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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 - 서양

제국 - 로마 (Rome) ① 로마건국~ 공화정 시대~ 서로마ㆍ동로마 (1453)

by 당대 제일 2022. 9.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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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로마 (Ancient Rome)"B.C 8C, "이탈리아 중부"의 작은 마을에서 시작해 "지중해"까지 거대한 제국을 이룬 고대 문명이다. "고대 그리스오리엔트셈족서유럽 켈트게르만" 등을 지배했으며, "고대 로마"의 문화군사 체제는 현대사회의 법정치전쟁예술문학건축기술언어 분야의 기틀이 됐다.

 

1. 고대 로마의 변천

알바 롱가 왕국 로마 왕국에트루리아카르타고 (BC 753~ BC 508) 로마 공화국 (BC 508~ BC 27) → 로마 제국 (로마 제정ㆍBC 27~ 395)  동부서부 분할 (293ㆍ동로마ㆍ서로마) "비잔티온""콘스탄티노폴리스"로 명명 (330ㆍ콘스탄티누스 대제ㆍ이스탄불) 서로마 제국 (395~ 476)ㆍ비잔티움 제국(395~ 1453) 동고트 왕국ㆍ오스만 제국

•   왕정     정치 : BC 753~ BC 509

•   공화정 정치 : BC 508~ BC 27

•   제정      정치 : BC 27~ AD 1453 (혹은 AD 476)ㆍ전제군주제

2. 동로마서로마

395, 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1"에 의해 완전 분할

"테오도시우스 1"는 약해진 "황제의 통치력"으로는 더 이상 로마 제국을 혼자서 통치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제국을 ""로 나눠, 자신의 아들들에게 통치를 맡겼다.

동로마 제국 (비잔티움 제국비잔틴 제국로마 제국중세 로마 제국로마니아)

로마 황제가 통치수도 - 콘스탄티노폴리스 (, 터키 이스탄불)  /  로마 제국과 동로마 제국을 구분하는 것은 긴 로마 제국의 역사를 편의상 구분하기 위한 것  /  1453"오스만 제국"이 침공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함락으로, "로마 제국"은 완전히 멸망

서로마 제국"게르만 족"의 여러 독립 국가로 갈라져, "프랑크 왕국()신성 로마 제국()"

"황제"에게는 실권이 없었고, "게르만족 군인들"이 실권을 장악  /  판도는 "본국 이탈리아로마"를 포함하고, 서쪽으로는 "히스파니아아프리카 북부", 북쪽으로는 "갈리아브리타니아게르마니아" 영역이었으나, 이민족의 침입으로 인해, "방위선"이 무너져 "국경지대"는 점차 관할에서 멀어진다.

동로마 서로마

3. 고대 로마 황제 계보

BC 27 ~ AD 68 :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황조

68 ~ 69 : 군인 황제 시대 (1)

69 ~ 96 : 플라비우스 황조

96 ~ 192 : 네르바 안토니우스 황조

192 ~ 193 : 난립기

193 ~ 235 : 세베루스 황조

235 ~ 284 : 군인 황제 시대 (2)

284 ~ 364 : 테트라키아 콘스탄티누스 황조

364 ~ 388(392): 발렌티니아누스 황조

392 ~ 455 : 서로마 제국 - 테오도시우스 황조

455 ~ 476(480): 서로마 제국 멸망기

4. 로마의 건국

로마의 전설에 따르면, 건국자는 "암늑대의 젖"을 먹고 자란 "로물루스레무스" 형제라고 한다.

형제의 외가는 "알바롱가"의 왕가이며, 아버지는 군신 "마르스(또는 아레스)"였고, "알바롱가"의 왕은 "트로이 전쟁"에서 살아남은 "트로이" 측의 영웅 "아이네이아스"의 후손이었다재밌는 건, 이게 사실이라면 "트로이""그리스 인"이 세운 국가이므로, 로마도 그리스 민족 국가로 볼 수 있.

이것이 전설일 뿐이라도, "그리스"의 후손이라는 걸 자랑스럽게 여겼으니, 당시 로마에서 "그리스"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였나를 알 수 있는 부분이다반대로 "그리스인"들은 자신들이 로마인이라는 걸 자랑스럽게 여겼다"리비우스"에 따르면, "트로이"가 망한 뒤, 살아남은 두 "트로이"의 왕자들이 포로로 잡혔고, 이 두 왕자가 "그리스"에 우호적이었던 것을 기억했던 "그리스 인"들은 이 두 왕자를 "이탈리아"에 정착하도록 도와주었다.

이 두 왕자 중, 하나는 "아이네이아스"였는데, 그는 중부 "이탈리아"에 오게 되었고, 이때 "알바롱 가"라는 도시의 왕이었던 "라티누스""아이네이아스"의 인품에 감복하여, 그를 사위로 삼은 뒤, 자신이 죽게 되자 왕좌를 물려주었다고 한다. 그 뒤 그의 후손이 대대손손 왕위에 앉았다이후 "프로카"라는 왕이 사망했을 때, 그의 아들인 "누미토르아물리우스"가 내분을 일으켰는데, "아물리우스""누미토르"를 내쫓은 뒤, 그의 아들들을 모두 죽이고 그의 딸인 "레아 실비아"를 결혼을 못하는 "여 사제"로 만들어 버렸다.

그런데 "레아 실비아"의 미모에 반한 "마르스(또는 아레스)"가 그녀를 취해, "레아 실비아"는 두 쌍둥이를 낳게 되었고, 그녀가 부정을 저질렀다고 생각하여 분노한 "알바롱 가"의 왕 "아물리우스"는 그 두 형제를 강가에 "노출" 시켰다그러던 중, 그곳을 지나가던 "어미 늑대"가 형제를 발견하고 젖을 물림으로써 그들은 목숨을 구한다.

이윽고 두 형제를 양치기가 발견하여, 두 형제를 자식으로 삼아 키웠는데, 그 둘을 각각 "로물루스레무스"라고 이름 짓는다. 쌍둥이 형제는 장성하여, 양치기 집단의 두목이 된다.

어느 날 왕위에서 쫒겨 난 "누미토르"가 정착한 땅을 약탈하러 온 "레무스"를 생포하게 되는데, 이들을 심문하는 과정에서 "누미토르"는 이들이 자신의 외손자임을 알게 되었고, "누미토르"가 자신의 할아버지임을 알게 된 "로물루스""레무스"는 자신의 원수 "아물리우스"를 죽이기로 하고, "누미토르"의 도움으로 궁전에 침입하여, "아물리우스"를 죽이는 데 성공한다.

"누미토르""아물리우스"의 뒤를 이어 "알바롱 가"의 왕이 되었으며, "누미토르"의 도움으로 "로물루스무스"는 자신들이 정착할 도시를 찾아 떠나게 되었고, "로마 시"를 건설하게 된다이때가 BC 753년이라고 한다당시 로마인들은 거창한 신화와는 달리 부랑자, 난민들이 모인 집단이었을 가능성도 있는데, 이를 "사비니의 여인 노략 신화"가 보여준다.

"사비니의 여인 노략 신화"는 로마인들에게 마땅한 배필이 없자, "로물루스"가 꾀를 내어, "사비니 족" 가족들을 초청하여 파티를 벌인 틈을 타, 무방비가 된 "사비니 족"여자들을 보쌈해 배필로 삼아 버렸다는 신화다.

이것이 신화에 지나지 않으나, 실제 역사에서도 로마에 정착한 사람들은 각 도시에서 흘러나온 부랑아, 난민들로 여겨지는데, 그 이유는 로마 시가 주변의 도시들에 비해 상당히 건국 시점이 늦은 점, 또한 시의 발전이 강력한 집단의 조직적인 도시 건설 계획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밖에서 유입된 인구 증가에 맞춰 그때그때 필요한 시설을 건설한 것으로 보여 진다는 점에서 그러하다그러나 이러한 신화와는 달리 고고학적으로는 난민들이 모여 살다가 점점 유입되어 도시화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땅을 파 보자, 로마에는 소규모 촌락의 흔적이 B.C 800년 이전에도 있었고, 이것이 로마인들의 뿌리라는 것이다.

이때 로마인들은 초가집과 같이 흙과 밀집을 엮은 텐트 같은 집에서 살았고, 당시 이미 으리으리한 궁전을 짓고 살고 있었던 동방의 도시들에 비하면, 한 줌 밖에 안 되는 마을에 지나지 않았다.

5. 고대 로마 (Ancient Rome)

BC 8C , "이탈리아" 중부의 작은 마을에서 시작해, "지중해"를 아우르는 거대한 제국을 이룬 고대 문명으로 "고대 그리스오리엔트셈족서유럽 켈트게르만" 등 문화의 용광로였다.

고대 로마의 "문화군사 체제"는 서구 유럽, 동구권을 막론하고, 현대 사회의 "정치전쟁예술문학건축기술언어 분야"의 기틀이 됐다고대 로마는 수백 년 동안 확장을 거듭하며, "왕정"에서 "과두 공화정"으로, 또 점차 "제정"으로 변모했다.

BC 7C, 로마는 지역 중심지로 번영하던 "도시 국가""왕정 체제"였다BC 500년경, "왕정"이 무너지고, 귀족과 평민 계급이 "공화정"을 세웠다로마인들은 평민과 귀족 간에 200여 년 이상 투쟁타협을 반복하며, 로마 특유의 "과두정 체제"를 이뤘다내부의 신분 투쟁 가운데도 로마는 외적들을 복속시키며, 마침내 B.C 272년 경 "게누아(제노바)"에서 "탈리아 최남단"까지 거대한 동맹 체제를 수립했다로마는 거기에 그치지 않고, 150여 년간 여러 정복 전쟁을 통해 "갈리아카르타고" 등을 정복하고, "지중해" 전역을 제패했다.

BC 1C ,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씨를 뿌리고,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로마 초대 황제BC 27~ BC 14 이사르의 동생의 외손자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양자)"에 의해, 시작된 "제정"초기의 로마 제국은 "팍스 로마나"로 불리는 태평성대를 구가하며, 라틴어 문학 등 "그레코-로만 문화"의 전성기를 이뤘다.

"트라야누스 황제"시대(98~117)에 로마제국은 북으로는 "스코틀랜드"에서 남으로는 "아프리카 수단"까지, 서로는 "포르투갈"의 대서양 연안에서 동으로는 "카프카스 지방"까지 최대 판도를 이룩했다오늘날 환산하면, 현재 미국 면적의 2/3에 달하고, 인구도 현 미국의 절반에 약간 안 되는 정도로 추산된다로마 제국은 "기독교 공인" , "교황선출 문제"를 기화로 "서로마동로마"로 분할됐으며, 이민족의 침략으로 쇠퇴기에 접어들었다.

5C , "서로마 제국"은 멸망 후, "게르만족"의 여러 독립 국가로 갈라져, "프랑크 왕국신성 로마 제국"로마의 후계자를 자처하는 여타 서유럽의 정치 세력들이 나타난다한편 "동로마 제국"은 중세 시대에 "비잔티움 제국"으로 발전했으나, 1453"오스만 투르크"에게 멸망한다.

6. 고대 로마 문명의 초기 역사

BC 10C를 전후로 하여, "이탈리아 반도"의 중부에 정착하여 살던 여러 부족은 약 2~ 300년에 걸쳐 로 교류하거나 전쟁을 벌였으며, 융화와 추방을 반복했다고대 로마 문명의 초기 역사는 이 시기를 기점으로 하고 있다.

BC 8C , "라티움"에는 "라티움 인"들이 정착해 살고 있었다이 땅은 "티베리스 강" 이남 "중부 이탈리아" 서해안에 자리 잡아 물이 넉넉하고 비옥한 평야였다이들은 후기 청동기 시대와 초기 철기 시대에 "인도- 유럽어 족""이탈리아" 전역에 흩어질 때, 형성된 일개 "인도-유럽어 권" 집단이었다. 이들은 분명 농경과 목축으로 먹고 살았을 것이다몇몇 보석 장신구와 청동 혹은 철 연장을 제외하면 이들은 해외에서 물건을 수입해서 쓴 적이 거의 없었던 것 같다.

고대 로마의 역사가들은 BC 753년에 "로마"라는 이름의 도시가 "로물루스"에 의해 건설되었다고 쓰고 있다그러나 로마의 기원 전설은 대부분 비역사적인 허구이므로, 지리적 혹은 고고학적 증거를 통해 검증이 필요하다.

BC 750년경에는 "팔라티누스 언덕"을 비롯한 로마의 여러 언덕에 농촌 촌락들이 들어섰는데, 이들 산지 촌락들은 저마다 독특한 방언과 관습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탈리아"의 대다수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미개한 상태였는데, 이곳에 복합 문명이 발달하게끔 깊은 영향을 준 두 집단이 있다.

하나는 "라티움"에서 "테베레 강"을 건너, "에트루리아"에 정착한 "에트루리아 인"들이었고, 다른 한 집단은 BC 8C 중엽에 "이탈리아 남부""시칠리아(마그나 그라이키아)"에 정착한 "그리스 인"들이었다이들은 이후 "이탈리아"를 통일하게 될 도시 "로마"의 발전에 있어 각별히 중요한 민족이었다.

7. 왕정 시대 (BC 753~ 508)

로마는 BC 753.04.21일에 "로물루스"가 세운 것으로 후대에 전해지고 있다.

이 날짜는 BC 1세기 말에 로마의 역사가 "마르쿠스 테렌티우스 바로"가 설정한 것으로, 그는 구체적인 과학적 증거 없이, 고대 로마에 관한 신화들과 전설들을 연구하여 이 날짜를 도출했다현대 학자들은 로마에 사람들이 본격적으로 살기 시작한 것은 B.C 750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확증하고 있다.

BC 7C 말에 "에트루리아 인"들은 이 지역에 "귀족왕족 계급"을 이루어 피지배층을 정치적으로 다스린 것으로 보인다"에트루리아 인"들은 BC 6C말 경에 이곳의 지배권을 잃은 것이 확실하며, 이 시점에 "라티움""사비니" 부족이 권력 집중을 억제하는 "공화정 체제"를 세웠다.

8. 공화정 시대 (BC 508~ 27)

"에트루리아""캄파니아"에서 패배하고, "라티움 인"들이 반란을 일으키며, 게다가 산지 종족들이 "라티움(latium)"을 침공하는 등, 몇 차례에 걸친 군사적 패배로 로마에 사회정치적 위기가 일어나면서, "왕정" 몰락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그러나 여러 학자들은 연대 목록(fasti)에 기록된 BC 509~ 507년을 "왕정"몰락의 시점으로 보기도 한다.

초기에는 "군사 위원회 (military tribune)"에 의한 공동통치의 형태였다가, "독재관"을 자주 선출하는 문제가 생기자, 2명의 "집정관 제도"로 바꾸었다로마의 정체는 "견제균형권력 분점"으로 구성된다.

가장 중요한 "정무관""두 집정관"으로 군사 통솔권인 "명령권(imperium)"을 통해 집행권력을 함께 행사했다"집정관 직"은 오랜 기간의 실험과 발전을 거친 뒤에야 비로소 정착된 것으로 보이며, BC 5C 중엽쯤에는 "화정"의 고위 정무관 직을 "집정관"이라 하였다"집정관"은 원래 "원로원(귀족들의 자문 회의)"과 협조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원로원"은 양적으로 확대되었다.

"공화정"의 다른 정무관으로는 "법무관조영관재무관"이 있었다"정무관 직"은 원래 "귀족"출신으로 제한되었으나, 나중에는 "평민"에게도 개방되었다"공화정""민회"로는 "왕정 시대"에 기원을 두며, 전쟁과 화의 여부를 결정하고, 요직 관리를 선출하는 "켄투리아 회(comitia centuriata)", 하위직 주요 관리를 선출하는 "트리부스 회(comitia tributa)"가 있었다.

로마는 점차 "에트루리아" "이탈리아 반도"의 다른 나라를 정복하게 되었다. 그중 "베이 점령""라티움" 밖으로 영향력을 확대하는 징표가 되었으며, 그 이후 로마는 "이탈리아" 내에서 팽창을 거듭한다이후 "삼니움 족""캄파니아"침입에 개입하여, "3차 삼니움 전쟁"을 치루었고, 여기서 승리한 로마는 "중부 이탈리아"의 패자가 된다.

"이탈리아 반도" 통일을 앞두고, 로마의 지배권에 마지막 도전장을 던진 세력은 "그리스 식민""타렌툼"이었다BC 281, "타렌툼""에페이로스""피로스"를 끌어들여, 로마와 싸웠으나 결국 패배했다.

로마는 정복을 통해 전략 요충지에 로마의 식민시를 건설하여, "이탈리아"에 안정적인 지배권을 확립했다BC 3C 후반, 로마는 3차에 걸쳐 "포에니 전쟁(BC 264~ 146)"에서 "카르타고"와 격돌했다.

"12차 포에니 전쟁"에서는 초반에는 "카르타고"가 우세했으나, 결국은 로마가 승리하면서 로마는 이 전쟁에서 처음으로 해외 영토인 "시칠리아""에스파냐" 등지를 정복한다.

후에 "3차 포에니 전쟁"에서는 "카르타고"가 로마와 맺은 협약을 위반하여, 로마의 침공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카르타고"는 완전히 멸망하여, 폐허가 되고 만다이로서 로마는 "서 지중해"의 패권을 거머쥐었다.

BC 2C에는 "마케도니아 왕국셀레우코스 왕국"을 물리치면서, "지중해" 세계를 제패했다해외 팽창은 내분을 불렀다"원로원" 의원들은 "로마 속주"의 부를 통하거나, 임금 노동 대신 외국 노예에 크게 의존하게 되어, "대농장" 발달하여 부유해졌지만, 주로 소농 출신의 병사들은 고향을 오래 떠나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땅을 지키지 못했다전리품 수입 덕분에 새로 확보한 "속주"에서 상업이 발달하였고, "세금 징수할당 제도"로 신흥 상인 계급인 "기사 계급"은 경제적 이익을 거머쥘 기회를 얻었다.

"클라우디우스 법(lex Claudia)"으로 "원로원 의원"의 상업 행위가 금지되면서, 이론상 "원로원"에 진출할 수 있었던 "기사 계급"은 정치권력에 심각한 제약을 받게 된다"원로원"은 끊임없이 정쟁을 일삼아, 계속 토지개혁에 발목을 잡았고, "기사계급"에 정치 발언권 확대를 거부했다"원로원"의 정적들끼리 도시 실업자 출신의 폭력조직을 조종하여, "완력"으로 유권자를 위협했다.

이런 상황은 BC 2C , 평민에게 주로 귀족이 소유한 토지를 재분배하려는 토지개혁 입법을 시도한 "라쿠스 형제"시대에 극에 달했다두 형제는 살해당했는데, 여기에 "원로원"은 불만을 품은 "평민""기사계급"을 달래고자, "그라쿠스 형제" 추진한 개혁의 일부 입법을 통과시켰다"이탈리아" 동맹국에 "로마 시민권 확대"를 거부하면서, BC 91~ 88년에 "동맹국 전쟁"이 일어났다.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군제 개혁으로 병사들이 국가에 대한 충성심을 잃고, 점차 사병화 되었으며, 유력한 장군이 국가와 "원로원"을 장악하게 된다(로마의 장군이자 정치가였던 "가이우스 마리우스"는 로마의 군사 제도에 극적인 개혁을 시행하였다.)  이로써 "마리우스"와 그의 부하 "술라"는 내전을 벌였으며, "술라"BC 82"콜리네 문"에서 압승을 거두었고, 결국 BC 81~ 79년에 "술라"가 독재 권력을 휘두르게 되었다.

"술라"는 무너져가던 "공화정"을 부흥시키려 개혁을 하고, "독재관"에 취임한 지 2년 만에 자진 퇴임한다그러나 "술라"가 죽으면서, 로마는 다시 혼란에 휩싸이게 된다.

BC 1C 중반, "마리우스"의 처조카인 "율리우스 카이사르""술라"의 부하인 "폼페이우스 마그누스라수스" 세 사람이 "13두 정치"를 이루어, "공화국"을 농단했다이후 BC 53, "파르티아"와 벌인 "카르하이 전투"에서 "크라수스"가 전사하면서, "3두 정치""카이사르" "원로원 파"로 돌아선 "폼페이우스"로 나뉘어 전개된다.

BC 58년부터 7년에 걸쳐, "갈리아"를 정복한 후에(갈리아 전쟁), "원로원"과 대립하던 "카이사르"는 BC 49, "루비콘 강"을 건너, "폼페이우스"가 이끄는 "원로원 파" 군대와 내전을 일으킨다.(카이사르의 내전)

BC 48,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폼페이우스"를 상대로 압승을 거두고, "탑수스 전투""문다 전투"에서 "폼페이우스"의 잔당을 격파한 "카이사르"는 결국 내전에서 승리하면서, "로마의 종신 독재관"이 되어, 각종 개혁을 실시하였다.

BC 44, "카이사르"는 독재 의혹을 받다가, "공화제 헌정"을 복원하려는 "정적(브루투스카시우스롱기누스 )" 암살당한다그러나 "카이사르"의 암살자들은 정권을 잡지 못하였고, "카이사르"의 후계자 "옥타비아누스""카이사르" 수하 "안토니우스레피두스""23두 정치"를 이루며, 권력을 잡는다. 그러나 이 정치적 동맹은 "권력 투쟁"으로 기운다.

"레피두스"는 추방되며, "옥타비아누스""안토니우스"를 국가의 적으로 선포하며, BC 31"악티움 해전"에서 "안토니우스클레오파트라"를 격퇴하여, 로마의 "유일한 지배자"가 되었다.

9. 로마 제국제정 시대 (BC 27~ 476 (서로마 제국)1453 (동로마 제국))

내전에서 승리한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의 칭호를 받고 거의 절대적인 권력을 잡았지만, "공화정" 가장했으며, 이때의 통치체제를 "원수정"이라 한다. (사실상 "제정"이다"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을 "프린켑스 (1시민)"이라 칭한다(이렇게 "아우구스투스""독재관"을 거부하는 등, 조심스럽게 행동한 것은 양아버지였던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 때문이기도 하다).

"아우구스투스"의 후계자 "티베리우스"는 심각한 반대 없이 권좌에 올라, "아우구스투스"에 이어 본격적인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를 이루었고, 이 왕조는 "티베리우스" 사후, "칼리굴라""클라우디우스" 치세를 거쳐, AD 68"네로"가 자살할 때까지 이어진다이후 1년간 로마는 내전상태에 돌입하면서, "갈바오토비텔리우스"가 즉위한다.

후에 "시리아"주둔군 사령관이었던 "베스파시아누스"가 자기 군단의 지지를 받아 로마에 입성하여, "비텔리우스"를 살해하고 왕위에 오르면서, "플라비우스 왕조"의 시대를 개창한다.

"제정 시대"에도 영토 확장은 이어졌으며 안정을 유지했지만, 흔히 저열하고 타락했다고 평가받는 황제도 몇몇 있었다.(가령 혹자는 "칼리굴라"를 정신이상자로 보기도 하며(즉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정신병이 걸려 폭정을 일삼았다)

"네로"는 국가 정사보다, 개인 관심사에 더 몰두하며 잔인했다는 평판을 받는다하지만 현대에 이르러서 "네로"에 대해서는 역사적인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그리고 "플라비우스 왕조"가 뒤를 잇는다.(69~ 96)   "베스파시아누스티투스도미티아누스"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암살이후, 로마 번영의 시작을 알린 "오현제 시대(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의 네르바트라야누스하드리아누스안토니누스 피우스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콤모두스)"에서 제국은 영토나 경제문화면에서 정점을 이루었다"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는 대략 80년간 지속되면서, 이시기에 로마는 대내외적으로 안정을 이루었고, 로마의 "평화(팍스 로마나) 시대"에 제국은 번영했다.

"트라야누스" 재위 시에는 "다키아(, 루마니아)"의 정복과, "파르티아"와의 전쟁을 통하여, 제국의 영토는 최대가 되며, 그 지배 지역이 650km²에 이르렀고, "트라야누스" 사후, 즉위한 "하드리아누스"는 정복전쟁을 중단하고 제국을 순찰하면서, 국경 수비를 강화하는데 힘쓴다193~ 235년 사이에는 "세베루스 황조"의 치제(흔히 말하는 "군인 황제시대")"헬리오가발루스" 같은 무능한 지배자도 나타났다.

게다가 군대가 제위 계승에 영향력을 더욱 행사하게 되면서, 오랜 기간 "3세기의 위기"라는 혼란기(49년간 20여 명의 황제가 교체됨)로 접어들었다이 위기는 유능했던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일단락 지었으며, 293년에 제국을 "동부""서부"로 나누어 각각 두 공동 "황제""부제(副帝)"가 지배하는 "4두 체제"를 도입했다여러 공동 황제는 50년 이상 서로 대립하며, 권력 투쟁을 벌였다.

330.05.11, "콘스탄티누스 대제""비잔티온""콘스탄티노폴리스"로 명명 (현, "이스탄불")하고, 로마 제국의 새 수도로 삼았다.

"제국""테오도시우스 1" 사후인 395년에 "비잔티움 제국""서로마 제국"으로 영구히 갈라졌다4C가 넘도록, "서부 지역"은 끊임없이 이민족의 침략에 시달리면서, 점차 쇠퇴 일로로 치달았다.

4C"훈족"이 서쪽으로 이동하면서, "서고트 족"이 밀려나 제국 국경 안쪽에 피난처를 구하게 되었다. 401, "알라릭 1"가 이끄는 "서고트 족""로마 시"를 약탈했다.

"반달 족"은 로마 속주인 "갈리아히스파니아북아프리카"를 침략하고, 455년에 "로마"를 약탈했다.

476.09.04, "게르만"장군 "오도아케르""서로마"의 마지막 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를 폐위시켰다1,200여 년의 역사를 뒤로 하고, 로마의 서부 지역 지배는 막을 내렸다"비잔티움 제국"도 마찬가지 위기를 겪었지만, 서쪽보다는 나은 처지였다.

"유스티니아누스 1"는 잠시 "북아프리카""이탈리아"를 수복했으나, "유스티니아누스"가 죽고 몇 년이 채 안 되어, "이탈리아" 남부와 "시칠리아"에 미쳤던 "비잔티움"의 세력 범위는 줄어들었다"유스티니아누스"시대의 치명적인 전염병 등으로 "비잔티움"은 또한 "이슬람"의 발흥에 위협받았으며, "이슬람" 세력은 "시리아""이집트"의 영토를 곧 정복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직접 위협하게 되었다.

그러나 "비잔티움 제국"8세기경 "이슬람"의 확대를 막아냈으며, 9세기 초에는 정복당한 땅의 반환을 다시 요구했다.

1000, "비잔티움 제국"은 전성기를 이루었다"바실레이오스 2""불가리아""아르메니아"를 재정복했으며, 문화와 교역이 번영했다그러나 이 정복이후 제국은 1071"만지케르트 전투"에서 패하면서 팽창에 제동이 걸렸다이 사건은 결국 "제국의 쇠퇴"로 이어진다.

수백 년 간 내분과 "터키"의 침략으로 "알렉시오스 1세 콤네노스"1095년 서방에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서유럽에서는 "로마가톨릭"의 교황인 "우르바노 2""클레르몽 공의회"를 소집하여, "십자군"을 조직하여 "비잔티움 제국"에 파견한다

수십 년이 흘러 파견된 "4차 십자군" 당시 이들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하면서, 제국내의 물품을 약탈하고, "비잔티움 제국"은 잠시 동안 분열되어 몇몇 후계 국가들(니케아 제국라틴제국트레비존드 제국에피로스 공국)이 들어서다가, 결국 "니케아 제국"이 최종 승자가 되어, "비잔티움 제국"의 왕위를 계승하였다.

"제국 군대"가 수도를 수복한 뒤, "제국""에게 해" 해안에 국한된 "그리스 국가"로 전락하고 만다이후 즉위한 황제들은 아무도 제국을 부흥시키지 못하고, 결국 "비잔티움 제국"1453.05.29"오스만투르크""메메드 2"에게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당하면서 멸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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