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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 - 서양

제국 - 로마 (Rome) ② 서로마ㆍ동로마ㆍ신성 로마제국의 관계

by 당대 제일 2022. 9.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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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마 제국 (Western Roman Empire)"은 로마 제국이 동서로 분할된 395~476년까지 서방 황제의 치하로 존속한 "로마 제국"이고, "동로마 제국(비잔티움 제국)"은 동서로 분할된 395~1453년까지 동방 황제의 치하로 존속한 "로마 제국"이다.

 

1. 로마 제국 (BC 27~ 476 (서로마 제국)ㆍ1453 (동로마 제국)) - 신성 로마제국 (800(962)~1806) 관계

① 동고트 왕국 (B.C 27~ 395ㆍ이탈리아 왕국게르만족의 일파→ 고대 로마 제국 → 서로마 제국 (395~476) → 동로마 제국 (395~1453ㆍ비잔티움 제국) → 오스만 제국

② 신성 로마제국 (800(962)~1806)

"신성로마제국"이란, 칭호를 쓰기 시작한 건, "오토 1세" 부터 이다.

800년 :  "프랑크 왕국"의 "샤를마뉴(카롤루스 대제)가 교황으로부터 "서로마 황제"의 관을 받은 것

962년:  "동프랑크 왕국"의 "오토 1세"가 교황으로부터 "서로마 황제"의 관을 받은 것

"프랑스"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 의해 멸망한다.  ("신성 로마제국"이 "30년 전쟁(1618~1648)"이후, 멸망했다는 것은 틀린 정설이다.)

③ "서로마 제국ㆍ동로마 제국"과 "신성 로마제국"은 다른 나라이다.

"서로마 제국"은 395년 "테오도시우스 1세"의 사망으로, "로마"가 동ㆍ서로 분열되었고, "호노리우스"가 계승하며, 이어진 국가로 엄연히 다른 국가이다.

"신성 로마제국"은 "프랑크 왕국"의 "샤를마뉴"가 "황제의 관"을 쓰고, "로마 제국의 후계자"라고 스스로 외치면서 시작되어 시초라고 볼 수 있으며, 실제로, "신성 로마제국"이란, 칭호를 쓰기 시작하는 것은 "오토 1세"부터가 맞다. (신성 로마제국 = 로마 제국의 후예)

④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고, "동 프랑크(독일)ㆍ서 프랑크(프랑스)ㆍ중 프랑크(이탈리아)"로, 분열된다.  "동로마 제국"이 성상파괴로 "교황"에게 미움을 사기 전까지는 "서로마 제국"에는 "황제"칭호가 없었다.

⑤ 800년 : "프랑크 왕국"의 "샤를마뉴"가 교황으로부터 "서로마 황제"의 관을 받아, "로마 황제"가 된 사연

그 당시 "북아프리카"에는 "이슬람 해적"들이 판을 치고 있던 상황으로, 이들은 매년 "이탈리아ㆍ스페인ㆍ프랑스 남해안"등을 약탈하며, 어마어마한 피해를 입혔고, 그로 인해 해안지대에는, 사람이 아예 살지 못할 지경까지 이르렀다.  또한, "이슬람 해적"은 배에 말을 싣고 와서 육지까지 약탈했는데, "로마"가 공격당한 경우도 2번이나 있었다.  ("이슬람 해적"의 "지브롤타 해협(지중해로 들어가는 관문으로, 스페인과 모로코 사이에 있다.)" 침입도 상당히 유명하며, "중세 이탈리아 역사"를 읽다가 "사라센의 침입" 어쩌고 하는 말이 나오면, 99 % "이슬람 해적"이라고 보아도 좋다)

한편, 공식적으로 "로마 교황청"을 보호할 책임은 "로마제국의 황제"에게 있었는데, "로마제국"이 "동ㆍ서"로 양분되고,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자, "동로마 제국의" 황제(사실 "동로마 제국"이란 것은 후대 역사가들이 붙인 이름이고, 공식 국호는 그냥 "로마제국"이었다.)가 "교황청"을 보호하는 의무를 갖게 된다.

하지만, "동로마 제국"은 "유스티니아누스(527~ 565)" 때, 잠깐 반짝하였을 뿐, 줄곧 약체를 면치 못하여 "서유럽"까지, 신경 쓸 경황이 없었다.  게다가 "성상파괴 문제"로 "교황청"과 사이가 점점, 멀어져 감에 따라, "동로마 제국" 황제는 "교황청"을 보호할 책무를 아예 포기하다시피 한다. 이에, "교황"은 "동로마 제국"의 뒤를 이어, "교황청"을 보호해줄 만한, 세력을 찾게 되고, 그 결과, "프랑크 왕국"을 낙점하여, "로마 황제"라는, 칭호를 준 것이다.

⑥ 962년 : "동프랑크 왕국"의 "오토 1세"가 교황으로부터 "서로마 황제"의 관을 받아, "로마 황제"가 된 사연

"프랑크 왕국"의 "샤를마뉴" 이후, "샤를마뉴"의 후손들이 모두 "대"가 끊어지게 되는데, 987년에 이르르면, "샤를마뉴"의 자손들은 모두 단절된다.  "프랑크 왕국"이 "동 프랑크(독일)ㆍ서 프랑크(프랑스)ㆍ중 프랑크(이탈리아)"로, 분열된다.

그 후 "교회"가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독일 왕(동프랑크 왕국의 뒤를 이어, 성립한 왕조 가운데 하나인 "작센 왕조"의 왕)이었던 "오토 1세"를 "황제"로 봉한 것이다.

 

2. 로마 제국이 서로마 제국(395~476)과 동로마 제국(395~1453)으로 나누어진 이유

"로마"가 둘로 갈라진 것은 첫째로는 "국가적"으로 갈라지고, 둘째로 "종교적"으로 갈라진 것이다.

시작은 "종교적인 문제"로 분열되지 않았지만, "국가적으로 분열"한 뒤에는 "종교적인 문제" 때문에 갈라지게 된 것이니, "국가적으로 분열"한 뒤의 "종교적 분열"에는 종교가 개입하게 된다.

국가적으로 갈라졌을 때는 "로마동로마" 모두 "로마 가톨릭"을 믿었지만, 계속 트러블이 일어났다.

"동로마"에 있는 "비잔티움 황제""로마 가톨릭"의 우두머리가 될 것이냐, "서로마"에 있는 "로마 황제" 우두머리가 될 것이냐?  이 논란이 계속 이어지고, 결국 "서로마 황제"는 자신을 "교황"이라 칭한니다.

마지막으로 "동로마 황제""교황"에게 "성상을 모두 부수라!"고 명령을 내리지만, "이민족(게르만 족) 포교"를 위해 꼭 필요한 "성상"을 부수지 못하겠다고 "교황"은 반박하게 되고, "정말로" 분열하게 된다.

"서로마""게르만족"에게 망했다고 해도 "교황"은 건재했다오히려 여러 국가들이 "교황"을 보호하고, "명분"을 얻으려고 했다.

395"테오도시우스 1"의 사망으로, "로마"가 동서로 분열되었고, 아들인 "아르카디우스""로마 제국", "호노리우스""서로마 제국"으로 나누어 통치하게 되었다.

이는 "제국의 영토"가 넓기 때문에, 좀 더 효율적인 통치를 위해 조치한 것이지, "제국의 분할"을 염두에 둔 것은 전혀 아니었다 그러나 각각 동서쪽의 제국을 물려받은 이들의 생각은 달랐다.

특히 "동로마"의 군신들("아르카디우스"에게는 실권이 없었다.)"서로마"를 낮게 보았기 때문에, "동로마의 안전"만을 최우선으로 생각하였고, "서로마"가 어떻게 되든 큰 관심을 갖지 않았다 때문에 "서로마"가 이민족으로부터 지속적으로 침입을 받을 때에도 "구원군"을 보낸 일이 없었고, 오히려 "동로마"로 침입해온 이민족을 회유하여, "서로마" 쪽으로 발길을 돌리게 만들기도 했다 이처럼 "동로마""서로마"의 유대감은 점점 엷어지게 되었고, 이후 완전한 분할로 이어지게 된다.

"교황"이라는 명칭은 "제국"분할 이후,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고 한참 뒤에 나타난 것으로, 당시만 해도"서로마"에 속한 "로마 교회""5대 교구 중 하나"였을 뿐이었다(물론 "베드로"의 후계자를 자처하긴 했지만, 그다지 힘이 강하였다고 볼 수는 없다.)

"동로마서로마"가 분열된 이후, "서로마"영토에는 여러 이민족들이 들어와 자리를 잡았고, 어떤 때는 "서로마 제국"의 정권을 잡는 일도 있었다.

이런 이민족들은 대부분 "아리우스파 기독교도"인 경우가 많았는데, 당시 정통 "기독교"라고 할 수 있는 "가톨릭"과는 다른 계열이었기 때문에, "동로마"인들은 "서로마"를 더욱 배격하는 양상을 띠게 된다 그러나 "종교적인 이유"는 분열 이후, 분열 상태를 더욱 고착화시키는 영향을 끼치기는 했지만, 분열의 직접적인 원인은 아니었다 그런 와중에 "서로마"가 멸망해 버렸고, "서로마"의 영토는 각 "이민족"들의 영토가 되어버린다.

이후 "비잔티움 제국"은 옛 "서로마"의 영토인 "서유럽"에 대해 크게 관여하지 않았고, "서유럽"은 자신들을 돌보기에도 정신이 없었기 때문에, "비잔티움 제국"에 대해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하지만 "로마 교회"의 수장인 "로마 교황"과 나머지 "4대 교구(모두 동로마 쪽에 속해 있었음)"간에 러 가지 갈등이 생겨나게 되었고, 이것이 여러 가지 "종교적 논쟁"과 겹치면서, "서 교회""대분열"로까지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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