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도전 (鄭道傳ㆍ1342~ 398ㆍ56세)"은 "정몽주 (鄭夢周)"와 함께, "조선 주자학 (朱子學)"의 첫머리에 놓이는데, 그는조선 건국을 설계한 기획자이자, "역성혁명 (易姓革命)"을 주도한 혁명가였고, "주자학 (朱子學)"을 통치 원리로 세운 "유학 (儒學)"의 대가였다. 그러나 그는 "조선왕조" 500년 내내, "간신 (奸臣)"으로 낙인찍혀 배척당했고, 조선 건국세력과 대립한 "정몽주"는 뒷날 "조선 주자학 (朱子學)"의 우두머리로 등극한다.
1. 정도전의 개혁ㆍ이방원의 개혁
① 정도전의 개혁
정도전은 "정치의 근본이 민(民)"이라고 했다. "유교정치"의 원리인 셈이다. 권력이 이곳에서 출발하고, 통치자가 민심(民心)을 잃으면 덕(德)이 있는 다른 사람에게 권력을 넘긴다. 그래야만 "이성계"가 국왕이 되는 것이 가능하다. 또한 이 백성에서 선비가 등장해서 관료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정도전에게 선비와 농민은 둘이 아니었다.
그의 의도는 과거 "문벌(門閥)귀족"들이 차지했던 관료 자리를 더 많은 계층과 지역에 개방하는 것에 있었다. 이를 위해 정도전은 "지방관(地方官)" 등의 천거(薦擧)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도록 했다. 또한, 관료들은 통치를 위한 지식과 능력이 필요했기에 반드시 학교를 거쳐 과거시험을 보도록 했다. 그는 고려시대처럼 과거 시험관과 합격자 사이의 개인적 인맥(人脈)이 생기는 것을 막고, 이를 위해 "사립학교"를 약화시켰다.
정도전이 추구한 것은 "중앙집권적"인 국가운영이다. 그는 중국 고대의 제도인 "6부(部)"를 원리로 한 "중앙 관제"를 만들었다. 말하자면, 권력이 중앙에 모여 마치 물고기를 잡는 그물처럼 행정망이 펼쳐지는 그런 국가이었다. "고려"의 행정체제는 마치 벌집처럼 복잡한 자율성을 지녔다. 이 체제가 고려 말 국가위기에 대응하는 일에 무기력하였다. 국가 자원의 효율적인 분배와 동원을 어렵게 만들었던 것이다. 정도전은 이를 중앙에서 효율적으로 처리하고, 가문(家門)과 개인 등이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지 못하도록 할 필요가 있었다. 조선의 중앙집권적인 국가운영방식은 이러한 역사적 배경 속에서 탄생하였다.
② 이방원의 개혁
이성계가 집권한 이후 정도전이 당면한 정치적 문제는 2가지였다. 하나는 "국왕의 후계자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명(明)나라"와의 외교문제이었다. 후계자 문제는 빨리 결정되었다. 이성계의 2째 부인인 "강씨"소생의 막내가 후계자로 결정된 것이다. 1째 부인인 "한씨"소생으로 6명의 아들을 두었고, 이방원이 그 중에서 5째 아들이었다. 정도전 등은 공로가 있는 아들을 세우자는 의견이었지만, 결국 실현되지는 못하고, 이 문제는 결국 정도전이 죽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또, 큰 문제는 "명(明)"과의 외교 마찰이었다. "명 태조 주원장(朱元璋)"은 조선에 대한 의심의 눈초리를 풀지 않았다. "주원장"은 조선이 "명(明)"을 거역할 가능성이 있다고 여겼다. 그리고 "명나라"에 사신으로 왔던 "이방원(李芳遠)" 등에 대해 좋은 대우를 해주었다. 특히 "명나라"는 외교문서의 문구가 건방지다는 이유로, 조선에 문서 작성자를 보내라고 하였다.
"명나라"는 정도전에게 책임의 화살을 돌렸고, 정도전은 이 문제에 대하여 정면 대응하려고 하였다. 그는 "요동(遼東) 정벌"이라는 카드를 꺼내 들었다. 그는 이를 통해 정권에 위협이 될 최대 변수, 즉 "왕자"와 "개국공신"들이 거느린 "사병(私兵)문제"를 해결하려 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요동정벌" 추진은 "조준(趙浚)"등과 같은 개혁파까지 이를 반대하게 한 카드가 되었다. 개국공신들도 자신의 "사병"을 내놓아야 하기 때문에 여기에 찬동하지 않았다. "이방원"은 이러한 분위기를 놓치지 않았고, 결국 1398년 "왕자의 난"으로 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다.
"이방원"은 일단 형(정종)을 국왕의 자리에 앉혔다. 그렇지만, 그는 본인이 직접 정치에 참여하는 한편, 수하들을 요직에 포진시켰다. "이방원"이 주로 손을 잡았던 세력은 현실 개혁이 아닌 개선(改善)을 주장했던 세력들이다. 이들은 보수파는 아니지만, 기득권층의 이해는 나름대로 보존이 되어야 한다고 보았던 사람들이다. "권근ㆍ하륜" 등이 그들이었다.
물론 "이방원"의 뛰어난 정치적 감각은 이를 뛰어넘고 있었다. 그는 숙청이 끝난 이후에는 모든 정치세력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 하였다. 개혁파이었던 "조준(趙浚)"은 영의정으로 세웠고, 사돈관계를 맺었다. 또한 자신이 살해한 "정몽주"를 복권하고, "정도전"의 동생과 아들의 벼슬길을 열어 주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과거 귀족 가문으로 중심을 재편하였다. 단, 이들 가문 간의 결속력을 막고자, 종실(宗室) 세력을 키웠다.한마디로 "이방원"은 "정도전"처럼 중앙 정계에 지방 세력을 끌어들이지 않고, 이들의 참여를 막았다. 대신에 이들에게는 "군역(軍役)의 면제"나, "면세(免稅)"와 같은 특권을 주었다. 이처럼 정도전이 추구했던 개혁의 방향은 "이방원"에 의해 변질되었다.
2. 관계 : 정도전 (1342)ㆍ이방원 (1367)
두 사람은 조선 초기의 "신권(臣權)ㆍ왕권(王權)"을 대표하는 역사적 라이벌로 알려져 있다. 나이 차이부터 상당하였는데, 1392년 "조선"이 건국되었을 때, "정도전"은 50세의 중년, "이방원"은 25세의 청년으로 아버지와 아들 뻘 정도의 차이이었다. 두 사람이 살아온 길도 조금 달랐다. 정도전은 "경상도 향리(鄕吏)"집안 출신이고, 어머니의 "혈통(血統)문제"로 곤란을 겪기도 했다. 귀족 가문이 얽혀 있는 중앙정계에서 그는 과거시험과 자신의 실력만으로 권력의 정글을 헤쳐 나가야 했다. 이 때문에 정도전은 유배(流配)를 갔으며, 그 후에도 노골적으로 차별(차별)도 받았다. 자신이 세운 "삼각산(三角山)"아래 학교를 옮겨야 했고, 이사도 여러 차례 했었다. 아마도 그의 성격은 원칙적이고, 때로는 과격했던 것 같다.
"이방원"은 그보다 좋은 주변 환경에서 좋은 조건으로 살았다. 그는 "이성계(李成桂)"가 중앙 정계에 등장한 이후에 태어났으며, "이성계"의 많은 아들 중에서 드물게 "과거(科擧)시험"에 합격하였다. 벼슬길에서도 크게 어려운 일을 겪지 않았고, 또한 귀족적 나약함보다 정치적 판단력과 추진력이 있었다. "이방원"이 "정몽주"를 살해하는 과정은 그의 냉혹함과 판단력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정도전과 "이방원"이 당면했던 현실은 "국가운영의 문제"였다. "고려왕조"는 힘들게 숨을 내쉬고 있었다. 국제적으로는 새롭게 등장한 "명(明)나라"와 이전의 "원(元)나라" 사이에서 방황하였다. 더구나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은 견디기 쉽지 않은 시련이었다. 특히 "왜구"의 침략은 시간이 갈수록 더했고, 바닷가 지역의 사람들은 삶의 터전에서 쫓겨나야 했다.
국내 상황은 더 큰 문제였는데, "고려 귀족"들은 지배층이면서도 사회적 역할을 하지 못했다. 이들은 권력과 경제력을 이용해 남의 땅을 삼켰다. 넓어진 땅에 필요한 일손은 백성을 노비로 만들어 보충하였고, 이들에게는 법적소송도 먹히지 않았다. 귀족들은 자신의 수하에 있던 사람들을 관료로 만들었다. 세금(稅金)을 내야 할 땅과 군대에 가야할 사람들이 계속 줄어갔다. 한마디로 국가운영이 파탄나고 있었다. 새로운 질서와 혁신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두 사람은 공감하였고, 여기까지가 두 사람의 공통점이었다. 정도전은 현실을 바꾸기 위하여, "이성계"와 손을 잡았다.
"고려 말"의 여러 지식인이 정도전처럼 개혁을 생각했다. 그들은 "성리학(性理學)"을 공통된 이념적무기(武器)로 삼아, 현실에 적용하려 했다. 자신들의 학문을 "실학(實學)"이라고 불렀다. 그들이 본 "불교(佛敎)"는 "인륜(人倫)"을 해치는 껍데기 학문이었다.
"위화도(威化島) 회군(回軍)"은 "이성계"와 개혁을 꿈꾸었던 세력이 정치의 전면에 나서게 된 사건이었다. 당시 "요동 정벌"을 추진했던 "우왕(禑王)"과 "최영(崔瑩)장군" 등은 구세력(舊勢力)으로 물러나야 했다. 그렇지만, 개혁세력은 점차 분화(分化)되어 갔다. 새 술을 새 부대에 담고 싶어 한 "정도전ㆍ조준(趙浚)", 적어도 고려왕조의 틀은 유지하려한 "이색(李穡)ㆍ권근(權近)ㆍ정몽주(鄭夢周)" 등은 대립해야 했다. "정몽주"의 죽음은 "고려"의 멸망을 재촉한 상징적 사건이었다.
3. 관계 : 정도전 (1342)ㆍ정몽주 (鄭夢周ㆍ1338)
두사람의 관계는 한 스승 "목은 이색(牧隱 李穡)"아래에서 동문수학하며, 둘도 없이 친하게 지낸 벗이지만, 조선 최고의 권력자와 고려 마지막 충신으로 극과 극의 인생을 살게 된다. 1337년 "경북 영천"에서 태어난 "정몽주"는 "3차"에 걸쳐 치러지는 과거시험에서 "3번 모두 장원"에 급제하여, 능력을 인정받았다. "충청도 단양"에서 4살 아래로 태어난(서울 출생이라는 의견도 있다) 정도전은 "정몽주"보다 2년 늦은 해에 과거시험에 합격하였고, 두 사람은 "성균관"에서 만나게 된다. "이색"을 스승으로 둔 두 사람은 서로간의 학문을 도와주며 돈독한 우애를 다졌고, "친원파(親元派)"의 계략으로 유배를 떠날 당시에도 편지를 주고받으며, 위로하였다.
이 과정에서 "정몽주"는 2년 유배생활을 끝마친 후, 뛰어난 외교술을 발휘하여 "왜(倭)나라"와 평화협정을 맺고 돌아오면서 그 위상을 떨쳤고, "정도전"은 청년들에게 유학을 가르치던 중 떠돌이 신세로 전락, 백성들을 가까이서 지켜보며 개혁의 의지를 다졌다. 두 사람은 "이성계"를 사이에 두고 다시 만나게 되었다. "고려 우왕(禑王)"을 폐위시키고, "공양왕"을 즉위시켜, 정권을 장악한 세 사람은 권력의 중심에 섰지만, 이때부터 삐걱거리기 시작하였다 정도전은 "이성계"와 함께 새 왕조에 대한 건국 의지를 밝혔지만, "정몽주"는 "고려 왕조" 내에서 점진적 개혁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먼저 움직인 사람은 "정몽주"였다. (정몽주는 자기 이익을 위해서는 변심도 서슴지 않는 기회주의자)
1392.03월 초, "정몽주"는 "이성계"가 "해주"의 사냥터에서 사냥하다가 낙마하여 부상을 입게 되자, "이성계" 세력을 제거하려 하였다. "정몽주" 등에 의하여, 정도전은 "천지(賤地)에서 기신(起身)하여, 당사(堂司)의 자리를 도둑질하였고, 천근(賤根)을 감추기 위하여, 본주(本主)를 제거하려고 모함하였다"라는 탄핵을 받고, 귀양 보내졌으나, "이방원"에 의해 모든 계획이 드러나면서, 오히려 "정몽주"가 죽음을 당하였다. 이에 정도전은 "이성계"와 함께 "조선 개국공신"으로 최고 권력자가 되지만, "이방원"이 아닌 다른 형제를 "세자(世子)"로 내세우는 바람에, "이방원"에 의하여 죽임을 당한다.
1391.09월 정도전은 "평양부윤"에 임명되었으나, "정몽주"는 그를 제거할 목적으로 "사간원ㆍ사헌부"의 간관(諫官)들을 사주하여, "정도전이 가풍(家風)이 부정(不正)하고, 파계(派系)가 불분명함에도 큰 벼슬을 받아, 조정을 어지럽히고 있다"고 탄핵하게 하여, "봉화(奉化)"로 유배당하였는데, 이때 정도전은 "정몽주"에게 극심한 반감을 품게 되었다.
이어 정도전은 "나주"로 배소(配所)가 옮겨졌으며, 두 아들은 "삭탈관직"을 당하여 평민이 되었다. 이때 "정몽주"는 사람을 보내, 정도전을 고문(拷問)하는 척하면서 죽이라고 밀명을 내렸으나, 정도전은 "정몽주"가 자객을 보낼 것을 예상하고 피하여, 극적으로 목숨을 건졌다. "정몽주"는 정도전을 처형해야 한다고 건의하였지만, "공양왕"의 반대로 1392년 봄, 귀양에서 풀려났고, 고향인 "영주(榮州)"로 돌아갔다.
이어 정도전은 "향리"에 은신하던 중, 그해 4월 "이방원ㆍ조영규"등이 "선죽교"에서 "정몽주"를 격살(擊殺)함으로써, "고려 왕조"를 지지하는 세력은 구심점을 잃고 와해되었다. 그 후 정도전은 한성부에 내려가 있다가 "정몽주"가 제거된 뒤 복직, 개경(開京)으로 상경하였다.
1392.07월, "이성계(李成桂)"는 왕위에 올라, "즉위 교서"를 발표하였다. 여기서 그는 "임금의 존재 이유"를 간략하게 밝혔다. "하늘이 백성을 낳고, 임금을 세운 것은 임금으로 하여금 백성을 길러 서로 살게 하고, 백성을 다스려 서로 편안하게 하도록 하기 위함이다.그러므로 군도(君道)에는 득실(得失)이 있고, 인심(人心)에는 복종과 배반이 있으니, 천명(天命)이 떠나가고, 머물러 있음은 여기에 달려 있다. 이것은 변하지 않는 이치이다." ("정도전"이 쓴 이 교서(敎書)는 맹자(孟子)의 혁명논리(革命論理)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임금이 임금의 임무를 다하지 못했을 때, 인심(人心)이 돌아서고 천명(천명)이 떠난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정도전"은 맹자(孟子)의 민본주의(민본주의)를 자기 사상의 근본으로 삼았다. "유교적 민본주의(民本主義)"에서는 "군주(君主)의 정통성"을 천명(天命)에 두고 있으며, 그 천명(天命)은 궁극적으로 백성에 의해 확보되고 유지된다. "맹자"에게 정치적 행위의 현실적 근거가 "민심(民心)"이라면, 이념적 근거는 하늘이라고 할 수 있다. 바로 이 점이 "유교적 민본주의"의 두드러진 특징이며, "정도전"도 이 틀을 벗어나지 않는다.
"정도전"은 "태조 이성계"를 "얼굴 마담"으로 끌어들여, 자신의 건국이념에 맞추어 "조선"을 만들어갔다. 그러나 또 다른 실력자 "이방원"이 그 건국의 길에 최대 걸림돌로 등장했는데, 결국 그는 "이방원" 세력한테 붙잡혀 참수당하고 만다.
조선의 설계자(設計者) "정도전"은 "난신적자(亂臣賊子)"의 지위로 떨어졌다. 반면에 "역성혁명(易姓革命)"에 반대하다가, "이방원"의 철퇴에 맞아 죽었던, "정몽주"는 그 "이방원"이 조선의 3대 왕(王)이 된 직후, 복권(復權)되어 "충신(忠臣)"의 자리에 오른다. 이어 "중종(中宗)" 때, 문묘(文廟)에 종사됨으로써, 조선 "주자학(朱子學)"의 태두(泰斗)가 된다. "정몽주" 복권은 "충신 이데올로기"를 확립하려는 왕권(王權)의 뜻과 "주자학(朱子學)"이념을 튼튼히 세우려는 "신진 사대부(新進 士大夫)"의 뜻이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다.
4. 관계 : 정몽주 (1338)ㆍ이성계 (1335)ㆍ이방원 (1367)
"이성계ㆍ정몽주"는 원래 친밀한 관계였으며, "이성계" 스스로 "정몽주"를 친구라고 불렀다. 그들은 모두 "친원(親元)세력"이 정국을 주도하던 시절에 같은 "친명파(親明派)"였다. 그들은 "유교"를 바탕으로 한 개혁을 함께 주도하였던 "동지적 관계"였다. 그럼에도 그들이 서로 등을 돌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단 하나였다.
"정몽주"는 "개혁"을 통하여, "유교 정치의 실현ㆍ고려 왕조의 발전"을 기대하였지만, "이성계"는 "혁명"을 통하여, 새로운 왕조를 일으키려 하였던 것이다.
"정몽주ㆍ이성계"는 모두 "유교적 왕도정치"가 실현되는 새로운 사회를 꿈꾸었다. 그러나 "정몽주"는 "유교정치"에 더 많은 비중을 두었다면, "이성계"는 "새로운 사회"에 비중을 두었다. 그리고 그것은 "역성혁명(易姓革命)"을 통하여, 새 시대를 여는 것이었다. 유교적 충절을 중요시하는 "정몽주"는 "혁명"을 생각할 수 없었다. "이성계"가 "정몽주"를 제거해야 할 이유이었다.
하지만 "이성계"는 "정몽주의 충절(忠節)"을 폄하하지 않았다. 개인적인 친밀함도 있었지만, 어차피 그가 개창하는 "유교 사회"가 신하들의 충절을 기반으로 유지될 수밖에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정몽주"를 살해한 "이방원"도 그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여, "하여가(何如歌)" 등으로 그를 회유하려 하지만, 실패하고 결국 그를 죽인다. 그러나 "이방원" 역시 그의 충절을 높이 사서, 후일 여러 벼슬을 추증하게 되는 것이다.
5. 정몽주ㆍ이방원 : 동지적 관계에서 살인을 하는 관계로
"개성 선죽교"에서 "정몽주"는 "이방원"에 의해 살해된 후, "개성 근처 공동묘지"에 묻혔다. (비문(碑文) : 고려수문하시중 정몽주(高麗守門下侍中 鄭夢周)라고 적혀 있다.) 후일 "이방원"이 "태종"으로 즉위한 후, "정몽주 묘"를 고향 "경북 영천"으로 이장하는 것을 허락한다. 그리고 "정몽주"를 "영의정"으로 추증한다. "정몽주"를 죽이기는 하였지만, 처음에는 서로를 인정하는 동지관계이었다.
이러한 관계 때문인지, 또는 자신도 왕위에 올라, 신하들에게 충절을 강조하기 위하여 인지, "고려시대" 벼슬만을 기록하는 것을 양해한다. 그를 죽일 수밖에 없었지만, 인정하였던 "이방원"이었다.
6. "단심가 (丹心歌)"의 임 향한 일편단심에서 "임"은 누구인가?
① 하여가 (何如歌) : 이방원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리, 만수산 드렁 칡이 얽힌들 그 어떠리, 우리도 이같이 하여 백년까지 누리리.
此亦何如被亦何如 (차역하여피역하여), 城隍堂後垣頹落亦何如 (성황당후원퇴락역하여), 我輩若此爲不死亦何如 (아배약차위불사역하여)
② 단심가 (丹心歌) : 정몽주 (1338)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此身死了死了 一百番更死了(차신사료사료 일백번갱사료), 白骨爲塵土 魂魄有也無 (백골위진토 혼백유야무), 向主一片丹心 寧有改理與之 (향주일편단심 영유개리여지)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을 감행하며, 2차례나 "고려의 왕"을 바꾼다.(창왕ㆍ공양왕) "정몽주"는 "공민왕" 시절부터 벼슬을 한 사람으로, 이 때 그는 무엇을 하였을까? "위화도 회군"에서 "정몽주"가 어떤 역할을 한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곧 "대제학"에 오르는 것을 보면, "이성계"를 지지하였던 사실은 분명하다.
이런 의미로 "정몽주ㆍ이성계"는 "고려 말"의 권문세족을 제거하는 일에는 동지였다. 유교적 가치에도 합치하는 일이었다. "개혁"이었다. 그들의 관계는 "위화도 회군"을 지나, "최영 장군ㆍ우왕(禑王)"을 제거하는 경우에도 여전히 동지였다. "우왕"을 제거하고, "창왕(彰王)"을 내세운 후, 1년 만에 다시 "창왕"을 제거하고, "공양왕"을 내세우는 일에도 "정몽주"는 반대는커녕, 오히려 함께 참여하였다. 그러므로 정몽주의 "임"은 고려의 왕은 분명 아니었다.
"위화도 회군"으로 권력을 잡은 "사대부 세력"은 "강경 개혁파ㆍ온건 개혁파"의 둘로 나뉜다. "고려" 말, 극도의 "무인정치"에 대항하는 세력은 "최영 장군ㆍ사대부들"이었다. "위화도 회군" 이후, "최영ㆍ우왕ㆍ창왕"이 모두 제거되었는데, 이제 남은 세력은 "사대부들" 뿐이었다.
결론적으로, "정몽주의 임"은 "고려의 왕"을 향한 것도 아니고, 더욱이 "고려 왕조"를 위한 충성심 그 자체라고도 볼 수 없는 것이다. 오히려 그 시대의 상황에서 그가 옳다고 생각한, 믿은 그의 "정치노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정몽주"를 마치 사심(私心)이 없는 오로지 "충절로 가득한 사람"이었다고 이해하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목숨을 바치면서까지 지키려고 한 그의 정치노선이, 역사적으로 판단할 때, 반드시 옳았다고 평가할 수도 없고, 그래야 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그가 자신의 정치노선을 위하여, 어떠한 회유나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죽음을 마다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분명 후세의 본보기가 될 것이지만, 중요한 것은 오로지 지조(志燥)나, 충절의 차원에서만 보아서는 안 된다는 점일 것이다.
7. 포은 정몽주 (圃隱 鄭夢周ㆍ1337~1392ㆍ55세)
고려 말기 문신ㆍ외교관ㆍ유학자ㆍ경북 우항리 출신ㆍ이색의 문인이라고 하나 기록은 없다. 손녀(정종의 서자 선성군의 부인 오천군부인)·서 손녀(한명회의 첩) • 제자 : 길재(사림파의 비조)ㆍ권우(세종대왕 스승)
"고려 개경"에 거주하였던 그는 1360년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로 출사하여 여러 벼슬을 지내고, "성균관대사성ㆍ예의판서ㆍ예문관제학ㆍ수원군" 등을 지내며, "친명파 신진사대부"로 활동하였으나, "역성혁명·고려개혁"을 놓고 갈등이 벌어졌을 때, "온건개혁"을 선택하였으며, "명나라"에 외교관으로 다녀오기도 했다. 관직은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ㆍ익양군충의백"에 이르렀다. "역성혁명파"의 조선건국에 반대하다가, 1392.4월(공양왕 4) "이성계"의 문병차 돌아가던 길에 "개경 선죽교"에서 "이방원" 일파에 의해 암살되었다.
"정도전"의 오랜 친구였으나, "역성혁명·온건개혁"을 놓고 갈등하던 중 정적으로 돌변했다. "역성혁명"에 반대하다가, "이성계·정도전" 일파를 제거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오히려 "이방원" 일파에 피살되었다. 암살 직후, "역적"으로 단죄되었으나, 후에 1401년(태종1) "태종"에 의해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의정부사"에 추증(追贈)되고, "익양부원군(益陽府院君)"에 추봉되었다. "태종"은 "정도전ㆍ남은"을 제거한 후, "정도전" 등을 격하시키기 위해, 조선 건국에 반대하고 피살당한 그를 의도적으로 충절의 상징으로 격상시켰다.
※ 선죽교 (善竹橋)
"북한 개성"에 있는 돌다리이다. 고려 말, "정몽주"가 "이성계"를 문병 갔다가 돌아올 때, "이방원(이성계 아들)"이 보낸 "조영규" 등에게 피살된 곳이다. "철퇴"를 맞아 죽었다고 한다. 다리 위 돌에 붉은 반점이 "정몽주의 피얼룩"이라 전하며, 옆에 비각이 있는데 그의 사적을 새긴 비석 2기가 안에 있다. "피얼룩"은 후일 "김구"가 1947년 그곳을 방문할 때까지도 남아있다고 한다. 길이 8.35mㆍ너비 3.36m의, 화강석으로 축조된 전형적인 "널다리"이다. "개성 남대문"에서 동쪽 약 1km 거리의 "자남산" 남쪽 개울에 있는 다리이다. "태조 왕건"이 919년(태조1) "송도(개성)"의 시가지를 정비할 때,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시대"에는 돌난간이 없었는데, 1780년(정조4) "정몽주"의 후손들이 난간을 설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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