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어도 (傳御刀)"는 "태종 이방원 (太宗ㆍ1367~1422ㆍ55세)"이 "태조 이성계 (太祖ㆍ1335~1408ㆍ73세)"에게 선물한 검이라고 한다. 현재 전해지는 "전어도"는 "이성계"가 실제로 사용한 "진품"이 아니라, "이방원"이 아버지의 환심을 사기 위해 만든 "모조품"이라고 한다.
1. 태조 이성계 (太祖ㆍ1335~1408ㆍ재위 1392~1398 (6년)ㆍ73세)
고려 말 장군ㆍ정치가ㆍ조선을 건국한 초대 국왕ㆍ본관 전주(全州)ㆍ송헌거사(松軒居士)
1335년, "고려 동북면 화령(함남 금야군)"에서 "이자춘"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공민왕ㆍ우왕" 시대에 홍건적과 왜구 토벌에서 영웅적 공로를 쌓아 입지를 다졌다. 1388년(우왕 14) 철령 이북 영토 문제를 두고 "명나라"와 갈등이 빚어지자, 이에 대한 타개책으로 "우왕"은 "명나라 요동 정벌"을 명한다. "우군도통사(右軍都統使)"로서 요동 정벌을 위하여 북진하다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정권을 장악하였고, "공양왕"에게서 선위 형식으로 "개경 수창궁"에서 1392년 즉위함으로써 조선을 개국하였다.
"정도전ㆍ남은ㆍ조준ㆍ윤소종"등의 급진개혁파 사대부들과 전제 개혁을 비롯한 각종 사회 개혁을 단행한 끝에 "조선"을 개국했고, "한양"으로 천도해 왕조 기틀을 다졌다. 퇴위 후 "태상왕"이 되었다.
2. 전어도 (傳御刀) : 고려 말~ 조선 초기의 도검
"태종 이방원"이 "태조 이성계"에게 선물한 검이라고 한다. 현재 전해지는 "전어도"는 "이성계"가 실제로 사용한 "진품"이 아니라, "이방원"이 아버지의 환심을 사기 위해 만든 "모조품"이라고 한다.
• 장검ㆍ길이 : 147cmㆍ칼날 (도신): 92.0cmㆍ칼집 길이 : 103cmㆍ자루 : 55cm
• 원래 "창덕궁"에 소장되어 있었다가, 현재는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전시 중
• 손잡이는 "상어 가죽"으로 감싸고, 머리에는 "용 머리"를 조각했는데, 채색한 뒤 붉은색 매듭 끈을 드리워 장식했다. 검의 끝부분이 "역날검"처럼 생겨 오해하기 쉽지만, "역날검"은 아니며 끝부분 만이 양날인 "의사도"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크기를 볼 때, 실전용이 아닌 "지휘도"였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는데, 후술할 전설이나 검이 모조품이라는 것을 미루어보면 "전어도"의 원본은 이유야 어찌 되었건 1번 부러졌다는 이야기다. 이는 실전에서 쓰이지 않은 칼로써는 좀처럼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칼의 끝부분만 양날로 만드는 것은 베기 외에 찌르기에도 적합하게 만들면서 칼날 전체를 양날로 만드는 것에 비해, "내구성이 좋다"는 강점을 가지는데, 그러한 칼날이 부러졌다는 것이다.
"이성계"가 활동했던 "고려 말기" 시절, "일본"은 "전어도"처럼 칼날 길이가 90cm를 흔히 넘기던 "오오타치"가 이미 등장한 시점이며, 이 시기 왜구는 정규병에 가까웠다.
한참 나중에 벌어진 "임진왜란"에서 "오오타치" 및 길이가 더 긴 일본도에 대응하기 위해 "환도"의 길이가 다시 늘어나고, "명나라"로부터 "쌍수도"를 들여왔던 걸 보면 이러한 길이의 칼은 "고려 말기"에서도 흔히 사용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해 볼 수 있다. 칼의 모양이 워낙 특이하다 보니, "전어도"가 사실은 후세에 만들어진 창작품이라는 주장이 있었으나 "러시아 체르냐찌노 발해 고분"에서 크기나 형태가 전어도와 상당히 유사한 철검이 발굴됨에 따라 이러한 주장은 쏙 들어가게 되었다.
3. 전설
"나옹 대사(무학대사 스승)"가 "함흥"을 지날 때, 한 묏자리를 보고 "왕이 날 자리"라 하였다. 마침 "이성계의 종"이 그 말을 듣고, "이자춘(이성계 아버지)"에게 고했다. "이자춘"은 "나옹 대사"를 찾아가 이를 재차 물었으며, "나옹 대사"는 굳게 다물고 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 "동자승 무학"이 "이자춘"에게 슬며시 알려주어, 즉시 그 묘자리로 조상의 묘를 이장하기 위해 땅을 파자, "칼 1자루"가 나왔다. 찬란한 금빛에 용머리로 되어있는 칼자루 끝은 예사롭지 않았고 "이자춘"은 "임금이 될 자의 칼"이라며, 크게 기뻐하고 아들 "이성계"에게 건네주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이성계" 일파가 "고려 우왕 (1388년 위화도 회군 이후, 폐위)"을 죽일 때, "용의 후손"이라 그 어떤 무기도 통하지 않자, "이성계"가 이 검으로 손수 베어 죽였다는 일화가 있다. 그 뒤 "우왕"이 가지고 있던 "사진참사검"이 저주를 내려, "이성계"의 수하들이 피를 토하며 죽어가자 "무학대사"의 조언에 따라, "사진참사검" 옆에 이 검을 꽂아 저주를 막았고, 두 칼은 3일 밤낮으로 싸우며 울다가 "전어도"는 박살나고, "사진참사검"은 금이 갔다고 한다.
"전어도ㆍ사진참사검"은 "무학대사"가 거두었고, 현재는 행방이 묘연하다고 한다. 비록 "사진참사검"은 망가졌지만, "이성계의 혈통에" 내린 저주가 남아 있어서 그것을 막기 위해 조선 왕실에서는 "용의 기운"을 가진 "사진참사검"과는 정반대로 "호랑이의 기운"이 담긴 "사인참사검"을 신하들의 반발을 무시하고 정기적으로 제작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조선 > 인물 • 악녀 (10인) • 부덕 (6인)'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려 삼은 (三隱) : 이색 ㆍ정몽주ㆍ길재 (2) | 2022.10.08 |
---|---|
무학대사 (無學)ㆍ이성계의 꿈 해몽 (0) | 2022.10.08 |
정도전 ⑤ 삼봉 (三峰)의 생애ㆍ죽음 (2) | 2022.10.07 |
정도전 ④ 건국 : 주요 인물은 누구? (이성계ㆍ최영) (2) | 2022.10.07 |
정도전 ③ 관계 : 정몽주ㆍ이방원ㆍ이성계 (2) | 2022.10.07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