시 "단골"이었는데, "굿"보다 "소리"를 더 좋아하여, 이곳저곳으로 배우러 다녔다고 하며, "진채선" 역시 "신재효"를 만나기 전부터 이미 소리를 하고 다녔다고 한다.
"단골"이란 남쪽 지방의 "세습무"를 지칭하는 말이므로, 어머니는 음률에 뛰어난 "무당"이었음에 분명하며, "남도의 세습무"는 "내림굿"을 받고, 직접 "신"을 모시는 "한강 이북의 강신무"와 달리, 일정한 지역의 "단골판"을 운영하면서, 뛰어난 가창력ㆍ연희성을 바탕으로 "제의"를 주관하는 "예능인"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한강이남, 특히 "전라도 지역의 단골"들이 부르는 "서사무가"는 "씻김굿 공연"에서 볼 수 있듯이 "판소리"와 유사한 성격을 지녔고, 때문에 일부 학자들은 "판소리"가 "서사무가"에서 나왔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전주대사습 사"에는 "진채선"이 "관기" 출신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녀가 어머니의 "무업"을 계승하지 않고, 일찍부터 "고창현의 관기"가 되어, 동기 때부터 체계적으로 "기생"의 학습과정을 밟았다면, 50대 중반까지 "고창현의 아전"으로서 만년에 "호장"의 직임을 맡았던 "신재효"의 관리를 받는 과정에서, 가창력을 인정받았음에 분명하다. "호장"은 "아전의 우두머리"로서, 관청에서 주관하는 각종 행사나 연회에, 소리꾼들이나 기생을 동원하는 직분도 수행했기 때문이다.
① "판소리계"에 나타난 여성 소리꾼
19세기 중반, 남성들의 독무대였던 "판소리계"에 여성 소리꾼이 나타나 큰 파장을 일으켰다. "고창현 관기"였던 그녀는 "동리정사"에서 "신재효ㆍ김세종"의 가르침을 받고, 명창의 반열에 올랐다.
당시 "신재효"는 12마당의 "판소리" 중에서 5마당을 개작했고, "판소리 이론"을 확립한 다음, "명창 김세종"을 영입하여, 함께 제자들에게 전문적인 "판소리 교육"을 실시하고 있었다. 때맞춰, 판소리 애호가였던 "흥선대원군"은 "운현궁"에 "박유전ㆍ박만순ㆍ정춘풍" 등 당대의 명창들을 불러들여 "판소리"를 감상함으로써, "판소리" 보급에 기폭제 역할을 했다. 그 무렵 "양반 사대부"들은 각종 연회에 "소리꾼"들을 불러들여, "소리판"을 벌이게 했고, 종종 저택의 사랑방에 둘러앉아, 소규모의 공연을 즐겼다. 그렇듯 "판소리"의 저변의 확대되자, 양반이었던 "정현석"이 "판소리 비평가"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동안 금기시되었던 "기생의 판소리 연창"도 허용되었다. 이전 기생들은 "음률ㆍ가무"에는 능숙했지만, "잡가ㆍ판소리" 같은 "속악"은 부르지 않았다. 이와 같이 급변하는 시대 조류 속에서 "신재효"는 문하에 80여 명의 "기생"을 받아들여 "판소리"를 가르쳤고, 마침내 "진채선"이라는 "여류 명창"을 1867년, "경복궁 경회루 낙성연"에 데뷔시킴으로써 "여성 판소리"의 서막을 열었다.
② 1867년 "경회루 낙성연"
그런 변화의 시기에 "기생"이었던 "진채선"은 "신재효"가 세운 "동리정사"에 들어가, 그의 판소리 이론을 습득하고, "동편제 명창 김세종"의 소리를 전수받았다. "판소리"의 전수 방법은 전통적으로 "도제식"이었다. 사제가 숙식을 함께하며, 철저한 주입식 교육을 통해, 스승의 소리를 제자에게 심어주는 것이다. 그와 같은 교육 방식을 감안한다면, 그녀의 소리는 "김세종의 동편제" 계보를 이어받았으리라 짐작된다.
1867년, 20세 한창 꽃피는 나이의 "진채선"은 "김세종"과 함께 서울에 올라가, "흥선대원군"을 비롯하여 고관대작들이 운집한 "경회루 낙성연"에서 유감없이 실력을 발휘하여, 여류 명창의 출현을 알렸다. "경회루 낙성연"이 공식적인 국가 행사였던 만큼, 그녀의 명성은 전국에 널리 퍼졌다. 당시 "진채선"은 갓 쓰고 도포자락 휘날리는 남자 복장으로 무대에 서서, "신재효"가 개작한 "춘향가"에 이어, 흥겨운 "방아타령"과 국태민안을 기원하는 "성조가"를 불렀다. "방아타령"은 본래 하층민들의 삶을 적나라하게 묘사하는 "민중가요"로, 자유롭고 발랄한 성 의식을 드러내지만, 그녀가 부른 "방아타령"은 "신재효"가 개작한 것으로, 왕실에 대한 찬양ㆍ축원을 담고 있었다.
"성조가" 역시 "성주풀이" 형식으로 집 안팎을 관장하는 여러 "신"들에게 집안의 안녕을 기원하는 노래인데, "신재효"가 "경복궁 중건"을 기념하고, 왕실을 찬양하는 내용으로 사설을 바꾸어, 그녀에게 부르게 했다. "조선창극사"에서는 당시 "진채선"의 활약상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성음의 웅장한 것과 기량의 대단한 것은, 당시 명창 광대로 하여금 손색이 없게 되었다. 경복궁 경회루 낙성연에 불려 올라와서 만록총중 홍일점으로 명성이 일세를 경동케 하였더라." "판소리"에 나름대로 일가견이 있던 "흥선대원군"은 "진채선"의 공연을 보고 매우 흡족해 하면서, 즉시 그녀를 "대령기생"으로 임명했다.
그리하여 "진채선"은 졸지에 "운현궁의 여악"을 담당하는 궁녀가 되었다. 그때부터 "진채선"은 "고종"의 친정 선언으로 "대원군"이 실각할 때까지, 6년여의 세월을 "운현궁"에서 보내야 했다. "음률ㆍ가무ㆍ정악"에 능하고, "판소리(춘향가의 기생점고대목ㆍ심청가)"를 잘 불렀는데, 남성 명창들과 겨루어 손색이 없었으며, 독자적인 "더늠"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더늠"이란 "명창"들이 직접 사설과 음악을 독특하게 새로 짜서, 자신의 장기로 삼아 부르는 대목을 말하는데, 그녀가 사설 창작 능력과 출중한 연창 능력을 겸비하고 있었음을 증명한다. 다음과 같은 "진채선"의 더늠 "기생점고대목"은 "박헌봉의 창악대강"에 나오는데, 맨 마지막에 등장하는 "낙춘이"의 용모와 행색이 앞서, 우아하게 등장하던 여러 기생들과 대비되어, 관객들의 폭소를 유발시킨다.
이것은 "동리정사"의 실기 선생이었던 "김세종"이 부르던 "춘향가"나, 이론 선생이었던 "신재효"가 개작한 "춘향가"사설과 매우 다르다. "낙춘이가 들어오는데, 제가 잔득 맵시있게 들어오는 체하고 들어를 오는데, 시면한단 말을 듣고 이마박에서 시작하여 귀 뒤까지 파재치고, 분 성적한단 말을 들었던지 개분 한 냥 일곱 돈 엇치를 무지금하고 사다가 성 같에 회칠하듯 반죽하여 온 낯에다 맥질하고 들어오는데, 키는 사그내 장승만한 년이 초마자락을 훨신 추어다가 턱 밑에다 떡 붙이고, 무손의 곤이 걸음으로 껑충껑충 엉금엉금 들어오더니, 점고 맛고 "나오." 운운."
③ 스승 "신재효"와 관계, "도리화가"
"판소리계"의 신화적인 존재인 "신재효"는 일찍이 3명의 부인이 있었지만, 차례로 사별하고, 56세 때부터 홀아비가 되었고, 때문에 그가 길러낸 여류 명창 "진채선"과의 관계가 세인들의 주목을 받았다. 그가 59세 때, "진채선"에게 지어 보낸 "도리화가"에는 사제 간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애틋한 정경이 잘 묘사되어 있다. 다른 한편으로 "진채선"이 "대원군"의 명을 받아, "운현궁의 대령기생"이 된 후, 어떻게 생활했는지를 다소나마 추측할 수도 있다.
"신재효"는 "진채선"과 이별한 지 3년 만에, 그녀가 인근 고을의 관아에 내려와 "소리판"을 열자, 설레는 마음으로 찾아간다. 당시 "신재효"의 나이는 59세, "진채선"의 나이는 24세였다. "도리화"란 "붉은 복숭아꽃과 흰 오얏꽃"이니, "붉은 복숭아꽃"은 젊고 활기찬 "진채선"을, "흰 오얏꽃"은 늙어버린, 언제 질지 모르는 노인인 "신재효" 자신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듯하다. 두 사람은 사제지간이었으므로, 언뜻 보면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같지만, 예인들의 분방한 세계에서는 가능했을지도 모르겠다.
더군다나 "진채선"은 "운현궁의 대령기생"으로서, 아무리 스승이라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그렇기에 상사병에 걸린 스승은 공연이 벌어지는 내내, 먼발치에서 그녀의 자태를 낱낱이 훑어보면서 그리움의 실체를 확인할 뿐이다. 제자의 화려하면서 웅장하고, 아름다우며 고운 몸짓은 이전의 어떤 명기도 따라올 수 없는 경지였다. 그런 와중에 "신재효"는 "진채선" 역시 자유로운 삶과 연인에 대한 자신에 대한 연정으로 번민하고 있음을 알아챈다.
하지만 그녀는 상전이 허락하기 전에는 새장에서 절대로 빠져나올 수 없는 신세이다. 이윽고 그녀와 마주한 "신재효"는 고생 끝에 영화가 올 터이니, 믿고 참아야 한다며, 타이르다가 마침내 그녀와 헤어지고 뒤, 외롭고 쓸쓸해진 자신의 신세타령을 늘어놓는다. "진채선"의 공연을 보고 집으로 돌아온 "신재효"는 그날부터 상사병이 더욱 깊어진다. 급기야 7월7석 날이 되자,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심정이 되어, "도리화가"를 지어 "운현궁"으로 보냈다. 노래의 말미에 그는 한글로 "증 선낭"이라 썼는데, "채선 낭자에게 준다."는 뜻이다. 그렇게 해서 두 사람의 사제 관계는 선명한 남녀 관계로 바뀌었다.
< 도리화가 > 당시 신재효 나이 59세, 진채선 나이 24세
스물네 번 바람 불어 만화방창 돌아오니, 귀경 가세 귀경 가세 도리화 귀경 가세. 도화는 곱게 붉고 흼도흴사 오얏꽃이 꽃 가운데 꽃이 피니 그 꽃이 무슨 꽃고. 웃음 웃고 말을 하니 수렴궁의 해어환가. 해어화 거동 보소 아릿답고 고을시고. 현란하고 황홀하니 채색채자 분명하다. 도세장연 기이한 일 신선선자 그 아닌가.
"도리화가"의 내용으로만 보면, "진채선"은 내내 "운현궁"에만 머문 것이 아니라, 때때로 지방 관장의 초청을 받아 "판소리"를 공연했고, 3년 만에 공연 차 남쪽 지방에 내려갔을 때, "신재효"가 찾아와 만난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대원군"이 부르면, 언제라도 달려가야 하는 "대령기생"으로서 일개 지방수령의 부름에 응한다는 것은 가당찮은 일이다. 때문에 "도리화가"는 상사병에 걸린 "신재효"가 자신이 기대하고 원하는 만남의 장면을 상상하여, 그려냈을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어쨌든 "신재효"는 이 노래에서, 강호 위의 호걸들이 왕래하며 하는 말이 "선낭의 고운 얼굴 노래 또한 명창이라. 듣던 바에 으뜸이니 못 들으면 한이 되리. 그 중에 기묘한 이 쌓인 병이 절로 났네." 미인에다 명창인 제자 "진채선"에 대한 스승으로서의 자부심과 연인으로서의 그리움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그 후 "진채선"의 판소리 실력은 안타깝게도 "운현궁의 대령기생"이라는 한계 상황에 가로막혀, 더 이상 빛을 보지 못했지만, 그녀의 이름만은 최초의 "여류 명창"으로서 "여성 판소리사"의 첫 장을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다.
④ "진채선"의 마지막 행적
"진채선"의 행적은 스승 "신재효"가 남긴 "도리화가"의 여운을 끝으로 미궁 속에 빠져든다. "진채선"의 입장에서 보면, "천민"으로서 지방의 가기였던 그녀가 당대의 최고 권력자인 "흥선대원군의 대령기생"이 되었으니, 대단한 영광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도리화가"를 통해, 스승의 마음을 알게 된 "진채선"은 "대원군" 앞에서 "추풍감별곡"이란 노래를 불렀고, 그녀의 뜻을 헤아린 "대원군"이 하향을 허락하자, "고창"으로 돌아와, "신재효"를 모셨다고 한다.
일설에는 1873년 "고종"의 친정 선언으로 실각한 "대원군"이 "양주 땅"에 은거하자, 그녀 역시 "서울"을 떠나, "김제 땅"에 살면서, 두문불출했다고 한다. 속설에 따르면 그녀는 1873년, "고종"의 친정 선언과 함께 실각한 "흥선대원군"이 "양주" 땅으로 내려가 칩거하자, "운현궁"을 떠나 "김제"에서 살았고, 1898년 "흥선대원군"이 사망하자, 3년 상을 치른 뒤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그렇다면 "진채선"은 27세 때 "궁"을 나와, 50세가 넘도록 살면서, 필생의 업이었던 "판소리"를 외면하고, 제자를 기른 흔적조차 없다는 사실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다른 속설로는 "신재효"로부터 "도리화가"를 전해 받은 "진채선"이 "흥선대원군" 앞에서 "추풍감별곡"을 불러, 연인에 대한 간절한 마음을 드러내자, 그 뜻을 헤아린 "대원군"이 귀향을 허락했고, 마침내 "고창"으로 돌아온 그녀가 "신재효"와 함께 살았다는 해피엔딩이다. "추풍감별곡"은 "평양의 김진사 댁" 무남독녀 "채봉이"와 "선천 군수"의 아들 "강필성"의 슬프고도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로, 노래 속에서 "채봉"은 연인 "강필성"과 장밋빛 미래를 꿈꾸지만, 아버지의 실수로 집안이 망하자, "평양의 기생"이 된다.
그녀는 수시로 "관장"에게 수청을 들어야 하는 비참한 현실 속에서도 "강필성"에 대한 애절한 연모의 정을 버리지 않고, "추풍감별곡"이라는 노래를 지어 불렀다. 그러자 "평안 감사"가 그녀의 사연을 알고 감동하여, 마침내 "강필성"과 짝을 맺어주었다는 내용이다. 이 이야기는 "도리화가"와 "추풍감별곡"이라는 2개의 애틋한 가사 내용이 교묘하게 어울리며, 그럴 듯하다는 느낌을 준다. 하지만 너무나 잘 짜여진 각본이라, 신빙성이 들지는 않는다.
그밖에도 "진채선"의 행적에 대한 여러 속설이 나돌지만, 분명한 것은 그녀가 나라의 최고 권력자였던 "흥선대원군"을 모셨던 "궁녀" 출신으로서, "운현궁"을 나온 뒤에는 더 이상 세상을 울고 웃기는 "소리꾼" 노릇을 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점이다. 더군다나 "일본의 침탈"로 인한 망국의 시대 상황 속에서, 그녀가 늙은 스승의 바람대로 마음 편하게 애틋한 러브스토리를 완성했을지도 의문이다.
2. 신재효 (申在孝ㆍ1812~1884ㆍ향년 71세)
조선말 판소리 연구가ㆍ판소리 이론가ㆍ판소리 개작자ㆍ판소리 후원자ㆍ시인ㆍ가선대부, 오위장 등 역임 / 도리화가ㆍ치산가ㆍ호남가ㆍ성조가ㆍ광대가ㆍ오섬가ㆍ어부사ㆍ방아타령ㆍ괘씸한 양국놈가 등 30여 편의 작품을 남겼다. 그의 "단가"에는 자신의 기질ㆍ사업ㆍ지향성을 잘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작가 본인의 정체성ㆍ그를 중심으로 하는 조선 후기의 문화 실상을 파악하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 출생 : 전라도 고창현 (전북 고창군)
• 창 작 : 단가ㆍ잡가 창작
• 판소리 12마당 : 1910년대 "송만재"가 지은 "관우희(觀優戱)"에 따르면, "판소리"는 본래 "춘향가ㆍ심청가ㆍ홍보가ㆍ수궁가ㆍ적벽가ㆍ변강쇠타령ㆍ배비장타령ㆍ장끼타령ㆍ옹고집타령ㆍ왈자타령ㆍ강릉매화타령ㆍ가짜신선타령" 등 "12마당"이 있었다.
• "동편제ㆍ서편제" 소리 : "동편제 소리"는 장단에 충실하고, 박자의 변화가 단조롭다. "서편제 소리"는 잔가락이 많고, 박자가 변화무쌍했다. "신재효"는 그렇듯 "난마"와 같은 "판소리 사설"을 정리하고, 법칙을 세웠지만, 자신은 "소리꾼"이 아니었으므로, 제자들에게 실기를 보여줄 수 없었다. 그래서 "동편제의 명창 김세종"을 "동리정사의 소리 선생"으로 영입하여, 함께 이론과 실전이 결합된 "판소리"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다. 이론가 "신재효"와 실력자 "김세종"의 지도를 받은 제자들은 진정한 "명창"으로 거듭났고, "반가의 연회"는 물론 "궁중"에까지 들어가 실력을 뽐냈다. 두 사람은 그렇듯 상이한 "동편제와 서편제" 소리를 조화롭게 어울린 것인데, 일종의 표준화였다.
① "판소리를 광대들의 기예가 아닌, 예술의 수준"으로 올려놓았다.
조선 후기 "판소리"는 "광대"들의 생동하는 목소리로 "시장터"에서 공연되었고, "양반가"를 거쳐 "구중궁중"까지 침투했던 매우 특별한 예능이었다. "신재효"는 그런 "판소리"의 후원자ㆍ지도자ㆍ이론가ㆍ논평가로서, 또한 수많은 "단가ㆍ잡가"의 창작자로서 독보적인 업적을 남긴 인물이다.
그의 전 작품에는 서민적인 해학성과 사실성이 넘치고 있다. 문하에서 "김세종ㆍ정춘풍ㆍ진채선ㆍ허금파" 등 많은 명창을 길러냈다. "진채선"은 "여자 광대"로 여자도 판소리를 할 수 있는 길을 열었으며, "춘향가"를 "남창ㆍ동창"으로 구분하여, "어린 광대"가 수련할 수 있는 대본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전북 고창"의 아전 출신이었던 그는 사재를 털어 수많은 소리꾼들을 후원하고 가르치면서 구전되어 오던 "판소리 12마당" 중에 "6마당"의 체계를 잡아, 사설을 고쳐 써서, 그 내용을 제자들이 온전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고, 작품화했다.
그의 소리꾼에 대한 남다른 지원과 전문적인 "판소리 교육"이 세간에 알려지자, "이날치ㆍ김수영ㆍ 정창업ㆍ박만순ㆍ전해종ㆍ김창록" 등 "서편제ㆍ동편제"의 유명한 명창들까지 앞 다투어 "동리정사"에 들어왔고, 그들 외에도 80여 명의 "기생"을 제자로 받아들여, 장차 "여류 명창"의 출현을 예고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판소리"는 "기생ㆍ광대"가 아무 계통 없이 불러왔는데, 그는 이를 통일하여 "춘향가ㆍ심청가ㆍ박타령(홍보가)ㆍ토끼타령(수궁가)ㆍ적벽가ㆍ가루지기타령(변강쇠타령)" 등 6마당으로 체계를 세우고, 독특한 창의로 "판소리" 사설 문학을 이루었으며, 특히 "춘향전ㆍ심청전ㆍ박타령(홍보가)ㆍ토끼타령(수궁가)" 등을 창극화했다.
"광대가 갖추어야 할 법례"를 마련함으로써 "판소리를 광대들의 기예가 아닌, 예술의 수준"으로 올려놓았다. 그 결과 "신재효"는 "어전 광대가 되려면, 신재효의 문하를 거쳐 와야 한다."는 말이 나돌 정도로 수많은 명창들의 스승이 되었고, 그가 살았던 "고창"은 "조선 판소리"의 성지가 되었다. 특히 그는 남성들의 독무대였던 소리판에 "진채선"이라는 "여성 명창"을 데뷔시키고, 그녀와의 사이에 "도리화가"라는 애틋한 연가까지 남김으로써, 대가의 풍모에, 로맨티스트의 이미지까지 갖추었다.
1866년,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군"이 조선군과의 싸움에서 큰 타격을 입고 패하자, 이를 기뻐하여 전승을 축하하는 노래인 "괘씸한 양국놈가"이라는 노래를 작곡하였다. "괘씸하다 서양되놈, 무군무부 천주학을 네 나라나 할 것이지"라며 질타하였고, "남은 목숨 도생하려고 바삐 도망친다."며, "프랑스군"을 조롱하였다.
1868년, "경복궁 중건" 기념식에서 중요한 순서를 맡았으며, "명당축원ㆍ성조가ㆍ방아타령" 등을 지어 제자인 "광대 진채선"으로 하여금 "흥선대원군" 앞에서 부르게 하였다. 이 공로로 그는 "당상관"에 준하는 "명예직"을 하사받았으며, 이를 계기로 "대원군 정권"과 가까운 관계를 맺으며, "판소리계"에 두각을 나타내기도 하였다.
1876년(고종13), "대흉작"이 들었을 때, 굶주리는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사재를 털어 구호활동을 하였다. 그해 굶주리는 사람을 구제한 공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가 되고, 이어 "절충장군(折衝將軍)"을 거쳐,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승품(陞品)되고, "호조 참판(戶曹參判)"으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겸직했으며, "고종" 때는 "음서"로 "오위장"을 지냈다.
② "판소리 이론" 정립
"신재효"는 평소 제자들에게 "판소리는 우아한 표현의 사설이 기본이 되어야 하고, 음악적 기교 역시 뛰어나야 하며, 청중을 사로잡을 수 있는 연기력도 중요하다"고 가르쳤다. 그는 이런 몇 가지 요건만 제대로 갖추면, "판소리"가 "한시문학"과 어깨를 겨눌 수 있으리라 단언했다. "판소리 이론가"로서 "신재효"의 면모를 가장 잘 보여 주는 작품이 "광대가"이다.
여기에서 그는 사상 최초로 "판소리를 하는 소리꾼"이 갖추어야 할 조건들을 제시하고, 이를 반드시 준수하라고 요구하고 있는데, 제시하고 있는 "판소리의 4대 법례"는 다음과 같다. "광대 행세 어렵고 또 어렵다. 광대라 하는 것이 제일은 인물 치레, 둘째는 사설 치레, 그 직차 득음이요, 그 직차 너름새라. 너름새라 하는 것이 귀성기고, 맵시 있고, 경각의 천태만상, 위선위귀, 천변만화, 좌상의 풍유호걸, 구경하는 노소남녀 울게 하고 웃게 하는 이 귀성 이 맵시가 어찌 아니 어려우며, 득음이라 하는 것은 오음을 분별하고, 육률을 변화하여, 오장에서 나는 소리 농락하여 자아낼 제, 그도 또한 어렵구나. 사설이라 하는 것은 정금미옥 좋은 말로 분명하고, 완연하게 색색이 금상첨화 칠보단장 미부인이 병풍 뒤에 나서는 듯, 삼오야 발근달이 구름 밖에 나오난 듯, 새눈 뜨고 웃게 하기 대단이 어렵구나. 인물은 천생이라 변통할 수 없거니와, 원원한 이 속판이 소리하는 법례로다."
여기에서 "신재효"는 "판소리"를 소리꾼 중심으로 이해하면서, 그들이 갖추어야 할 4 가지 요건, 즉 "인물 치레ㆍ사설 치레ㆍ득음ㆍ너름새"를 제시하고 있다. "판소리 공연"이 "소리꾼" 한 사람에 의해 주도되고, 관객들이 느끼는 희로애락이 그들의 능력에 따라 좌우된다는 점을 중시한 것이다.
③ 그가 제시한 광대의 요건 중에
• 1번째는 "인물 치레"이다.
그것은 "판소리" 하는 "소리꾼"이 잘 생겨야 한다는 뜻이지만, 세부적으로는 소리꾼으로서의 자질을 설명한 것으로 보이는데, "광대"로서 사람들 앞에 나설 때, 인물이 중요하지만, 그것을 만들어주는 것은 좌중을 이끌어가는 자신감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 시절 "소리꾼"들은 용모가 빼어났을 뿐만 아니라, 남다른 품격까지 갖추고 있었다고 한다.
• 2번째는 "사설 치레"이다.
"소리꾼"은 "판소리의 사설"을 분명하게 표현함으로써 관객들이 판소리의 내용을 정확하게 알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판소리의 사설"은 엄청나게 길고 난해하다. 때문에 이전에 소리꾼들은 자신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대목은 대충 넘어가는 경우가 많았다. "신재효"는 바로 그런 점을 지적하면서 소리꾼이 정확하고, 멋들어지며, 그럴 듯한 사설을 구사해야만 서민에서 양반가지 전 계층을 망라하게 된 판소리 관객의 호응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 3번째는 "득음"이다.
"판소리"에서 "득음"이란 타고난 목청을 가지고, 오랜 훈련을 거쳐, 마침내 사물이나 사건을 자유자재로 표현해 낼 수 있는 경지를 뜻한다. "신재효"는 "소리꾼"이라면 마땅히 "오음(五音- 궁ㆍ상ㆍ각ㆍ치ㆍ우)"을 분별하고, "육률(六律- 12율 가운데 양성에 해당하는 태주ㆍ고선ㆍ황종ㆍ이칙ㆍ무역ㆍ유빈)"을 변화시켜, "오장육부"에서 쏟아져 나오는 소리로 관객들을 농락할 수 있어야 하며, 깨끗하게 정련된 "금"과 아름다운 "옥"과 같이, 곱디고운 말로서 "칠보단"을 두른 선녀가 병풍 속에서 나오듯 하거나, 삼오야 밝은 달이 구름 속에서 얼굴을 내밀듯 해야만 한다고 역설했다.
오늘날에도 "소리꾼"들은 이런 경지에 이르기 위해, "폭포수" 아래서 피를 토하면서 목청을 가다듬고 있으며, "신재효"는 "광대가"에서는 이런 득음의 경지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진양조는 달아두고 놓아두고 걸리다가 둘치다가, 청청하게 도는 목이 단산의 봉의 울음, 청원하게 뜨는 목이 청천의 학의 울음, 애원성 흐르는 목 황영의 비파 소리, 무수히 농락변화 불시에 튀는 목이 벽력이 부딪는 듯, 음아질타 호령 소리 타산이 흔드는 듯, 어느덧 변화하여 낙목한천 찬바람이 소슬케 부는 소리"
• 4번째는 "너름새"다.
중요도로는 맨 뒤에 있지만, 어려움에서는 맨 앞이다. "너름새"란 관객들을 웃기고 울리는 가장 중요한 극적 장치이므로, 그 "맵시"를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광대가"에서는 이 외에도 "가객"이란 명칭과 함께, "시김새ㆍ조ㆍ장단론" 등에 대하여, 비교적 초기의 이론을 피력함으로써, "판소리 역사"에 중요한 자료를 제시해준다.
아울러 역대 "판소리 명창"들의 특징을 "중국 당ㆍ송나라" 시대의 유명 문인들의 작품 세계와 대비하여 설명하는데, 이전의 명창들이 도달했던 "판소리"의 독자적인 예술성을 "한문학의 대가"들이 이룩한 문학적 성과에 견주어 품평한 것이다. 이는 그가 "판소리"의 예술성에 큰 자부심을 품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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