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녕대군 (讓寧大君ㆍ1394~1462ㆍ68세)"은 왕세자ㆍ화가ㆍ시인ㆍ서예가ㆍ명필가로, "태종ㆍ원경왕후 민씨"의 장남이자, "세종"의 큰형이며, "숭례문(崇禮門)" 현판 작성자이다. 원래는 "태종 이방원 (太宗ㆍ1367~1422ㆍ재위 1400~1418(18년)ㆍ55세)"의 4남으로, "양녕대군" 위로 아들 3명을 더 두었지만 모두 어린 시절에 요절했기에 장남이 되었다.
1. 조선시대 5대 개차반 (왕족)
① 양녕대군 (讓寧大君ㆍ1394~1462ㆍ68세) : 왕세자ㆍ화가ㆍ시인ㆍ서예가ㆍ명필가
② 사도세자 (思悼世子ㆍ1735~1762ㆍ27세) : 궁녀ㆍ환관 100여 명 살해ㆍ정조 부친
③ 임해군 (臨海君ㆍ1572~1609ㆍ37세) : 선조 1째 아들ㆍ광해군의 동복형
④ 정원군 (定遠君ㆍ1580~1619ㆍ39세) : 선조 3째 아들ㆍ인조의 부친ㆍ광해군의 바로 아래 동생
⑤ 순화군 (順和君ㆍ1580~1607ㆍ27세 ): 선조의 4째 아들
2. 양녕대군 (讓寧大君ㆍ1394~1462ㆍ68세) : 왕세자ㆍ화가ㆍ시인ㆍ서예가ㆍ명필가
"양녕대군"의 글씨는 조선조 명필들 중에서도 최고로 친다. 부르는 게 값일 정도이다. "세종"이 죽은 후에는 장손인 "단종"을 몰아내기 위해 "수양대군"이 일으킨 "계유정난(癸酉靖難)"때, "효령대군"과 함께, 적극적으로 동조하고, "단종"을 죽이는 데 앞장섯다.
능력이 더 뛰어난 동생 "충녕대군(忠寧大君ㆍ세종(世宗)ㆍ1397~1450ㆍ53세ㆍ재위 1418~1450)"을 위해 일부러 놀고 날뛰며 불량하게 행동하면서 폐세자가 된 뒤, "충녕"에게 세자 자리를 양보한 대인배 정도로 미화되었지만, 실제로는 배경ㆍ자신의 권력으로 평생동안 온갖 유흥ㆍ패륜을 일삼다가 "전 중추 부사 곽선(무신)의 첩인 "어리"와의 간통 사건을 기점으로 폐세자가 되었다. 자중하고 반성해도 모자랄 때, 결정적인 충돌이 일어나게 된다.
"양녕대군"이 장문의 항의서를 "태종"에게 보낸 것으로, "아버지도 여자를 거느리고 탐하였건만 왜 자신은 그러면 안 되냐, 나중에 자신이 왕이 된 후 어쩌려고 그러냐"는 식의 협박에 가까운 항의서였던 것이다. 결국 "태종"은 대신들을 모아놓고, "세자폐위"를 발표하고, "양녕"은 유배를 떠난다.
처음엔 "양녕"의 아들을 세자로 올릴까 했으나, 후환이 생길까하여 3째 아들 "충녕"을 세자로 삼았는데 이렇게 "세종대왕"이 탄생하게 된다. "양녕대군"의 도를 넘는 악행에 "태종"은 결국 그를 폐위할 때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폐위) 교서를 전할 때, "양녕"은 눈물을 흘리지 않았고, 조금도 비탄(悲嘆)하는 모습은 없었다. "태종ㆍ원경왕후 민씨"는 자식 셋을 낳자마자 잃었고, "양녕대군"은 왕자이기 이전에 특별한 아들이었기 때문에 너무 오냐오냐해서 교육에 문제가 있었을 가능성이 주로 제기된다.
※ 계유정난(癸酉靖難) : 1453.11.10일(단종1ㆍ음10.10), "수양대군(당시 36세ㆍ세조ㆍ1417~1468ㆍ49세ㆍ재위 1455~1468ㆍ세종2째 아들ㆍ1째-문종대왕)"이 "세종의 여러 대군들(안평대군(3째 아들)등)ㆍ김종서(1383~1453)ㆍ황보인(1387~1453)ㆍ남지(1392~1454)"를 귀양 보내거나 제거하고, 마지막으로 "단종(1441~1457ㆍ16세ㆍ재위 1452~1455)" 제거하여, 정권을 장악한 사건
※ 효령대군 (孝寧大君ㆍ1396~1486ㆍ90세): 왕자ㆍ서예가ㆍ명필가 : "양녕대군"과 달리, 처음부터 세자가 아니었고, "양녕대군"이 폐위될 때, 잠시 세자가 자신에게 올 수도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지는 몰라도, "세종"이 세자로 책봉된 이후에는 "불교"에 심취했다. 조선의 "숭유억불" 정책으로부터, "불교"를 옹호ㆍ보호하는 역할을 했다. "세종" 즉위 후에도 "문종ㆍ단종ㆍ세조ㆍ예종ㆍ성종" 등 6대에 걸쳐서 장수를 누렸다. "계유정난(癸酉靖難)"때, 적극적으로 동조한다.
① 변명의 여지가 없는 여자 문제 : 어리(於里)ㆍ봉지련ㆍ소앵ㆍ초궁장ㆍ칠점생
• 세자의 아이를 낳은 여인 "어리 (於里)", 자살하다.
결정판은 "어리 (於里)"와의 위험한 애정행각이라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결국 폐위당했고, 비운의 여인 "어리" 역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1417년(태종17ㆍ24살 때), 2월 세자의 총애를 받던 "악공 이오방"이 몰래 동궁에 들어가, "전 중추 부사 곽선(무신)의 첩인 "어리"의 자색과 제주가 뛰어나다"고 소근거림으로써 시작됐다. 궁을 뛰쳐나온 세자는 "남편(곽선)이 있는 몸"이라고 거절한 "어리"를 겁박한 뒤, 동궁에 불러들였다.
"태종"은 세자를 타락에 빠뜨린 "이오방ㆍ3형제(구종수ㆍ구종지ㆍ구종유)" 등을 참형에 처하는 것으로 사건을 마무리지었다. 쫓겨난 "어리"를 세자가 장인인 "김한로(1358~?)"의 집(처가)에 몰래 숨겨두었다가, 다시 입궁시켜 "세자 전"에 들였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어리"가 덜컥 세자의 아이를 낳은 것이다.
"태종"은 이때 "세자를 바꿔야겠다"고 마음을 굳힌 것 같다. 이때 다시 내쫓긴 "어리"는 결국 폐위된 "세자(양녕대군)" 때문에 결국 죽음을 맞이하고 만다. 새로운 세자(충녕대군)가 옥좌에 오른 후인 1419년(세종1) 1월, "경기도 광주"에 연금되다시피한 "양녕대군"이 밤에 담을 넘어 도망가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때 조정 여론이 모두 "어리 때문에 모든 사단이 일어났다"고 수근거렸다. 그러자 "어리"는 너무나 분한 마음에 목을 매어 죽고 말았다.
• 전하의 여인들은 되고, 저의 여인들은 안된다는 말입니까?
"태종"이 "세자(양녕)"이 그토록 아꼈던 여인 "어리(於里)"를 내쫓자, 세자는 부왕에게 작심한 듯 큰 글씨로 2장이나 되는 자필편지(친서)를 올린다. (1418.05.30일) 그것이 결정타였다. "전하(태종)의 시녀는 모두 받아들이면서 왜 신(세자)의 첩들은 내보내는 거냐"는 직격탄이었다.
"전하의 시녀는 다 궁중에 들이는데, 어찌 다 중하게 생각하여 이를 받아들입니까? 신(세자)의 여러 첩은 다 내보내어 울부짖음이 사방에 이르고 원망이 나라 안에 가득찹니다. (태종실록) " 세자는 한발 더나아가 "전하께서는 어찌 스스로에게서 반성을 구하지 않으시냐"고 까지 치받았다. 폐위를 각오하지 않으면 올릴 수 없는 편지였다.
• 1410년 (태종10ㆍ17살 때), 11월 중국 사신의 잔치연에 불러나온 "기생 봉지련"에게 흠뻑 빠져 그 집을 찾아가 사통한 뒤, 궁중으로 불러들였다.
• 1413년 (태종13ㆍ20살 때), 3월 "소앵 (평양기생)"을 궁중으로 불러들였다가 적발됐다.
"태종"은 "봉지련ㆍ소앵"을 내쫓고, 관련자들을 처벌하는 것으로 마무리지었지만, 세자는 단식투쟁
• 1414년 (태종14ㆍ21살 때), 10월 세자가 매형인 "이백강 (1381~1451)"의 집에서 벌어진 종친연회에서 밤이 깊도록 "기생 초궁장"을 끼고 술을 마신 게 "태종"의 꾸지람을 샀다.
"태종"은 "세자라는 작자가 다른 동생(대군)들하고 같냐. 그냥 예만 갖추고 돌아와야지 그렇게 방종하게 즐겼단 말이냐"고 호되게 꾸짖었다. 그런데 7개월 뒤인 1415년(태종15) "태종실록"을 보면, "세자가 여러 달 사통한 초궁장"은 다름아닌 상왕이자 큰아버지인 "정종"을 모신 기생이었다는 내용이 등장한다. 실록은 "세자가 그 같은 사실을 몰랐다"고 했지만, 큰아버지의 여인을 범한 패륜을 저질렀음을 알 수 있다. "초궁장"은 이 일로 쫓겨났다.
• 1416년(태종16ㆍ23살 때), 3월 세자가 매형인 "이백강(1381~1451)"이 축첩한 "기생 칠점생"을 궁궐로 데리고 오려 했다.
그러자 보다 못한 동생 "충녕대군"이 "친척의 첩을 이렇게 데려오면 어떻게 하느냐"고 정색했다. 이 일은 "세자(양녕대군)ㆍ동생(충녕대군ㆍ세종)"의 사이를 갈라놓은 결정적인 사건이 됐다. "충녕대군이 "안 된다"는 말을 반복하자 세자는 마음속으로 노했다. 하지만 (지당한 말인지라) 동생의 말을 따랐는데 후에는 충녕대군과 가는 길(道)이 달라 마음으로 매우 꺼려했다."(태종실록)
• 여성편력 세자 때문에 죽은 어린 내관
1417년(태종17ㆍ24살 때), 4월 "태종실록"을 보면 세자의 외도를 도운 "소친시(임금 곁에서 잔심부름 하는 어린 사내아이) 이귀수ㆍ진포"를 참형에 처하는 등 관련자들을 처벌했다는 기록이 등장한다. 즉 세자의 곁에서 알랑거리던 "진포"라는 인물이 "세자에게 바칠 예쁜 여자가 있느냐"고 묻자, "이귀수"가 군기시 관리를 지낸 "방유신의 손녀"를 선택했다.
세자는 그 집을 2번이나 찾아가 기어코 "방유신 손녀"와 강제로 사통하고 새벽에 궁궐로 돌아왔다. 이 사건이 발각되자, "태종"은 "이귀수ㆍ진포"를 참형에 처했다. "태종실록"은 "이귀수의 참형에 불만을 품은 세자가 수업거부 투쟁을 벌였다"(04.24일)고 했다. "진포"는 물론 "이귀수"의 죄도 없다 할 수는 없지만, 세자 대신 당한 형벌치고는 너무도 혹독하다.
• "우리 친구하자"며, 옷을 벗어준 "난행"의 세자
세자는 선공감 부정(종 3품) "삼형제(구종수ㆍ구종지ㆍ구종유)", 서방색(궁궐에 지필을 공급하는 관아) 관리인 "진포", 악공 "이오방ㆍ이법화" 등과 사적으로 교유했다. 이들은 밤마다 "종묘 문"으로 들어가 대나무 다리를 만들어 궁궐의 담장을 넘어 "세자궁"으로 들어갔다. 세자와 "구종수"는 박희(놀음)를 했고, "이오방"은 거문고를 연주하며 밤새도록 놀았다.
세자는 "구종수 형제ㆍ진포ㆍ이오방" 등과 함께 야음을 틈타 미복 차림으로 궁궐 밖 "구종수"의 집 등에서 역시 시간가는 줄 모르고 놀았다. "구종수" 등은 세자에게 "오늘 일은 꿈만 같다. 세자께서는 (즉위 후에도) 저희 형제를 대우해달라"고 청했고, 취기가 오르자 한발 더 나아갔다. "저하께서 저희를 사반(私伴ㆍ고관이 사사롭게 부리는 반당)으로 삼아주소서."
감히 장차 임금이 될 세자의 충직한 비선 노릇을 자청한 것이다. 세자는 "그거 좋다"면서 자신의 옷을 벗어 "구종수"에게 입혀주었다. 철없다고 하기에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행태였다.
• 아들의 애첩을 강탈
1450년(세종32)의 "세종실록"을 보면, "이혜는 아비(양녕대군)에게 애첩을 빼앗긴 뒤 심화병을 얻어 주정을 부리다 사람을 죽인 까닭에" (세종실록 1450.02.11일) 1447년(세종27) 10월 "양녕"의 적 3남인 이혜(李譿ㆍ서산군(瑞山君))는 술주정을 하다가 살인을 저질러 유배형에 처해졌고, 노비 1명을 또 죽이는 등 해괴한 행동을 일삼았다. 1451년(문종1) 2월 "이혜"가 쇠못으로 여종을 찌르고, 그 집에 불을 지른 뒤 도망친 일이 벌어졌다. "이혜"는 결국 2달 뒤 목을 매달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② 조카들의 죽음 촉구 : 조카들 (안평대군ㆍ금성대군)을 죽이라고 촉구한 삼촌
"수양대군(세조)"이 "계유정난(1453)"을 일으키자, "안평대군의 악역이 지극히 중하니 마땅히 법률에 따라 처벌하고 처벌받은 자들은 효수해야 한다"는 주청을 올렸다. "양녕대군(세종 형)ㆍ안평대군(세종 아들)"은 삼촌ㆍ조카 사이이다. 삼촌이라는 자가 "조카를 살려달라"는 주청을 올리지는 못할망정, 도리어 "대역죄인이니 죽이라"고 했다니 이게 정상인가?
"세조" 조차 "양녕"의 주청이 올라오자, "골육지친인 용(안평대군)을 어찌 죽일 수 있겠느냐"고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러나 "안평"은 결국 사사됐다. 1457년(세조3), "양녕"은 "단종 복위운동"을 펼친 다른 조카 "금성대군(세종 6남ㆍ1426~1457) 등을 "이 변란에 이유(금성대군)이 노산군(단종)을 끼고 종사를 위태롭게 했다"면서 엄중한 처벌을 촉구했다. "금성"은 사사됐고, "세조실록"은 "노산군은 금성대군의 사사 소식을 듣고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고 기록했다. "양녕"은 17살에 불과한 동생의 손자(단종)이 자결하는데 일조한 셈이다.
• 살아서는 임금(세종)의 형이요, 죽어서는 부처(효령)의 형이다. "양녕대군"이 미친 척하니, "효령대군"이 "장차 형님이 폐위되고 내 차례가 되겠구나"라고 여기고 열심히 글 공부를 했다는 것이다. 그러자 "양녕"이 지나다가 들어와 "효령"을 발로 차면서 "어리석다. 넌 충녕에게 성덕이 있는 것을 모르느냐"고 했다. < "연려실기술" 양녕대군의 폐위 >
• 나이 10세 때 세자 책봉을 받았지만, 16~17세 때 성스러운 덕을 타고난 세종에게 하늘도, 인심도 쏠린 것을 알고는 일부러 미친 척하면서, 하루같이 술과 기생 속에 보내 < 1789년(정조13) 양녕대군의 사당을 위해 직접 지은 "지덕사기(至德祠記)"의 내용 >
3. 사도세자 (思悼世子ㆍ1735~1762ㆍ27세): 궁녀ㆍ환관 100여 명 살해ㆍ정조 부친
"정조"의 부친으로, 어릴 때, 영특하기 그지 없던 세자가 삐뚤어지고 엇나가 이후에는 의대증(옷을 입으면 발작하는 증세)을 보이는가 하면, 우물에 빠져 죽으려 자살을 시도하기도 한다. 사사건건 망신을 주고 화를 내는 "영조" 때문에 강박증이 심해져 정신적으로 불안정해진 것이다. 이후엔 짐승들을 죽이며 분을 풀었다는 기록도 있다. 전형적인 광기를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엔 이런 증세가 심각해져 자신의 아이를 낳은 후궁까지 죽이는 짓을 저지르고 만다.
바로 "경빈 박씨"로 알려진, 나인 출신 "후궁 빙애"를 죽인 일이다. 어떤 나인ㆍ후궁보다 "빙애"를 총애했던 것 같지만, "빙애"를 좋아하지 않았던 "혜경궁"은 그녀를 "요악하다"고 묘사한다. 그럼에도 "은전군ㆍ청근현주"의 어미였던 "빙애"가 맞아 죽을 땐 가련하고 참혹하였던 모양이었다. "정조"가 읽고, 제목을 "천유록"에서 "대천록"으로 직접 고쳐주었다는 책 속에 "사도세자"가 죽인 사람의 숫자가 나온다. (世子戕殺中官內人奴屬將至百餘 而烙刑等慘) "세자가 죽인 중관ㆍ내인ㆍ노속이 거의 100여 명에 이르고, 낙형 등이 참혹하다."
• 한중록 : 1757.06월부터 , 경모궁(사도세자)의 화병이 더해 사람을 죽이기 시작했다.
그때 당번내관 김한채를 먼저 죽이셨다. 그 머리를 들고 들어와 내인들에게 효시하였다. 내가 그때 사람 머리 벤 것을 처음 보았는데 흉하고 놀랍기가 이를 데 없었다. 사람을 죽인 후에야 마음이 조금 풀리시는지 그때 다시 내인을 여럿 죽였다.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 간 "나경언"의 고변이 있던 그 날 밤, "영조"가 뜰에 엎드린 세자에게 소리친 그 첫 마디 역시 살인에 대한 것이었다. "네가 왕손의 어미를 때려 죽이지 않았느냐." 또한, "한중록"에 의하면 그는 어머니인 "선희궁 영빈 이씨"의 내인을 죽인 사실도 나오는데, 어머니를 모시는 내인을 살해한 행위는 "효"를 강조하는 유교국가에서는 용납될 수준이 아니었다.
점점 심각해져 심지어 친여동생인 "화완옹주"에게도 칼을 들이댔고, 어머니조차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간신히 죽음에서 벗어나는 사태까지 발생하였다. 다만, "정조" 입장에서 생부의 기록을 지우기 위해, "승정원 일기"는 오려지고 세검정에서 씻겨 사라져버렸다. 오려지고 통째로 찢겨져 나간 곳이 100여 곳이 넘는다. "승정원 일기" 곳곳에는 "이 아래 한 장은 칼로 삭제되었다. 병신년 전교로 인해 세초했다."
4. 임해군 (선조 1째)ㆍ정원군 (인조 부친ㆍ선조 3째)ㆍ순화군 (선조 4째)
① 임해군 (臨海君ㆍ1572~1609ㆍ37세) : 선조 1째 아들ㆍ광해군의 동복형
선조의 아들 중, 이복동생인 "정원군ㆍ순화군" 등과 더불어 난폭한 행동을 일삼고, 관료를 살해하는 등 전대미문의 행동을 일삼아 대신들이 처벌할 것을 강하게 청하였지만, "선조"의 비호로 무사하였다. 대신 "유희서ㆍ소충한" 등이 살해되었으며, 큰어머니인 "하원군의 아내 이씨"는 모욕을 당했다. "광해군"이 즉위하자, 사병을 양성하여 반역을 꾀한다는 "북인"의 탄핵을 받아 "교동"으로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사사되었다. 1609년(광해군1), "이정표(李廷彪)"는 그를 핍박하며 독을 마시게 했으나 따르지 않자, 목졸라 죽였다.
< 악행 >
• "임해군"은 큰어머니를 꾸짖고 욕보이며, 백성들의 전답ㆍ재산을 갈취하고, 노비를 빼앗았다. 수령을 욕보였을 뿐만 아니라, 재상을 살해하였다. 시비가 붙으면 상대의 신분에 상관없이 노복들을 시켜 구타하거나 모욕을 주는 행위를 일삼았으나, "선조"는 "임해군"의 죄를 감싸주었다. 도적을 시켜, "대신 유희서"를 죽이자, "유희서"의 고종사촌이자 당시 영의정이었던 "이덕형"이 "유희서"의 아들을 사면해줄 것과 "유희서"의 죽음에 대한 여러 일들과 "임해군"의 처벌을 왕에게 아뢰었으나, 선조는 이를 듣지 않았다. 마침내 "이덕형"은 사직하고 영의정에서 물러났다.
• "임해군"은 궁노를 풀어 남의 산택을 멋대로 차지하고, 재물이 많은 시장 상인에게 누명을 씌워 은포를 받아내었으며, 남의 지아비를 죽이고 아내를 억지로 궁노와 짝지어 주었다. 뿐만 아니라 "양주 백련사(白蓮寺)"에서 시주받은 재물을 빼앗아갔으며, 자신의 궁가에 산채(山菜)동물을 바치게 하였다.
• 무뢰배들이 "임해군ㆍ순화군" 등 왕자를 사칭하고 다니며 여염집에 피해를 입히자, "임해군"은 "선조"에게 평소 왕자들의 행실에 대해 대죄하였는데, 선조는 괜찮다고 하며 사칭하는 무리들만 잡아들이게 하였다.
• "임해군"의 난폭함으로 조정ㆍ민간에서 고통스러워하자, 마침내 "선조"는 "임해군"이 빼앗은 노비를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게 하였다.
② 정원군 (定遠君ㆍ1580~1619ㆍ39세) : 선조 3째 아들ㆍ인조의 부친ㆍ광해군의 바로 아래 동생
동복 형제이자 3째 형 "의안군"은 일찍이 요절하고, 4째 형 "신성군"도 임진왜란 초기 요절하여, 실질적으로 "선조"의 3째 아들이자 "광해군"의 바로 아래 동생이었다. "선조실록"에는 "성품이 포악하고 행동이 방탕하여 당시 사람들에게 손가락질과 탄핵을 받았다"라고 적혀있다. "임해군ㆍ순화군"을 능가하는 "선조"의 아들들 중 최악의 망나니였지만, 아들이 왕(인조)이 됨에 따라 과도한 띄워주기를 했다.
"선조실록 순화군 졸기(卒記)"에는 "비록 임해군ㆍ정원군의 행패보다는 덜했음에도, 무고한 사람을 죽인 숫자가 해마다 10여 명을 헤아리기에 백성들이 그를 두려워하여 호환(壺患)을 피하듯 했다"는 부분이 있어, 1년에 10명씩은 무고한 사람들을 이유없이 갖은 핑계대며 죽이고, 온갖 행패를 부린 사이코패스인 "순화군"이 "정원군"보다는 덜하다는 평가가 있어서 얼마나 "정원군"이 행실 및 인성이 나빴는지 알만하다.
"광해군" 즉위 이후, 모후 "인빈 김씨"가 생전 "공빈 김씨(광해군의 모후)"의 숙적이었던 탓에 일체의 정치적 활동을 삼가고 조용히 근신하였다. 그러나 아들 "능창군"이 역모로 몰려 죽는 것을 보았다. 이 때문에 아들 "인조"가 "인조반정"을 일으키는 데에 빌미를 주어, "광해군"을 폐위시키는 것에 대해 마음을 굳히게 되었다. 3남 "능창군"이 죽은 뒤 그는 홧병을 얻었고, 술을 더 가까이 했다.
그는 술을 좋아하였는데, 후일 "인조" 즉위 후, 편찬된 "광해군 일기"에 의하면, "걱정과 답답한 심정으로 지내느라 술을 많이 마셔서 병까지 들었다"고 한다. 그는 늘 말하기를 "나는 해가 뜨면 간밤에 무사하게 지낸 것을 알겠고, 날이 저물면 오늘이 다행히 지나간 것을 알겠다. 오직 바라는 것은 일찍 집의 창문 아래에서 죽어 지하의 선왕(선조)을 따라가는 것일 뿐이다."라고 했다 한다. "한성 회현방(會賢坊)"에서 술병ㆍ홧병으로 사망하였다.
< 악행 >
• 자신의 영향력을 이용하여, 과거 시험에 처남을 합격시키는 부정을 저질러 "사헌부"에 탄핵당하거나 군적 회피자를 돈 받고 자기 집에 숨겨주거나 하는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 1602년(선조35), "정원군"의 가노들이 "하원군의 부인(선조 형수)"을 납치하는 강력 범죄도 저질렀다. 노복들과 창기(娼妓) 대여섯명이 "하원군" 집 앞을 지나다가 "하원군"의 노비와 싸우게 되었는데 "하원군 부인"이 나와서 말리려다가 도리어 집이 습격당하고 노비들한테 끌려가 감금된 것이다. 혈연으로는 큰어머니가 되는 "하원군 부인"이 납치된 사건임에도 오히려 자기 집 노비들의 말을 듣고 말리는 종친들을 되려 나무랬고, 그 과정에서 "하원군" 종들은 아주 신나게 두들겨 맞았다.
③ 순화군 (順和君ㆍ1580~1607ㆍ27세 ): 선조의 4째 아들
어려서부터 잔인한 성격을 지녔으며, 동물을 잔혹하게 학대하였다. 성격이 포악하여 사람을 함부로 죽이거나, 민가의 재물을 약탈하는 등의 행동을 하여 "사헌부ㆍ사간원"으로부터 거듭 탄핵당했다. 특히 술만 마시면 행패를 부리고 남의 재산을 빼앗았다. "임해군ㆍ정원군"의 행패보다는 덜했으나 무고한 사람을 살해한 것이 해마다 10여 명이 되었다. 이러한 광폭한 행동으로 인해 "선조"에 의해 "군(君)"의 작위를 박탈당하였다. "이수준"의 집에 감금된 상태에서 중풍에 걸려 병석에 누워있다가 사망했다.
< 악행 >
• 1600년(선조33), "의인왕후"의 상 중에 빈전에서 어머니의 시녀를 겁간하였다. 국모의 상중에 성관계를 갖으면 국법에 의해 엄하게 처벌되었는데, "순화군"은 모후의 상중에 강간죄까지 저질렀으므로 "교살형"에 처해져야 했다. "선조"는 비망기로 "순화군"에게 죄줄 것을 명하고 외방으로 귀양보냈다.
• 1601년(선조34), "순화군"이 "나물(菜物)이 좋지 않다"고 수문을 부수고 나와 원두(園頭)를 관리하는 종(奴) 임동(林同)의 숙모를 손수 잡아들여다 20여 차례 형문하였는데 직접 결장(決杖)하였다. 읍내에 사는 "김영수(金永水)"가 궁에 상직(上直)하러 나갔을 때, 수문으로 잡아들여다 20여 차례 형문하였는데 직접 결장하고, 그가 입고 있던 의복을 전부 불태웠다.
"순화군"이 직접 밖으로 나와, 쇠고기와 생선 등을 올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창고를 지키고 출납을 관리하는 종(奴)인 어리손(於里孫)의 가옥을 불을 질러 전소시켰으며, 이달 27일 초혼에는 일용하는 촉병(燭柄)을 올리는 일로 나간화공(畫工) 정업수(鄭業水)를 수문으로 잡아 들여다 40여 차례 형문하였는데 손수 결장하였다.
• 1601년(선조34), "순화군"이 약주를 가지고 간 원금(元金)을 수문으로 잡아들여 무수히 구타하였고, 12일에는 약주를 가지고 간 여종 주질재(注叱介)를 수문으로 잡아들여, 옷을 전부 벗겨 알몸으로 결박하고 날이 샐 때까지 풀어주지 않았다고 하며, 18일에는 읍내에 사는 군사 장석을시(張石乙屎)가 그의 집에 역질이 들어 역신을 쫓고 있을 때, 장석을시와 맹인 윤화(允化)의 아내 맹무녀(盲巫女) 등을 잡아가 수문으로 끌어들여, "순화군"이 직접 결박하고 1차례 형문한 뒤에 밤새도록 매어두었다. 그리고 맹무녀의 윗니와 아랫니 각 1개, 장석을시의 윗니와 아랫니 9개를 작은 쇠뭉치로 때려 깨고 또 집게로 잡아 빼 유혈이 얼굴에 낭자하였으며, 피가 목구멍에 차 숨을 쉬지 못하였다. 맹무녀는 궁 안에서 즉시 치사하였고, 장석을시는 이튿날 수문으로 끌어내 왔는데, 목숨이 위급하여 곧 죽을 상황이었다.
• 1604년(선조37), 위리안치에서 벗어난 뒤 또다시 살인을 저질렀다. "순화군"이 위리에서 벗어난 뒤부터 더욱 흉학한 짓을 마구하여 거리를 드나들면서 사람을 만나면 번번이 죽였었는데, 이날에도 두 여인을 죽여 참혹한 독기를 뿌린 것이 극도에 달하였다.
• 1606년(선조39), "순화군"은 중풍을 앓는 중에도 하인들을 시켜, 외숙부인 김언희를 결박하여 구타하고 잡아다가 가두는 등의 패륜을 저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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