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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 - 서양

제국 - 알렉산더 대왕 ① 마케도니아ㆍAlexandrosㆍBC 356~323ㆍ33세

by 당대 제일 2022. 9.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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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더 대왕 (Alexandros)"은 짧은 13년 동안의 재위 기간 (BC 336~323)동안, "그리스ㆍ페르시아ㆍ인도"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하여, "그리스 문화"와 "오리엔트 문화"를 융합시킨 새로운 "헬레니즘 문화"를 이룩하였고, 정복한 땅에 "알렉산드리아"라는 도시를 70개나 건설하였다.

 

알렉산더 대왕 (알렉산드로스 3ㆍBC 356~323 (32)재위 BC 336~323)

"필리포스 2" "올림피아스"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로 "마케도니아"의 왕 (재위 13년)

 국 적 : 마케도니아 왕국 (Kingdom of Macedonia) : 그리스 북쪽에 있던 고대 왕국

알렉산더 대왕 1
알렉산더 대왕 2

< 연대기 >

BC 356 : 알렉산더 대왕 출생

BC 342~ 340 (13~15) : 부친 "필리포스 2"에 의해 초빙된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배움

BC 338 (17) : "카이로네이"아 전투 참가

BC 336 (19) : 부친 "필리포스 2"가 암살당한 뒤, "마케도니아"의 왕으로 즉위

BC 334 (21) : "페르시아" 정벌을 위해 "소아시아"로 건너감. "그리니코스 강 전투"에서 "소아시아" 태수들의 연합군에 승리

BC 333 (22) : "이수스 전투"에서 "페르시아 왕 다리우스 3"가 이끄는 10만의 군대를 격파

BC 332 (23) : "이집트"를 정복하고, "이집트의 파라오"로 인정. "알렉산드리아" 건설.

BC 331 (24) : "가우가멜라 전투"에서 "페르시아 왕 다리우스 3"가 이끄는 20~30만의 군대를 격파. "바빌론수사페르세폴리스" 등을 약탈하고 파괴

BC 330 (25) : "페르시아 왕 다리우스 3"가 측근인 "베수스 총독"에 의해 암살되자, 공격하여 멸망시킴

BC 329~ 327 (26~28) : "소그디아나, 박트리아"에 대한 공격

BC 328 (27) : "옥스야르테스" 영주의 딸 "로크사네"를 부인으로 맞이함. 술자리에서 만취한 상태에서 측근인 "클레이토스"를 창으로 찔러 살해

BC 326 (29) : "인더스 강"을 넘어 "펀잡 지방"을 침공했으며, "히다스페스 전투"에서 "파우라바스의 포루스 마하라자"를 격파. 이후 중앙아시아로 진군하려 했으나, 병사들의 거부로 귀환하기로 함

BC 323 (32) : "수사(페르시아 제국의 수도)"로 귀환

BC 323.06.10(19) : 알렉산더 대왕 사망 (32)128개월 동안 왕위에 있었다.

•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 이집트ㆍ남부 시리아를 차지

• 안티고노스 왕조 : 잔존 마케도니아 왕국ㆍ그리스 일부를 차지

• 셀레우코스 왕조 : 시리아ㆍ에게 해 연안~ 힌두쿠시 산맥에 이르는 아시아 지역을 차지

사후

1. 사망 원인 :  "암살설" 이외에

상실설 : 너무 젊은 시절에 이뤄야 하는 것을 다 이뤄서, 의욕 상실로 사망

과음설 : 죽기 전에 포도주 원액 6.5L 가량을 들이켜 마셔서, 사망

독성설 : 열병을 빨리 치료하기 위해 독성이 강한 약을 한꺼번에 너무 많이 사용하여 사망

접촉설 : 어느 지역에서 그에게 여자를 진상했는데, 그 여자가 소위 말하는 독인(어릴 때부터 독을 먹여 접촉하는 것만으로도 독살이 가능하다는 사람)이어서 그 여자를 안고나서 시름시름 앓다가 사망

말라리아 설 : 현대 학자들이 제일 유력하게 받아들여지는 학설은 말라리아에 감염되어 죽었다는 설로, 열대 풍토병이 많은 인도 원정에서 감염되어, 귀환후 사망

BC 324년 봄, 그들이 "수사"에 도착했을 때, 남은 병력은 "인도"를 출발할 때의 1/4 밖에 안 되었다.

"수사"로 돌아가, 그를 따라 종군했던 "마케도니아군"에게 보상으로 많은 급료를 주고 그들의 빚을 모두 대신 갚아준 뒤, "마케도니아"로 귀국하라고 하였다이유는 "마케도니아군""인도"에서 파업을 벌였을 때 내세운 표면적 명분이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오해한 것으로, 사실 이들이 원한 것은 전쟁을 그만두고 싶은 것이었다.

게다가 이들은 알렉산더 곁에 머물며, 정복자로서의 혜택을 누리고 싶었다그래서 이들은 알렉산더의 명령을 거부하며, "오피우스"에서 반란을 일으켰다그는 직접 나아가 이들을 꾸짖고, 몇몇 주동자를 처형하라고 지시했다.

그러자 밤에 "마케도니아" 군인들은 알렉산더가 있는 막사를 포위한 뒤, 동틀 때까지 목놓아 울었는데 결국 그는 자신의 계획을 철회하고, 이들을 모두 용서한 뒤 이들 전원에게 "자신의 일족"이라는 칭호를 부여하는 영예를 주고, 성대한 잔치를 베풀어 이들과 함께 주연을 즐겼다.

그 뒤, "마케도니아인"들의 반발이 자신의 "친 페르시아 행보" 때문이라는 것을 파악하고, "마케도니아인페르시아인"들을 융화시키기 위해, 그 두 인종 간의 집단 혼인식을 치르게 했다이때 "페르시아" 여자와 결혼한 "마케도니아" 남자의 수는 무려 10,000명에 이르렀다고 한다스스로 모범을 보이기 위해, "이소스 전투" 때 사로잡은 "다리우스 3"의 큰딸과 결혼했다재미난 사실은 그가 죽은 뒤, 이혼도 많았다는 것이다.

그는 일평생을 함께 했던 오랜 친구이자, 연인이자, 심복이었던 "헤파이스티온(마케도니아알렉산더의 절친동성 연인)"의 죽음을 접하게 된다.

이로 인해 대단한 상실감과 좌절감에 빠졌으며, 그를 기리기 위한 거대한 기념물들을 짓기 시작하였다더불어 "헤파이스티온"의 갑작스러운 급사 때, 자리를 비운 담당 의사를 태만죄를 물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고, 이후 "콧사이오이 부족"을 정벌했을 때, 스트레스 해소 차원에서 부족의 청장년 장정들을 모조리 목 베어 학살했다. 그 뒤 얼마 안 있어 알렉산더는 쓰러졌다.

알렉산더는 쓰러지기 전까지 건강에 아무런 이상이 없었고, 젊었기에 "아랍 원정"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쓰러진 것이었다쓰러지기 직전, 알렉산더는 "네아르코스(해군 제독)"와 파티를 한 뒤, 아침이 될 때까지 술을 퍼마셨었다. 그 뒤 알렉산더는 몸에 열이 나기 시작하였는데, 고열은 계속되었다.

1주일 후, 알렉산더는 말을 할 수 없게 되었고, 다음 날 "마케도니아 군인들"은 알렉산더의 건강에 무엇인가 이상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알렉산더를 만나게 해달라고 요구하였다.

그는 이들 중 지위가 높은 몇 명만 만났는데, 이때 그는 이들을 반기기 위해 간신히 손을 들어 올릴 수 있을 뿐이었다. 2일 뒤, 그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왕의 일지 (Royal Journals에우메네스 기록)"의 마지막 부분을 보면, 독살의 징후는 없었던 것으로 나와 있다사람을 서서히 죽어가게 하는 ""은 현대에도 드물기 때문이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 실려있는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8: 왕은 심한 열 때문에 목욕실에서 잠을 잤다. 다음날 왕은 침실로 돌아와서 메디우스와 함께 주사위 놀이를 하며 하루를 보냈다. 그날 저녁 왕은 목욕을 하고,신에게 제사를 드린 다음 저녁 식사를 했다. 그날 밤에도 열이 심했다.

20: 평소와 같이 목욕을 하고 신에게 제사를 드렸다. 목욕탕에 누워 네아르코스의 항해담과 바다에 대한 이야기를 매우 재미있게 들었다

21: 전날과 같은 하루를 보냈다. 다만 열이 심해져서 밤새도록 몹시 앓았다. 다음 날은 열이 더욱 심해졌다. 왕은 부축을 받으면서 일어나 목욕통 옆자리에 누웠다. 그리고 장군들과 의논을 하여 적당한 사람으로 군대에 생긴 결원을 보충하기로 했다.

24: 병세가 더욱 나빠졌지만, 왕은 일어나서 제사를 드렸다. 그리고 장군들은 곁을 떠나지 말고, 하급 장교들은 문밖을 지키며 밤을 새우라고 명령했다.

25: 강 건너편에 있는 궁궐로 자리를 옮긴 뒤 잠을 조금 잤으나 열은 내리지 않았다.

장군들이 침실에 들어갔을 때는 혼수상태에 있었다. 다음날도 같은 상태가 계속되었다. 마케도니아 병사들은 왕이 돌아가신 줄 알고 모두 몰려와 소란을 일으키며, 왕의 막료들을 협박하여 안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무장을 벗은 뒤 차례로 왕의 침상 곁을 지나며 쾌유를 빌었다. 같은 날 피톤과 셀레우코스를 세라피스의 신전으로 보내, 왕을 그곳으로 옮기는 것이 어떤지를 물었다. 그러나 옮기지 말라는 신탁이 내려왔다.

28: 저녁에 마침내 왕이 돌아가셨다.

죽기 전, 아무 유언도 남기지 않아, 그가 죽자 곧바로 후계자 문제를 놓고 분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우선 부하 장군들은 "아리다에우스(알렉산더 이복형제)"를 왕위 계승자로 선출하고, BC 328년 그와 정식으로 결혼한 "록사나(박트리아 부족장 딸알렉산더의 왕비)"가 임신 중이었으므로, 만일 왕자를 낳는다면 "아리다에우스"와 이 왕자가 제국을 공동지배하도록 결정했다.

그러나 이미 제국의 각처에 근거를 갖고있던 여러 장군들 사이의 이해관계가 일치할 리 없었다. 그들은 세력을 독차지하기 위해 온갖 권모술수를 써가며 대립했고, 이런 세력다툼의 소용돌이 속에서 왕족들은 어처구니없이 희생되었다.

"아리다에우스(왕위 계승자)록사나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유복자올림피아스(모친)" 등 대왕의 친족들은 거의 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자객들의 손에 의해 차례로 죽어갔다.

BC 323"알렉산더"가 사망하고, BC 310, "알렉산더"의 친족이 모두 제거되었으며, "마케도니아" 장군들이 스스로 "알렉산더의 후계자임"을 자칭하면서 각자 자기의 세력권 내에서 ""의 호칭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런 혼란은 약 40년간 계속되다가 결국 3개의 헬레니즘 왕국으로 분열되었다.

이들 3국의 건국자는 모두 "알렉산더 대왕" 휘하의 대표적인 장군이었다이 국가들은 한결같이 "전제군주국"이었지만, "민족구성지리적 환경관습" 등은 서로 달랐고, "로마"에게 멸망되기까지 "헬레니즘 국가"로 존속했다.

•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 이집트ㆍ남부 시리아를 차지

• 셀레우코스 왕조 : 시리아ㆍ에게 해 연안~ 힌두쿠시 산맥에 이르는 아시아 지역을 차지

• 안티고노스 왕조 : 잔존 마케도니아 왕국ㆍ그리스 일부를 차지

2. 외모

"아리아누스(고대 역사가)"의 기록에 의하면, 한쪽 눈은 검푸르고 다른 쪽 눈은 하늘색, 그러니까 "오드아이"였다고 하는데, 이것도 어떤 유전적인 장애의 징후가 아닌가 하는 의견도 있다.

고대 역사가들은 일반적으로 "꽃미남"으로 묘사하고, 남아 있는 조각상에서도 일반적으로는 준수한 "미청년의 모습"을 일관되게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당시로선 작은 키에 외모도 평범한 편이었다평균적인 "마케도니아" 남자의 키에도 못 미치고, 몸은 뒤틀려있고, 목소리는 쇳소리가 나는데다 수염도 성기게 나서 일부러 면도를 한 모습으로 묘사된다.

3. 사생활

록사나  왕비박트리아 부족장 딸

아들 "알렉산드로스 4"를 두었으나, 일생 대부분 시간을 원정에 쏟아부었고, 아들이 아직 태어나기 전에 요절했으니, 함께 했던 시간은 극히 짧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바르시네 (스타테이라 2) : 후궁"다리우스 3"의 장녀"로도스의 멤논"의 아내

후궁으로 삼아 또 다른 아들도 두었는데, 이름은 "헤라클레스". 하지만 "헤라클레스" 역시 그가 죽은 뒤 등장한 "디아도코이" 간의 내전 중에 "카산드로스"에게 독살당한다.

파리사티스 2: 후궁"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의 막내딸

 바고아스 : 미소년 환관페르시아 출신Persian Boy(바고아스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

외모가 아름답고, 가무에 능하여, 알렉산더의 총애를 받았다. "플루타크 영웅전"에 따르면, 알렉산더 대왕이 군대를 이끌고 인도를 떠나, "게드로시아 사막" 횡단한 후에, 병사들을 위로하기 위해 무용 경연이 열었는데, 당시에 "바고아스"가 아름다운 춤을 추어 우승하고, 덤으로 알렉산더 대왕과 키스를 나누었다고 한다.

• 헤파이스티온 : 동성 연인ㆍ마케도니아ㆍ알렉산더의 절친ㆍ마케도니아 출신

※ 시노페의 디오게네스 :  "헤파이스티온의 허벅지"가 알렉산더를 지배했다.

알렉산더가 "미에자"에서 "아리스토텔레스"에게 가르침을 받을 시기인 어릴 적부터 함께 했던 친구였는데, 왕자 시절에 "필리포스 2(아버지)"와 불화로 "마케도니아"를 떠나 있을 때에도 덩달아 추방되었을 정도로 친밀한 관계였다. 동방 원정 중에는 "엘리트 친위기병대(헤타이로이)"의 최선임 장군 자리와 "친위대(알렉산더의 최측근 장군 7)"의 수장을 맡았다.

사실 능력에 있어서 특출나게 뛰어난 인물이라고는 보기 힘들었으나, 알렉산더의 오랜 친구였을 뿐 아니라 그 누구보다도 충성스러운 신하였기에 많은 총애를 받았다.

알렉산더는 당시로선 작은 키에 외모도 평범한 편이었고, 오히려 "헤파이스티온"이 더 키도 크고 잘생겨서, 알렉산더 대왕의 군대가 "다리우스 3" 군대를 박살내고, 그의 어머니와 아내가 있는 막사에 들어왔을 때, "다리우스 3"의 어머니와 일가는 "헤파이스티온"이 알렉산더 대왕인 줄 알고 그 앞에 엎드렸다는 얘기가 있다.

4. 인품즐겨 읽던 책 (일리아스 - 호메로스 작)스승 (레오니다스ㆍ아리스토텔레스)

어렸을 때부터 야심이 매우 컸고, 자신감이 늘 넘쳐났고, 배짱도 강했으며, 자제력도 매우 강했.

죽음에 두려움을 보이는 일 없이 용감하여, 모든 전투에서 황금빛 갑옷을 입고 선두에 선 것은 유명하며, 이로 인해 많은 부상을 입었다. "물욕육욕"에 대한 자제심이 매우 강했다"식욕" 또한 필요한 만큼만 먹고, 늘 군인다운 검소한 삶을 했다. 자신감이 높은 만큼, 자존감도 높았는데, 술을 마시면 자기 자랑을 거하게 하는 편이기도 했다"이집트"에서 신탁을 받은 뒤로는 자신이 ""이라 믿기도 하였다.

가장 좋아한 작가는 "호메로스". "일리아스""모든 군사적 덕성과 지식을 담고 있는 완벽한 보물"이라며, "단검"과 함께 베개 밑에 간직했다고 "영웅전"을 쓴 "플루타르코스"가 전한다.

전장에 나가면서도 "호메로스"의 책을 지참했으며, 베개 밑에 "일리아스"를 놓고 함께 잤다고 한다"리아스"를 추천해준 것은 "아리스토텔레스", 그가 항상 갖고 다닌 "일리아스""아리스토텔레스" 작성해 준 "요약 필사본"이라고 한다전장에 나가면서도 "호메로스"의 책을 지참했으며, 베개 밑에 "일리아스"를 놓고 함께 잤다고 한다.

"아시아 원정" 중에도 "일리아스"를 가지고 다녔는데, 이유는 거기에 담긴 이야기를 통해서 자신의 원정과 삶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어릴 적의 스승은 "레오니다스"이고, 좀 더 컸을 때 스승은 "아리스토텔레스"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을 온전히 이어받아, 그의 정복 전쟁과 정치에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여전히 자신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는지, 죽을 때까지 "아리스토텔레스"와 계속 교류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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