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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 - 서양

제국 - 신성 로마 제국 (1254~1806)

by 당대 제일 2022. 9.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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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 로마제국 (Sacrum Romanum Imperium)"은 중세 초기에 형성되어 1806년 해체될 때까지 "중앙유럽"에서 발달한 "다민족 영토복합체 제국"이다. 제국의 복합체를 구성한 영토 가운데 중 가장 큰 국가는 "독일 왕국"이었고, 그 외로 "보헤미아 왕국부르군트 왕국이탈리아 왕국" 등이 있었다.

 

1.  신성 로마 제국 (Sacrum Romanum Imperiumㆍ1254~ 1806)

중세의 "신성 로마 제국""교황청"과 함께, 서유럽에서 가장 지위가 높고, 중요한 곳이었다초기 "신성 로마 제국"은 정치적 관점과 그리스도교도의 역사에서 각각 해석할 수 있다"신성 로마 제국""독일이탈리아" 등의 왕국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지만, 각 영역은 자국의 체성을 유지했다. "신성로마 제국"의 기원기능정당성에 대한 해석은 주로 3가지 관점으로 나뉜다.

제국이 궁극적으로 교황의 자유재량 아래 있다고 보는 "교황 측"의 이론

황제의 권력과 권위의 원천으로서 기능한다는 제국 또는 "프랑크"의 이론

로마 인민에게서 권력을 위임받은 것이라는 "로마인"의 이론

"신성 로마 제국"이라는 이름은 1254년 이후부터 쓰이다가, 1806년 해체될 때까지 중앙유럽에서 발달한 "다민족(대부분이 독일계)" 영토복합체다. "신성 로마 제국"이라는 복합체를 구성한 영토들 중 가장 큰 것은 "독일 왕국"이었고, 그 외에 왕국으로 "보헤미아 왕국부르군트 왕국이탈리아 왕국" 등이 있었으며, "공작" 이하의 자잘한 영토들은 셀 수 없이 많았다.

신성 로마 제국

800.12.25, "교황 레오 3""프랑크인의 왕 카롤루스 1"에게 황제의 관을 씌우고,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이래, 3C 동안 공석이었던 "서유럽 제위"의 부활을 선언했다"카롤루스 왕조 서로마 황제" 제위는 8C까지 지속되다가, "이탈리아 지역"에서 제위를 둘러싼 내전이 잇따른 끝에, 924"베렌가리우스 1세 포로이울리엔시스"가 죽으면서, 단절되었다.

962, "오토 1"가 황제로 대관하고, "카롤루스 1"의 후계자를 자처하면서, "서유럽 제위"가 부활했고, 이후 8C 동안 제국이 지속되었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카롤루스 1세의 대관""신성 로마제국의 시작"이라고 여겼고, 또 다른 역사학자들은 "오토 1세의 대관"이 시작이라고 여겼다그러나 현재의 학자들은 대개 "신성 로마제국"을 이루는 제도와 원칙들이 1번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점차적으로 발달한 것이라고 결론짓고 있다.

"신성 로마 제국"이라는 말은 13C 이전까지는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제권 이양론"에 따라, "로마 황제"로부터 계승된 최고 권력인 주권을 소유하는 것이 "황제의 특권"이라는 개념은 계속 유지되었다"신성 로마 황제"는 원칙적으로 "선거 군주"였으나, 대개 왕조를 이루며, 특정 가문에서 계승되었다.

"제국의 최고위 귀족""독일 선제후"들이 누군가를 "로마인의 왕"으로 선출하면, 이후 "교황""로마인의 왕"에게 "신성 로마 황제의 관"을 씌어주는 식으로 대관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16C부터 "교황의 대관 전통"은 거의 단절되었다.

"서프랑크 왕국"의 후신인 "프랑스 왕국""중앙 집권"을 향해 발달한 것과 달리, "신성 로마 제국" 수백 개의 "왕국공국후국백국자유시" 등의 영방국가들로 이루어진 분권화된 "제한적 선거군주국"으로 발전했다.

"신성 로마 황제"의 권력은 제한적이었고, 여러 "공작후작백작주교후시장들"은 명목상 "황제의 제후"였지만, 자신의 영토 안에서는 사실상의 독립적 지위를 누렸다.

1806.08.06,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1""라인 동맹"을 만듦과 동시에, "신성 로마 황제 프란츠 2"가 제국의 해체를 선언하면서, "신성 로마 제국"은 멸망했다1034년부터 "콘라트 2"가 통치하는 영토를 가리켜, "로마 제국"이라는 이름이 쓰였고, 1157년부터는 "신성제국"이라는 이름이 쓰였다.

"로마 황제"라는 이름은 "오토 2(983 죽음)" 때부터 유래한 것으로, "신성 로마 제국"이라는 이름보다 유서가 깊다하지만 "샤를마뉴 대제"에서 "오토 1" 때까지는 "황제이며, 존엄한 (imperator augustus)"라는 표현을 특정 영토와 연결 짓지 않고 썼다.

초기 "신성 로마 제국"에 관해서는 정치체제의 한 사례로 고찰할 수도 있고, 정치이론의 관점에서 살펴볼 수도 있다또는 전체 그리스도교도의 역사와 관련지어 다룰 수도 있다.

"신성 로마 제국"은 제국을 구성한 "독일이탈리아"의 여러 왕국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

그렇지만 "신성 로마 제국"의 역사를 "제국 구성국"들의 역사와 혼동하거나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제국을 구성한 각 영역은 각기 자국의 본체를 유지했고, 역대 "황제""대관식" , 각기 자기가 속한 나라의 왕관을 썼다.

"오토 1" 이전의 황제는 실제로 "로마"에서 교황이 주관하는 "대관식"을 치르기 전에는 "황제"라고 칭하지 않았다.

그러나 "카를 5" 이후의 황제는 황제로 선출되자마자, 당연히 "대관식"을 치른 것처럼 예외 없이 "황제의 권위"를 주장했다. 후자의 경우는 "로마 교황이 주재하는 대관식을 거치지 않았다"는 점에서, 실제로는 "황제"라고 부르기 어렵다.  이런 변칙이 있었음에도, 적어도 중세 때 "신성 로마 제국""교황청"과 함께, 서유럽에서 가장 지위가 높고 중요한 곳이었다. (교황제)

여러 시대의 "신학자법률가군주반역자문학가귀족" 등은 제국에 관한 각기 다른 해석을 내려 "제국의 기원기능정당성"에 대해 제각기 다른 관념을 가졌다.

서로 다르고 때로는 모순되는 이들 견해 중에는 다음 3가지가 유력하다.

교황은 교황 나름의 고유한 의도로 제국을 만들었다. 그 때문에 제국은 교황의 요구에 따라야 하는 세속적 부분이므로, 궁극적으로 교황의 자유재량 아래 있다고 보는 "교황 측"의 이론

황제의 권력과 권위의 원천으로서 정복과 패권에 중점을 두고 황제가 직접 신에게 책임진다는 제국 또는 "프랑크의 이론"

"로마법"의 전통에 따라 제국은 로마 인민에게서 권력을 위임받은 것이라는 "로마인(여기서는 로마 귀족)의 이론" 등이 그것이다.

이들 3가지 이론 중에는 그 중요성에서 3번째 설이 가장 낮았다교황의 본질적인 역할을 넌지시 부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이론은 명백히 "반 교황"을 의도한 것이었다.

"세계주의자""지방주의자"가 제국에 관해, 각기 품은 관념들을 구분해보는 것도 중요하다.

"세계주의자"에 따르면, 제국은 세계적인 왕국이었다그러나 "지방주의자"에 따르면, 황제는 세계 지배에 아무런 야심도 갖지 않았고, 황제의 정책도 다른 군주들과 마찬가지로 제한받는 것이었다.

※ 합스부르크 가문 (1516~1700ㆍ스위스의 도시ㆍ백작 라드보트는 성을 세운 뒤, 가문의 이름을 정했다)

시작은 작은 귀족 가문이었으나. 혼인(아들이 없는 영주들)을 통해, 영토 확장제국 완성   유럽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광범위한 영토를 가졌던 왕가    마리 앙투아네트 (프랑스 왕후)

2. 역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카롤링거 왕조 : 샤를마뉴(카를1800~814)루트비히1(814~840)로타르1(843~855)루트비히 2(855~875)카를2(875~877)카를3(881~887)

스폴레토 왕가 : 비도(891~894)람베르트(894~898)

카롤링거 왕조 : 아르눌프(896~899)루트비히3(901~905)

프랑켄 왕가 : 콘라트1(911~918)

카롤링거 왕조 : 베렝가르(915~924)

작센 왕가 : 하인리히1(919~936)오토1(936~973)오토2(973~983)오토3(983~1002)하인리히2(1002~24)

잘리어 왕조 : 콘라트2(1024~39)하인리히3(1039~56)하인리히4(1056~1106)

제위 요구자 : 루돌프(1077~80)헤르만(1081~93)콘라트(1093~1101)하인리히 5(1105/06~25)

수플린부르크 왕가 : 로타르2(1125~37)

호엔슈타우펜 왕가 : 콘라트3(1138~52)프리드리히1(1152~90)하인리히6(1190~97)필리프(1198~1208)

벨프 왕조 : 오토4(1198~1214)

호엔슈타우펜 왕가 : 프리드리히2(1215~50)

제위 요구자 : 하인리히7(1220~35)하인리히 라스페(1246~47)홀란트의 빌렘(1247~56)콘라트4(1250~54)

대공위시대 : 리처드 (1257~72)알폰소(카스티야 왕 알폰소 101257~75)

합스부르크 왕가 : 루돌프1(1273~91)

나사우 왕가 : 아돌프(1292~98)

합스부르크 왕가 : 알브레히트1(1298~1308)

룩셈부르크 왕가 : 하인리히7(1308~13)

합스부르크 왕가 : 프리드리히3(1314~26)

비텔스바흐 왕가 : 루트비히4(1314~47)

룩셈부르크 왕가 : 카를4(1346~78)벤첸(1378~1400)

비텔스바흐 왕가 : 루페르트(1400~10)

룩셈부르크 왕가 : 요프스트(1410~11)지기스문트(1411~37)

합스부르크 왕가 : 알브레히트2(1438~39)프리드리히3(1440~93)막시밀리아1(1493~1519)카를5(1519~56)1527년 로마 침략교황을 지켜낸 스위스 군대(가장 용)페르디난트1(1556~64)막시밀리안2(1564~76)루돌프2(1576~1612)마티아스1(1612~19)페르디난트2(1619~37)페르디난트3(1637~57)레오폴트1(1658~1705)요제프1(1705~11)카를6(1711~40)

비텔스바흐 왕가 : 카를7(1742~45)

합스부르크 왕가 : 프란츠1(1745~65)요제프2(1765~90)레오폴트2(1790~92)란츠2(1792~1806)

롬바르드 족(Lombards): 게르만의 한 부족으로, 발트 해의 한 섬에서 발원한 부족으로 추측된다.

기원전 마지막 세기에 "독일"로 내려오기 시작한 이래, "롬바르드 족"500년 동안 계속 남하하여, 마침내 오늘날의 "오스트리아 지역"에 정착했다.

3. 신성 로마 제국 창설의 조건

"서유럽"에는 새로운 "로마 제국"이 탄생하는 데 필요한 몇 가지 조건이 형성되어 있었다.

1째 조건은, "이탈리아 서쪽"이 이미 정치적인 현실성을 잃었음에도 "세계적이며, 영원한 로마 제국"이라는 관념이 여전히 존속했다는 점이다.

2째 조건은, "서유럽" 이민족의 다수가 제국에 관해 "그리스도교 왕권(imperium Christianum)" 또는 "그리스도교도의 제국"이라는 관념을 품고 있었다는 점이다.

3째 조건은, "서유럽"에 제국을 세우는 데 충분한 권력과 지위를 지닌 인물, "프랑크 왕 샤를마뉴"라는 후보자가 나타났다는 점이다.

이 관념은 "콘스탄티누스 대제""그리스도교"로 개종한 뒤, 구체적인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그리스도교도들"은 기도문 가운데, "제국황제"를 위한 기원을 덧붙여,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들었을 뿐만 아니라, "로마 제국"을 세계의 마지막 국가로 설정해, "그리스도교적 종말론"의 틀 속에 끼워 넣었다. 이 관념에서는 "세계의 종말이 곧 신의 나라로 들어가는 실마리"가 된다.

4. "샤를마뉴 대관식" 직전의 정세

"비잔틴 제국"의 상황 역시, "신성 로마 제국" 수립의 한 요소가 되었다.

"비잔틴 제국"의 입장에서 볼 때, "교황""비잔틴 황제"를 받드는 다른 사제와 마찬가지로 "사제직을 인가받은 황제의 신하"였다. 그러나 8C, "이탈리아 반도"에서 "제국의 지배권"은 붕괴되기 시작했다.

"이슬람 세력"과 대립하게 된 "제국"은 힘을 "동방문제"로 집중할 수밖에 없었고, 이미 568"탈리아"를 침입했던 "롬바르드 족"에게서 "이탈리아 영토"를 지킬 수 없었다.

그때까지 "역대 교황""롬바르드 족"의 위협에 대비해, "비잔틴 황제라벤나의 총독"에게 충성을 맹세해왔다. 그러나 사태는 일변하여, 751"롬바르드 족""라벤나"를 빼앗고, "총독"을 추방했다.

"로마 교황""비잔틴 황제"에게 보호를 호소했지만, 소용이 없었으므로, "프랑크 왕 피핀"에게 의지하게 되었다.

754, "피핀""이탈리아"를 침입해 "롬바르디아의 왕 아이스툴프"를 내쫓고, 756"라벤나 총독령" "교황"에게 바쳤다. 이렇게 해서 "교황의 세속적 권력"이 생겨났고, "프랑크 왕권""교황청" 사이에는 밀접한 관계가 생기게 되었다.

"교황"은 정식으로는 "황제"에게만 줄 수 있는 "로마인의 보호자(Patricius Romanorum)"라는 호칭을 "프랑크 왕"에게 주었다. 이 호칭을 받은 사람은 "교황청"을 방위하고, 유지할 권위까지 받게 되는 것이었지만, "교황""비잔틴 제국"과 본질적인 연계를 끊기를 주저했다.

이 점은 "샤를마뉴"774"롬바르디아"의 마지막 독립군주 "데시데리우스"를 물리친 뒤, "교황 하드리아누스 1(772~795 재위)" , 두드러졌다.

"롬바르디아의 왕"이 된 수호자 "샤를마뉴"는 과거의 적과 마찬가지로 "교황"에게 위험한 존재가 될 가능성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 가능성은 동서간의 관계가 더 멀어진 점, 비잔틴 황제와 프랑크 왕 사이에서 교황의 처신이 과거보다 곤란해진 점, 로마와 이탈리아 중부에 대한 비잔틴 제국의 지배력이 약해진 점 등에서 찾을 수 있다.

751, "라벤나 총독" 추방 이후, 사실상 실권을 쥔 "교황"은 아마 "서유럽"에서 황제의 후계자가 되기를 원했을 것이다사실 "콘스탄티누스의 기부장"(위조되었다는 설이 있음)에는 "콘스탄티누스 대제""교황 실베스테르 1"에게 "제국의 옥새와 이탈리아 및 서방 여러 지역의 모든 주()를 주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781년 이래, "교황 문서"에는 이미 황제의 통치를 기초로 한 연대표기를 사용하지 않았고, "교황" 자기 나름의 화폐를 주조했다. 그러나 이런 야망은 "샤를마뉴""롬바르디아 왕"이 되었을 때, 사라졌다.

5. 신성 로마 제국과 샤를마뉴의 대관

"교황 하드리아누스 1""프랑크 왕""비잔틴 황제"의 대립관계를 이용해 독립을 유지하고자 한 데 비해, "교황 레오 3(795~816 재위)""프랑크 왕"에게 종속적인 태도를 보였다.

"콘스탄티노플"에서도, "로마"에서도, 사태는 안정을 잃고 있었다"콘스탄티노플"에서는 "이레네"가 아들 "콘스탄티누스 6"를 폐위시키고(797), 최초의 여황제가 되었다. "로마"에서는 "반교황파 귀족들"이 이 기회를 포착해 "교황"을 공격했다"교황"은 보호자 "샤를마뉴"에게 달아났다(799).

"샤를마뉴"는 고문관인 "알퀸(앨퀸)"의 권고를 받아들여, "레오"의 권위를 보증해주었다그러나 사태는 여전히 안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800년 가을, "샤를마뉴""교회의 위엄과 권위"를 회복하기 위해, "로마"로 출발했다.

12.25, "성베드로 대성당"에 많은 사람들이 모였는데, 이때 "교황""샤를마뉴의 아들"을 왕으로 성별(聖別)하도록 되어 있었다그런데 "샤를마뉴"가 기도를 마치고 일어서자마자, 갑자기 "레오""샤를마뉴"의 머리에 제관을 씌웠다.

줄지어 앉아 있던 "로마인"들이 "샤를마뉴""황제이며, 존엄한 분"이라고 환호하는 가운데, "교황" "샤를마뉴" 앞에 무릎을 꿇고, "고대 황제 대관식"의 관행에 따라, "샤를마뉴"에게 신하로서의 예를 갖추었다"교황"의 행동은 "샤를마뉴"에게 "대관"을 베풀어, 자기의 지위를 견고히 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 명백했다. "교황의 행위에 놀라고 화를 냈다"고 전해지는 "샤를마뉴"는 계속해서 중대한 문제, "콘스탄티노플의 승인"을 받아내는 문제에 직면해야 했다. "교황"에게는 "샤를마뉴"를 황제로 봉할 권한이 없었으므로, 어쨌든 이 대관은 비합법적이고, 혁명적인 행동이었다.

"비잔틴 제국"의 눈에는 "샤를마뉴"가 찬탈자로 비쳤지만, 실제로 "샤를마뉴"가 영유하고 있던 제국의 영토라면, 과거의 "로마 공작령총독령" 뿐이었고, 그 밖의 면에서도 과거 그대로 "프랑크 왕""롬바르디아 왕"의 지위에 머물러 있었다.

806, "샤를마뉴"는 자신의 영토를 세 아들에게 분할해주었다.

만약 위의 두 아들이 "샤를마뉴"보다 먼저 죽지 않았다면, 그리고 8143째 아들 "경건왕 루트비히 1(814~840 재위)"에게 분할하지 않은 땅을 물려주지 않았다면, "샤를마뉴 대제의 제국"이 존속할 수 있었을까 의심스럽다.

800년에 치러진 "황제 대관식"은 직접적 효과는 한정되어 있었지만, 실은 더욱 넓은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동서간의 분리가 결정적인 정치적 사실이 되었다. 812년 흐지부지 끝난 전쟁 뒤에 "비잔틴 황제 미카일 1""샤를마뉴"가 황제라고 칭하는 것을 일단 승인했다. 그러나 "미카일""콘스탄티노플 황제"만이 유일하고, 진실한 "로마 황제의 계승자"라는 생각을 버리지 못했다.

"샤를마뉴 제국""콘스탄티노플"과의 경쟁관계에 놓이게 되었고, 이것은 적어도 1204년까지 계속되었다.

"샤를마뉴"의 대관에 따라, "사를마뉴"와 그의 후계자는 "교황이 전체 그리스도교도의 지배자"라는 "교황 측"의 주장에 어떤 해결책을 제시해야 했다. "샤를마뉴"도 알고 있었듯이, "샤를마뉴" 자신과 이후의 모든 황제는 "교황 측의 주도로 성립된 황제권"이라는 점에서 묘한 처지를 감수해야만 했다.

그래서 "샤를마뉴"813년 아들 "루트비히"와 공동으로 황제 권한을 행사하기로 결심하고, "교황의 출석"을 요구하지 않은 채, "아헨 궁정성당"에서 의식을 거행했으며, 참가한 "프랑크 귀족들"의 환호로 "대관 승인 의식"을 대신했다.

"루트비히""샤를마뉴"에게서 왕관을 받았거나, 아니면 제단에서 자기 손으로 왕관을 썼을 것으로 각된다. 이 의식은 분명히 800"로마"에서 있었던 의식과는 대조적이었다이후에는 "교황의 제국""프랑크인의 제국", "제국"에 관한 2개의 상반된 견해와 이론 간의 다툼이 중요한 논제가 되었다.

6. 카롤링거 제국

"루트비히 1""제국"이라는 말을 다양한 영지를 하나로 유지하는 통일된 관념이라 여겼다.

그래서 그는 "각 나라의 왕"이라는 명칭을 버렸다이것이 817년에 나온 "제국 칙령"의 기초가 된 관념이다.

"루트비히 1"는 맏아들 "로타르 1"를 공동 황제로 봉했고, "로타르"의 동생 "페팽""루트비히(독일인 왕)"에게는 부속왕국인 "아키텐바이에른"을 각각 주었다

그러나 "루트비히 1"의 생각은 보수적인 "프랑크인 귀족들"의 반대를 불러일으켜, 마침내 내란으로 발전했다. 대립하는 쌍방의 회유에 능한 "교황"에게는 이 분쟁이 반가운 일이었다이미 816"루트비히 1""교황 스테파누스 5(또는 4)"의 설득을 받아들여, 교황의 손으로 성유를 받은 바 있었다.

"로타르 1"는 아버지 "루트비히"813년에 그랬던 것과 같이, 교황의 중개 없이 제위에 올랐고(817), 자기의 지위를 튼튼히 하기 위해, 823"로마"에서 "교황 파스칼리스 1" 힘을 빌려 "관식"을 치렀다.

이렇게 해서 제국은 "프랑크 왕령"이 아니라, "교황의 영향력"이 미치는 영토가 되었다"로타르"의 아들 "루트비히 2"850년 교황이 얹어주는 황제의 관을 썼고, "로타르"가 죽은 855년부터 자기가 죽은 875년까지 단독으로 제위를 지켰다.

그 뒤를 이은 "카를 3"881년부터 "동 프랑크"의 유력자들로부터 폐위당한 887년까지 제위에 있었다888년 이후, "프랑스독일이탈리아""부르군트 왕국로타링기아(로렌)"를 미결 영토로 남겨둔 채, 각기 독립국가가 되었다이후 "교황""이탈리아 귀족" 가운데서 잇달아 황제를 선임했는데, "교황" 자신도 "이탈리아 귀족정치"의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았다.

우선 "동 프랑크 왕 아르눌프"의 도움을 받아, "스폴레토의 비도(891~894 재위)", 이어 그의 아들 "람베르트(894~898 재위)"가 황제가 되었으며, "아르눌프" 자신도 896년 제관을 썼다그러나 이런 인물들은 "교황"에게는 거의 이용가치가 없었고, 또 그들로서도 당시의 침체된 "교황권" 이용할 일도 없었다.

901년에 제관을 쓴 "루트비히 3"905"프리울리의 베렝가리오(베렝가르)"에 의해 폐위되었다"베렝가리오"915년 교황의 손을 빌려 "대관식"을 올렸다"베렝가리오"가 죽은(924) 뒤에는 유력한 "로마 귀족 크레셴치 가문"이 권력을 수중에 넣고, 황제의 칭호를 금했다.

7. 오토 제국

"이탈리아"에서 "제국"이 해체과정에 있던 사이에도, "알프스 북부"에서는 제국에 대한 여러 관념들이 남아 있었다. "제국"에 관한 "프랑크"의 전통적 생각은 "샤를마뉴 대제의 방식"으로 되돌아가는 것이었다과거 "샤를마뉴"가 통치한 것처럼, 여러 국가를 통치하는 지배권을 쥐고자 한 것이었다과거 "서 프랑크의 왕 카를(샤를)2(대머리 왕)" "로마"에서 제관을 받기 6년 전인 869"로타링기아"를 정복했을 때, 자신을 "황제이며, 존엄한 자"라고 선언했다.

"독일의 작센 왕조" 초대 왕인 "하인리히 1(919~936 재위, 대관식을 치르지는 않았음)"933"헝가리"에서 승리를 거두고, 황제로 추대되었으며, 마찬가지로 아들 "오토 1(936~973 재위)" 955"레흐펠트 전투" 뒤에 황제로 추대되었다이것이야말로 "프랑크 족"이 품은, "로마"와는 관련이 없는 "제국"에 대한 관념이었다.

936, "동 프랑크" 왕위를 이은 "오토 1""샤를마뉴 대제"의 진정한 후계자였다.

그는 성직자를 장관으로 기용하고, "벤드족"에게 "그리스도교"를 포교할 목적으로 "엘베 강가"에 선교를 위한 교구를 설치했다서부 "카롤링거 가문의 프랑스 왕 루이 4""오토"의 보호 밑에 있었으며, "부르군트 왕 콘라트" "오토"의 지지를 얻어, 왕좌를 유지한 데 지나지 않았다.

951"오토""이탈리아"를 침입해, "이브레아의 베렝가리오""독일 왕의 신하"로 만들었으며, 962년에는 "교황 요한네스 12"의 손을 빌려, 제관을 썼다.

800, "샤를마뉴"가 대관할 때와 마찬가지로 다시 주도권을 쥔 쪽은 "교황"이었다.

그러나 "오토 제국""샤를마뉴의 제국"에 비하면, 판도가 꽤 한정되어 있었다이 무렵 "황제이며, 존엄한 자"라는 칭호는 의미가 반감되어, "오토 시대"에는 오로지 "로마 교회" 보호에만 한정되었으며, "제국"의 영토도 줄어들었다.

"오토 1"와 그의 후계자들은 아무도 "서 프랑크 령"에 대한 통치권을 요구하지 않았다이후 "제국"이라는 것은, 단일 지배하의 "독일""북부 이탈리아"의 연합체를 뜻한 데 불과했다.

또 그들은 "비잔틴 황제"에 도전해, 지배권을 "비잔틴 제국"에까지 미치려 한 적도 없었다. 그러나 "비잔틴 제국"은 급속히 세력을 회복했고, 이 시기(10~11C) 팽창과 재정복에 나설 준비를 했으므로, 두 제국의 관계를 조정하는 일이 새삼스럽게 시급한 과제가 되었다그 뒤, 두 제국 사이에 전개된 항쟁의 결과로 "제국의 로마화"에 박차가 가해졌다.

"오토 1""로마 황제"의 칭호를 구하지 않은 데 비해, "오토 2(공동 황제 967, 단독 황제 973~983)""비잔틴 황제 바실리우스 2"에 대항하여, 스스로 "로마 황제"라고 선언했으며, 자기의 제국을 "로마 제국"이라고 불렀다.

이러한 변화는 "콘라트 2세 치세(1024~39)"에 일어났다1040년 이후에는, "대관식"을 치르기 전의 "선출 황제(또는 황제가 지명한 후계자)"에게 "로마인의 왕"이라는 호칭이 붙여지게 됨으로써, 이 변화는 더욱 가속되었다.

그러나 이 같은 형식의 변화가, "고대 로마 제국"의 유산을 요구한 데서 나온 것이 아니라, 단순히 "비잔틴 제국"과의 경쟁관계에서 빚어진 것도 주목할 만하다.

"오토 3"의 치세 (983~1002)는 이런 발전의 중간기를 형성한다.

그는 "제국의 이념"에 이질적인 요소를 덧붙여, 새로운 통치이념을 만들기 위해서, "로마카롤링거 왕조그리스도교" 등의 여러 요소를 도입했다"로마"는 그 수도였고, "교황"은 그리스도교 지배를 발전시키기 위한 "황제의 부관" 역할을 해야 하는 존재로 여겨졌다.

"오토 3" 이후에도, 존속한 중요한 특색은 "교황이 완전히 황제에 종속되었다"는 점이다당시의 초상화에는 "교황"이 아니라, "황제""성 베드로의 대리인"으로, 때로는 지상에서 "신의 대리자"로 그려졌다962~1046년은 사실상 제국의 전성기였다한편 "교황청""황제"의 보호 아래 있을 때 이외에는, "로마의 당파"에 이용되는 정쟁(政爭)의 도구로 타락했다.

 

8. 신성 로마 제국과 교황청 

정세는 11C 중엽부터 변하기 시작했다그 원인의 하나는 "유럽 경제"의 급속한 부흥이었다"유럽 경제의 부흥""독일"에는 불리한 세력 교체를 가져왔다. 한편 유럽 경제의 부흥보다 중요한 직접적 원인은 "교황청의 부흥"이었다.  1056, "황제 하인리히 3(1039~56 재위)"가 죽은 뒤, 주도권은 "교황"의 손으로 넘어갔다.

이후 1065년까지는, 나이 어린 "하인리히 4(1084 대관, 1106 죽음)"의 치세가 이어졌고, 교황 측에는 "동맹자(특히 시칠리아 왕국의 노르만족)"가 출현함으로써, "교황의 주도권"이 더욱 강력해졌다유럽 민중도 "교황""전 그리스도교도의 지도자"로 받들게 되었다.

"황제의 통치"를 고마워하는 사람들은 제국의 영내에서조차 "독일인"뿐이었고, "부르군트 족이탈리아 주민"은 아니었다. "부르군트 족이탈리아 주민"으로서, "황제의 통치를 고마워한다"는 것은 "독일인 지배"에 대한 종속적 태도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게다가 "로마""제국의 수도"로 삼은 사람은 "오토 3"뿐이었으며, 4년도 채 되지 않았다.

다른 황제들은 자기들의 힘을 모두 "알프스 북부"로 집중했다"제국"에 관해 9C에 체계화했던 "교황" 측의 논리는 "교황 그레고리우스 7(1073~85 재위)" 치하에서 더욱 넓고 견고한 기초 위에 부흥되었다.

이 시기에 "서임권 투쟁"으로 알려진 1076~1122년의 항쟁이 발생했다실제 논점은 "그리스도교 사회"에서 "황제"가 차지하는 지위에 관한 것이었다.

"그레고리우스 7""황제의 옥새"를 쓸 수 있는 사람은 "교황" 뿐이며, "교황은 합법적으로 ""를 폐위할 수 있지만, 자기는 누구의 손으로도 어떻게 될 수 없는 존재"라고 주장했다.

이렇게 해서, "교황의 독립에 대한 요구"는 급속하게 "황제에 대한 우월성의 요구"로 바뀌어갔다"서임권 투쟁"1122"교황 칼릭스투스 2황제 하인리히 5" 사이에 "보름스 협약"이 이루어짐으로써 일단 해결되었다"그레고리우스 7"의 도전에 대해, "황제"측은 자신의 지위를 지킬 새로운 기초를 모색해야 했다.

"그레고리우스"의 호적수였던 "하인리히 4"는 여전히 부왕에게 물려받은 권리를 주장했으나, 12C 들어와, "하인리히 5(1105/1106~25 재위)로타르 2(1125~37 재위)붉은 수염왕 프리드리히 1(1152~90 재위)하인리히 6(1190~97 재위)" 등은 논법을 바꿨다.

그들은 "교회 측 법률가"의 논거에 대항하기 위해, "로마법"을 부흥시켜 얻은 여러 무기를 내세웠다그 결과, 새롭고 좀 더 숭고한 "제국의 관념"이 만들어졌다이 점에 관해 가장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은, 1157"프리드리히 1""신성한 교회(Sancta Ecclesia)" 정면으로 대항하는 뜻에서, "제국을 신성 제국"이라고 칭한 것이었다.

"자기가 보편적 권위를 갖는다""교황의 주장"에 직면해, "호엔슈타우펜 가문"의 여러 황제는 ""과 마찬가지로 보편적 권리를 주장했다.  "제국 측 법률가""제후의 선거로 선출된 사람은 교황이 인정하기 전에도 진정한 황제"라고 주장했다.

"교황과의 싸움", 그리고 "서임권 투쟁" 와중에 줄어든 "황제권"의 영토적 기반을 회복해야겠다는 생각은 "황제""이탈리아"로 달려가게 했지만, "황제의 군대""이탈리아"에서 국민적인 저항에 부딪쳤다.

"국민적 저항" 때문에, "프리드리히 1""롬바르디아 동맹"을 격파하지 못하고, 1183"스탄츠"에서 한때 "평화조약"을 맺었다"황제의 종주권"은 인정되었지만, "이탈리아"에서 "황제"의 권위는 결정적인 손상을 입었다.

"프리드리히"의 아들 "하인리히 6""시칠리아 왕국"의 상속녀와 결혼한 뒤에는 "이탈리아"에서 제국의 지위를 회복하는 데, "노르만 족의 힘"이 이용되었다"교황청""로마""제국 령"으로 편입되는 것을 두려워해, 심하게 반발하고 나섰다.

1197, "하인리히 6"가 일찍 죽은 뒤, "독일"에서는 내분이 이어졌다이 내분은 "교황 인노켄티우스 3(1198~1216 재위)"에게 유리했다(오토 4세가 새 황제로서 정식 대관식을 올린 것은 1209년임).

"하인리히 6"의 아들 "프리드리히 2(1215~50 재위)"는 자신의 "이탈리아 정책"에 대한 "독일 제후들"의 지지를 얻어내고자, "제후들"에게 많은 양보를 시도했지만 허사였다그는 "롬바르디아 제압"에 실패하고, 1239년 파문당했으며, 1245년에는 폐위되었다.

"프리드리히 2"의 죽음(1250)과 그 뒤를 이은 23년간의 "대공위시대(大空位時代)"는 중세 제국의 실질적인 종언을 뜻했다"이탈리아"에서는 "구제도의 부활이 있을 수 없다"는 점을 확실히 하기 위해, "교황청""프랑스 앙주 가문의 샤를"을 초청했다.

1273년에 "독일 왕위""합스부르크 가문의 루돌프(1273~91 재위)"가 이어받았으나, "루돌프"단순히 "제후연합의 우두머리"에 불과했고, "이탈리아"에서 "롬바르디아"의 명목상 권리를 유지했을 뿐, "중부남부 이탈리아"에 대한 모든 권리는 포기했다.

9. 프리드리히 2세 이후의 신성 로마 제국

"루돌프"는 여러 가지 시도를 해보았지만, "제국의 존엄성"을 획득하지 못했으며, 이후 "제국"은 유명무실했다.  "프리드리히 2" 이후 1C 동안, "로마"에서 대관식을 올린 황제는 "하인리히 7" 1명뿐이었는데, 대관은 1312"아비뇽의 교황"이 보낸 사절단에 의해 치러졌다(교황제).  "루트비히 4(1314~47 재위)"는 민중대표들이 모인 가운데, 1327"로마"에서 대관식을 올렸다.

그러나 이 의식은 "교황"의 허가 없이 치러진 것이었다이후 "제국의 종언"에 이르기까지, 정식으로 대관한 황제는 "카를 4(1355년 교황사절단이 대관)지기스문트(1433년 교황이 대관)카를 5(1530년 교황이 볼로냐에서 대관)" 3명뿐이다.

이 무렵 "독일"에서는 "내전"으로 왕권이 이미 약해져 있었다"제후들"1250년 이후, 결정적으로 기초를 굳힌 "선제후회의"를 통해, "황제 선출제도"를 효과적으로 관리하고 있었다유럽에서 지도적 지위를 쌓아올리고자 했던 "프랑스"의 요구는 "독일이탈리아"의 제국주의자에게 최후의 분발을 촉구하는 역할을 했다.

한편 냉정한 현실주의자인 "카를 4(1347~78 재위)"는 제국을 명백히 "독일적인 제도"로 한정하기 시작했다. "교황 클레멘스 5"와 맺은 협약에 따라, 그는 정식으로 "이탈리아"를 포기했고, 정해진 대관식 날에 "로마"로 들어가, 같은 날 그곳을 떠났다.

이어서 그는 "독일의 제국법", 특히 "선제후의 권리 확립"에 관심을 돌렸다이 관심은 1356"금인칙서" 제정으로 결실을 보았다.

이런 변화는 "제국"의 마지막 호칭에 반영되었는데, "프리드리히 3(1440~93 재위)" 치세에 "신성 로마 제국""독일 국민의 신성 로마 제국(Sacrum Romanum Imperium Nationis Germanicae)"이 되었다.

"프리드리히"의 후계자 "막시밀리안 1(1493~1519 재위)"1508"로마"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교황"이 동의한 형식을 따라, "선출 황제(imperator electus)"라는 이름을 얻었다.

10. 근세의 신성 로마 제국

"금인칙서" 발포 후, "제국의 역사"는 본질적으로 "독일 역사"의 일부이다"지기스문트(1411~37 재위)카를 5(1519~56 재위)" 같은 몇몇 황제들은 먼 옛날과 같은 "황제 대권"의 부분적인 회복을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투르크 족"과의 싸움에서, "제국""그리스도교 전체"에 대해 어느 정도 주도권을 쥐기도 했다그러나 제도에서 "제국"의 역할은 계속 쇠퇴해갔다"종교개혁""제후"의 권리를 확고히 해주었고, "제후"들의 자립을 북돋아주었다.

11. 카를 5(Karl V)

"신성 로마 제국 황제"였으며, 1516년에서부터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1(Carlos I)"이기도 했다"카를 5"가 통치한 땅은 광대했지만, 그것은 여러 왕국의 엉성한 집결체에 지나지 않았다"카를 5""가톨릭"을 옹호하며, "종교개혁"에 대항했다.

하지만 "제국의 부흥"이란 정신에서도, 현실에서도, 이미 "중세 제국의 부흥"을 뜻하는 것은 아니었다.

"아우크스부르크 조약(1555)"에 따라, "독일"은 정식으로 2개의 "종교집단"으로 분열되었고, "황제" 한 종파의 우두머리를 차지하는 존재에 불과하게 되었다.

"지기스문트"가 죽은(1437) , "비텔스바흐 가문의 카를 7(1742~45 재위)"에 의한 잠깐 동안의 중단을 제하면, "제위"는 선거라는 형식을 거치면서도,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가"가 세습하게 되었다. 이 사실은 "황제""제국" 사이의 이해 분열을 낳았다.

1556년 이후, "제국""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주재로, 여러 "독일 제후들"이 합친 느슨한 연방체에 불과했다"30년 전쟁"을 끝낸 1648년의 "베스트팔렌 조약""연방 방식의 체제"에 마지막 획을 그었다.

그럼에도 "제국"의 산만한 구조는 여전히 어느 정도까지는 18C의 세계주의적 정신에 걸맞았고, "독일" 서부의 기사나 귀족에게는 "제후"의 절대정치에 대항하는 안전판으로 간주되었다그러나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면서, 각국의 "민족주의"가 고조되었고, "제국"은 시대에 뒤지는 존재가 되어갔다.

"프랑스"의 역대 왕은 13C 말 이래, "제국"의 외곽에 있는 여러 땅을 병합하면서, "황제"의 지위를 탈취하려 했다"나폴레옹 1"의 출현으로, 이 야망은 마침내 달성될 것처럼 보였다새로운 "샤를마뉴 대제"를 자처한 "나폴레옹"1806, "프란츠 2(1792~1806 재위)"의 호칭을 박탈하고, "신성 로마 제국"을 자신의 "새 질서"에 짜 넣기로 결심했다.

이미 무력해, 적을 막아낼 수 없는 "황제의 자리"였지만, 결국 "프란츠"는 제위를 다른 아무에게도 넘겨주지 않은 채, 1806.08.06일 스스로 물러남으로써, 오랜 "제국의 권위"를 포기했다이렇게 해서, "신성 로마 제국"은 막을 내렸다"제국"이 영향을 미친 범위나 성격은 언제나 논의의 표적이 될 것이다논의야 어쨌든 "제국"은 유럽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제국"이 소멸한 뒤에도 "제국의 영향력"은 그치지 않았다"중세 제국"에 관한 논의는 1871"2제국(독일 제국) 창설"의 관념적 배경이 되었다.

또한 "히틀러의 제3제국"까지도 "샤를마뉴 대제오토 대제프리드리히 2"의 업적을 종종 아전인수식으로 끌어 붙이거나 왜곡해, 자신의 존립에 활력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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