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도전 (鄭道傳ㆍ1342~ 398ㆍ56세)"은 고려에서 조선으로 교체되는 격동의 시기에 역사의 중심에서, 새 왕조를 설계한 인물로, "조선의 설계자ㆍ최고의 혁명가"이다. 그러나 자신이 꿈꾸던 "성리학적 이상세계"의 실현을 보지 못하고, 끝내는 정적인 "태종(이방원)"의 칼에 단죄되어, 조선 왕조의 끝자락에 가서야, 겨우 신원(伸寃)되는 극단적인 삶을 살았다.
1. 정도전 (鄭道傳ㆍ1342~ 1398ㆍ향년 56세ㆍ호 : 삼봉 (三峰))
이성계 (1335~1408ㆍ73세)ㆍ정몽주(1337~1392ㆍ55세)ㆍ이방원 (태종ㆍ1367~1422ㆍ55세)
조선개국(1392)시, 50세ㆍ고려 말~조선 초 문신ㆍ유학자ㆍ외교관ㆍ정치가ㆍ사상가ㆍ혁명가ㆍ조선 초기 성리학자(性理學者)의 한사람ㆍ유학(儒學)의 대가(大家)ㆍ지방 향리의 아들
※ 출생 비밀 : 바람둥이 땡초 중 (우현보의 김진)이 "노비"를 건드려, "정도전"의 외할머니를 낳았다는 것이고, 그 딸의 딸이 "정운경(鄭云敬)"에게 시집가서, 맏아들 "정도전"을 낳았다는 것이다.
• 출 생 : 고려 양광도 (충북 단양군 삼봉(三峰)ㆍ선향(先鄕): 경북 영주)
• 사 망 : 조선 한성부 송현(松峴)마루 (남은(南誾) 사택ㆍ현 광화문 광장 옛 "한국일보" 자리) ※ 남은(1354~1398ㆍ44세ㆍ12살 차) 신진사대부 정치인ㆍ개국공신 1등ㆍ정도전 일파
• 사 인 : 피살 (태종 이방원이 피살) • 묘(墓)의 위치 : 알려지지 않는다.
• 호 : 삼봉 (三峰) 재야시절에 북한산 아래에 있는 "삼봉(三峰)"이란 마을에서 후학을 가르칠 때, "삼각산(三角山)"과 같이 학문과 경륜과 처세에 우뚝한 봉우리가 되라는 뜻으로 "이존오(李存吾)ㆍ박의중(朴宜中)ㆍ김구용(金九容)" 등이 1369년 가을 "삼각산" 그의 집을 찾아와서 지어준 것이다. 이들은 모두 정도전과 "성균관"에서 함께 공부하던 사이였다.
• 별 칭 : 해동장량 (海東張良) 당시 자신과 "이성계"의 관계를 "한(漢)고조 유방(劉邦)"과 참모 "장량(張良)"에 비유하였는데, "한 유방"이 "장량"을 이용한 것이 아니라, 역으로 "장량"이 "한 유방"을 이용하였다는 말을 꼭 덧붙였다. 이 말은 한 "한 유방"이 "장량"을 이용하여 "한(漢)나라"를 세운 것이 아니라, "장량"이 "한 유방"을 내세워 자신이 원하는 제국을 건설하였다는 뜻으로, 자신 또한 "이성계"를 내세워 자신이 원하는 새로운 왕조를 건설한 것이며, 조선 건국의 실질적인 "기획자"는 곧 자신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정몽주"등을 제거한 "이방원(李芳遠)"등의 반발을 초래하게 되었다.
• 부 모 : 정운경 (형부상서ㆍ본관 : 봉화(奉化))ㆍ영천 우씨(경북 영주)ㆍ집안 : 경상도 봉화(奉化)지역의 토착세력
• 처 : 경주 최씨(최습의 딸) • 자 녀 : 3 남- 정정진ㆍ정정영ㆍ정정유
• 가 족 : 아우- 정도존ㆍ정도복/ 매제- 황유정→ 정도복ㆍ황유정은 연좌되지 않고, 살아남음.
1남인 도전(道傳)은 "도를 전하고" 2남인 도존(道存)은 "도를 간직하고" 3남인 도복(道復)은 "도를 회복하라"는 뜻에서 이름을 그렇게 지었다고 한다. 2남인 도존은 "무인정사" 당일 "정도전"과 함께 피살되었다. 3남인 도복은 "정도전"이 죽자, 관직을 버리고, 선향(先鄕)인 경북 영주로 낙향했다.
• 경 력 : 1360- 성균관 진사 급제 / 1362- 문과 급제
• 저 서 : 조선 경국전 (朝鮮 經國典)ㆍ불씨잡변 (佛氏雜辨, 삼봉집(三峰集) 제9권에 수록)
2. 죽음 : 이방원 (5째)의 1차 왕자의 난ㆍ방원의 난ㆍ무인정사 (戊寅靖社)
1398.10.06일 밤, "이방원(李芳遠)"은 "이숙번(李叔蕃)"의 군사들을 거느리고, "경복궁" 앞에 포진하였다. 쿠데타를 단행한 것이다. 그 시각, "정도전"은 측근들과 함께 경복궁 근처인 "송현(松峴)마루"에 있었다. (지금의 광화문 광장 동쪽에는 "옛 한국일보" 자리가 있는데, 그곳이 바로 "송현마루"였다.)
정도전의 측근인 "남은(南誾)"의 첩(妾)이 그곳에 살고 있었다. "이방원" 측은 그 집을 공격하기에 앞서, 이웃집 3곳에 불을 놓았다. 도주 경로를 미리 차단하는 한편, 정도전을 당황하게 하기 위해서였던 듯하다. 그런 후에 병력을 집 안으로 투입시켰다. 정도전을 포함한 몇몇은 담을 넘었고, 나머지는 몰살을 당했다.
"이방원"과 그의 군사들은 정도전을 찾아, 옆집으로 난입하였다. 옆집은 전(前) 판서인 "민부(閔傅)"의 집이었다. "민부"가 먼저 말하였다. "배가 볼록한 자가 제 집에 들어왔습니다." "배가 볼록한 자"라는 말에 "이방원"은 즉시 정도전의 모습을 떠올리고, 부하 4명을 시켜 집안을 샅샅이 뒤지도록 하였다. 잠시 후, 침실에서 정도전이 끌려나왔다.
그런 뒤, 그는 마지막 유언(遺言)을 남기고, "이방원"의 부하에 의하여 목이 베였다. 이때 정도전의 "유언"과 관련해서, "이방원" 측의 기록과 "정도전" 측의 기록이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방원"이 정권을 잡은 뒤, 기록된 <태조실록(太祖實錄)>에 따르면, 침실 속에 숨어있던 정도전은 이방원의 부하들이 호통을 치자, 조그마한 칼을 쥔 채, 엉금엉금 기어서 나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방원"의 부하들이 칼을 버리라고 꾸짖자, 정도전은 칼을 문 밖으로 던지고는 "이방원"에게 애걸복걸하였다고 한다.
<태조실록>에는 그가 "바라옵건데, 한마디만 하고 죽겠습니다."라고 말한 뒤, "예전에 공께서 저를 살린 적이 있으니, 바라옵건데 이번에도 살려 주소서."라고 했다는 것이다. "예전에 공께서 저를 살린 적이 있다"는 것은 조선건국 직전에 "정몽주"가 정도전을 암살하려 했을 때, "이방원"이 정몽주를 암살함으로써, 정도전이 극적으로 회생한 일을 가리킨다. 정도전의 그때의 일을 상기시키면서, "이방원"게 목숨을 구걸했다는 것이 <태조실록>의 기록이다.
반면 정도전의 문집인 "삼봉집(三峰集)"에는 위의 <태조실록>의 기록을 반박하는 자료가 수록되어 있다. 정도전이 죽기 직전에 읊은 "시(詩) 한 수"가 그것이다. 제목은 "자조(自嘲)"이다. 즉, "나를 비웃다"라는 의미의 시(詩)이다.
操存省察兩加功 (두 왕조에 한결 같은 마음으로 공(功)을 세워) 不負聖賢黃卷中 (책 속 성현의 뜻을 거역하지 않았건만) 三十年來勤苦業 (삼십년 동안 애쓰고 힘들인 업적들) 松亭一醉竟成空 (송현 정자에서 한 번 취하니, 결국 헛되이 되누나.)
이 시(詩)에 따르면, 죽기 직전 최후의 순간, 정도전은 30년 업적을 한 잔의 술로 날려버린 자기 자신을 비웃으며, 세상을 떠난 것이 된다. "이방원" 부하들의 호통을 들으며, 엉금엉금 기면서 목숨을 구걸하였다는 <태조실록>의 기록과는 달리, 이 시(詩)에 나타난 정도전은 의연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당당한 "패장(敗將)"의 모습이다.
이 시(詩)에서 나타난 또 다른 정도전의 이미지는, 최후까지 정치적 목표에 집착하는 한 혁명가(革命家)의 모습이 아니라, 마지막 순간에 모든 것을 내려놓고 스스로를 관조(觀照)하는 한 인간의 모습인 것이다. 그는 한 잔의 술과 함께 물거품이 된 55년 인생을 관조하는 모습이다.
"이방원"측이 정도전을 지나치게 폄하하는 일에 급급하였다는 점, "이방원"측의 주장을 반박하는 위 시(詩)가 정도전의 문집에 존재하고 있다는 점 등을 볼 때, 우리는 정도전의 마지막 유언이 "살려 주세요"가 아니라 "자조(自嘲)"이었을 것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 하여튼 "이방원"에 의하여 죽임을 당할 때, 두 아들 "정영ㆍ정유"는 아버지를 구하려고 달려들다가 살해되고, 얼마 후 조카 "정담(鄭澹)"은 큰 아버지와 사촌들의 죽음 소식을 듣고 집에서 자살하였다.
맏아들 "정진"은 삭탈 당하여, 수군(水軍)으로 충군 당하였다. 그에게는 종친(宗親)과 공신(功臣)들을 모해(謀害)하고, 왕자들을 모함하여 살해하려 했다는 죄명을 쓰고 억울하게 피살당하였다.
3. 출생의 비밀?
정도전에게는 출생의 의혹이 꼬리표처럼 따라 다녔는데, 이것으로 인하여 고려 조정에서도 냉대를 당했다. "이색(李穡)"의 문하로서 "정몽주ㆍ이숭인ㆍ길재"등과 당당히 겨루어 실력이 부족함이 없었으나 항상 뒷전으로 밀렸다. 주류(主流)로부터 중심세력권의 진입을 거부당하는 비주류(非主流)였다. 이것이 정도전의 울분이었고, 비분의 원천이었다. 후일 정도전이 실권을 잡은 뒤, 복수의 칼을 뽑아들게 된다.
<태조실록>에 의하면, "우현보(禹玄寶)"의 족인(族人) "김진"이라는 사람이 일찍이 "중"이 되어, 그의 종 "수이"의 아내를 몰래 간통하여, 딸 하나를 낳았다. "김진"이 후일에 속인(俗人)이 되어, 종 "수이"를 내쫒고, 그 아내를 빼앗아 자기의 아내로 삼았다. 그 딸을 "우연(禹延)"에게 시집보내어, 딸 하나를 낳아 "정운경(鄭云敬)"에게 주었다. 그 딸이 아들 셋을 낳았으니, 맏아들이 "정도전(鄭道前)"이다.
다시 설명하면, 정도전의 외할머니가 "노비(奴婢)의 딸"이라는 것이다. 바람둥이 땡초 중이 노비를 건드려, 정도전의 외할머니를 낳았다는 것이다. 호적관계가 불분명하던 시대에 확인할 증거는 없다. 하지만 "적서(嫡庶)"를 분명하게 따지던 당시에 정도전에게는 불이익으로 작용하는 악재였다.
역사는 승자(勝者)의 기록이라고 한다. 정도전이 "이방원"에게 죽고, 태종 초에 편찬된 "태조실록"이 진실인지 사실인지 여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후대 사람들은 진실로 받아들인다. 역사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4. 위민의식
부친의 뒤를 이어, 과거에 급제한 정도전은 22살 때, "충주사록"에 임명되면서 관직생활을 시작하였다. 또한, 정도전은 "공민왕"의 "유학육성"사업에 참여하여, 성균관 교관에 임명되었다. "정몽주ㆍ이숭인" 등도 참여하였다.
그러나 "공민왕"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정도전에게 시련의 시작이었다. "공민왕"의 뒤를 이어 "우왕(禑王)"이 즉위하였는데, "우왕"이 재위하던 때에는 정도전과 정치적 성향이 다른 "이인임" 등의 권문세족이 정국을 주도하였다. 양측의 충돌은 불가피하였고, 결국 "원(元)나라" 사신의 마중을 거부하였다는 이유로 정도전은 오늘날의 "전라도 나주"에 속해있는 "회진현"에서 유배생활을 하게 되었다. "회진현"에서 유배생활을 하는 그곳에서 백성들의 삶을 직접 목격하고는 "위민의식(爲民意識)"을 키웠다.
정도전이 "회진현"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어느 날, 들녘에서 한 농부를 만났다. 그 농부는 정도전을 보고, 당시 관리들이 "국가의 안위와 민생의 안락과 근심, 시정의 득실, 풍속의 좋고 나쁨에 뜻을 두지 않으면서, 헛되이 녹봉만 축내고 있다"며, 질책하였다. 촌노의 이런 발언은 그에게 백성을 위하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다시 마음에 새기는 계기가 되었다.
정도전은 부패한 관료로 인한 피폐한 백성들을 구제하고, 도탄에 빠진 나라를 구하는 길은 오직 "혁명 "밖에 대안이 없다고 결론짓고, 이를 실행하기 위해서는 "이성계"의 군사력이 절실하게 느끼게 되었다.
5. "도담삼봉"의 유래 : 충북 단양군 매포읍 하괴리 산 20-40
"도담삼봉"은 "도담리" 쪽 강가에서 볼 때, 상류 쪽인 왼편에 있는 봉우리가 "첩 봉(또는 딸 봉)"이고, 중봉을 "남편 봉(또는 아버지 봉)", 하류 쪽인 오른편 북 봉을 "처 봉(또는 아들 봉)"이라고 한다. 세 봉우리 가운데 가장 높은 "중봉"에는 현재 "삼도정"이라는 육각의 정자가 세워져 있다.
조선의 개국공신 정도전은 "도담삼봉(嶋潭三峰)"과 이웃한 지금의 "단양읍 도전리"에서 태어났고,(이 또한 다른 의견이 많으며, 그의 출생지나 거주지는 분명치 않다), "도담삼봉"에서 아호(雅號)를 따서 "삼봉(三峰)"이라고 하였다고 하나, 이는 어디까지나 전설이다. "도담삼봉"의 유래에 대하여는 "정도전"과 관련된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도담삼봉"은 원래 "강원도 정선군"의 "삼봉산(三峰山)"이 홍수 때 떠내려 온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매년 "강원도 정선(旌善)"에 세금을 내고 있었는데, 소년 "정도전"이 "우리가 삼봉(三峰)을 정선(旌善)에서 떠내려 오라 한 것도 아니요, 오히려 물길을 막아 피해를 보고 있으니 도로 가져가라"고 한 뒤부터, 세금(稅金)을 내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도담(嶋潭)이 군 북쪽 24 리에 있다. 세 바위(삼암, 三巖)가 못 가운데 우뚝 솟아 있고, 도담에서 흐름을 거슬러서 수백 보(步)쯤 가면 푸른 바위가 만 길이나 된다. 황양목(黃楊木)과 측백(側柏)이 돌 틈에서 거꾸로 났고, 바위 구멍이 문과 같아서(巖穴如門) 바라보면 한 동천(洞天)이 있는 것 같다"'고 수록되어 있다.
6. 저서 : 조선 경국전 (朝鮮 經國典)ㆍ불씨잡변 (佛氏雜辨)
① 조선 경국전 (朝鮮 經國典)
"태조 이성계"에게 바친 것으로, 이 책은 조선의 통치규범을 제시한 것으로 후일 조선의 최고법전인 "경국대전(經國大典, 성종)"이 나오게 되는 출발이었다. "요순시대"처럼 임금과 신하가 서로 조화를 이루는 "왕도정치"를 전면적으로 표방한 것이다. 역사적으로 살펴볼 때, "성문헌법"의 유무(有無)는 조선시대와 고려시대를 가르는 중요한 기준이 되었다.
기존의 관습법이나 중국 법률에 의존하던 단계에서 벗어나, "조선시대"에 와서야 비로소 성문 헌법인 "경국대전(經國大典)"이 완성되어, 국가 운영의 체계가 잡혀갔기 때문이다. "경국대전"은 "성리학"을 이념으로 표방한 조선이라는 국가의 헌법으로서 오늘날 관점에서 보면 많은 한계점도 있다.
과부(寡婦)의 재가를 금지한 것이나, 서얼(庶孼) 자손에 대한 영구한 과거응시금지 조치, 노비에 대한 매매의 허용등 시대적 한계성을 보이는 내용들도 다수 있다. 그러나 경국대전이 만세불변(萬歲不變)의 법전을 만들기 위해 기울인 노력의 과정이나 오늘날의 관점에서도 상당한 합리성을 보인 규정들이 다수 존재하였다는 점 등은 특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② 불씨잡변 (佛氏雜辨ㆍ삼봉집(三峰集) 제9권에 수록)
성리학적 입장에서 저술한 "불교(佛敎) 비판서"로, 조선의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의 계기가 되었다. 그는 "불교는 이단(異端)이므로, 배척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고, "배불(排佛)"의 정당성을 역설하였다. 정도전은 "불씨잡변"을 마친 뒤, "권근"에게 서문을 부탁하였다. 그러나 수개월이 지난 같은 해 8월에 "왕자의 난"으로 복주(伏誅)되어 "불씨잡변"은 간행되지 못하였고, 그 후 그 유고(遺稿)가 족손(族孫) "한혁(韓奕)"의 집에서 발견되었다.
이에 "한혁"이 같은 해 과거급제자인 "양양부사 윤기견"에게 이를 보였는데, 그가 "벽불(闢佛)의 명저(名著)임"을 감탄하여 비로소 간행되었다. 정도전은 "불법(佛法)"이 중국에 들어와, "불(佛)"을 섬기다가 화(禍)를 입은 실례와 천도(天道)를 버리고, "불과(佛果)"를 이야기하는 모순 등 "불료균회설ㆍ인과설(因果說)ㆍ지옥설" 등에 대한 비판을 가하였다.
7. 한양 천도 (漢陽 遷都)
1392.08월부터 정도전은 새로운 도읍지 건설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는데, 이는 "고려의 구신(舊臣)"과 "세족(世族)"이 도사리고 있는 "개경(開京)"은 신왕조의 정착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 그의 견해였다. 1394.08월부터 "개경"을 떠나 새로운 도읍 건설을 추진하여, "한양(漢陽)"을 새 왕조의 도읍지로 정하였다. 그는 "한양"을 "조선의 새 수도"로 결정한 것은 물론, 한양의 도시 설계에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경복궁(景福宮)"의 위치도 "정도전"이 잡은 것으로, "무학대사(無學大師)"는 지금의 "인왕산(仁旺山)을 주산(主山)으로 궁궐을 세워야 한다."고 했으나, "정도전"은 반대하였다. 그는 "무학대사"가 추천한 위치는 동향(東向)이며, 터가 너무 좁아 왕도(王都)로 적당하지 않다고 주장하였고, 결국 정도전의 뜻대로 "경복궁"이 현재의 자리에 세워지게 되었다. "한성부(漢城府)"의 각 "궁궐ㆍ전각ㆍ문(門)"의 이름을 짓고, "도로ㆍ수도의 행정분할"도 결정하였다.
1394년 "한양 천도"의 지도와 감독을 병행하면서, 새로운 사회에 맞는 사상으로 "유교(儒敎) 성리학(性理學)"을 정식 "국교(國交)"로 채택할 것을 주청하였으며, 그 해에 "심기리편(心氣理篇)"을 지어 "불교"와 "도교(道敎)"를 비판하고, "유교"가 중심 실천덕목으로 하는 "인본주의(人本主義)" 사상이라고 주장하였다.
정도전은 이성계의 허락 아래, "종묘(宗廟)ㆍ사직(社稷)ㆍ궁궐의 터" 등이 들어설 자리를 정했을 뿐만 아니라, 각종 "궁궐ㆍ각 전각(殿閣)"의 이름도 모두 손수 지었다. 그는 "전각"과 "거리"의 이름을 지을 때, "유교적 덕목(儒敎的 德目)"이 나타나도록 "근정(勤政)ㆍ인정(仁政)" 등의 단어를 사용하였다. 또한 "한성의 4대문"과 "4소문"의 첫 이름과 현판을 짓기도 했다.
그 밖에도 "종묘의 제례법"과 "음악(音樂)"도 정도전이 제정한 것이었다. 특히 "몽금척(夢金尺)ㆍ수보록(受寶錄)ㆍ문덕곡(文德曲)" 등 수많은 악장을 지어, "태조 이성계"의 공덕을 찬양하였는데, 이 악장은 조선조 500 년간 연주되었다.
8. 밀본 (密本)은 있다? TV 드마라 (육룡이 나르샤ㆍ뿌리 깊은 나무)
① 육룡이 나르샤 (제목) : "용비어천가"의 1장 첫 구절에서 따온 것
해동 육룡이 나르샤, 일마다 천복이시니, 고성이 동부하시니 (海東六龍飛 莫非天所扶 古聖同符)
• "고려"라는 거악(巨惡)에 대항하여, "고려"를 끝장내기 위해 몸을 일으킨 6인물의 이야기
2마리의 용은 하늘에서 떨어졌고, → 이성계(태조)ㆍ정도전
다른 2마리는 스스로 땅에 발을 디뎠으며, → 이방원(태종)ㆍ이방지(까치독사)
결국 하나의 용이 새로운 세상의 주인이 되었고, → 분이(백성)
또 하나의 용은 훗날 새로운 주인을 끝까지 지킨다. → 무휼(무사)
② 밀본 (密本) : 숨겨진 (密) 뿌리(本)
"뿌리 깊은 나무ㆍ육룡이 나르샤(프리퀄 작품)"에 등장하는 가상의 비밀 결사 조직ㆍ"드라마만의 오리지널" 설정으로, "밀본"의 수장은 "본원"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조선" 건국의 주도적 역할을 한 "정도전"이 "재상ㆍ사대부" 중심으로 조선을 이끌어나간다는 목적으로 설립한 비밀결사라고 볼 수 있는데, "태종 이방원"이 "1차 왕자의 난"을 통해, "정도전"과 그의 세력을 박살내면서, "정도전"은 죽고, 남은 조직은 지하로 숨게 된다. (유래에 대해서는 현 정치 세태를 풍자했다는 등의 설왕설래가 있으나, 작가가 공식적으로는 부정했다.)
• 정도전 (뿌리 깊은 나무ㆍ정도광의 집 지하 동굴에 새겨진 밀본지서 요약본)
"군주가 꽃이라면 그 뿌리는 재상이다. 꽃이 부실하다 하여 나무가 죽는 것은 아니지만, 뿌리가 부실하면 나무가 죽는다. 부실한 꽃은 깎으면 그만이다. 왕은 오로지 재상을 선택하고 재상과 협의하는 자리이며, 조선이라는 나무의 화려한 상징일 뿐이다. 조선의 뿌리는 재상인 것이다. 조선의 사대부들이여. 뿌리가 되어라!
조선을 떠받치는 선비가 되어 뛰어난 관료들을 키워내고 현능한 재상을 세워라. 하여, 조선이란 나무가 만만세가 될 수 있도록 뿌리 중의 뿌리가 되어라. 이것이 나 정도전이 뿌리 중의 뿌리, 숨겨진 뿌리, 밀본을 만든 이유이다. 사대부들이여, 이 조선의 뿌리가 되어라. 밀본이 되어라. 조선을 지켜라!"
• 정도전 (육룡이 나르샤ㆍ밀본 창설 시)
"2300여 년 전, 주나라 이후, 정전제와 계민수전을 지향하는 진정한 유자의 나라, 조선이 건국된 지, 벌써 수년이 흘렀다. 허나, 이 조선이라는 거대한 나무의 뿌리는 아직도 약하기 그지없소이다. 선비가, 관리가, 사대부가, 바로 여기에 있는 우리가, 이 나라의 건강하고도 튼튼한 뿌리가 되어야 하는 것이외다.
조선이라는 나무가 만세에 이르도록, 우리는 뿌리 중의 뿌리, 숨겨져 있으나 살아 숨쉬고, 보이지 않으나 나무에, 잎사귀에, 꽃잎에, 생동하는 기운을 전하며, 저 역사라는 이름의 대지 위에 깊고도 단단하게 내린 감춰진 뿌리, 우리가 이 땅의 밀본 이올시다."
"밀본이 정군(正君)한다. 밀본이 격군(格君)한다. 밀본이 이 땅 밑 가장 낮은 곳에서 위민(爲民)한다. 밀본이 애민(愛民)한다. 밀본이 중민(重民)한다. 밀본이 안민(安民)한다. 밀본이 목민(牧民)한다. 밀본은 오직, 오로지, 다음 두 가지에 다름 아니어야 하오. 바로, 민(民), 본(本), 민본이요!"
• 정기준 (뿌리 깊은 나무ㆍ세종과의 토론 중)
"저들에겐 희망이 없다. 역사를 발전시키는 건, 저 무지몽매하고 변덕스럽기 짝이 없는 군중이 아니라, 책임을 질 수 있는 몇몇이다."
• 1대 본원 : 정도전 (아우- 정도존(무인정사 당일 살해)ㆍ정도복(경북 영주로 낙향))
• 2대 본원 : 정도광 (?) - "밀본"이 "민본"을 잊고, 비틀려진 계기를 만든 인물
• 3대 본원 : 정기준 - "정도광"의 아들
'조선 > 인물 • 악녀 (10인) • 부덕 (6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정도전 ③ 관계 : 정몽주ㆍ이방원ㆍ이성계 (2) | 2022.10.07 |
---|---|
정도전 ② 평가ㆍ경복궁 (근정전ㆍ강녕전) 뜻 (2) | 2022.10.07 |
흥선대원군 ③ 진채선 (애첩)ㆍ신재효 (스승)ㆍ도리화가 (0) | 2022.09.27 |
흥선대원군 ② 척화비ㆍ강화도 조약ㆍ동학운동 사주 (0) | 2022.09.27 |
흥선대원군 ① 이하응 (1820~1898)ㆍ석파(石坡) (2) | 2022.09.27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